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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17화)
chapter 6. 헌팅(2)


루인의 눈빛이 변했다. 맞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만 여기서 허무하게 죽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다.
나이트암을 상대하는 건 힘들지만 눈앞에 있는 기사는 다르다. 비록 실력이 좋다고 해도 지금은 잔뜩 흥분한 상태. 윌포스를 이용한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
‘일단 프라임 홀을 파괴한 후 인질로 삼고 도망쳐야겠군.’
루인은 독한 마음을 먹으며 윌포스를 사용하기 위해 의지를 모았다. 그때 나이트암에 타고 있던 기사들 중 하나가 말했다.
“어이, 크랄. 여기서 살인 사건이 생기면 영주가 도적단이 나타난 줄 알고 출동 명령을 내릴 거다. 귀찮은 일 만들지 마라.”
“묻어 버리면 되지.”
“묻으려면 너 혼자 해라. 나는 땅 팔 생각 없다.”
“내가 했다고 보고하면 돼. 평민 놈 하나 죽은 거 가지고 뭐라 그럴 사람은 없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랬다면 뭐라 그럴걸? 네가 마음에 안 든다고 죽인 평민이 좀 많냐? 너 그러다가 쫓겨난다.”
“쳇.”
크랄이라 불린 기사는 신경질적인 태도로 루인의 머리를 걷어찼다. 그러고는 루인의 품을 뒤져 웅담뿐 아니라 가죽을 판 돈까지 모조리 빼앗았다.
크랄은 루인에게 침을 뱉으며 말했다.
“퉤. 재수 좋은 놈. 앞으로 내 눈에 띄면 그땐 정말 죽는다.”
기사는 그 말을 끝으로 나이트암에 탑승했다. 내려올 때는 한 번에 뛰어내렸지만 올라갈 때는 한 번에 안 되는 듯, 중간중간 튀어나온 돌출 부위를 발로 딛고 뛰어올랐다.
나이트암 네 기는 루인을 버려 둔 채 떠나갔다.
루인은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기절한 것은 아니었다. 웅담이 날아갔다는 허탈함에 빠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분함에 이빨을 꽉 깨물고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루인이 슈론토로 온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정확하게는 돈을 버는 방법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루인은 정신기생체에게 정신을 점령당하며 다른 차원의 지식을 얻었다. 그중에는 돈을 벌 만한 지식도 상당히 많았다.
문제는 루인이 정작 이 베이디안 대륙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이다.
루인은 최고급의 성노예였다. 비참하게 살긴 했지만 험하게 살진 않았다. 루인이 아는 것은 귀족가의 그림자와 노예라는 극단적인 두 일면뿐이다.
길포드 용병단에게 세상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직접 경험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사람을 알아야 하고 그러자면 사람이 모이는 곳으로 가야 한다.
슈론토는 브란델 왕국 남부의 최대 상업 도시였고 당연히 유동 인구의 숫자도 많았다.
원래는 이곳에서 한동안 지내며 앞으로 할 일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겨 버렸다. 바로 돈.
웅담뿐 아니라 가지고 있던 돈까지 모조리 기사에게 빼앗겨 버린 상태였다. 상업 도시인 이 슈론토에서는 돈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들었다. 루인의 험악한 인상 때문이었다.
그렇게 도시를 떠돌던 루인의 머리 위로 무언가 떨어졌다.
철벅.
질척한 감촉과 동시에 불쾌한 냄새가 루인의 후각을 자극했다. 인분, 그것도 설사였다.
루인이 걷고 있던 곳은 대로변이 아니라 골목길이었다. 이런 곳을 걸을 때는 항상 위를 주의하며 걸어야 했다.
돈이 많은 자들은 위에서 떨어지는 인분을 막기 위해 양산을 가지고 다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그냥 멍하니 걷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일쑤였다.
루인은 재수 없다는 생각은 했지만 불쾌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수도 시설이 전혀 없는 베이디안 대륙에서는 인분을 집 바깥으로 던져 버리는 것으로 처리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인 역시 멍하니 걸은 자신의 실수를 탓했지 인분을 던진 사람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머리에 인분을 얹은 채 계속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루인은 서둘러 도시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도시 근처에 흐르고 있는 개울가로 향했다.
한참을 씻은 후에야 냄새를 없앨 수 있었다.
