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타이탄 로드 1(6화)
chapter 2. 하르실리온(4)
루인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현실과 유리된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공명에 대한 하르실리온의 말을 듣고 실행에 옮기는 순간 이런 일이 벌어졌다.
될 거란 생각은 없었다. 그저 한번 하르실리온의 존재를 느껴 보자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하르실리온이란 존재를 너무나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정신을 차려 보니 어두컴컴한 공간이었다.
루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디야?”
대답을 듣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답이 들려왔다. 여자아이로 짐작되는 귀엽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어디긴? 이곳은 나, 하르실리온의 안에 존재하는 아공간이야.”
루인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귀여운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백옥 같은 피부에 커다란 두 눈에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반짝인다. 은발의 탐스러운 머릿결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옷은 검은색과 붉은색이 잘 조화된, 프릴이 치렁치렁하게 달린 드레스.
전체적으로 귀엽다는 인상이 강한 미소녀였다.
소녀를 보는 순간 루인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누, 누구냐?”
소녀가 입술을 삐죽이며 루인의 질문에 답했다.
“누구냐, 라니? 섭섭한걸. 나야, 하르실리온.”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루인에게 바짝 다가섰다. 루인은 다시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 같았다.
“하르실리온이라니? 그런 모습이 아니었잖아? 게다가 왜 여자아이?”
“분명 나는 타이탄인 하르실리온이야. 하지만 이곳은 내 속에 존재하는 아공간. 그렇기에 지금처럼 인간의 모습을 하는 일도 가능하지. 그리고 타이탄의 성별은 주인의 마음에 따라 정해져. 내가 여자의 성을 가지게 된 건 네가 원해서 그런 거야. 지금의 내 모습 역시 네가 바란 거고.”
“너의 모습이 내가 바란 거라고?”
하르실리온은 귀여운 태도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얼굴을 루인에게 바싹 가져다 대며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르실리온과 루인의 얼굴은 바짝 붙은 상태였다. 조금만 더 가까우면 입술이 닿을 정도의 거리였다.
하르실리온의 입김이 루인의 코끝을 간질거렸다.
“으, 으응.”
루인은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가까스로 대답할 수 있었다.
루인의 대답에 하르실리온은 매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루인의 왼쪽으로 와서 와락 팔을 끌어안았다.
“뭐, 뭐 하는 거야?”
“그냥, 이렇게 루인과 가까이 있고 싶어서. 싫어?”
“아, 아니 싫다기보다…… 그런데 너 성격 변하지 않았어? 이전과 많이 다르다?”
“공명 전에는 백지상태와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지만 루인과 공명하며 지금의 성격을 가지게 된 거야.”
“혹시 공명할 때마다 바뀌거나 그러는 건?”
하르실리온은 루인의 팔을 잡은 채 머리를 가로저었다.
“한 번 정해진 자아는 바뀌지 않아. 나는 계속 이대로. 헤헤.”
“그……렇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바짝 붙어 있는 하르실리온에게서는 상큼한 향기가 전해져 왔다. 몸에 와 닿는 감촉 역시 실제와 다를 바 없었다.
한때 성노로 전전했기에 여성과의 신체 접촉은 많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두근거림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앞으로 탑승할 때마다 이런 기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니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하르실리온에서 내렸을 때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최소한 지금 같은 신체 접촉은 없을 테니까.
루인은 그 순간 하나의 의문을 떠올리고는 하르실리온에게 질문했다.
“저기, 네 성격 말이야. 계속 이런 성격일 거라고 했지?”
“응.”
“그럼 내가 하르실리온에서 내렸을 때도 변하지 않고 똑같은 거니? 말투도?”
“물론이지.”
하르실리온의 말투는 굉장히 애교가 많은 말투다. 지금처럼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라면 아주 잘 어울린다. 하지만 신장 6밀의 강철 거인이 그런 말투를 사용한다면?
비록 그 생김새가 유려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거인은 거인이다. 그런 거인이 ‘헤헤’ 하며 귀엽게 웃는다? 그건 다른 의미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험이다.
하르실리온이 본체로 애교 부리는 모습을 떠올려서일까? 더 이상 처음처럼 긴장되거나 두근거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루인은 담담한 목소리로 하르실리온에게 말했다.
“일단 타는 건 성공했으니까 이제 조종해 보자.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루인은 자신의 몸을 움직일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직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지? 그냥 이것을 하겠다고 생각하면 몸이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응.”
“타이탄을 움직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야. 특별히 생각할 것 없어. 그냥 본다고 생각해. 그럼 나의 눈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어. 그리고 움직인다고 생각해. 그럼 내 몸을 움직일 수 있어. 내 몸은 루인의 것이니까.”
하르실리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뺨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루인은 하르실리온의 태도에 당황스러움을 느끼고는 얼른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고는 눈을, 떴다.
루인의 눈에 하르실리온이 보였다. 주위는 여전히 컴컴한 어둠이었다.
루인은 혹시 자신이 실수했나 싶어 다시 눈을 감았다 떴다. 결과는 동일했다.
“안 되는데?”
하르실리온이 검지를 입에 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하네. 분명 심퍼사이즈했는데 어째서 유니온은 되지 않은 거지? 루인은 ‘세상의 흐름을 느끼는 자’일 테니까 의지가 움직이면 자동적으로 마나가 움직여야 하는데 왜 아무런 움직임이 없지?”
“유니온?”
“심퍼사이즈가 나와 네가 하나 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하나 된 채로 내 몸을 움직이는 게 바로 유니온이야.”
하르실리온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띄며 루인에게 말했다.
“너 혹시 일부러 마나를 움직이지 않은 거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마나를 어떻게 움직여?”
