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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오브 베스트 1권(8화)
4. 첫사랑, 그리고 이별(2)
하는 수 없이 상황을 깨달은 은정이 무슨 말을 하든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하였지만 방금 깨어난 누나의 얼굴을 바로 바라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누나가 깨우길 기다렸는데, 일어난 은정의 행동이 이상했다.
무언가 서두르듯 옷을 걸치고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기에 지후는 눈을 떠 누나를 마주하면 그녀나 자신이나 민망할 것이기에 이 순간만 모면하기로 하고 계속 잠든 척을 한 것이다.
그런데 잠든 척을 하는 것도 한순간 위기가 있었다.
은정이 정리를 다 하고 알몸인 지후에게 다가와 키스를 한 뒤 던진 말 때문이었다.
‘난! 네 거야!’라는 말에 조금 움찔하였지만 은정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급히 서두르느라 은정은 지후의 반응을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이다.
지후는 은정이 방을 나가고 자신의 몸이 변한 것을 느꼈다.
이 느낌은 남천상을 처음 만나 옥룡신공을 익힌 다음 날 그 느낌과 비슷하였지만 그때보다 더욱 강렬하였다.
그때 조금 전의 일에 대해 계속 생각에 잠긴 지후를 방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르릉! 때르릉! 일어나라! 일어나라!
지후의 새벽잠을 깨우는 알람 소리였다.
지후와 은정이 밤늦게 술을 마시고 즉흥적으로 섹스를 하고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벌써 지후의 일과가 시작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지후는 일단 잡념을 털어 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보급소로 향하였다.
***
남자와 여자가 하룻밤을 함께 보내면 없던 관심도 생기는 것인지 지후와 은정의 사이는 그날 이후 조금씩 변했다.
은정은 지후를 볼 때면 이전보다 더 살갑게 다가왔다.
아직 지후가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은정은 자신의 나이가 많은 것이나 먼저 들이댄 것이 부끄러워 대놓고 표현은 못했다.
은정이 소극적일수록 지후는 자신이 그날 깨어 있었다는 것을 알면 그녀가 부끄러워 말도 못할 것이기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뿐이다.
대신 지후는 은정과 있을 때면 그녀가 바라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렇게 둘은 좋은 누나 동생이 아닌 다정한 연인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후와 은정이 연인으로 변해 갈 때 이런 둘의 변화를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은정의 엄마였다.
배우 지망생인 대학생임에도 자신을 꾸미는 것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딸이 자신을 치장하는 것에 유독 공을 들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때만 하여도 지난겨울에 방송에 출연도 하고 하여 그런가 보다 하였다.
하지만 그제 자신의 두 눈으로 그것이 아님을 목격하게 되었다.
물론 대학생이니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잘 보이기 위해 꾸밀 수 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고아라면 이야기가 다른 것이다.
***
“아니, 똘이 엄마! 가까운 시장 놔두고 뭐하러 여기까지 오자고 한 거야?”
현숙은 동네에도 가까운 곳에 시장이 있어서 불편함 없이 생활을 했는데, 이 먼 곳까지 온 것이 불만이라 자신을 이곳까지 데려온 똘이 엄마를 타박하였다.
“형님! 여기 물건이 거기보다 훨씬 좋아요. 봐요!”
똘이 엄마가 찬거리로 들이미는 생선을 보며 현숙도 물건이 좋다는 것은 인정을 하였다.
“뭐, 좋긴 한데, 너무 멀잖아!”
“형님도, 멀면 얼마나 멀다고 그래요. 바로 옆이고만!”
너무 멀다고 엄살을 피우기는 해도 똘이 엄마 덕분에 좋은 물건을 사게 된 게 기분 좋은 현숙은 수다를 떨며 주변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현숙의 눈에 이상한 것이 띄었다.
분명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자신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호호, 지후야! 이렇게 둘이 장을 보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가 신혼부부로 보이겠지?”
젊은 남녀가 옆을 지나가는데, 남자는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지후고, 그 옆에 팔짱을 끼고 달라붙어 있는 여자는 분명 자신의 딸이었다.
