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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2화)
chapter 1. 혼혈 노예(2)
에테르기움 광산은 밤에도 일을 쉬지 않는다. 어차피 지하에서 하는 일이기에 밤과 낮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노예들은 이교대로 돌아가며 일을 했다.
교대를 마친 후 루인은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는 모든 노예들이 한데 모여 잠드는 곳으로 매우 비좁고 더러웠다. 하지만 노예들은 잘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했다.
그건 루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테르기움을 캐는 일은 매우 힘든 육체적 노동이다. 당연히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루인의 온몸은 땀으로 질척했다.
루인은 씻고 싶었지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숙소에 있는 물이라고는 마실 물뿐이었다. 물론 그 물도 흙탕물이었지만 심한 갈증은 그러한 사실을 잊게 해 준다. 그 흙탕물의 양도 매우 적었기에 씻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200밀(미터) 정도 나가면 냇가가 있다. 하지만 노예인 루인은 그 냇가에 갈 수 없다. 노예가 숙소와 광산을 벗어날 경우 도주로 간주하여 무조건 죽여 버리기 때문이다.
루인은 질척이고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숙소로 걸어갔다.
숙소의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혹하는 것마냥 끈적이는 목소리였다.
“루인, 이제 왔니?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다고.”
루인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무표정하게 바꾸고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인이다.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하고 있고 옷은 노출이 매우 심하다. 앞섶이 너무 심하게 파여 풍만한 가슴이 밖으로 나와 버리기 직전이다.
“헬레나 님, 무슨 일이십니까?”
루인은 목소리는 무감각했다.
지독한 피로는 성욕마저 앗아 간다. 그리고 굳이 피곤하지 않다고 해도 루인이 헬레나라는 여인을 보며 특별한 욕구를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헬레나의 눈빛은 과거 루인이 성노로 팔렸을 때, 루인을 바라보던 귀부인들의 눈빛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
루인의 냉정한 반응에 헬레나는 입술을 삐쭉이더니 짐짓 눈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잉, 헬레나 님이라니. 그렇게 딱딱하게 부르지 말고 그냥 헬레나라고 부르라니까.”
헬레나는 은근슬쩍 루인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그러고는 루인의 팔을 자신의 가슴으로 자극했다.
헬레나의 가슴은 매우 컸고, 루인의 팔에 푹신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루인은 여전히 냉정한 태도로 헬레나에게 말했다.
“제가 어찌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헬레나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루인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귀엽기는. 그런데 아직 못 씻었지? 따라와, 내가 냇가로 데려다 줄게. 후우.”
말을 끝내며 헬레나는 루인의 귀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루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물적인 욕구가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귓가에 닿는 입김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헬레나는 루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루인이 힘을 준 채 서 있었기에 헬레나의 시도는 무효로 돌아갔다.
“왜 그러니? 같이 가자니까.”
“신경 써 주신 점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냥 자겠습니다.”
루인의 말이 끝나는 순간 헬레나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바뀌었다.
“네놈이 감히 내 말을 거부하겠다는 거냐?”
“죄송합니다, 그럼.”
루인은 헬레나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서둘러 숙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 루인을 향해 헬레나가 소리쳤다.
“당장 이리 와! 그렇지 않으면 네놈이 날 강제로 겁탈했다고 빌에게 말할 테니까!”
헬레나는 빌의 정부였다.
헬레나 역시 광산에 팔려 온 노예였다. 하지만 헬레나는 타고난 색기와 풍만한 몸매를 무기로 감독관인 빌을 유혹했고 정부가 될 수 있었다.
헬레나의 색기는 빌로 그치지 않았다. 광산을 지키는 기사나 병사는 물론 몸이 좋거나 얼굴이 괜찮은 노예가 보이면 자신의 몸으로 유혹했다.
빌이 루인을 유독 심하게 괴롭히는 것은 헬레나 때문이었다. 자신의 정부인 헬레나가 루인에게 관심을 가지자 질투를 느껴 루인을 심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는 루인이 헬레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기에 괴롭힘으로 끝났다.
감독관이라고 하나 빌이 루인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노예는 영주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사사로이 영주의 재산을 처리했다가는 빌도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인이 헬레나와 관계를 가졌다면 빌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루인의 목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주인의 허락 없이 노예는 결혼할 수 없고, 그건 성관계를 가지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노예는 오직 주인의 허락이 있을 때에만 아이를 가질 수 있었다.
성노예는 더욱 아름답게, 전투 노예는 더욱 용맹하게, 일꾼 노예는 더욱 힘 좋게.
우수한 노예로 품종 개량하려는 목적이었다.
주인의 명을 어긴 노예는 즉결 처벌된다.
헬레나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전에 몇 명의 노예가 헬레나와 관계를 가진 후 빌에게 살해당했다.
그럼에도 헬레나의 유혹은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남자들을 발아래에 놓고 조종하는 것을 즐겼다.
루인이 헬레나를 역겹게 여기는 이유였다.
루인은 헬레나의 앞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라 그럴듯해 보이는 사실이다. 빌은 루인을 죽이기를 원하고, 헬레나의 겁탈 증언은 빌에게 좋은 핑계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루인이 다가오자 헬레나는 언제 화냈냐는 듯 다시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루인의 팔을 잡아끌고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방향은 냇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 * *
다음 날.
루인은 언제나처럼 에테르기움을 캐서 날랐다. 그런 루인에게 빌이 다가와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네놈은 더 이상 이쪽 갱도에서 캘 필요 없다. 11번 갱도에서 캐라.”
