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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15화)
chapter 5. 이별(3)
대주술사는 주먹만 한 크기의 금속 상자를 내밀며 말했다.
“제 부탁은 이것을 글라스트 제국의 리호벤까지 옮겨 달라는 것이에요.”
글라스트 제국은 브란델 왕국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거대한 제국이다. 리호벤은 그 글라스트 제국의 수도다. 정상적으로 이동하면 세 달 정도 걸리는 거리다.
“어째서 대주술사님이 직접 옮기시지 않는 거죠? 대주술사님의 마법이라면 인간들의 시선은 피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저는 사정이 있어서 한동안 이곳을 떠날 수 없어요. 그리고 인간이 아닌 이종족이 여행한다는 건 너무 힘든 일이죠.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인간뿐이에요. 제가 믿을 수 있는 인간은 그대들뿐이고요. 부탁드려요.”
“이것이 무엇이기에 저희들에게 의뢰를 하시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이 물건이 무엇인지 말씀드릴 순 없어요. 알게 되면 그대들이 위험해질 거예요. 물론 이 의뢰 자체도 많이 위험해요. 이런 위험한 부탁을 드려 죄송해요.”
길포드가 살짝 당황한 태도로 말했다.
“저, 대주술사님. 그런 말씀을 하시면…….”
“미안해요. 저는 인간의 방식을 잘 몰라요. 그래서 그저 진심으로 부탁드릴 뿐이에요. 도와주세요.”
길포드는 한숨을 한 번 내쉰 후 말했다.
“후우. 부담을 주시는군요, 대주술사님. 하지만 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제 단원들의 안전입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이 의뢰는 받지 않겠습니다.”
대주술사는 의이하다는 어투로 질문했다.
“킨델베르의 숲에 들어간 일은 안전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되는데요?”
“그 일은 제 욕심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안전했기에 괜찮을 거라고 자만했었죠. 운이 좋지 못했다면 모두 죽었을 겁니다. 앞으로는 단원들이 그런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은 막고 싶습니다. 숲의 친구라는 과분한 호칭을 거둬 가시고 저를 욕하셔도 됩니다. 모든 코로나 족이 저를 욕하더라도 저는 제 단원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대주술사는 미안하다는 눈빛으로 길포드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그대가 제 의뢰를 받아들일 걸 알아요. 그대의 마음을 알게 되었지만 이 의뢰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정말 미안해요.”
길포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대주술사님. 의뢰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주술사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의뢰의 대가는 S급 에테르기움이에요.”
* * *
길포드와 대주술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남은 용병단원들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주제는 루인이었다.
딜스가 아쉬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올 때 루인과 함께 왔어도 되지 않아? 그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볼 수 있었을 텐데.”
알리시아가 냉정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건 안 돼. 이곳에 대주술사님이 있는데 아무나 데리고 올 수는 없어.”
“루인은 아무나가 아니잖아! 비록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 아이라면 믿을 수 있어.”
외모 때문일까? 딜스는 루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루인을 아이로 생각했다. 그건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
“나도 그 아이를 믿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루인이 인간이란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 인간에게 이종족이란 노예 이상도 이하도 아냐. 잘못하면 대주술사님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인간들에게 대주술사님의 존재를 노출시키는 건 안 돼. 우리도 얼마 전까지 똑같았다는 것을 잊은 거야? 인간들에게 죽을 뻔하다가 코로나 족의 도움으로 살아남지 않았다면, 그들을 지금처럼 대등하게 생각했을까?”
딜스는 알리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단장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같이 오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얼른 노을의 노래로 가서 만나면 되지.”
대화가 끝나고 잠시의 침묵. 그 침묵을 깬 것은 걸어오는 길포드였다. 길포드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의뢰다.”
* * *
삐이걱.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나무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을 통해 한 소년이 들어섰다.
“어서 오시…… 헉!”
무두장이 갤런은 자신의 상업 전략인 친절한 인사로 손님을 맞이하려 했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친절한 인사는 날아가고 그저 놀라서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조직이 들어섰나? 소년 수금원?’
