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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14화)
chapter 5. 이별(2)
루인과 길포드 용병단이 킨델베르 숲을 벗어난 것은, 루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3일째의 오후였다.
킨델베르 숲에서 나와 처음 밟은 땅은 레실이라는 작은 영지였다. 브란델 왕국 서남단에 위치한 작은 영지로, 루인이 원래 있었던 루드란 제국과는 수백 키밀(킬로미터)의 거리 차이가 있었다.
레실 영지는 길포드 용병단이 의뢰를 받은 곳이기도 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으니 당연한 결과다.
숲을 나와 걸으면서 길포드가 루인에게 물었다.
“루인,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정한 게 없다면 우리랑 함께 다니지 않을래? 물론 용병 일은 위험할 때도 있지만 네 실력이면 네 몸 하나는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무엇보다 우리는 네가 마음에 든다.”
함께 킨델베르 숲을 헤쳐 나온 3일. 루인은 길포드 용병단 전원의 동생이 되어 있었다. 모두 루인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루인은 길포드 용병단원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루인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었을 때 이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고 싶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루인을 같은 사람이 아니라 노예로 취급한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비단 그것 말고도 루인에게는 다른 계획이 존재했다.
루인의 거절에 용병단원 전원은 실망한 듯 축 처졌다. 잠시 힘이 빠져 있던 길포드가 아쉬운 태도로 질문했다.
“루인, 이제 어디로 갈 거냐?”
“일단 이곳에서 가죽을 팔아서 돈을 마련한 다음에 큰 도시로 이동할 생각이에요. 슈론토를 생각하고 있어요.”
루인은 지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노예가 도주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노예에게는 아예 그런 종류의 지식은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포드 용병단과의 대화로 지리에 관해 알 수 있었고 그중에는 슈론토라는 도시도 존재했다.
슈론토는 레실에서 7일 거리에 있는 상당히 큰 도시였다.
“바로 떠날 거냐?”
“시간이 늦었으니까 아마 하룻밤 자고 떠날 생각이에요.”
루인의 말에 길포드가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녁에 ‘노을의 노래’란 여관으로 와라. 어차피 이 레실에 여관이라고는 그곳뿐이라서 찾는 게 어렵지는 않을 거다. 우리도 의뢰 완료한 후에 이곳을 떠날 생각인데 그때 슈론토로 함께 가자.”
‘조금 더 함께 지낼 수 있겠구나!’
루인은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딜스가 싱글거리며 말했다.
“코가 비틀어지도록 마셔 봐야지. 안 그래?”
알리시아가 딜스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말했다.
“아직 어린애한테 그게 무슨 말이야!”
딜스가 뒤통수를 손으로 만지며 알리시아의 말에 반박했다.
“어린애라니! 루인은 어린애가 아니라 남자다! 원래 15살만 넘으면 소년에서 남자로 변신…….”
딜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루인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루인 너 몇 살이냐?”
“20살인데요?”
루인이 나이를 밝히는 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딜스가 루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키 커 봐야 아무런 소용없어. 동작만 둔해 보인다고. 지금 네가 딱 좋아.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마렴.”
코로나 족 혼혈인 루인의 성장은 일반 인간에 비해 몇 배나 느리다. 지난 3년간 많이 자랐음에도 루인은 아직 소년 같은 체형을 하고 있었다.
현재 루인의 키는 160이 되지 않는다. 20년 정도 더 지나면 루인도 일반적인 성인의 키로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즉, 아직 덜 자란 거지 절대 키가 작은 것은 아니다.
“아…… 저…… 그런 게 아닌데…….”
루인은 오해를 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자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한다. 루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짝!
길포드가 박수를 치며 시선을 모았다.
“그만. 이야기는 그만하고 빨리 움직이자. 위빙 플라워를 가져다주러 가야 한다.”
길포드의 말에 용병단원들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루인은 그들이 왜 킨델베르 숲으로 들어왔는지 들었기에 용병단원들의 태도를 이해했다.
길포드가 루인에게 말했다.
