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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오브 베스트 1권(10화)
4. 첫사랑, 그리고 이별(4)


마음이 힘든 때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찾아오던 산, 이렇게 산에 오르면 무언가 힘을 얻는 듯하여 지칠 때마다 찾게 된 산이기에 지후는 오늘도 산을 찾은 것이다. 은정의 어머니가 다녀간 뒤 치미는 울분에 돈을 많이 벌겠다는 다짐을 하기는 하였지만 어떻게 해야 돈을 많이 벌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돈을 벌지? 어떻게 해야 많이 벌 수 있을까? 군대도 갔다 와야 할 텐데…….’
지후는 저 멀리 한강이 보이는 산 중턱에 있는 바위에 홀로 앉아 어떻게 돈을 벌 것인지 앞날에 대하여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졸업한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배운 것이 전부인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 정도 학력으로는 마땅히 돈 잘 버는 직업이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막노동뿐이었다.
하지만 얘기를 듣기로는 그건 나이 들어 골병든다는 말이 많았기에 지후는 금방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몇 시간을 그렇게 바위에 걸터앉아 고민을 해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없어 지후는 막막하기만 하였다.
이제 겨우 한국 나이로 스무 살, 만으로는 19세인 지후가 사회 경험을 해 봐야 얼마나 해 보았으며, 인맥을 쌓아도 얼마나 쌓았겠는가?
경험이라고는 아버지 병 수발을 위해 3년 남짓 한 아르바이트뿐인데, 솔직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쌓을 인맥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렇기에 현재 지후에게는 아무런 비전이 없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은정이는 앞으로 연예인이 되려고 하는데, 만약 그런 은정이 애인이 있다고 하면 그 아이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지후 총각이 나라면 지금 어떤 판단을 하겠어?”

지후는 자신의 앞날에 대하여 생각을 하다 문득 조금 전 은정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자신도 은정과 사귀면서 그녀에게 꿈에 대하여 많이 들었다.

“내 꿈은 김이선이나 김세희 같은 톱스타가 될 거야! 그래서 우리 지후 내가 호강시켜 줄게!”

언제나 뒷말에 자신을 호강시켜 주겠다 덧붙이기는 하였지만 은정은 자신의 꿈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과 목표 의식이 있었다.
그에 반해 현재 자신은 그런 것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참 병신같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불과 1년 차이밖에 나지 않는 은정은 그렇게 자신의 꿈에 대하여 확고한 생각이 있는데, 자신은 그저 살기 위해 사는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내 꿈은 뭐였지?’
지후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떠오르는 꿈이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의 암 선고에 지후는 아버지 약값을 조금이나마 보태어 고생하는 새엄마를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기에 꿈을 꿀 시간이 없었다.
더욱이 새엄마는 아버지 병 수발을 드는 것이 힘이 들었는지 금방 아버지와 이혼을 해 버렸다.
그 뒤로 지후의 삶은 더욱 치열해져 새벽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이어 하느라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을 했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남겨진 것은 고아라는 타이틀과 고졸 학력뿐이다.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 지후는 그제야 자신이 은정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은정이 자신과 사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잘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40평대의 단독주택을 가진 부모님이 계시고,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며, 누구나 미인이라고 인정할 만한 외모에 아르바이트라고 하지만 방송에도 나간 사람이었다.
듣기로는 이미 몇몇 연예기획사에서 계약을 하자는 제의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런 은정이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자신과 연인 사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정말로 구만리 같은 은정의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되는 일이었다.
‘그래, 지금은 포기하자! 누나를 위해서라도, 누나를 놔주는 것이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야!’
지후는 아까 집에서 나오기 전까지만 하여도 들끓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산에 올라 홀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이제야 모든 것을 깨닫고 내려놓았다.
‘아마 나는 누나의 다정한 모습에서 날 감싸고 보듬어 줄 엄마를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걸 내려놓으니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러자 지후의 몸에서 작은 변화가 생겼다.
언제 생겼는지 알지 못하는 기운이지만 지후의 아랫배, 즉 단학에서 단전이라고 말하는 곳에 따뜻하고 묵직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빠르게 회전을 하며 전신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은정과 첫 경험을 했을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대주천이었는데 지금은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아아!”
따스한 기운이 전신을 휘돌자 지후는 작은 감탄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환희였고, 기쁨이었다.
작은 깨달음으로 꿈에서만 행하던 것을 현실에서도 할 수 있게 된 지후였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하나를 내려놓으니 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

