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베스트 오브 베스트 1권(2화)
1. 아버지의 유품(2)
지후는 지금 안개 속을 거닐고 있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너무도 꿈이 사실적이라 그런지 현재 자신이 정말로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이상한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인지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느낌상 가위에 눌렸을 때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또 똑같지도 않았는데, 그것은 무섭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달콤한 향이 코끝을 유혹하며 발길을 자꾸만 잡아당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 지후는 자신도 이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발이 인도하는 곳으로 걸어갔다.
풍경이 모호한 곳임에도 지후는 전혀 이곳이 무섭지 않다고 생각을 하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지후는 이야기로만 들었던 무릉도원과 같은 곳에 나올 법한 그런 건물을 발견하였다.
“계세요? 누구 안 계세요?”
지후는 처음엔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 보다 아무 반응이 없자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 보았다.
이런 곳에 정자가 있는 것을 보면 분명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라 판단을 하고 불러 보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후의 주변으로 안개와 같은 것이 지나가고 정자에는 어떤 아저씨 한 분이 서 계셨다.
“인연자여, 어서 오거라!”
중국 무협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복장을 한 아주 잘생긴 아저씨가 자신을 보고 인연자라 부르며 어서 오라는 말을 하자 지후는 무엇에 홀린 것마냥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난 옥룡지존 남천상이라는 사람으로 오랫동안 그대를 기다려 왔다.”
“저를 말입니까?”
“그래! 그대는 나와 수백 년의 세월을 격하고 인연의 끈이 연결이 되어 이렇게 마주하게 되었다. 난…….”
자신을 옥룡지존이라 소개한 아저씨는 지후에게 자신과의 인연에 대하여 장시간 이야기를 하였고, 지후는 그 사람의 말이 정말이라고 믿으며 그의 말에 빨려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지후가 형원의 유품에서 발견한 고서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일로 현재 지후의 몸은 자신의 방에 잠들어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 그 옆에는 지후가 보려던 고서가 불이 붙은 것도 아닌데, 흰 연기를 내고 있었다.
그 연기에서는 지후가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맡았던 그 유혹적인 향이 배어 나오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후가 꿈을 꾸게 하는 작용을 하고 있던 것이다.
고서는 중국 명나라 때, 무림 고수이며 핍박받는 여성들의 보호자였던 옥룡지존의 무공서였다.
자신의 최후를 알게 된 옥룡지존은 그것을 심공편과 운용편으로 나눠 각각 자신을 따르던 여인들에게 주었는데, 세월이 지나 그중 심공편이 이렇게 지후의 손에 들어온 것이었다.
“너와 난 이미 하늘이 정한 인연을 가지고 있기에 앞으로 한 달 동안 이렇게 매일 네 꿈속에서 너에게 나의 무공을 가르칠 것이니 잘 배워 세상의 여인들을 두루 구원하기 바란다.”
***
일어나라! 일어나라! 아침이 밝았다. 땡땡땡땡!
요란한 알람 소리에 지후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껌껌한 어둠에 싸여 있어 주변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아주 신비로운 곳에서 자신을 제자라 부르는 남천상과 함께 있었는데,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을 차리니 주변이 아주 어두웠던 것이다.
그제야 자신이 알람 소리에 잠이 깬 것이란 것을 깨닫고 아직 완전히 깨지 않은 정신을 깨우기 위해 밖으로 나가 세수를 하였다.
지후가 세면을 하기 위해서는 집을 나가 좁은 통로를 조금 돌아야 하는데, 아직 겨울 새벽녘이라 그런지 아주 쌀쌀하였다.
찬바람을 맞아 정신이 번쩍 든 지후는 찬물에 양치를 하고 세안을 한 다음 보급소로 달렸다.
“저 왔습니다, 소장님!”
“그래, 어서 와라! 아버지 장례는 잘 지냈고?”
“네, 소장님이 알려 주신 대로 구청에 도움을 청하니 알아서 해 주더라고요.”
“다행이다. 에휴, 어린 너만 두고 그렇게 가다니…….”