“루인, 바빠서 먼저 가 봐야겠다. 저녁에 노을의 노래에서 꼭 보자. 성인이니까 술도 같이 해야지. 그런데 정말 성인 맞아?”
“맞아요, 길포드. 나중에 봐요.”
인사를 나눈 후 길포드와 용병단원들은 서둘러 이동했다.
* * *
루인과 헤어진 길포드 용병단은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레실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흙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 흙집에서 살아가는 것은 농노들이었다.
길포드 용병단은 흙집 중 한 곳으로 들어갔다.
거적을 걷고 들어간 곳에는 세 명의 사람이 있었다.
한 명은 어린 소녀로 눈을 감은 채 누워 있었다. 몸이 안 좋은 건지 피부가 창백했다.
한 명은 중년의 여인으로 슬픈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 한 명은 양손을 소녀의 몸 위에서 10세밀(센티미터) 정도 띄운 채 올리고 있었는데, 양손에는 희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셋 모두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녀와 그 소녀를 바라보는 여인의 피부는 돌처럼 거칠었다. 소녀는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여인의 눈동자는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라딘 족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라딘 족은 힘과 체력이 인간에 비해 월등히 좋았다. 하지만 성격이 순하고 싸움을 싫어해 가장 먼저 인간들의 노예가 된 종족이었다.
라딘 족의 숫자는 인간들의 숫자와 대등할 정도로 많았고 그들 대부분은 일꾼 노예로 쓰였다. 힘은 좋았지만 천성적으로 싸우는 것을 싫어해 전투와는 맞지 않았다.
실제로 루인이 일했던 에테르기움 광산에도 60퍼센트 정도가 라딘 족 노예였다.
이곳의 라딘 족은 레실의 농노로 당연히 농사짓는 일을 했다.
마지막 한 명은 놀랍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은발의 긴 생머리는 허리까지 내려오고, 붉은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였다.
여인이 아름다운 건 당연했다. 이마에 있는 두 개의 점, 인간과는 다른 커다란 동물의 귀. 여인은 코로나 족이었다.
길포드 용병단 네 명의 남자가 홀린 듯 코로나 족 여인을 바라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알리시아는 한숨을 한번 내쉰 후 앞으로 나섰다.
알리시아는 줄곧 쓰고 있던 후드를 걷었다. 그에 따라 푸른빛의 긴 머리가 흘러내렸다.
코로나 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알리시아 역시 매우 뛰어난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 미색을 오른쪽 눈을 가리고 있는 검은 안대가 퇴색시키고 있었다.
알리시아는 갈색 주머니에서 위빙 플라워를 꺼낸 후 공손하게 코로나 족 여인에게 건네었다.
코로나 족 여인은 소녀에게서 손을 거둔 후 위빙 플라워를 받아 들었다.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고마워요.”
“아닙니다. 고생이라면 저희보다 대주술사님이 더 심하셨겠지요.”
“여러분 덕분에 이 아이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겠어요.”
코로나 족 여인은 그렇게 말한 후 양손을 다시 소녀의 몸 위로 올렸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손에 위빙 플라워가 들려 있다는 것.
코로나 족 여인이 무언가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법 언어. 하지만 마법사인 알리시아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현재의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신마법 언어가 아니라 고대 마법시대에 사용되었다는 고대 마법 언어였기에.
마법사인 알리시아에게 고대 마법 언어란 경이 그 자체.
알리시아는 황홀한 눈빛으로 코로나 족 여인을 바라보았다.
네 명의 사내는 다른 의미로 황홀한 눈빛으로 곁눈질했다.
시간이 흐르고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한순간 위빙 플라워가 분해되어 가루가 되었다. 그렇게 생긴 보라색의 가루가 누워 있는 소녀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위빙 플라워의 가루가 모두 흘러 들어가자 빛도 사라졌다.
치료에 많은 힘을 쓴 건지 코로나 족 여인은 앉은 채로 비틀거렸다. 알리시아는 놀라며 코로나 족 여인을 부축했다.
