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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5화)
chapter 2. 하르실리온(3)
루인은 가만히 서 있기도 그래서 일단 공동을 둘러보았다.
절망적이게도 공동에는 통로라 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지하수가 고인 건지 호수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 호수(?) 주위로는 이끼 같은 것도 잔뜩 자라고 있었다. 이끼의 양은 굉장히 많았다.
당장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끼를 다 뜯어 먹은 뒤에는 결국 굶어 죽을 것이다.
루인이 절망적인 기분을 느끼고 있는데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꼬마.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루인.”
[루인, 너는 나와 대화가 통하는 것으로 보아 타이탄 심퍼사이저(Titan Sympathizer)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루인은 목소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무슨 말이지? 대화가 통하는 건 당연하잖아? 네가 나르켈어로 이야기하…….”
그제야 루인은 깨달았다. 목소리의 말은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루인의 머릿속에 직접 들리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네가 타이탄 심퍼사이저의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루인, 나에게 이름을 지어 다오.]
“이름이라고?”
[나는 이름이 없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름을 가져 보지 못했다. 이름이 없는 나는 그저 존재할 뿐인,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목소리의 말에 루인은 측은한 기분이 들었다. 루인 역시 어렸을 때는 이름을 가지지 못했다. 그저 노예 번호를 배정 받았을 뿐이다. 그때의 루인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이름을 가졌을 때 처음으로 ‘나’라는 것을 각성했다.
목소리에게 측은함을 느끼긴 했지만 덥석 부탁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이름을 지어 줬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가고일이라는 몬스터가 석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안심한 사람을 덮친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루인은 한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목소리의 청을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은 갱도가 무너졌을 때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 뒤 수상한 기생체에게 몸을 빼앗기긴 했지만 다시 몸을 찾을 수 있었다. 죽음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겨서인지 몰라도 생에 대한 집착이 그리 크게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이름을 지어 주고, 그 일이 나쁜 결과로 돌아온다면 그것 역시 운명이라고 담담하게 생각했다.
루인이 석상을 향해 말했다.
“좋아. 이름을 지어 줄게. 네 이름은…….”
그 순간 루인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단어인데도 갑자기 명확하게 떠올랐다.
루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를 입에 담았다.
“하르실리온.”
루인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에서 희미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루인은 이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쩌저저저적!
무언가 갈리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의 진원지는 바로 석상이었다. 석상 전체에 잔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제는 하르실리온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친다. 뒤로 물러나라.]
“왜?”
하르실리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루인은 어째서 뒤로 물러나라고 했는지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쿵!
거대한 돌조각이 루인의 앞으로 떨어졌다. 그건 돌 껍질이라 부르면 적당할 모양이었다. 크기에 비해 매우 얇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바닥과 충돌한 돌 껍질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건 루인의 앞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석상의 주위로 돌 껍질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떨어진 돌 껍질들은 역시나 바닥과 충돌해 파편을 날려 댔다.
석상의 키는 6밀 정도. 돌 껍질이 낙하하며 얻은 운동에너지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루인의 옷은 완전히 해어져 알몸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였다. 훤히 드러난 맨살에 돌조각이 스치고 지나가자, 금세 베어진 상처가 생기고 그곳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떨어지는 돌 껍질은 매우 많았다. 그에 파생되어 날리는 돌조각들은 더욱 많았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수많은 돌조각에 스쳐 과다 출혈로 죽을 판이었다.
아무리 루인이 생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고 해도, 살길을 버리고 죽을 길로 뛰어들 정도로 무모해진 건 아니었다. 루인은 양팔로 얼굴을 가리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돌 껍질들의 낙하는 금세 끝이 났다.
낙하가 끝났을 때, 석상은 더 이상 석상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직 돌 부스러기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금속 특유의 광택이 에테르기움의 푸른빛을 받아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루인은 그 모습을 보며 얼빠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이트암.”
대륙에 존재하는 나이트암과는 그 형태가 달랐다. 일단 나이트암의 형태는 육중했다. 뚱뚱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굵다는 느낌은 들었다.
나이트암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무겁고 진중하다는 이미지였다.
반면, 하르실리온은 달랐다. 일단 날렵했다. 게다가 강하다는 느낌보다는 유려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주는 모습이었다.
주로 짙은 색이 칠해진 나이트암과는 달리 흰색과 녹색이 교차된 색상 역시 그러한 느낌에 한몫했다.
나이트암과 하르실리온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머리였다.
나이트암에도 머리라 할 만한 부분이 존재했다.
나이트암 파일럿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상체를 나이트암의 동체 바깥으로 내어놓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이트암 파일럿이 위험하게 된다.