현숙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자신이 아침에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에 좀 함께 가자고 했을 때 은정은 분명 친구들과 연습이 있다고 거절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지보다 어린 지후와 그것도 팔짱을 끼고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옆을 지나가면서도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지 지 엄마도 분간 못하고 걸어가는 것을 보자 분통이 터졌다.
‘내, 저것을 그냥! 어디 두고 보자!’
현숙은 그렇게 자신의 딸과 지후가 딱 붙어 걸어가는 것을 속으론 칼을 갈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현숙의 마음도 모르고 옆에 있던 똘이 엄마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어머, 형님! 요즘 젊은것들은 부끄러운 것도 모른다니까요. 저 봐봐, 여자가 여시같이 남자에게 딱 달라붙어서는 말이야!”
똘이 엄마는 자신이 흉보고 있는 여자가 현숙의 딸인 은정인지 알아보지 못하고 지후와 딱 붙어 있는 모습이 눈꼴 시린지 계속해서 험담을 하였다.
그런 똘이 엄마의 험담이 듣기 거북했던 현숙은 얼른 한마디 하였다.
“지들이 좋다는데 남들이 뭐라 한다고 듣겠어! 어서 장이나 보고 가자고.”
더 이상 똘이 엄마의 험담을 듣고 있다가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아 현숙은 얼른 말을 끊고 장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
그 일이 있은 후 현숙은 자신의 딸 은정을 감시하게 되었다.
지후를 지켜보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아 대신 은정의 행동을 주시하게 된 것이다.
며칠 안 가 현숙은 딸과 지후의 관계가 예상보다 깊어 보이자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은정이 늦은 시간 바람 좀 쐬고 온다거나 뭘 사 온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때마다 뒤를 따르면 어김없이 은정은 지후가 세 살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길 바라지만, 한두 번 목격한 것이 아니기에 현숙은 혹시나 둘이 사고라도 쳤을까 그것이 걱정이었다.
여자 팔자라는 것이 뒤웅박 팔자라고 남편을 잘 만나야 고생하지 않고 행복한 것이다.
그런데 고아에 돈도 없이 남의 집에 세를 살고 있는 남자와 엮인다면 결코 그 삶이 행복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현숙은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을 떼어 놓을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현숙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이지만 그래도 진상을 듣기 위해 딸에게 물어보기로 하였다.
“은정아! 엄마가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들어간다.”
딸의 방에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간 현숙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하고 있던 딸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에 은정은 얼른 말을 하였다.
“뭔데? 할 말이 뭐야?”
“응, 다른 것이 아니라! 너 요즘 누구 사귀는 사람 있니?”
현숙은 혹시나 딸의 입에서 지후의 이름이 나올까? 걱정을 하며 물었다.
“응. 있긴 있어. 내가 얼마나 인기가 좋은데!”
은정은 엄마가 무엇 때문에 누구와 사귀는가를 묻는지 모르기에 그냥 있다고 말을 하였다.
“너…… 아니다.”
현숙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그런 자신에게 딸이 반발을 할까 봐 말을 하지 못하였다.
“뭐야! 말을 하다 말고. 궁금하게. 뭔데 그래?”
엄마가 이야기를 하다 마니 오히려 궁금해진 은정이 물었다.
“뭔데 그러냐고? 말해 봐!”
딸의 물음에 현숙은 한숨을 쉬다가 말을 하였다.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너 지후랑 어떤 사이냐?”
은정은 예상치 못한 엄마의 물음에 당황하였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지후하고 무슨 사이냐니?”
“엄마도 다 확인해 보고 하는 얘기야! 사실대로 털어놔 봐!”
현숙은 당황하는 은정의 모습에서 둘 사이에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고 윽박지르듯 딸을 몰아붙였다.
그런 엄마의 태도에 은정은 망설이다 이야기를 하였다.
“사실 나 지후 좋아해! 아니, 사랑해!”
은정의 사랑한다는 말에 현숙은 눈앞이 깜깜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이것이……. 안 돼!”
“왜 안 돼?”
반사적으로 반대하는 말을 꺼냈던 현숙은 은정의 반문에 머뭇거리다 보편적으로 자주 언급되는 현실에 대해 늘어놓았다.
“넌 지후의 형편을 알고 말하는 거야? 지후 걔가 내세울 만한 학벌이 있니? 아니면 기댈 가족이나 재산이 있니?”
