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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탄 로드 1



타이탄 로드 1(1화)
프롤로그


‘아아아아아!’
렉토-헬리온-쿠브린은 정신적인 비명을 질러 댔다. 소멸에 대한 공포는 차원을 여행하는 강대한 펠그림도 버틸 수 없는 것이었다.
펠그림 종족은 우주에서 가장 강대한 종족들 중 하나였다. 그들은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지식을 습득했다.
생물이 차원을 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펠그림 종족은 차원여행이 가능했다. 그것은 그들이 평범한 생물이 아니라 정신기생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물의 정신에 기생한다. 그리하여 그 생물의 몸을 마치 자신의 몸인 것마냥 부린다. 펠그림 자체는 생물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에너지에 가까웠다.
물질이 아니기에 차원의 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이다.
펠그림이라고 해서 무한정 차원을 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차원의 벽을 넘을 때마다 이전 차원의 찌꺼기가 남게 된다. 그렇게 조금씩 펠그림이라는 에너지는 탁해져 간다.
에너지의 오염 정도가 너무 심하게 되면 더 이상 펠그림은 차원을 넘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하나의 차원에서 오랫동안 머물게 되면 결국 펠그림은 그 차원의 질서에 영향을 받게 된다.
영속적인 존재는 없다.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다.
차원의 질서에 편입된 펠그림은 나이를 먹고 늙어 사망하게 된다.
그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렉토-헬리온-쿠브린은 상당히 특이한 펠그림이라 할 수 있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펠그림들 중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살아온 펠그림이었다. 에너지가 탁해졌는데도 불구하고 차원이동을 시도했고 몇 번이나 성공했다. 소멸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그 어떤 펠그림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그 어떤 펠그림보다 많은 차원을 여행했다. 그런 만큼 렉토-헬리온-쿠브린이 축적한 지식 역시 많았다.
하지만 렉토-헬리온-쿠브린이 영원한 삶을 보장 받은 것은 아니었다. 무리한 차원이동은 결국 문제를 일으켰고 렉토-헬리온-쿠브린은 소멸할 지경에 놓이고 말았다.
‘이렇게 죽을 순 없다. 아직 가 보지 않은 곳이 많아. 살아남을 테다. 저 행성에는 에너지가 풍부한 곳이 있다. 그곳에서 에너지를 보충하면서 기생할 생물을 기다리자. 나는 아직 죽지 않을 테다!’
렉토-헬리온-쿠브린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푸른빛의 아름다운 행성을 향해 날아갔다.



chapter 1. 혼혈 노예(1)


에테르기움(Ethergium).
에테르기움은 푸른빛의 보석 같이 아름다운 광석이다. 하지만 이 광석의 중요성은 아름다움에 있지 않다.
이 광석은 마도공학에 빠져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요소다. 에테르기움에서 방사되는 에너지가 마도공학품의 동력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에테르기움은 보통 땅속 깊은 곳이나 산속에 존재한다. 학자들의 이야기로는 대지의 마나가 강하게 압축되어 에테르기움이 생성된 것이라 한다.
생성 원리야 어찌 됐건, 그 생성 위치 덕분에 에테르기움을 캐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지하 깊숙이 갱도를 파고 그 안에서 에테르기움을 캔 후 바깥으로 가지고 나와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에테르기움을 캐는 일에는 에테르기움을 원천으로 하는 마도공학품을 사용할 수 없다. 에테르기움 광맥의 강력한 에너지파가 마도공학품이 오작동을 일으키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일일이 수작업으로 에테르기움을 캘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에테르기움 광맥 근처에는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갱도는 10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만다.
에테르기움을 캐는 일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자원해서 일하겠다는 자는 거의 없다.
그래서 에테르기움 광산에서 일하는 자들 대부분은 노예다.
베이디안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수많은 노예들을 양산해 냈다. 공급이 늘어나면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필연. 하지만 값싼 노예들은 에테르기움 광산에서 꾸준히 소비되었고 덕분에 노예의 가격은 안정되었다.
노예의 희생으로 캐어진 에테르기움은 마도공학품이 작동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얻어진 편리에 만족해했다.
그렇기에 수많은 노예들의 죽음에도 에테르기움 광산은 활기차게 돌아갔다.