레실이 비록 작은 영지이긴 하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그중에는 지하조직도 존재했다. 조직이 자금을 얻는 방법은 불법적인 사업과 상인들에게 뜯어 가는 상납금 등이 있다.
레실을 지배하는 조직이 바뀌면 당연히 상납금을 뜯으러 오는 자들도 바뀌었다. 지금까지 온 자들은 모두 어른이었다.
당연하다. 험악한 어른이 아니라, 꼬마가 와서 돈 내라고 하면 어느 상인이 곱게 지갑을 열겠는가?
그런데도 갤런이 소년을 보며 조직을 떠올린 건 소년의 인상이 워낙 험상궂었기 때문이다. 눈은 쫙 찢어져 있는데다 기분이라도 나쁜지 얼굴까지 찌푸리고 있다.
갤런은 긴장하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이니?”
“가죽을 좀 팔러 왔습니다. 이것 모두 하면 얼마입니까?”
소년은 루인이었다. 루인은 등에 메고 오던 코쿤과 헬릭스, 그리고 오우거의 가죽을 내려놓았다.
갤런은 가죽을 보는 순간 해연히 놀랐다. 오우거의 가죽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우거의 위험성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건 나이트암 때문이다.
나이트암 없이 오우거를 잡는 건 여전히 힘든 일이다.
‘설마 인상으로 기절시킨 후 잡은 걸까?’
소년이 힘으로 오우거를 잡았다는 것보다는 훨씬 신빙성이 가는 추측이었다.
잡은 경위야 어쨌건 오우거의 가죽은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 게다가 가죽에는 상처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쉬운 점이라면 가죽을 손질한 사람이 완전히 초보라서 최상등품이 될 수 있는 가죽을 중상등품으로 만들었다는 것 정도일까?
갤런은 소년에게 올바른 가죽 손질 방법에 대한 교훈을 내려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년을 다시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은 쏙 들어갔다.
‘요즘 애들 무섭다잖아? 괜히 기분 나쁘다고 나까지 죽일지 몰라. 그냥 모른 척하자.’
“오우거 가죽을 1,000달란트로 치고 다 해서 1,100달란트. 어때?”
루인은 아무런 흥정도 없이 바로 승낙했다.
“팔겠습니다.”
루인은 돈을 챙겨 들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갤런은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더 불렀어야 했는데.’
인상이 너무 무서워서 지레 겁을 먹고 많은 액수를 불러 버렸다. 눈치를 보아하니 물가를 몰라서 부르는 대로 받았을 것 같다. 하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손해는 보지 않았으니까.’
상인이 부른 가격은 정가였다.
루인은 얼굴 때문에 본의 아니게 손해 보지 않고 가죽을 팔 수 있었다.
무두점에서 돈을 얻은 루인은 옷가게와 잡화점, 대장간을 돌아다녔다. 입을 옷과 여행용 물품, 적당한 무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하는 쇼핑이었지만 모두 손해 보지 않고 제값을 내고 구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인은 기쁘지 않았다.
가게 주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매우 익숙한 것이었다. 바로 에테르기움 광산에서 일할 때 노예들이 간수를 바라보는 눈빛과 비슷했다.
엄밀히 따지면 다르지만 상대에게 겁먹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루인은 간수와 같은 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조금 손해를 보고 말지 그 같은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단지 얼굴이 험악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눈빛을 받아야 했다.
루인은 외모가 다는 아니지만 상당히 중요한 요소 중 하나란 사실을 깨달았다.
쇼핑을 마친 루인은 노을의 노래란 곳으로 향했다. 루인이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길포드 용병단이 1층 홀에서 한잔하고 있었다.
딜스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어이, 루인. 여기!”
마치 당연히 함께 앉아야 한다는 태도였다.
다른 자들은 살짝 경계하며 루인을 살피고 있었다. 험악한 외모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길포드 용병단은 루인의 역용한 모습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항상 위험과 함께 살아가는 용병이라 그런 것일까?’
루인은 길포드 용병단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딜스가 루인의 앞으로 술이 꽉 찬 잔을 내밀고는 말했다.
“자. 남자라면 원샷이…… 켁!”