“아닙니다. 저도 몇 달 후면 학교도 졸업하고 이젠 성인이니 알아서 해야죠.”
홀로 남은 지후를 걱정하던 소장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큰소리치는 지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네 엄마한테는 연락이 없었냐?”
소장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버지와 이혼을 했다는 새엄마에 대하여 물은 것이다.
이미 몇 달 전에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이혼 이야기를 들었기에 아버지 장례를 치르면서 이야기를 해 보았는지 물은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임종이라도 보라고 전화를 하여도 오지 않던 새어머니가 장례식에 올 턱이 없었고, 그 전화 이후 지후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무 소리를 하지 않는 지후의 어두운 표정만으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한 소장은 모든 것을 듣지 않아도 알게 되었다.
“에휴! 몹쓸 인간, 그래도 그게 아닌데……. 어여 일 봐라!”
“네!”
소장은 혼잣말로 지후의 새엄마에 대하여 넋두리를 하다 지후를 일별하고 일 보라며 손짓을 하였다.
지후는 사무실을 나가며 마음속으로 소장을 향해 계속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였다.
‘고맙습니다. 소장님! 흑흑, 그래도 소장님 같은 분이 계셔서 아버지 장례를 무사히 치를 수가 있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언젠간 제가 꼭 천배 만배 보답하겠습니다.’
지후는 배달을 나가며 사무실에 대고 인사를 하였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빙판길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다녀오겠다는 지후의 인사에 소장도 새벽길 추운 날씨로 빙판이 있어 조심을 요하기에 지후에게 빙판길 조심하라는 경고를 했다.
“네, 알겠습니다.”
지후는 배달할 신문과 우유를 담은 자신의 스쿠터에 올랐다.
***
아버지 장례를 치르기 위해 3일간 빠졌던 학교에 가기 위해 지후는 빠르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가방을 챙겼다.
수능도 끝났기에 별거 없지만 그래도 학생이다 보니 책가방을 챙겨 학교에 등교를 하는 것이다.
수업도 오전 3시간, 그저 입시에 대한 설명만 듣고 끝나는 것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3학년이라 이렇게 일찍 학교에 올 필요는 없지만 언제나 새벽 공기를 마시며 학교에 가는 느낌이 좋아 지후는 줄곧 일찍 학교에 갔었다.
교문에 들어서며 지후는 학교 수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그래, 지후 학생도 좋은 아침이여!”
수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로 들어선 지후, 그런데 오전 7시 반뿐이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지후보다 먼저 등교한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반장인 구준표와 부반장인 금잔디였다.
지후는 반장과 부반장을 보며 둘과의 첫 대면을 떠올리며 피식 웃어 버렸다.
3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아이들이 교실에 모이고 조회 시간에 선생님이 반장과 부반장을 뽑으려 할 때였다.
“어라! 여기가 무슨 신화고등학교냐?”
“선생님, 그게 무슨 소리세요?”
“이놈들아, 이 반에 글쎄 구준표, 윤지후, 금잔디가 있으니 하는 말이다.”
“하하하하.”
무엇이 우스운지 아이들은 담임 선생님의 말에 웃어 댔다.
그리고 그것은 지후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드라마 속 주인공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반에 이렇게 주인공 3명과 이름이 같은 학생이 일을 확률이 얼마나 될 것인가? 혹시나 이 일로 아이들이 아직 나오지 않은 주인공과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를 찾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역시나 반 아이들은 혹시나 하는 심정에 전교생을 대상으로 소이정과 송우빈을 찾기 시작하였고, 결과는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2학년과 1학년에 각각 소이정과 송우빈이 있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는 뜻하지 않게 자신을 비롯한 아이들이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F4라 불리게 되었다.
물론 지후는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부르던 상관을 하지 않았지만 부반장인 금잔디만은 무엇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던 것이 생각이 났다.
“오랜만이다. 구준표, 금잔디!”
“어! 일찍 나왔네?”
“오랜만이야, 지후야! 괜찮은 거지?”
“뭐 내가 안 좋을 게 있나? 걱정해 줘 고마워!”
