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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13화)
chapter 5. 이별(1)


홀스터가 매우 작은 목소리로 딜스에게 속삭였다.
“혹시 드래곤 아닐까?”
홀스터의 말에 딜스는 물론 옆에 있던 크레일까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레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너 뭔가 날짜를 심하게 착각한 거 아니냐? 지금은 2809년이지 289년이 아니란다. 드래곤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게 2000년도 더 전이지 아마?”
딜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크레일의 말에 덧붙였다.
“홀스터, 넌 다 좋은데 동화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탈이야. 동화는 동화일 뿐이야. 그만 환상에서 빠져나와서 현실을 보렴.”
홀스터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드래곤이 아니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무 막대기 하나로 오우거를 물리쳤어. 그것도 그냥 가볍게 던지는 것만으로. 너희들은 그게 사람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냐?”
홀스터의 말에 크레일은 바로 반박했다.
“마스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마스터가 옆집 개 이름인지 알아? 초인이라고 초인. 최고의 기사들도 수십 년 수련하고 운 좋으면 올라갈 수 있는 경지가 바로 마스터지. 난 아무리 봐도 저 소년의 나이가 20살은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저 정도의 어린 나이에 마스터 경지에 올랐다는 게 말이 돼?”
크레일은 순간 말이 막혔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딜스가 침착한 태도로 크레일의 말에 반박했다.
“확실히 마스터라는 건 믿기 어려워. 그렇다고 드래곤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어. 왜냐하면!”
딜스가 고개를 돌려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루인을 바라보았다. 딜스의 이야기를 듣던 크레일과 홀스터는 자연스럽게 딜스의 행동을 따라했다.
갑자기 시선이 집중되자 루인이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셋은 동시에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딜스의 입이 다시 열렸다.
“왜냐하면, 저 소년은 못생겼으니까!”
딜스의 말에 홀스터와 크레일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딜스는 그런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전해 내려오는 드래곤의 전설에는 항상 공통점이 있지. 드래곤이 인간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바뀐 모습은 절세의 미남미녀라는 것!”
딜스가 홀스터를 매섭게 노려보며 질문했다.
“홀스터. 너 추남추녀 드래곤에 대해서 들어 본 적 있냐?”
홀스터는 딜스의 박력에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래곤은 위대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도 강한 존재들이라고 했어. 그렇기에 인간의 모습을 할 때도 가장 아름답게 변했다고 전해지지.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름다움이랑은 거리가 멀지.”
홀스터는 딜스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동화책에 나오는 드래곤은 모두 아름다웠으니까. 하지만 바로 수긍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우거를 나뭇가지 하나로 죽였잖아.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것까지는 나도 몰라. 그리고 중요한 건 따로 있어. 드래곤은 인간의 모습을 할 때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정체를 들키면 알게 된 인간을 모두 죽이고 모습을 감춘다고 알려져 있어. 그러니까 저 소년은 무조건 드래곤이 아닌 거야.”
당당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딜스의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홀스터는 딜스의 태도를 보고 깨달을 수 있었다. 때론 진실보다는 거짓이 필요할 때도 있는 법이다.
“고맙다, 딜스.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어. 드래곤이라니, 말도 안 되지.”
“뭘.”
홀스터와 딜스가 훈훈한 눈빛을 나누는데 크레일이 찬물을 끼얹었다.
“저기, 분위기 좋은데 미안하지만. 만약 저 드…… 소년, 우리가 이야기하는 거 다 듣지 않았을까?”
홀스터의 얼굴이 순간 창백하게 질렸다. 딜스 역시 얼굴은 창백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크레일의 말에 반박했다.
“드래곤이라니? 그건 전설에나 등장하는 존재라고. 그럴 리는 없지만 저 소년이 드래곤이라고 가정하면,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방관하겠냐? 당장 우리 뒤에 나타나서 어깨에 손을 턱…….”
턱!
한창 잘 이야기하던 딜스의 말이 끊어졌다. 갑자기 손 하나가 딜스의 어깨를 짚었기 때문이다.