그 일이 있고 은정은 지후를 만나 이야기를 하려고 하였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무엇 때문인지 자신을 피하는 느낌을 받은 은정은 지후가 자신을 피할수록 더욱 애가 달았다.
계속해서 자신을 피하려고만 하는 지후와 오늘은 결판을 짓기로 작정을 한 은정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용기를 내기 위해 술을 잔뜩 마시고 지후가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있을 시간에 맞춰 지후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야기 좀 해!”
“누나, 늦었어! 아침에 하자!”
“아니, 지금 해! 너 내일이면 또 없을 거 아냐!”
언제나 이랬다.
자신의 엄마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마치 사귀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마냥 지후의 태도가 데면데면해진 것이다.
자신을 봐도 웃어 주지 않고 언제나 담담하게 이야기할 뿐이었다.
“휴, 그럼 잠깐만이다.”
지후가 문을 열기 무섭게 은정은 지후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 은정이 자신을 지나칠 때 확 풍겨 오는 술 냄새로 인해 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개인적으로 지후는 이렇게 술에 취해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객들에게 행패를 많이 당해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것이 싫었다.
“여기 냉수, 술이나 좀 깨고 이야기해!”
지후의 싸늘한 말에 은정은 용기를 내기 위해 마셨던 술이 확 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지후에 대한 원망이 조금 피어올라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넌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그래?”
“난 술 취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정말로 싫을 뿐이야!”
지금도 자신을 향해 담담하게 말하는 지후가 원망스러웠지만 은정은 지후가 내민 컵을 받아 들어 냉수를 들이켰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은정은 본격적으로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요 근래 날 왜 피해 다닌 거야?”
“그런 적 없어!”
지후는 담담하게 대답하였으나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다.
현재 자신이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는 사람인데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미웠다.
“아니야! 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 내 눈을 보고 말해 봐! 날 사랑해?”
“아니!”
지후는 은정의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아니라는 대답을 하였다.
너무도 냉정한 지후의 말에 은정은 충격을 먹은 듯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하였다.
“그럼 그동안 날 사랑하기는 한 거야?”
지후는 바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봤기에 차마 이것마저 부정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대답을 하면 정말로 은정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표정이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후∼ 미안!”
“뭐가 미안한데. 응! 뭐가 미안한 건데?”
은정은 지후의 미안하다는 말에 불안해져 쏘아붙였다.
“누나를 정말로 사랑했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은 아니야, 라는 말을 할 때 지후는 억지로 이를 악물며 다짐을 하듯 힘들게 대답을 하였다.
이미 눈물이 앞을 가리고 슬픔에 정신이 아득해진 은정은 지후의 말뜻을 단번에 받아들이지 못했다.
멍하니 정면만 응시하던 은정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차린 은정은 눈물을 닦고 지후에게 말을 하였다.
“그럼 지금 날 안아 줘!”
“누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정말로 마지막으로 안아 줘! 그럼 널 잊을게!”
은정은 무슨 생각인지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 달라고 말을 하였다.
두 사람은 지후가 졸업을 하던 날 엉겁결에 첫 경험을 치르고 연인이 된 뒤로도 몇 번 관계를 했다.
그러다 은정의 어머니와 지후가 만난 날 이후 두 사람의 사이가 소원해졌는데, 이렇게 관계가 결말에 치닫자 은정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안아 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그런 은정의 부탁에 지후는 거절을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은정도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엄마가 험한 소리를 했기에 지후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자신과 헤어지려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엄마로부터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들었기 때문이었다.
옷이 하나씩 벗겨지고 두 사람은 태초의 모습이 되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나신이었지만 두 사람의 눈에는 전혀 욕념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후는 경건한 마음으로 첫사랑과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은정의 벗은 몸을 자극하였다.
처음에는 꼿꼿하게 있던 은정도 지후의 리드에 따라 점점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격정적으로 변하였다.
이게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는지 평소보다 더 정열적으로 지후를 맞이하였다.
그렇게 지후와 은정은 밤새 육체를 불태웠다.
오늘이 마지막이기에 두 사람의 몸부림은 더욱 안타깝고 애달프면서고 격정적이었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운다고, 끝나지 않는 파티가 없듯 두 사람의 마지막 파티는 끝났다.
지후의 새벽 아르바이트 나가는 시간을 알리는 자명종이 울리고 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
간단한 인사말을 남기고 은정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고, 지후의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났다.