루인은 인분의 흔적을 없앤 뒤에도 슈론토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내가 슈론토로 간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얼굴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힘들고, 돈이 한 푼도 없어 장사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기사 놈이랑 마주치면 어떤 방해를 받을지도 모른다.’
루인은 몸을 돌려 자신이 슈론토로 올 때 지나온 길을 바라보았다. 정확하게는 프로운을 잡은 곳이었다.
“분명 사냥은 금지라고 했겠다?”
루인은 활과 화살을 꺼내 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 * *

루인이 익힌 궁술은 동이족이라는 지구의 어떤 종족의 기술이다. 그들의 활쏘기 기술은 매우 뛰어났으며 활 제작 방법 역시 우수했다.
활이란 수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다 보니 동이족에 관한 지식 중에는 사냥에 관한 지식도 존재했다.
숲 한가운데임에도 루인은 아무런 소리 없이 움직였다. 동이족의 사냥법과 수라타의 걸음걸이가 합쳐진 결과였다.
전신은 코쿤의 가죽으로 감싸여 있었다. 루인 자신의 채취를 감추기 위해서였다.
일반 동물들은 몬스터인 코쿤의 냄새에 도망치겠지만 몬스터들은 무시할 것이다. 코쿤은 약한 몬스터이기에.
바뀐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엉성하게만 보이던 활은 어느덧 제대로 된 모양을 잡고 있었다.
루인은 그렇게 소리와 냄새를 감춘 채 은밀히 움직였다. 루인의 시선이 직시하는 곳에는 아름다운 빛을 뽐내는 몬스터가 존재했다.
레인보우 러너.
생긴 모습은 조류를 연상시킨다. 온몸은 깃털로 뒤덮여 있고 머리에는 뾰족한 부리가 달려 있다. 몸통 아래로 새의 발과 흡사한 두 개의 발이 대지를 딛고 있다.
몸을 덮고 있는 깃털은 빛을 받으면 오색으로 빛난다.
신장은 무려 2밀. 모습은 새를 연상시키지만 실제로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 대신 달리는 속도는 굉장히 빠르다.
레인보우 러너가 달릴 경우 마치 땅 위에 무지개가 그려지는 것 같다고 하여 레인보우 러너란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달리는 모습의 아름다움에 현혹되면 안 된다.
레인보우 러너는 여행자들을 해치는 악명 높은 몬스터다. 순식간에 나타나 사람의 머리를 깨고 뇌를 먹어 치운 후 사라진다.
속도가 빠른 만큼 잡는 것도 쉽지 않다. 반면 깃털 자체는 매우 아름답기에 장식품으로 각광 받는다.
프로운의 웅담 정도는 아니지만 레인보우 러너의 깃털도 상당히 비싸게 팔린다.
루인은 레인보우 러너를 노리며 시위를 당겼다.
나무 활대가 휘어지며 안쪽에 대어 놓은 코쿤의 뿔이 바짝 긴장한다. 활대 바깥쪽의 오우거 힘줄은 이런 변화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루인은 엄지와 검지로 화살 끝의 오니를 바짝 당긴다.
루인의 사법은 베이디안 대륙에서 일반적으로 행하는 사법과는 그 형태가 달랐다.
베이디안 대륙에서는 검지, 중지, 약지로 시위를 당기고, 화살은 활 손잡이 왼쪽에 나 있는 홈에 화살을 걸쳐 놓고 쏜다.
하지만 루인이 익힌 것은 동이족의 사법.
활시위가 아닌 화살 끝의 오니를 잡고, 화살의 위치도 활 손잡이의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에 걸치고 쏜다.
오니를 잡고 있던 루인의 엄지와 검지가 벌어지는 순간!
탱.
잔뜩 긴장되어 있던 활은 순식간에 원래의 형태로 돌아간다. 그 복원력은 고스란히 화살로 전해져 운동에너지로 전환된다.
쐐액!
매섭게 날아가는 화살.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리고.
푸욱.
화살은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레인보우 러너가 아니라 한참 떨어진 곳에 존재하는 나무를.
“역시 아직까지 윌포스 없이 쏘는 건 무리군.”
루인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인이 들고 있는 각궁. 그것의 겉모습은 그럴듯했다.
그리고 겉모습만 그럴듯했다.
루인이 사냥을 시작한 지 고작 한 달. 그동안 활을 개량해 봐야 얼마나 개량했겠는가?