코로나 족 여인은 몸을 다시 바로한 채 손을 소녀의 위에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은 후 가만히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코로나 족 여인이 눈을 뜨며 말했다.
“나았군요.”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딘 족 여인이 눈물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라딘 족 여인은 코로나 족 여인과 길포드 용병단에게 연신 감사의 절을 올렸다. 가만히 있으면 라딘 족 여인은 계속해서 절을 할 기세였다.
길포드는 용병단원들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보냈고 모두 바깥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후 딜스와 크레일과 홀스터가 감탄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정말 아름다우시지. 누구랑은 달라.”
“목소리도 아름다우시고, 누구랑은 완전히 다르지.”
“눈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었어. 누구랑은 다르게.”
알리시아가 세 남자에게 발길질을 하며 소리쳤다.
“대놓고 욕을 하시지! 하여간 남자들이란. 당장 침 못 닦아! 어디서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 짐승들! 단장도 뭐라고 말 좀 해 봐.”
길포드는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헤벌쭉하게 웃고 있었다. 알리시아의 발이 길포드의 정강이로도 날아갔다.
그렇게 투닥거리는데 거적이 젖혀지고 코로나 족 여인이 바깥으로 나왔다. 용병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코로나 족 여인을 향했다.
코로나 족 여인이 길포드를 보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길포드는 잔뜩 당황해서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예? 저, 저요? 무, 물론입니다!”
코로나 족 여인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길포드는 코로나 족 노예를 본 적은 있었지만 이 여인처럼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코로나 족 노예는 강제로 잡혀 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정신은 절반쯤은 죽은 상태다. 인형과 마찬가지.
반면 눈앞의 여인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렇기에 코로나 족 본연의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길포드가 여인의 외모에 감탄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여인의 말에 긴장한 것은 여인의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인의 지위가 평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주술사.
고대 마법의 힘을 전승하는 코로나 족의 대주술사는 코로나 족의 정신적인 지주나 마찬가지다. 인간으로 치면 교황과 성녀를 합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대주술사의 존재는 인간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매우 극소수의 인간만이 그 존재를 아는데 길포드 용병단은 그 극소수에 포함되었다.
대주술사는 흙집에서 떨어진 곳으로 잠시 걸었다. 길포드는 황송해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다른 용병단원들은 뒤에 남았다.
걸음을 멈춘 대주술사는 달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들, ‘숲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부끄러운 이름입니다. 코로나 족이 좋게 봐 주어 얻게 된 과분한 호칭이지요.”
대주술사는 몸을 돌려 길포드를 바라보았다. 길포드는 대주술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아름답게 반짝이던 대주술사의 붉은 눈동자가, 밤에는 섬뜩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후후. 저도 사실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운이 좋은 인간이구나. 그게 아니라면 간악한 인간들이 저의 순진한 형제들을 속였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길포드는 대주술사의 말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대주술사의 말이 사실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본능적인 공포가 길포드의 몸을 잠식한 것이었다.
길포드의 눈을 직시하며 대주술사는 말을 계속했다.
“어쩌면 저 역시 제가 증오하는 인간들과 마찬가지였던 것 같아요. 저의 기준으로 세상을 제단하고 있었지요. 오늘 당신들을 보니 제 부족함을 알 수 있었어요. 감사드려요.”
대주술사가 공손한 태도로 길포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에 길포드는 당황하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까지 몸을 지배하던 공포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아, 아닙니다.”
“사실 그대들에게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아니, 그대들은 용병이니 부탁이 아니라 의뢰라고 하죠.”
대주술사가 의뢰라고 말하는 순간 길포드의 태도가 변했다. 조금 전까지는 일방적으로 대주술사에게 휘둘렸다면, 지금은 당당한 눈빛으로 대주술사를 주시했다.
의뢰를 잘못 받을 경우, 단순히 용병단이 고생하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지만 심각할 경우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다. 길포드는 용병단원들의 생명을 매우 아꼈기에 의뢰를 받을 때는 항상 이렇게 진지한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