에테르기움 광석을 캐기 위해서는 땅속이나 산속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갱도.
갱도 입구에서 한 소년이 걸어 나온다. 다른 노예들과 다를 바 없는 허름한 옷에 얼굴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 있다. 하지만 그런 차림에도 소년의 외모는 특별했다.
오뚝한 코와 커다란 눈망울, 먼지로도 가릴 수 없는 고운 피부. 소년의 얼굴에서는 마치 빛이 나는 것만 같다.
너무나 아름답기에 특이한 외모.
이마에 찍혀 있는 두 개의 녹색 점이 소년의 기이한 아름다움을 설명해 준다.
소년은 인간과 코로나 족의 혼혈이었다.
코로나 족은 인간과 분명 다른 종족이었다. 이마에는 두 개의 점이 선명하게 찍혀 있고 귀의 모양은 인간과 완전히 달랐다.
코로나 족의 귀는 인간과 달리 마치 개의 귀처럼 삼각형 모양에 머리칼과 같은 색의 짧은 털로 덥혀 있었다.
하지만 그 부분만 제외하면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커다란 눈과 백옥 같은 피부는 인간들의 눈에 코로나 족을 매우 아름답게 인식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인간은 얼마든지 탐욕스러워질 수 있는 존재다. 힘없고 아름다운 코로나 족은 인간들의 비틀린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에게 잡힌 코로나 족은 성노예로 팔렸다. 그리고 인간과 코로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성노예로 팔렸다. 코로나와 인간의 혼혈은 코로나 족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동물의 귀 대신 인간과 동일한 귀가 달려 있기에 거부감도 없었다.
성노예로 팔리는 데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었다.
소년의 이름은 루인.
루인 역시 처음에는 성노예로 팔려 나갔다.
윤기 흐르는 녹색 머리칼과 붉은 보석같이 빛나는 눈동자.
루인은 코로나 혼혈은 물론, 순수 코로나 족보다 더욱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매우 비싼 값을 받고 팔렸다.
하지만 밝은 곳에서 아름답게 빛나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는 지독하게 섬뜩한 느낌을 자아냈다.
루인에게 밤 시중을 시키려던 귀부인은 루인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절하고 말았다.
루인은 다음 날 즉시 노예상에게 반품되었다.
루인의 외모 자체는 워낙 아름다웠기에 그 후로도 수없이 팔려 나갔다. 하지만 매번 다음 날 반품되어 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팔리지 않았다. 루인의 붉은 눈에 대한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노예상인에게 노예란 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인은 더 이상 돈이 되지 않았다.
팔리지 않으니 계속 데리고 있어 봤자 유지비만 나간다. 결국 노예상인은 루인을 헐값에 광산에 팔아 버렸다.
그렇게 해서 루인은 에테르기움 광산에 오게 되었다.
루인은 등에 바구니를 짊어진 채 걸었다. 바구니 안에는 푸른빛을 발하는 에테르기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에테르기움의 밀도는 제법 높은 편이었다. 루인의 바구니에 담긴 에테르기움은 상당히 많은 양이었기에 루인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루인의 옆으로 두 명 정도의 노예가 지나갔다. 그들의 바구니에 담긴 에테르기움은 루인의 바구니에 담긴 양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들은 바구니에 든 에테르기움을 저장소에 붓고는 다시 갱도로 돌아갔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루인 역시 에테르기움 저장소에 도착했다. 이곳에 에테르기움을 붓고 다시 갱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으로 들어가는 동안은 편하게 갈 수 있기에 홀가분함을 느껴야 정상이다. 하지만 루인의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그 불안의 원인은 저장소 한 켠에 서 있는 30대 정도의 장한이었다. 장한은 손에는 채찍을 들고 각진 얼굴은 잔뜩 찌푸린 채 루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장한은 이 에테르기움 광산의 간수로 이름은 빌이었다.
빌은 채찍을 이용해 노예들을 통제했다. 조금이라도 느린 걸음으로 움직이면 사정없이 채찍을 날렸다.
와르르.
루인이 에테르기움을 붓는 순간 빌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채찍을 휘둘렀다.
짝!
“이 버러지 같은 새끼야! 기어 다녀? 똑바로 하지 못해!”
루인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그러지 않겠습니다.”
“이 새끼가 어디서 말대답이야!”
빌은 소리치며 루인의 배를 그대로 걷어찼다. 이런 일에 제법 경험이 많은 건지 빌의 발길질은 상당히 능숙했다. 발끝이 정확하게 루인의 명치를 가격했다.
퍽!
루인은 아직 어린 소년이다. 나이는 17세이지만 코로나 족의 혼혈이기에 외모는 10대 초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제 몸도 17세가 아니라 10대 초반의 몸이다. 그런 몸으로 어른의 발길질을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게다가 맞은 곳이 하필 급소다.
“크윽.”
루인은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빌은 루인의 얼굴을 향해 침을 찍 뱉었다.
“재수 없는 새끼. 당장 안 일어나!”
짝, 짝, 짝, 짝, 짝…….
욕설과 함께 시작되는 채찍질. 루인은 몸을 잔뜩 웅크려 급소만 보호한 채 빌의 채찍을 맞았다.
빌의 말대로 몸을 일으켰다가는 당장 발길질이 날아온다. 그러고는 다시 채찍질을 할 것이다. 이미 수없이 당한 일이기에 루인은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빌의 채찍질이 끝난다. 빌이 지쳤기 때문이다. 빌의 입에서는 거친 숨이 흘러나온다.
루인은 그제서야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때리는 빌이 지칠 정도의 채찍질이었는데 맞은 루인이 멀쩡할 리 없다. 루인의 전신은 채찍질의 흔적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지만 피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만큼 빌의 채찍질이 숙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숙련된 만큼 루인이 느끼는 고통도 컸다.
루인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모든 걸 잊고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여기서 신음 소리를 내면 엄살을 부린다고 빌이 다시 채찍질을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맞지 않기 위해서는 빌이 지친 지금 재빨리 갱도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빌은 자기 목숨을 철저히 생각하기에 위험한 갱도 안으로는 절대 따라 들어오지 않는다.
루인은 상처투성이의 몸을 추슬러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갱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갱도 안이라고 해서 쉴 수는 없다. 빌은 없지만 더욱 열심히 움직여야 한다. 갱도 안을 오가는 노예들은 모두 빌의 눈이기 때문이다.
빌은 갱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노예들을 통제할 수 없다. 노예들이 갱도 안에서 논다고 해도 빌이 파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은 멍청하지 않았다. 자신이 갱도로 들어가지 않고도 갱도 안의 노예를 통제하기 위해 신고 제도란 것을 만들어 운용했다.
만약 노는 자나 열심히 하지 않는 자를 발견해 신고하면 그만큼 보상을 베풀었다. 그 보상이란 바로 고기.
묽은 죽으로 연명하는 노예들에게 고기라는 존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루인은 고기를 갈망하는 노예들의 눈빛을 경계하며 갱도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