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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4화)
chapter 2. 하르실리온(2)


렉토-헬리온-쿠브린이 루인의 정신을 집어삼키는 일은 매우 손쉽게 이루어졌다.
‘이런 하등 생물의 미약한 정신력 따위는 나, 위대한 펠그림의 오라클인 렉토-헬리온-쿠브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렉토-헬리온-쿠브린은 그렇게 자신의 우월함을 스스로 칭송했다. 하지만 마냥 만족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소멸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생물인 루인을 숙주로 택했다. 하지만 루인의 신체는 죽어 가고 있었다.
아니, 죽었다고 보아야 마땅한 상태였다.
몸 전체에 수많은 에테르기움이 박힌 것은 지금에 와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수십 톤의 흙더미가 루인의 몸을 짓눌렀다. 사람의 몸이 그런 압력을 버틸 수는 없다.
루인의 몸은 완전히 으깨진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루인의 몸을 지배하는 것은 정신기생체인 렉토-헬리온-쿠브린이었다. 펠그림 족은 기본적으로 에너지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물리적인 힘이 그들에게 피해를 입힐 수는 없었다. 강력한 압력은 렉토-헬리온-쿠브린 자신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기생체인 그들은 숙주 없이 오랜 시간 존재할 수 없었다. 문제는 주위에서 루인 외에 또 다른 숙주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강대한 정신력을 가진 펠그림 족은 의지로 세상을 구축할 수 있었다. 정신의 힘으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이면서 힘든 일이었기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비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할 때였다.
새로운 숙주를 찾아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이 기생할 정도의 지성을 가진 존재는 수십 밀 위에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곳까지 이동하는 것은 펠그림의 오라클인 렉토-헬리온-쿠브린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행인지 5밀 정도의 아래에 공동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정신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정신의 힘으로 루인의 몸을 이동시켰다. 공동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옆으로 돌아갈까 생각했지만 거대한 바위의 존재가 생각을 바꾸게 만들었다. 그 정도 크기의 바위라면 구멍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바위 아래쪽으로 구멍을 만들었고 공동으로 떨어졌다. 예상대로 거대한 바위가 구멍을 막았고 뒤따른 다른 바위들 덕분에 흙이 흐르는 것도 멈추었다.
루인의 신체가 완전히 사망할 때까지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렉토-헬리온-쿠브린은 걱정하지 않았다.
펠그림은 정신으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고, 그 힘을 이용해 이 공동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 힘을 다르게 이용하면 완전히 박살 나 버린 신체도 고칠 수 있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에게는 이동하는 것보다 몸을 고치는 것이 더욱 쉬운 일이었다. 큰 힘을 내는 것은 어렵지만 그 힘을 세밀하게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쉬웠기 때문이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정신력을 루인의 신체에 가했다. 그에 따라 부서진 뼈가 다시 붙고 괴사했던 세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으깨졌던 뇌세포가 다시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가고 신경세포가 신호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피부가 재생되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것처럼 루인의 몸은 회복되었다.
복구된 루인의 몸은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나빠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월등히 좋아졌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루인의 몸에는 어떠한 탁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뼈와 근육, 신경들도 가장 이상적인 형상이었다.
바뀐 것은 또 있었다. 그건 바로 루인의 몸에 박혔던 에테르기움이었다. 그 개수는 모두 386개였다.
루인의 몸이 복구되며 386개의 에테르기움은 몸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루인의 몸에 골고루 퍼져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자리 잡은 에테르기움들은 루인의 몸과 완전히 결합되었다. 더 이상은 빼내려고 해도 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강제로 뺐다가는 루인의 몸이 상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이것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100퍼센트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회복되었기에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자신의 몸을 덮고 있던 흙을 팔로 치워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푸른빛을 내고 있는 에테르기움들이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만족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성대와 입은 완전히 회복되었기에 말을 할 수 있었다.