5. 호스트(1)


지후는 그날 이후 집을 강남에 있는 원룸으로 옮겼다.
지난겨울 강간범을 잡아 받은 현상금이 있어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강남에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보증금 1,500만 원에 월 50만 원이 적은 금액은 아니지만 그래도 강남에서 깨끗한 집을 얻고, 무엇보다 교통비가 들지 않을 만큼 일하는 편의점과 가까워 좋았다.
비록 새벽에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려면 교통편을 이용해야 하지만 다행히 그동안 지후가 착실하게 일을 해서 그런지 보급소 소장님이 배달할 때 사용하던 스쿠터를 타고 다녀도 상관없다는 말을 하여 기름 값 정도만 들이면 되기에 새로운 각오로 일을 하기 위해 깨끗하게 자신이 살던 동네를 떠난 것이다.
헤어진 마당에 한 동네에 살게 되면 서로 불편할 것 같아 내린 결정이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지후는 피크 타임이 지나 조금은 한가해질 시간에 상식이라도 얻기 위해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보고 있었다.
딸랑! 딸랑!
손님이 온 것을 알기 위해 편의점 문에 달아 놓은 방울이 누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렸다.
얼른 보고 있던 책에서 고개를 든 지후는 손님을 향해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였다.
“어서 오십시오. GX25시입니다.”
지후의 인사에도 손님은 자신의 볼일을 보기 위해 편의점을 돌아 쇼핑을 하고 계산대에 상품을 올렸다.
고급 정장을 입은 멋쟁이였는데, 그 사람이 구입한 물건은 여성용품이라 지후는 의아한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았다.
지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남자는 피식 웃음을 짓더니 말을 하였다.
“손님이 찾아서.”
무척이나 시크한 말이었지만 지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갔다.
고급 정장을 입었는데, 아마도 인근 술집의 직원인 듯하였다.
지후가 근무하는 편의점 근처에는 오피스텔이나 사무실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곳도 무척이나 흔하였는데, 그중에는 여자들을 상대하는 가게들도 꽤 되었다.
아마도 그곳의 직원인 듯 남자는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여성용품을 구입하는 것이다.
“5천 원입니다.”
지후는 물건을 바코드스캐너에 찍고 가격을 말하였다.
그런데 그 남자는 돈을 낼 생각을 하지 않고 갸웃거리다 지후를 쳐다보고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말을 걸었다.
“너 혹시 지후 아니냐? 이지후인가? 김지후인가?”
지후는 갑자기 손님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제가 지후는 맞는데……. 누구신데 절 알고 계십니까?”
자신의 질문에 지후가 맞다는 말을 하자 그 손님은 웃으며 말을 하였다.
“너 나 기억 못하겠냐? 쌀가게 집 큰아들!”
지후는 그제야 어렴풋이 눈앞의 손님이 누구인지 생각이 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