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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3화)
chapter 1. 혼혈 노예(3)


‘여긴 어디지? 난, 죽은 걸까?’
루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의문에 싸였다. 자신은 분명 갱도가 무너지면서 죽었을 터인데, 현재 살아서 생각이란 행위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죽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여기기에는 이야기로 듣던 켈서스나 셀레스트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켈서스와 셀레스트는 모두 인간이 죽은 뒤에 가게 된다는 곳으로, 죄를 지은 자는 켈서스로, 그리고 선행을 많이 한 자는 셀레스트로 가게 된다고 한다.
켈서스는 지독히 무섭고 절망스러운 장소이고, 셀레스트는 매우 아름답고 평화로운 장소라고 했다.
루인이 지금 있는 곳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새하얀 벽이었다. 그리고 새하얀 천장과 새하얀 바닥이 있었다.
온통 하얀색으로 칠해진 정육면체의 방 안이었다. 그 순백의 공간에 오직 루인만 존재할 뿐이었다.
방은 제법 컸다. 하지만 창문이나 문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루인은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루인은 누군가 있을 거라고 되뇌며 계속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갇혀 있다는 두려움에 잠식되어 버릴 것 같았다.
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본능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그렇게 필사적으로 주위를 살피느라 루인은 자신의 발밑을 보지 못했다.
순백의 백지 같던 바닥이 어느 순간 끈적거리는 액체로 변해 루인의 발을 휘감아 오르고 있었다.
꿀렁, 꿀렁.
루인이 이변을 눈치챈 것은 하얀 액체 같은 것이 루인의 무릎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으 으아! 이게 뭐야!”
루인은 놀라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액체는 잡고 있던 루인의 다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더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루인은 기겁하며 액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액체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꿀렁, 꿀렁.
액체는 어느덧 루인의 하체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루인은 팔을 버둥대며 비명을 질렀다.
“싫어. 제발 떨어져!”
루인이 그렇게 소리치는 순간, 루인은 액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기뻐할 수는 없었다. 벗어난 건 상체뿐이었다.
허리를 경계로 루인의 하체는 액체에 잡혀 있고 상체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허리를 잘라 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잘린 단면에서는 피 대신 빛의 가루 같은 것이 흩날렸다.
“히, 히익!”
자신의 몸이 둘로 나뉘었다는 것을 깨달은 루인은 놀라 신음을 내뱉었다. 너무 놀란 탓에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의식하지 못했다.
꿀렁, 꿀렁.
액체가 출렁이며 솟아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입이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입은 루인의 하체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하체를 삼키기 위해 솟아올랐던 액체가 갑자기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부풀어 오르고 터져 나가고 휘감기고 늘어났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출렁임을 정지했다.
액체는 사람의 형상을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은 루인의 모습과 일치했다. 다만 색은 여전히 하얀색이었다.
액체 루인의 입이 열렸다. 그 목소리는 루인과 완전히 동일했다.
“이거 귀찮은 꼬맹이군. 두 번이나 일을 하게 만들다니. 내게 얌전히 흡수되어라!”
액체 루인이 루인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둘의 거리는 손을 뻗는다고 닿을 거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액체 루인의 오른 손가락 다섯 개가 쭈욱 늘어났다.
그렇게 늘어난 손가락 다섯 개가 루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루인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다리는 없었지만 팔로 바닥을 짚으며 빠르게 움직였다.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하지만 늘어나는 손가락을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덥석!
손가락 하나에 루인의 왼팔이 걸렸다.
“히익. 떠, 떨어져!”
루인은 비명을 지르며 왼팔을 마구 휘저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에도 손가락은 떨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길이를 늘려 덩굴처럼 루인의 왼팔을 칭칭 감았다.
루인은 정신이 없었다. 액체 루인이 자신을 잡으려 하니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왼팔이 액체 루인에게 잡힌 상황이었다. 남은 오른팔만으로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도망치는 건 고사하고 끌려갈 상황이었다.
겁에 질린 루인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그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할 뿐이었다.
원래 이러한 행동은 지극히 좋지 못한 행동이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행동하다가는 피할 수 있는 위험까지 피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하지만 지금만은 루인의 이런 마구잡이 행동이 좋게 작용했다.
루인은 도망치고 있었다. 손가락에 잡힌 왼팔은 어느새 뜯어져 나가 있었다. 대신 액체에게 먹혔던 하체가 다시 달려 있었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기에 이러한 일이 가능했다.
루인은 그러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액체 루인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게다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못했기에, 벽에 문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루인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이 생겨 있었다. 루인은 문을 열었다. 문 바깥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이었다.
루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통과해 검은 공간으로 몸을 날렸다. 당장은 꾸물거리는 액체 촉수가 더욱 무서웠다.
검은 공간으로 들어온 후 루인은 문을 잠갔다. 그러고는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액체 루인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문을 두드리는 기색도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안전해진 것 같았다.
루인은 그제야 주위를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검은 공간은 더 이상 검지 않았다.
하얀 벽, 하얀 천정, 하얀 바닥.
문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얀색밖에 존재하지 않는 방 안이었다.