알리시아가 딜스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무슨 짓이야. 애한테! 루인, 억지로 마실 필요 없단다. 처음에는 맛만 본다고 생각하고 조금만 마셔.”
‘저 애 아닌데요?’
루인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먹히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저 술 마셔 본 적 있어요.”
알리시아가 놀란 눈으로 루인을 바라보았다. 그건 다른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딜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참, 루인은 20살이랬지? 자꾸 착각을 하네. 하하.”
루인은 17세 때 공동에 갇혔다. 당연히 공동 안에서 술을 마신 것은 아니다.
루인은 성노예였고 그 일을 하기 전 분위기를 띄운답시고 루인에게 술을 먹인 주인들은 제법 많았다. 덕분에 루인의 주량은 상당했다.
“원샷인가요?”
루인은 그렇게 중얼거린 후 한 번에 잔에 든 술을 다 마셔 버렸다.
루인은 팔려 가는 것은 굉장히 싫어했지만, 그렇게 팔려 간 후 술을 먹는 것은 매우 좋아했다. 술을 마시면 현실을 잊을 수 있기에.
오랜만에 마신 술맛은 정말 좋았다. 루인은 계속해서 술을 마셨고 딜스는 놀란 표정을 한 채 기계적으로 술을 따랐다.
술꾼들에게 가장 환영 받는 자는 술 잘 먹는 자다. 루인의 인상 덕분에 경계하던 자들이 루인의 술 마시는 모습에 경계심을 풀어 버렸다. 도리어 다가와서 한 잔씩 따라 주었다.
술꾼들의 술 따라 주기는 결국 길포드의 만류로 끝이 났다. 그때까지 루인이 먹은 술은 스무 잔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루인은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원래 주량이 세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나이트에 올라서 주량도 늘어난 건가?’
루인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술꾼들의 행렬이 끝이 나고 다시 길포드 용병단은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루인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로 길포드 용병단원들이 루인에게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게 2시간이 흘렀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에 취했는지 바닥에 엎어져 있고 길포드와 루인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정말 술 잘 마시는구나?”
사실 루인이 이렇게 술에 취하지 않게 된 것은 루인이 익힌 내공심법인 혼허무극신공 때문이다.
혼허무극신공은 정갈한 내공만 받아들이는 만큼 해로운 기운은 배척하는 효능도 있었다. 과한 술은 간에 심각한 해를 입힌다. 그렇기에 혼허무극신공이 자연스럽게 일어나 몸 바깥으로 주기를 배출시킨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루인은 그저 머리만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하하.”
“그런데 루인아.”
“왜 그러세요?”
“아무래도 너랑 슈론토로 함께 가지는 못할 것 같다. 이번에 의뢰를 받았는데 방향이 슈론토랑 반대 방향이다.”
루인은 길포드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서 찢어지는 통증을 느꼈다. 그렇다고 실제로 몸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아픈 것은 마음.
루인은 그제야 자신이 길포드 용병단에 매우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3년간 함께 지냈던 하르실리온도 수리를 위해 아공간으로 가 버린 상황. 게다가 나온 곳은 공간이동 좌표의 오차로 원래 있던 곳과는 수백 키밀 떨어진 곳.
루인은 지독한 외로움과 막막함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길포드 용병단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따뜻했다. 게다가 루인이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인간미까지 느낄 수 있었다.
루인은 자연스레 길포드 용병단에 의지하게 된 것이었다. 단지 지금까지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길포드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는 순간 알게 된 것이었다.
싫다고, 자신도 길포드 용병단과 함께하고 싶다고.
루인은 소리쳐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루인은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그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만약 길포드 용병단과 함께 다닌다면 그들 속에서 행복함을 느끼며 안주해 버릴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리될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이들에게 버림받은 게 아냐.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 건 나에게도 좋은 일이야.’
“어쩔 수 없죠. 괜찮아요. 슈론토까지는 안전하다니까 저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죠. 의뢰 잘 마치세요.”
루인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전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서 잘게요.”
루인은 서둘러 여관의 2층으로 올라갔다. 계속 있다가는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루인이 사라지자 엎드려 있던 다른 용병단원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무런 말도 없이 루인이 사라진 계단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