“좋군,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내가 움직이기에 그리 부족하지는 않은 몸이군. 게다가 저렇게 많은 이텔샤드들이라니. 클클클클.”
이텔샤드란 펠그림이 에테르기움을 부르는 말이었다.
“순도 높은 이텔샤드가 이 정도나 있으니 나의 탁해진 에너지를 정화할 수 있겠군. 그럼 차원이동의 부담이 그만큼 줄어들 테니 더욱 자유롭게 다른 차원으로 이동할 수 있을 테고. 그렇게 되면 펠그림의 복음을 더 많은 차원에 전달할 수 있을 테지. 크하하하하…… 하?”
미친 듯이 웃던 렉토-헬리온-쿠브린은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슴 어림에서 기이한 울림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문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한 기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신에서 조금씩 빛이 나고 있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이 움직이고 광소하고 의아함을 느낄 때에도, 몸을 치료하라는 의지는 계속해서 작동하고 있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이 의아함을 느끼고 가슴 부분을 보았을 때, 문신에서 희미한 빛이 나올 때, 그때는 루인의 몸이 거의 완벽하게 회복되었을 때였다.
그리고 의지는 결국 루인의 몸을 완전히 회복시켰다.
그 순간.
빛이, 폭발했다.
미약하게 흘러나오던 빛이 갑자기 엄청난 기세로 내뿜어졌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고 특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 힘은 물질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에는 매우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정신기생체인 렉토-헬리온-쿠브린에게는 지금의 빛이 그 어떠한 것보다 위협적이었다.
“키에에에엑!”
렉토-헬리온-쿠브린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문신에서 피어오른 빛이 에너지로 이루어진 정신기생체 렉토-헬리온-쿠브린을 조금씩 녹여 가기 시작했다.
그 피해는 분명 지극히 위력적이었지만, 녹아내리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피한다면, 그래서 빛을 피할 수만 있다면 치명적인 타격을 피할 수는 있었다.
문제는 이곳에 있는 것이 루인뿐이란 점이었다.
생물은 루인 말고도 존재했다. 수많은 작은 벌레들이 주변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펠그림이 기생하기 위해서는 그 생물이 일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현재 이곳에서 렉토-헬리온-쿠브린이 기생할 수 있는 생명체는 루인뿐이었다.
게다가 빛이 나오는 곳이 바로 루인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이었다. 루인의 정신에 기생한 렉토-헬리온-쿠브린으로서는 그 빛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빛은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렉토-헬리온-쿠브린을 녹여 갔다. 그 고통은 매우 엄청났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그 지독한 고통을 무려 하루 동안이나 겪어야 했다.
“어째서 이 차원에 테사르의 륜이 존재한단 말인가?”
이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수많은 차원에 절망을 뿌렸던 펠그림의 가장 강력한 오라클은 소멸되었다.

* * *

루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완전히 먹혀 버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몸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고맙게도 몸은 완전히 회복된 상태였다.
루인은 렉토-헬리온-쿠브린에게 정신이 먹혔을 때를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신의 존재가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루인은 머리를 흔들어 그때의 기억을 날려 버렸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생각날 것 같아서 일단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루인은 우선 주변을 살펴보았다.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빛을 뿜고 있는 무수한 에테르기움들이었다.
루인은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게 도대체 몇 등급짜리야?”
루인이 지금까지 본 그 어떠한 에테르기움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에테르기움만큼 밝은 빛을 내뿜지는 않았다.
사실 이 정도의 에테르기움은 제법 많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유용성 때문에 상당히 귀하게 취급되었다. 루인은 노예의 신분이었기에 그런 귀한 물건을 접해 보지 못한 것이다.
시선을 옮기던 루인의 눈에 거대한 석상이 들어왔다. 그 위치는 공동의 정중앙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치 공동이 석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루인은 이내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공동의 형태에는 아무런 규칙성이 없었다. 누가 보더라도 ‘자연적으로 우연히 형성되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형태였다.