루인의 눈이 놀라 커졌다.
“빌 간수님. 11번 갱도는 폐쇄된 것이…….”
퍽!
빌의 커다란 손이 루인의 머리를 후려쳤다. 루인은 그 충격으로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빌이 씩씩대며 루인에게 말했다.
“가라면 가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루인은 비틀거리며 일어난 후 빌에게 다시 말했다.
“11번 갱도는 무너질 위험이 너무 높아서 폐쇄된 곳 아닙니까? 그곳에 가라는 건 저보고 죽으라는 말이잖아요.”
“그러게 몸을 함부로 굴리지 말았어야지. 헬레나랑 자니까 좋더냐?”
루인이 억울함을 담아 소리쳤다.
“간수장님이 오해하신 겁니다. 헬레나 님과는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루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숲으로 들어간 헬레나는 스스로 옷을 벗고는 루인을 유혹했다. 헬레나는 자신의 가장 큰 가치가 몸이란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열심히 관리했다.
그 덕분인지 헬레나의 몸매는 이십 대 못지않은 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삼십 대의 요염함까지 함께 담겨 있었다.
멋모르는 사내라면 침을 흘리며 달려들 몸매였지만 루인은 역겨움만 느꼈다. 그 때문인지 루인의 물건은 헬레나의 유혹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헬레나는 결국 루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자리를 떴었다.
빌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알게 뭐야. 어차피 그 걸레 같은 년이 네놈의 상판떼기에 혼자 몸이 달아서 날뛴 거겠지. 나는 네놈의 그 잘나 빠진 상판떼기가 마음에 안 든단 말이다. 이 재수 없는 새끼야!”
빌은 소리치는 것으로 말을 끝내며 루인을 다시 한 번 걷어찼다.
퍽!
“끄윽.”
루인은 고통으로 신음을 흘리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빌은 비웃음을 띤 채 루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11번 갱도로 가라. 싫다면 당장 죽여 주마. 명령 불복종도 충분한 처형 사유가 되니까. 클클클.”
루인은 억울했지만 빌의 명령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루인은 몸을 일으킨 후 힘없이 11번 갱도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로 빌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걸레 년은 치워 버리고 새로운 년을 들여야겠어. 이번에 새로 들어온 년이 제법 괜찮던데. 크큭.”
간수인 빌에게 노예란 마음먹은 대로 다룰 수 있는 편리한 도구일 뿐이다.
* * *
11번 갱도가 폐쇄된 것은 일주일 전이다.
일주일 전, 11번 갱도의 한쪽 구역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때 죽은 노예의 숫자만 100명이 넘는다.
보통 이렇게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연쇄적으로 다른 곳도 무너진다.
11번 갱도가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그 이후로 사람의 출입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에테르기움을 캐지 않았기에 충격 받을 일도 없었고, 그래서 가까스로 버티는 것이었다.
이제 루인이 에테르기움을 캐기 시작하면 충격이 가해질 것이고, 어느 순간 갱도는 무너질 것이다.
그 시간이 언제일지는 모른다. 어쩌면 오늘은 무사히 넘길 수도 있다. 지금 에테르기움을 캐는 것은 루인 단 한 명이기에 그만큼 충격 역시 작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 무너진다는 것은 확실했다.
루인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코너에서 벽에 어깨를 살짝 부딪쳤는데, 그때 천장에서 흙이 우수수 떨어졌다. 갱도가 작게 떨리기도 했다. 그 이후로 루인의 발걸음은 매우 조심스러워졌다.
그렇다고 아예 천천히 움직일 수는 없었다. 갱도가 다르다고 해도 에테르기움 저장소는 한 곳이었고 결국 빌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루인이 갱도에서 나오는 시간이 늦어진다면 작업 태만을 핑계로 빌이 루인을 처벌할 수도 있었다.
루인은 최대한 조심하면서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갱도의 끝을 향해 이동했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에테르기움 광맥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에테르기움 광석은 푸른빛을 뿜어냈다. 돌 중간중간에 알알이 박혀 있었기에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푸른 별을 보는 것 같은 모습이다.
루인은 정과 망치로 에테르기움을 둘러싼 돌을 쪼갰다. 돌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며 에테르기움이 헐거워졌다.
루인은 조심스럽게 에테르기움을 캐낸 후 바구니에 담았다.
1시간 정도 같은 작업을 하자 바구니가 가득 찼다.
‘하나만 더 캐고 바깥으로 나가자.’
에테르기움을 적게 캐 갈 경우 빌이 트집을 잡았다. 그래서 루인은 항상 다른 노예들보다 많은 양의 에테르기움을 캐서 바깥으로 나갔다.
루인은 마지막 에테르기움을 캐기 위해 정을 내리찍었다.
쩡.
그 순간!
우르르르릉!
굉음이 울리며 갱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루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런 루인의 위로 천장이 내려앉았다.
루인의 현재 위치는 지하 수십 밀 아래다. 그곳에서 가해지는 흙의 압력은 인간이 버틸 만한 수준이 아니다.
루인은 그대로 엎어졌다. 바구니는 부서지고 그 속에 담긴 에테르기움들이 루인의 몸 위로 쏟아졌다.
인간의 몸은 상당히 연약하다. 흙더미의 압력으로 에테르기움들이 루인의 몸에 파고들었다.
루인은 지독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