얘기를 하다 보니 더욱 확신이 들어 현숙은 어떻게든 은정과 지후를 떼어 놓아야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엄마는 사람이 어쩜…….”
“뭐! 내 딸 인생이 달린 일이니 그러는 것 아니야!”
“엄마 딸 인생? 엄마는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어? 모든 것을 돈, 학벌만 따지는…….”
“아니 이것이! 내가 나 좋자고 그런 말 하는 거니!”
“날 위해서라는 말 하지 마! 내가 좋다는데! 엄마 좋자고 반대하는 거밖에 더 돼?”
“넌 엄마 맘을 그렇게 모르겠어? 현실적으로 보란 말이야! 네 사랑이 얼마나 갈 것 같아?”
“엄마는 그게 딸에게 할 말이야? 지후가 얼마나 착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그런데…….”
너무 흥분한 은정은 자신의 사랑에 제동을 거는 엄마의 말이 답답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
그런 딸을 보며 현숙도 마음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린 딸을 지후가 어떻게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기회에 단단히 주의를 줘 두 사람을 떼어 놓지 않으면 염려하던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너희는 아직 어려서 현실을 모르고 이상만 좇고 있는데, 삶이라는 게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그러니…….”
“듣기 싫어, 그만 나가 줘!”
“아니 이것이!”
“아, 몰라! 엄마랑 더 이상 하고 싶은 말 없으니 그만 해! 나 지후랑 헤어질 생각 없으니 그리 알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은정은 잠시 끊고 뜸을 들이다 말을 하였다.
“정말이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야! 만약 지후에게 뭐라고 하기만 해 봐!”
“너 지금 엄마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라는 말에 은정은 자신이 너무했나 싶어 대답을 망설였지만 지후가 자신을 떠날 것이 두려워 일부러 더 날을 세워 대꾸했다.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협박이 맞아!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난 다신 엄마 얼굴 안 볼 거야!”
은정의 말에 충격을 먹은 현숙은 멍한 표정으로 딸의 방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현숙은 한참을 그렇게 정신이 없는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저것한테는 내 말이 먹히지 않을 것 같으니 하는 수 없지!’
현숙은 이미 남자에게 마음이 쏠린 딸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이젠 하는 수 없이 지후에게 말을 해야만 될 것 같았다.
비록 자신의 딸을 어려운 상황에서 도와준 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딸의 인생은 인생인 것이다.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악역도 도맡아 할 생각이 있는 현숙은 사랑에 콩깍지가 씐 딸보단 그래도 세 들어 살고 있는 지후가 현실을 알고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이란 판단을 한 것이다.
***
한편 은정은 엄마가 저렇게 반대를 할 줄은 몰랐다.
지후가 현재는 저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금전적인 것만이 다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자신이 아직 어려 현실을 보지 못하는지도 모르지만 지후가 덜 버는 것은 자신이 벌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은정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하는 엄마가 야속할 뿐이었다.
한참 엄마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은정은 얼른 핸드폰을 꺼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지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후야!”
전화기 너머로 지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바쁜 듯하여 은정은 용건만 간단히 말을 하였다.
“바빠? 알았어, 그럼 간단하게 말할게! 절대로, 우리 엄마가 무슨 말을 해도 넌 흔들리면 안 된다. 알았지?”
은정은 지후가 바빠서 길게 통화하기 곤란하자 흔들리면 안 된다는 말을 거듭 강조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은정은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지후와 사귀면서 그의 마음이 한없이 순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은정은 혹시라도 엄마가 지후의 마음을 흔들까 걱정이었다.
어린 나이와 학력, 그리고 금전적 이유를 들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물러나라고 한다면 지후는 분명 그러겠다고 말을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은정은 정말로 그리 말할까 봐 걱정이 들었다.
‘지후와 헤어져서는 살고 싶지 않아!’
은정은 정말로 지후와 헤어져서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날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줬을 때의 그 안도감이나 그동안 사귀면서 느낀 그의 감수성같이 순수한 모습들을 하나씩 새로 접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지후가 얼마나 진국인지 깨달은 터라 그를 놓친다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란 생각에 은정은 정말로 헤어질 수 없었다.
은정은 무언가 결심을 하였는지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