딜스의 목이 기계처럼 뻣뻣하게 뒤로 돌아갔다. 그런 딜스의 눈에 흉악하게 생긴 소년의 얼굴이 들어왔다. 루인이다.
딜스의 얼굴이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변했다. 호흡이 잘되지 않았다. 그건 홀스터와 크레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잡아먹힐 거야!’
딜스가 공포에 질려 이렇게 생각하는데 루인의 입이 열렸다.
“전방에 몬스터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대비…… 어! 괘, 괜찮으세요?”
몬스터의 출현을 알리던 루인은 놀라서 소리쳤다. 딜스가 기절해 버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분이 왜 기절을…… 다들 기절해 버렸네?”
홀스터와 크레일 역시 딜스와 마찬가지로 기절한 채 쓰러졌다.
‘뭐야? 몬스터들 나 혼자서 상대해야 하는 거야?’
루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다행히 덤벼든 몬스터들은 코쿤 다섯 마리가 전부였다. 접근하기 전 활로 두 마리를 처리하고 남은 세 마리는 수라타로 상대할 수 있었다.

루인은 길포드에게 빌린 단검으로 코쿤의 가죽을 벗겨 냈다. 뼈를 갈아 만든 단검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가죽을 벗기기에는 너무 뭉툭했다.
길포드가 루인의 일을 도우며 미안한 듯 말했다.
“원래 이렇게 허약한 놈들이 아닌데. 왜 갑자기 기절한 건지? 은인이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닙니다. 돕고 살아야죠. 그리고 말은 낮추어 주십시오. 제가 한참 어린 것 같은데.”
길포드가 부담스럽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길포드의 태도에 루인은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고 싶다는 충동을 살짝 느꼈다.
루인의 얼굴은 매우 흉악하게 바뀌어 있었다. 이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마에 찍혀 있던 혼혈의 증거, 두 개의 점도 사라져 있었다.
역용술이라는 수법을 사용한 결과였다.
루인이 역용술을 사용한 것은 이마에 찍혀 있는 두 개의 점 때문이다.
혼혈은 노예다. 코로나 혼혈의 증거인 이 점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은 자신이 노예라는 것을 광고하는 꼴이다. 그것도 현재 주인이 없는 노예.
주인이 없는 노예는 줍는 자가 임자다.
기껏 힘을 얻고 바깥세상으로 나왔는데 그런 꼴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던 지식 중에 역용술이란 것을 익혔다.
역용술은 얼굴의 마나를 임의적으로 조작해 얼굴근육이 다른 형태를 하게 만드는 수법이다. 그런 만큼 원래의 얼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마의 점을 피부 속으로 밀어 넣어 드러나지 않게 했다. 역용술의 효능은 놀라워 전혀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게 점을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니라서, 점을 밀어 넣다 보니 근육이 당기게 되고 그러다 보니 미간을 향해 근육이 몰리게 되어 버렸다.
원래의 고운 얼굴은 사라지고 매우 흉악한 인상이 되어 버렸다.
루인은 처음에는 바뀐 얼굴을 좋아했다. 험한 세상에 살아가려면 유약한 인상보다는 험악한 인상이 좋을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어쩌면 안 좋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오우거를 잡은 후 루인은 길포드 용병단과 함께 행동했다.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그럴 생각이긴 했지만,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자신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여긴 가장 큰 이유는 멀쩡한 3명이 길포드와 알리시아를 버리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오우거의 공격은 강했고 그 공격에 직격당한 길포드의 몸은 결코 성치 않았다. 용병단의 힐링 포션을 모두 퍼붓지 않았다면 길포드는 지금처럼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값비싼 힐링 포션을 퍼부었음에도 길포드의 상처 치료는 응급처치에 그쳤다. 뼈가 박살 날 정도의 큰 상처였기 때문이다.
힐링 포션 덕분에 걸을 수는 있었지만 속도는 매우 느렸다.
길포드에 비하면 알리시아는 멀쩡했다. 그래도 그녀는 다친 곳은 없었다. 대신 마나 역류로 인해 한동안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마법사는 짐이나 마찬가지다.