액체 루인은 루인이 닫은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문을 열고 뒤따라갈 수는 없었다. 루인이 문을 닫는 순간 문 자체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액체 루인은 벽을 향해 걸어갔다. 멈추지 않았다. 쿵 소리를 내며 튕겨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액체 루인의 몸이 벽에 닿는 순간, 마치 액체로 만들어진 것처럼 벽이 출렁거렸다.
액체 루인의 몸은 그대로 벽 속으로 들어갔다.

“허억!”
안심하고 있던 루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벽에 파문이 생기더니, 물속에서 사람이 떠오르는 것처럼 액체 루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루인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다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눈앞에 벽이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루인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대신 간절히 외쳤다.
“문, 제발 문!”
그 순간 원래 그렇게 존재했다는 듯 당연한 모습으로 벽에 문이 달려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루인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단지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문을 열었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만이 존재했다.
루인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안으로 몸을 날렸다.
“정말 신경 거슬리게 하는 꼬맹이군.”
액체 루인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이제는 문이 사라진 하얀 벽을 향해 걸어갔다.

루인과 액체 루인의 숨바꼭질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건 현실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일.
영원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최후의 승리는 액체 루인의 차지가 되었다.
루인이 문을 열고 들어갈 때마다 검은 공간은 하얀 방으로 바뀌어 갔다.
검은 공간은 무한하지 않았다. 모든 공간이 하얀 방으로 바뀌자 더 이상 문이 열리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액체 루인의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열 줄기의 촉수는 중간에서 갈라지며 수십 개로 늘어났다.
그렇게 갈라진 액체 줄기가 사방에서 날아왔기에 루인은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뻗어 나온 액체 줄기는 덩굴줄기처럼 루인의 전신을 칭칭 감아 버렸다. 루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액체 루인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루인에게 다가갔다.
제법 오랜 시간을 도망 다녔기 때문인지 루인은 더 이상 액체 루인에게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대신 궁금하다는 태도로 말을 걸었다.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나에게 무슨 짓을 할 셈이야?”
“궁금한 게 많은가 보구나. 하긴 궁금한 채로 죽으면 억울하긴 하겠지.”
액체 루인은 루인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후 손가락으로 루인의 뺨을 쓰다듬었다. 루인이 분노한 눈빛으로 액체 루인을 쏘아보았지만 액체 루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인심 쓴다는 어투로 루인에게 말했다.
“하등 생물 주제에 나에게서 이만큼이나 도망 다니다니, 정말 대단한 놈이구나. 그 점을 기특하게 생각하여 특별히 네 궁금증을 풀어 주도록 하마. 너무 많은 건 좀 그러니까 한 세 개 정도?”
“무슨 속셈이지?”
“속셈이라니? 그저 순수한 호의야. 마지막 선물이랄까? 후후.”
루인은 가만히 액체 루인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액체 루인이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간 끌 생각은 하지 마. 바로 먹어 버릴 테니까.”
루인은 살짝 몸을 떤 후 액체 루인에게 말했다.
“넌 뭐지?”
“내 이름은 렉토-헬리온-쿠브린. 펠그림의 가장 위대한 오라클이다.”
“펠그림이라고? 그게 뭐지?”
“두 번째 질문인가?”
루인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 아냐!”
아직 물어볼 것이 더 남아 있었다. 펠그림이 무엇인지도 궁금했지만 당장은 원래 생각했던 것을 더욱 알고 싶었다.
“두 번째 질문은 여기가 어디냐는 것이다.”
“이곳은 너의 정신세계. 즉, 너의 마음속이다. 정말 웃기는군, 자신의 정신세계를 나에게 물어보다니. 하등한 생물은 어쩔 수 없다니까. 너희 비천한 버러지들을 보면 너무 안쓰럽구나.”
루인은 렉토-헬리온-쿠브린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존재의 말을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굳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의 말이 맞다면 이곳은 정말 자신의 정신 속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거짓말이다! 나의 정신세계라면, 이곳의 주인은 나란 말 아니냐?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서 내가 너에게 당한단 말이냐!”
“킬킬킬. 멍청한 하등 생물인 네놈과 위대한 펠그림의 오라클인 나의 정신력이 비교가 될 것이라 생각하느냐?”
“그런…….”
“더 이상 궁금한 것은 없나? 그럼 이제…….”
“잠깐! 네, 네놈의 목적은 무엇이냐? 어째서 나의 정신세계로 들어온 것이냐?”
“내 목적은 이 차원에 펠그림의 복음을 전하는 것! 펠그림의 오라클인 나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리 있겠느냐? 정신 에너지체인 내 몸으로는 이 차원에 간섭할 수 없다. 간섭하기 위해서는 이 차원 생물의 몸이 필요하다. 나는 네놈의 몸을 차지하기 위해 네놈의 정신세계로 들어왔다.”
루인이 화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그 복음이란 게 무엇이기에 내 몸을 네 멋대로 하려는 거냐!”
“무엇이기는? 파괴와 절망과 비애의 복음인 게 당연하지 않느냐? 그러니 이제 얌전히 먹혀라.”
액체 루인이 입을 벌렸다. 그 입의 크기는 인간이 벌릴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고도 계속해서 벌어졌다.
꿀꺽.
액체 루인은 루인을 한입에 삼켰다.