“넌 세상의 흐름을 느끼는 자잖아. 그러니 의지로 마나를 움직일 수 있잖아.”
“세상의 흐름을 느끼는 자라니, 그게 뭐냐?”
하르실리온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루인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몰라? 너 아는 게 뭐니? 세상의 흐름을 느끼는 자는 의지로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자잖아. 마나로 신체를 강화해서 일반인보다 월등히 강한 힘과 빠른 스피드를 낼 수 있고, 무기에 마나를 담아 강도와 날카로움을 향상시키고.”
루인은 하르실리온이 이야기한 존재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세상의 흐름을 느끼는 자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거 혹시 나이트를 말하는 거야? 마나로 신체를 강화하고 나이트암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
기사의 지위를 뜻하는 나이트란 말은 언제부터인가 전사의 경지를 나타내는 말로 바뀌었다.
나이트란 마나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경지. 그럼으로써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경지였다.
나이트 위의 경지는 마스터(Master). 마스터는 단순히 마나로 신체만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깥으로 뿜어내 유형화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 기술을 오러(Aura), 혹은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라고 불렀다.
하르실리온은 루인의 말에 태평한 태도로 대답했다.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부르는 말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네. 네가 말한 나이트가 맞을 거야.”
루인의 이마 위로 힘줄이 삐죽 돋아 올랐다. 결국 하르실리온의 착각으로 아는 게 뭐냐는 말까지 들은 것이다.
생글거리는 하르실리온의 얼굴을 보자 루인의 분노가 한층 강해졌다.
하르실리온이 루인의 이상형이고, 그래서 루인이 하르실리온에게 첫눈에 반했다면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 이상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하르실리온의 모습을 보아도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았다. 귀엽긴 했지만 특별한 감정도 들지 않았다. 단순히 하르실리온의 원래 모습 때문에 그렇다고 여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너 정말 내가 바라는 모습인 거 맞아?”
루인의 질문에 하르실리온이 화들짝 놀라더니 소리쳤다.
“당연히 맞지!”
“거짓말하지 마. 내가 이런 모습을 좋아할 리 없어. 아니, 애초에 여자를 바랐을 리 없지.”
성노로 팔린 기억은 루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게다가 겨우 이틀 전에 헬레나와의 일도 있었다. 여자라면 진저리가 나는 루인이었다.
루인이 사납게 노려보자 하르실리온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곤 삐죽대며 실토했다.
“이씨! 그래, 지금 내 모습은 네가 바라던 게 아니다. 내가 원했던 모습이다. 됐냐!”
“얼씨구. 그러면 애초에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했으면 될 걸 왜 거짓말했어?”
“네가 상상한 건 이상한 시꺼먼 아저씨였단 말이야. 나는 그런 아저씨는 되기 싫었다, 뭐.”
“부족해. 그냥 네가 원하는 모습을 한 후 나에게 말했어도 될 일이야. 네가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네 모습이 내 이상형일 거란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애초에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
“그거야 널 내 치마폭으로 감싼 뒤 마음대로 하려고 그런 거지. 원래 남자는 여자가 지배하는 거 아니겠어? 오호호호호.”
루인의 이마에 핏줄이 또 하나 생겨났다. 루인은 주먹을 꽉 쥐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두근거린 건 뭐야?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이상해.”
“그건 현혹 마법을 흉내 내서 너에게 건 거였는데, 역시 별로 효과가 없었나 보네. 호호…… 호?”
루인이 하르실리온을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넌 정신교육 좀 받아야겠다.”
루인은 주먹을 꽉 쥔 후, 그 주먹을 하르실리온의 양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고는 마구 문질러 댔다.
“아, 아파. 후에엥!”
루인은 한참 동안이나 관자놀이 마사지(?)를 한 후 놓아주었다. 하르실리온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루인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거짓말하지 마라. 현혹 마법 같은 것도 쓰지 말고.”
“응.”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서, 어째서 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거야?”
“그건 네가 마나를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타이탄은 네 마나의 움직임을 감지해서 그것에 따라 동작해. 그런데 네가 마나를 움직이지 않으니 내 몸이 움직일 리 없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나이트가 아니야. 나이트는 고사하고 검 한 번 휘둘러 본 적 없어. 마나는 당연히 못 움직이지.”
하르실리온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루인을 바라보았다.
“거짓말. 흐름을 느낄 수도 없으면서 어떻게 나와 공명할 수 있었던 거야? 그것도 그렇게 빨리.”
“나도 몰라. 그냥 돼 버리더라. 그럼 마나를 다룰 수 없으면 네 몸은 움직일 수 없는 거야? 다른 방법은 없어?”
“없어.”
루인은 김이 팍 샜다. 결국 마나를 쌓아서 나이트의 경지에 올라야 타이탄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물론 실제의 나이트암도 조종하는 방식은 타이탄과 흡사했다. 당연히 나이트의 경지에 올라야 조종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름도 나이트암(Knight Arm:기사의 무기)이었다.
루인은 타이탄이니 나이트암과는 조금 다를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결국 헛된 기대임이 판명되었을 뿐이다.
지금까지 마나 연공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루인이다. 방법이 없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하르실리온을 조종하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르실리온. 이곳을 나가는 방법 혹시 아니?”
“내 발밑을 보면 공간이동 마법진이 있어. 그 마법진을 발동시키면 지상으로 자동으로 워프돼.”
루인은 하르실리온의 말에 놀랐다. 공간이동은 현재는 사라진 마법이었다.
“어떻게 발동시키는데?”
“그냥 위에 선 채로 ‘발동’이라고 외치면 돼.”
의외로 나가는 방법은 편했다. 루인은 얼른 바깥으로 나가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하르실리온의 말은 루인을 절망으로 빠뜨렸다.
“나와 유니온을 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