공동이야 어쨌건 석상의 존재는 상당히 특이했다. 지하 수십 밀 아래에 공동이 존재하는 것도 이상하긴 했지만, 그건 수많은 우연이 겹친 결과로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석상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석상의 크기는 대략 6∼7밀 정도, 형태는 인간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는 기사가 바로 서 있는 모습이었는데 양손에는 롱 소드처럼 생긴 무기를 각각 들고 있었다.
루인에게 이런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비단 루인만 아니라 베이디안 대륙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나이트암(Knight Arm).
탑승형 골렘 병기로 마도공학 기술이 집대성된 현대전의 주력 병기.
그 가격이 눈 돌아갈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유지비 또한 엄청나지만, 그 위력은 결코 돈이 아깝지 않은 것이 바로 나이트암이었다.
일반 병사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도 나이트암을 상대할 수 없다. 굳이 무기를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일반 병사들이 몰려 있는 곳을 한번 신나게 달려 주면 된다. 밟혀 죽을 테니까.
실제로 나이트암의 조종 교육 중에는 일반 병사들을 상대하는 방법으로 걷기와 달리기가 존재했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것이 나이트암일 리는 없다. 나이트암은 방어를 위해 강철, 혹은 단단한 합금으로 만들어지지 돌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루인은 손으로 나이트암의 형상을 하고 있는 석상을 어루만졌다. 돌 특유의 차가우면서 오돌토돌한 감촉이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루인은 아쉬움이 깃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단순한 장식품인가?”
베이디안 대륙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내들이 그러하듯 루인 역시 나이트암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트암에 타기 위해서는 나이트(Knight:기사)의 경지에 올라야 하는데다, 노예라는 신분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에 아쉬움을 담아 중얼거린 것이었다.
더 이상 석상에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이곳을 나갈 방법을 찾아봐야 했다.
루인이 석상에서 몸을 돌리려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장식품이라는 말이냐!]
루인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소리쳤다.
“누, 누구냐!”
너무 놀랐기에 그 목소리가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 들려오고 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다.]
“나라니? 말장난하는 거냐? 썩 모습을 드러내라!”
루인은 말을 하는 자의 정체를 알기 위해 주변을 바쁘게 돌아보았다. 하지만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난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네 앞에 서 있지 않느냐?]
“내 앞이라니?”
루인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정면에는 목소리를 낼 만한 존재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나이트암의 형상을 한 석상뿐이었다.
“어디 있다는 거냐? 내 앞에는 석상뿐…… 서, 설마 석상이 말을 한 거냐? 장식품이 아니었단 말이냐?”
[누가 장식품이라는 거냐! 나는 최강의 타이탄이다!]
“타이탄? 타이탄이 뭐냐?”
루인의 질문에 목소리가 어이없다는 어투로 말했다.
[타이탄을 모르다니 정말 무식한 놈이군. 전장을 지배하는 최강의 병기, 타이탄을 어찌 모를 수 있느냐?]
“내가 아는 최강의 병기는 나이트암이다. 생김새는 네 모습과 제법 비슷하고. 하지만 타이탄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본다.”
[이럴 수가, 타이탄을 처음 들어 보다니. 게다가 나이트암이라니.]
목소리는 한동안 침묵하더니 다시 말을 걸었다.
[어이, 꼬마. 지금이 몇 년도냐?]
“한델력 2806년.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건데?”
목소리가 갑자기 광포한 태도로 소리쳤다.
[거짓말하지 마라! 한델력 2806년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냐? 케네르력을 잘못 말한 거 아니냐? 한델력 286년을 잘못 말한 것 아니냐?]
목소리의 성량은 매우 커져서 공동을 울릴 지경이었다. 루인은 목소리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살짝 움찔했지만 이내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어디 있나? 지금은 분명 한델력 2806년이다.”
목소리가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그 이후로 목소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