chapter 2. 하르실리온(1)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공동이 존재했다. 그 모습에 인위적인 형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동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지하 100밀(미터) 아래에 자연적으로 이런 공동이 형성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공동의 중앙에는 인간의 형상을 띤 거대한 석상 같은 것이 존재하고 있기도 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임에도 공동은 제법 밝았다. 발광원은 공동의 벽에 빽빽이 들어찬 푸른색의 광물이었다.
그 푸른색의 광물은 모조리 에테르기움이었다. 게다가 내뿜는 빛이 밝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상등품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 이 공동에 들어와 에테르기움을 발견한다면 양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을 것이다. 상등품 에테르기움의 가격은 매우 비쌌고, 그런 에테르기움의 양이 이 정도라면 작은 영지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공동은 오랜 시간 밀폐되어 있었다. 이런 지하까지 찾아오는 방문자도 없었다. 그렇기에 만세 소리는 물론 어떠한 소란도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 밝게 존재해 왔다.
그런 정적의 공간에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왔다.
쿠르르르릉!
변화의 시작은 소리와 진동이었다.
쩌저저적.
진동이 끝나 갈 때쯤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갈라지는 소리는 외부가 아니라 공동 내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공동의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은 조금씩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공동의 천장 전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반경 2밀 정도의 일부분이 구멍 나듯 뚫렸고 그곳으로 흙과 바위, 그리고 유기체라 불러야 할 어떤 것이 떨어져 내렸다.
흙과 작은 바위들이 구멍을 통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그 기세는 제법 거세어 잘못하다간 구멍이 넓어지고 공동의 천장 전체가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흐름의 끝은 갑작스레 찾아왔다.
쿵!
울림과 함께 천장의 구멍에 거대한 바위가 들어찼다. 그 크기가 매우 커 천장의 구멍을 통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구멍을 막아 버리는 효과까지 일으켰다.
바위와 구멍의 틈새로 흙은 계속해서 흘러내렸지만, 그것도 작은 바위들이 그 틈새를 가리면서 조금씩 흐름이 줄더니 어느새 완전히 멈추어 버렸다.
다시 이전의 정적이 찾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매우 짧았다. 바닥에 쌓여 있는, 떨어져 내린 흙과 바위 더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