만약 길포드와 알리시아를 버린다면 멀쩡한 셋은 훨씬 빨리 숲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루인은 그런 의도를 비치며 제안도 했다.
처음 만날 때 자신의 무력을 과장되게 보여 주었으니 숲을 돌파하는 것에 문제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셋은 루인의 제안을 거절했다. 길포드와 알리시아를 절대 버릴 수 없다고 했다.
루인은 이 다섯 명에게서 끈끈한 무언가를 느꼈고, 함께 움직이기로 완전히 결정 내렸다.
그 후 함께 움직이며 이 다섯 명의 유대에 부러움을 느꼈다. 그 속에 같이 끼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느 수준 이상 가까워질 수 없었다. 루인은 그 이유가 역용으로 바꾼 험악한 인상 때문인 것만 같았다.
물론 그건 루인의 착각이었다.
홀스터, 딜스, 크레일은 루인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루인의 강함(?) 때문에 루인이 드래곤일 거라 오해하고 있었다. 무서워하니 자연스레 거리감이 생긴 것이다.
알리시아는 냉정한 태도로 루인을 관찰했다. 비록 후드로 가려져 있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루인은 알리시아의 집요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것 역시 루인의 착각이었다. 알리시아는 마법사. 특이한 것을 보면 배척하는 게 아니라 받아들이고 연구하는 존재다.
몬스터의 숲 한가운데에서 나타난 의문의 소년. 게다가 일격으로 오우거를 죽일 정도의 실력까지. 이 얼마나 흥미로운 연구 소재인가? 얼굴의 험상궂음 따위는 호기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리시아는 계속해서 집요하게 루인을 관찰했다.
길포드는 원래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정중하게 대한다. 루인은 처음 보는 사람인데다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다. 길포드는 단순히 조금 과하게 정중한 태도로 루인을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루인의 오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풀리게 되었다.
홀스터, 딜스, 크레일의 오해는 바로 풀렸다.
정신을 차린 세 명이 드래곤은 모른다며 일제히 외쳤기 때문이다. 길포드가 세 명에게 무슨 이야기인지 추궁했고, 세 명은 길포드에게 루인―드래곤 설을 이야기했다.
길포드는 말도 안 된다며 세 명의 만류에도 루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고, 루인은 실소했다.
루인은 오우거를 죽인 것이 자신만의 독특한 수법이고 위력이 강한 대신 부담이 너무 커서 함부로 쓸 수 없는 거라고 말했다.
세 명의 오해는 그렇게 풀렸다.
알리시아에 관한 오해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관찰이 조사의 단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루인은 알리시아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 진땀을 흘려야 했고 길포드의 도움으로 겨우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길포드와도 편안히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루인은 외모가 다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 * *

길포드 용병단은 위빙 플라워를 찾기 위해 킨델베르 숲의 제법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상태였다. 당연히 나가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오우거의 등장 이후로는 몬스터들의 습격이 부쩍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낮에는 접근하지 않다가 밤이 되어 잠을 잘 때면 몬스터들이 습격해 왔다.
길포드는 여전히 전투를 할 수 없었지만 알리시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세 명의 호흡도 잘 맞았기에, 루인의 궁술이 보태어지자 어렵지 않게 몬스터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그렇게 전투를 벌이며 루인은 길포드 용병단원들과 친해졌다.
베이디안 대륙에서 노예란 조금 비싼 가축으로 취급된다. 이종족이나 혼혈일 경우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하다.
루인 역시 그렇게 취급되어 왔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길포드 용병단과의 관계는 달랐다.
길포드 용병단에는 인간미가 넘치는 따뜻함이 있었고, 그 따뜻함은 루인의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게 비록 거짓된 얼굴의 결과라고 해도.
루인이 길포드 용병단과 함께하며 얻은 것은 따뜻함만은 아니었다.
길포드 용병단은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의뢰를 수행했고,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루인이 가진 지식은 많지만 그 대부분은 다른 차원의 것이고, 그마저도 이론적인 경향이 강하다. 루인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바로 경험.
길포드 용병단과 동행하며 나눈 이야기는 그 부족한 경험을 조금이나마 채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