간단하게 인사를 하는 준표와 다르게 잔디는 지후에게 관심을 보이며 질문을 해 왔다.
그런 잔디에게 지후는 괜찮다는 대답을 하였다.
부반장인 잔디는 사실 지후에게 오래전부터 관심이 있었다.
남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 밤늦게 학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질이 안 좋은 학생들에게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했었는데, 그때 자신을 구해 주었던 사람이 바로 지후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두워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얼굴을 자세히 살피지는 못했지만 자신과 같은 학교 교복을 입어 같은 학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교복 상의에 달려 있는 이름표를 보고 이름과 학년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그 이름을 잊을 수 없던 것이 한창 유행하던 TV 속 드라마 주인공과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의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윤지후라는 이름을 알고 학년도 알게 되어 몰래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 친구를 통해 알아본 결과 여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잘생긴 외모에 키도 크고 거기에 매너가 좋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지후가 여자아이들은 누구나 남자 친구로 사귀어 보고 싶어 하는 1순위의 남자였다.
하지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야간 자율학습도 하지 않고 언제나 일찍 학교를 나서는 바람에 그와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몰래 그의 모습을 훔쳐만 보며 짝사랑하던 차에 3학년이 되면서 한 반이 되었을 때 잔디는 지후와 자신이 인연이 있다고 생각을 하며 지후의 여자 친구가 되는 것을 기대하였는데, 그러지 못했다.
학기 초 선생님의 ‘신화고냐!’는 놀림 때문에 나서서 지후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못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흘러 며칠 후면 방학이고 또 몇 달 후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돼 못 볼 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웠다.
잔디는 자신의 한심스러운 성격에 화가 나기는 하였지만 지후만 보면 부끄러우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지후를 훔쳐보는 잔디를 안 보는 척 훔쳐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 반의 반장인 구준표였다.
사실 준표의 집은 드라마에 나오는 정도의 부자는 아니어도 잘나가는 중소기업은 운영하고 있어 꽤 잘사는 편에 속했다.
그렇기에 준표는 드라마가 방영이 될 때 정말로 자신이 그 드라마 속 주인공인 착각을 할 정도였다.
외모도 남에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수려하고 공부도 잘했기에 은근히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준표의 눈에 한 여학생이 들어왔는데, 그녀가 바로 금잔디였다.
학기 초 담임선생님의 농담에 웃기는 하였지만 이것이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준표와 금잔디, 학급에서도 반장과 부반장, 준표는 그렇게 1년간 학급 임원으로 잔디와 가까워지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준표는 잔디에게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미안! 나 오래전부터 지후를 좋아했어. 그래서 네 마음을 받아 줄 수가 없어.”
지후 아버지 장례식장에 담임선생님과 함께 다녀온 길에 잔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들은 말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쿨하게 잔디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잔디가 아련하게 지후를 쳐다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이지 준표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일이었다.
평소 지후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잔디에게 고백을 한 날 잔디의 지후에 대한 생각을 들었을 당시에도 이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는데, 오늘 준표는 지후에 대한 질투를 느끼게 된 것이다.
당사자가 없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하고 보니 그 감정을 깨닫게 되었다.
‘이게 질투라는 것인가? 이제 아버지도 없는 고아를, 내가? 미치겠네!’
답답한 준표는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조용히 교실 밖으로 나갔다.
***
“윤지후, 왔구나! 끝나고 선생님께 들르고 청소 당번은 청소 깨끗이 하고, 땡땡이치면 알지?”
“네!”
“선생님, 교실 깨끗해요.”
“니들은 아침 먹었다고 점심 안 먹어? 잔말 말고, 선생님이 검사할 거야!”
“우∼”
“이 녀석들이, 오랜만에 단체로 기합 한번 받아 볼까?”
“아니요.”
“그럼 반장!”
“차렷! 경례!”
“수고하셨습니다.”
드르륵드르륵.
교실은 종례가 끝나고 책상과 의자 끄는 소리로 소란스러웠고, 또 끼리끼리 모여 떠드느라 혼란스러웠지만 지후는 차분하게 가방을 챙기고 담임의 말대로 교무실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