나이트암 파일럿을 보호하기 위해 나이트암의 어깨에는 지붕이 달리게 되는데 그 모습이 투구와 흡사했다. 시야 확보와 방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보니 투구의 형상을 띠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그 투구 모양의 지붕을 나이트암의 머리라 불렀다.
하르실리온에도 머리가 달려 있었지만 나이트암의 머리와는 전혀 달랐다. 일단 눈이라고 짐작되는 두 개의 둥근 보석이 존재했고, 나이트암 파일럿이 앉을 빈 공간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고정되어 있는 나이트암의 머리와는 달리 하르실리온의 머리는 움직이기까지 했다. 마치 실제의 머리가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나이트암과 하르실리온. 그 둘의 형상은 분명 차이가 있었지만 대충 보면 비슷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루인은 하르실리온을 보며 나이트암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이 하르실리온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았다. 하르실리온의 입(?)―인간의 입에 해당하는 부분에 평편한 금속판이 달려 있었고, 작은 홈이 파여 있었다.―에서 심통 맞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이트암이 아니다. 나는 최강의 타이탄, 하르실리온이다! 주인.]
루인에게 다른 말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르실리온이 마지막에 언급한 주인이라는 말이 루인의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나이트암을 타는 것은 베이디안 대륙 대부분 사내들의 열망. 절대 이룰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그 일을 어쩌면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것이 나이트암이 아니라 타이탄이라 해도.
‘나이트암이나 타이탄이나. 거기서 거기지.’
베이디안 대륙에 존재하는 그 어떤 나이트암이라도 의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노예로 살아온 루인은 그러한 사실은 몰랐다. 그저 하르실리온이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좀 특별히 좋은 나이트암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루인은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호, 혹시 내가 널 탈 수 있는 거야?”
하르실리온은 호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하다. 주인인 네가 아니면 누가 감히 날 탈 수 있단 말이냐?]
루인은 하르실리온의 말을 듣는 순간 오른손을 자신의 뺨으로 가지고 갔다. 그러고는 꼬집었다.
“아얏!”
고통은 생생했다. 꿈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그 후에 찾아온 꿈같은 행운은 절대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지하 수십 밀에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도 잊고, 하르실리온에 타고 싶다는 생각만이 루인의 머릿속을 채웠다.
나이트암의 경우 투구 부분이 열리고 그곳을 통해 탑승할 수 있다.
“타고 싶어. 머리를 열어 줘.”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는 거냐? 타면 타는 거지 내 머리를 왜 열어?]
하르실리온의 머리 부분은 나이트암과 확실히 달랐다. 비록 금속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인간의 머리와 오히려 흡사하게 보였다. 머리를 열면 어쩐지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펼쳐질 것만 같았다.
루인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다시 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하아. 이런 것까지 일일이 이야기해 줘야 돼? 한심하군.]
하르실리온의 비아냥에 루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하르실리온은 루인의 표정 변화를 무시하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바꾸어 말을 계속했다.
[필요한 것은 너와 나의 공명(Sympathy)이다. 나를 느껴라. 그리하여 내가 존재함을 인지해라. 마음을 열고 나를 받아들여라. 너와 나는 서로 다른 몸이기는 하지만 또한 하나의 몸이기도 하다. 너의 팔은 나의 팔이고, 나의 다리는 너의 다리다. 너와 나는 너의 것이며 동시에 나의 것이다. 그럴 리 없다는 상식 따위는 잊어버려라. 중요한 건 그러한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러할 거라는 확고한 믿음. 그리고 나를, 그리고 너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하르실리온의 목소리가 다시 비아냥거리는 투로 바뀌었다.
[뭐, 그래 봤자 당장 공명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최고의 심퍼사이저라고 해도 새로운 타이탄과 공명하는 데에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두웅.
그것은 분명 소리가 아니었지만, 소리처럼 인식되어졌다.
그것은 파동이었다. 루인과 하르실리온 사이에서 생겨난 둥근 파동이 넓게 퍼져 나갔다. 그 파동은 계속해서 일어났고 간격은 조금씩 빨라졌다.
루인과 하르실리온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루인은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하르실리온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루인은 또한 움직이지 않고 있기도 했다.
루인은 눈을 감은 채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루인의 몸은 지상에서 뜬 채 하르실리온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루인과 하르실리온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다 결국 0이 되었다. 루인의 손이 하르실리온의 가슴 부분과 닿았다.
그 순간.
출렁.
분명 금속일 게 분명한 하르실리온의 표면에 출렁임이 발생했다. 마치 고요한 수면에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동심원의 물결과 흡사한 모습이었다.
이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루인의 팔은 천천히 하르실리온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하르실리온의 경악 섞인 비명을 마지막으로 루인의 몸은 완전히 하르실리온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