아무리 만드는 방식을 안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에 제대로 만들었을 리 없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요리책 보면 모두 요리사 되고 마법책 보면 모두 마법사가 될 것이다.
한 달 만에 겉모습이나마 그럴듯하게 만들었다는 것도 대단하다 하겠다.
그것은 루인의 궁술 역시 마찬가지.
지금까지는 윌포스의 힘으로 화살의 궤적을 조정했었다. 그렇기에 백발백중의 명중을 자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윌포스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윌포스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신 집중이 필요했다. 그런 만큼 다급한 상황에서는 사용하기 힘들었다.
궁술을 제대로 익혀 놓지 않는다면 급할 때는 활이 무용지물이 된다는 의미였다.
루인은 궁술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윌포스의 사용을 자제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다.
루인은 재빨리 또 다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이번에는 윌포스를 사용했다. 궁술을 수련할 여유는 없었다.
“키에에에에엑!!”
레인보우 러너가 괴성을 지르며 루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레인보우 러너는 오우거보다 훨씬 약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몇 배나 빨랐다. 루인에게는 오우거보다 더욱 상대하기 힘든 몬스터라 할 수 있었다.
레인보우 러너는 그 이름을 얻은 이유만큼 정말 빨랐다. 루인이 채 윌포스를 화살에 담기 전에 거리는 제로로 수렴되었다.
레인보우 러너의 부리가 루인의 머리를 향해 그대로 내리꽂힌다. 부리의 날카로움과 거기에 담긴 힘, 속도라면 루인의 머리에는 대번에 구멍이 나고 말 것이다.
루인은 윌포스를 담는 것을 그만두고 서둘러 옆으로 몸을 피한다.
레인보우 러너는 공격이 실패하자 바로 다음 공격을 시도한다. 마치 칼처럼 부리를 옆으로 휘두른 것이다.
워낙 부리가 날카로웠기에 그 공격도 매우 위험했다.
루인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레인보우 러너의 공격을 피한다. 동시에 왼 다리를 차올려 레인보우 러너의 머리를 공격한다.
퍽!
“키에에에엑!”
육중한 소리와 함께 레인보우 러너의 머리가 사정없이 흔들린다.
루인은 멈추지 않고 오른 다리마저 휘둘러 레인보우 러너의 머리를 찬다. 연달아 머리를 향한 두 번의 공격을 모조리 허용한 레인보우 러너.
레인보우 러너는 어지러운지 머리를 흔든다.
그사이 루인은 몸을 바짝 낮추고는 레인보우 러너의 다리를 후려 찬다.
쩡.
루인의 발차기는 레인보우 러너의 다리 관절에 정확하게 명중한다. 레인보우 러너의 몸이 휘청하고 흔들린다.
하지만 그뿐, 몬스터의 강인함은 루인의 강력한 공격에도 몸을 보호한다.
루인은 실망하지 않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같은 곳을 가격한다.
머리에 가해진 충격으로 몽롱해져 있던 레인보우 러너가 결국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 그 즉시 루인을 향해 부리를 휘두르려 한다.
그 순간.
뚝.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레인보우 러너의 다리 관절이 꺾일 수 없는 각도로 꺾인다. 동시에 레인보우 러너의 몸이 옆으로 넘어간다.
루인은 제자리에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다. 그러자 등 뒤에 레인보우 러너의 뒤통수가 위치하게 된다.
회전력이 담긴 루인의 오른 팔꿈치가 레인보우 러너의 목 뒤쪽 경추를 정확하게 가격한다. 신경이 지나는 곳이다.
레인보우 러너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경추에 온 타격 덕분에 몸을 움직이지도 못한다.
“내가 설마 아무런 대비도 없이 빗나갈지도 모를 화살을 쏘았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키엑?”
루인의 다리가 하늘 높이 들려진다. 그러고는 그대로 레인보우 러너의 머리를 향해 떨어진다.
빠각.
레인보우 러너의 머리는 한순간에 으깨진다.
한 달간 늘어난 것은 사냥 실력과 궁술만이 아니었다. 가장 크게 향상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수라타.
홀로 익히기만 했던 수라타 실력이 실전을 겪으며 매우 빠르게 발전한 것이었다. 루인은 그 실력의 증거물을 보며 감회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윌포스로 죽일 걸 그랬나? 깃털이 많이 상했네.”
루인은 조심스럽게 깃털을 뽑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