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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오브 베스트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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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오브 베스트 1권(1화)
1. 아버지의 유품(1)
차가운 강바람이 불어오는 12월의 한강 뚝섬, 그곳에 검정색 정장을 입은 한 청년이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섰다.
무슨 슬픈 일이 있었는지 조금은 어려 보이는 청년은 한참을 하염없이 흘러가는 강물을 쳐다보다 상자의 뚜껑을 열고 회색의 가루를 뿌렸다.
‘아버지! 안녕히 가세요.’
지후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납골당에 안치할 돈이 없어 이렇게 한강에 뿌리며 마음속으로 작별을 하였다.
그렇게나 원망하던 아버지인데, 막상 이렇게 떠나보내게 되자 눈물이 흐르려고 하였다.
하지만 억지로 참으며 아버지의 유골을 강물에 흘려보내는데 얼마 전 새어머니와 한 통화가 생각났다.
“어머니! 의사 선생님께서,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랍니다. 가시는 분 얼굴이라도 보시는 것이…….”
“그 사람과 난 이미 이혼을 하여 남남인데, 내가 볼 필요가 있겠니? 그리고 너도 날 더 이상 어머니라 부르지 않았으면 한다.”
“아니, 그렇더라도…….”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끊는다.”
“잠시만, 잠시만이요! 그럼 지은이라도 아버지 얼굴을 보게 해 주세요.”
“넌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나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은이는 적게나마 너랑 피를 나눈 사이인데, 그 어린것에게 얼마나 충격을 주려고 그러니? 일없다. 끊어!”
당시 너무도 매정하게 전화를 끊어 버린 새어머니, 처음부터 그녀가 이렇게 냉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지후가 기억하기로 새어머니를 처음 뵈었던 때는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친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초등학교 6학년 가을이었다.
그 다음 해 지후가 새어머니와 마주했으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딱 6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지후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도 되지 않아 새어머니를 집으로 들이는 것에 결코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사실 지후는 아버지인 형원을 보는 날이 1년 365일 중 채 한 달도 되지 못했다.
외향선원 같은 집을 오래 비워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이 아님에도 형원은 집에 자주 걸음을 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이 언제나 형원은 밖으로만 돌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커다란 집에는 지후의 엄마와 지후, 그리고 집안일을 해 주는 가정부뿐이었다.
어려서 지후의 소원은 아버지가 매일 집에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형원이 집에 있을 때하고 없을 때하고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아니, 어머니가 지후를 대하는 것이 달랐다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지후 때문에 원치 않게 형원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언제나 지후에게 폭력을 행사하였다.
하지만 형원이 집에 있을 때면 그런 폭력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기에 지후의 소원은 아버지가 매일 집에 있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평소 불면증에 시달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잠을 청하였다.
그런데 지후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그 가을, 평소처럼 약을 먹고 잠을 청했던 어머니는 더 이상 아침에 눈을 뜨시지 않았다.
어린 지후는 엄마가 일어나시지 않는 바람에 자신이 맞지 않는다는 것에 기뻐하였지만,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가정부 아주머니의 설명에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슬프다는 것을 떠올리지도 못했으나 감정은 그와 별개로 흘러넘쳤다.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자 그렇게 소원하던 대로 아버지가 매일 집에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는 홀로 남은 지후를 두고 또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집에 있는 시간보다 외박을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자신을 괴롭히던 어머니도 없는 집에 이제는 가정부와 자신만 있게 되자 지후는 너무도 외로웠다.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지후를 학교 친구들도 따돌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후가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형원이 새어머니라며 그녀를 소개하였다.
자신의 돌아가신 친모보다 젊고 아름다운 새어머니는 낯선 어른의 접근에 겁먹어 하는 자신에게 밝게 웃으며 다가와 말을 걸어 주었다.
“네가 지후구나? 참 잘생겼네!”
지후는 그 말이 얼마나 듣기 좋았는지 얼굴이 빨갛게 붉어지고 말았지만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당시 새어머니는 지후가 보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 천사 같은 새어머니는 자신의 품에 있던 작은 아기를 보여 주었다.
“지은이야! 지은아, 지후 오빠야! 그만 자고 인사해야지?”
지후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 어떤 악기보다 아름답고 맑게 들린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녀가 보여 주는 아기를 들여다보았는데, 동생이라고 소개된 아기는 자신이 보아도 무척이나 귀여웠다.
지후는 이제 집에 혼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렇게 천사 같던 새어머니가 변했다.
삶에 찌들어 악에 받친 아줌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새어머니가 오시고 몇 년은 아버지도 밖으로 떠돌지 않고 집에 계셨다.
하지만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형원은 다시 외박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지후와 새어머니의 관계가 이렇게 틀어지지 않았는데, 지후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여름방학 때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평소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으셨던 아버지에게 덜컥 암 진단이 떨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할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산도 치료를 하는 데 모두 들어갔고, 그도 모자라 새어머니는 밤낮으로 일을 하였다.
물론 지후도 그런 새어머니를 돕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여 조금이나마 아버지 병원비에 보태기는 하였지만 형원의 병은 날로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 병 수발에 지쳤는지 천사 같던 새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을 했다며 어린 지은을 데리고 집을 나가 버렸다.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지후에게는 청천병력과 같은 소리였다.
어떻게든 살아야 했기에 지후는 정신을 차리고 새벽부터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또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해 한 달에 120만 원 정도 벌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아버지의 약값도 대기 힘들어 지후는 어쩔 수 없이 형원을 통원치료를 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전 아버지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병원을 찾았는데, 더 이상은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남은 시간 동안 마지막으로 얼굴이라도 보게 해 드리기 위해 새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으나 지후에게 돌아온 것은 냉랭하고 날이 선 싸늘한 말뿐이었다.
새어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끝이 나 이렇게 홀로 쓸쓸히 아버지의 유골을 강물에 흘려보내는 것이다.
***
아버지를 강물에 띄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지후는 쓰러지듯 방바닥에 무너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낡은 도배지의 문양이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 지후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천장을 향해 하염없이 멍한 시선을 던지던 지후는 일단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기로 하였다.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가산을 정리하다 보니 지금 살게 된 집보다 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지후가 형원의 짐을 정리하다 보니 아버지의 짐 중에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사진들이었다.
사진 속에는 여러 풍경들이 담겨 있었는데, 평범한 농촌에서 농부들이 일하는 모습에서부터 이국의 낯선 풍경까지 다양한 풍경이 담긴 사진들이 꽤 되었다.
아버지가 남겨 놓은 유품들을 하나하나 정리를 하던 중 지후는 형원이 사진만 찍은 것이 아니라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들인 기념품 같은 것들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후는 그것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팔 수 있을 만한 것은 벼룩시장에 내놓기로 하였다.
그중 지후의 눈길을 끄는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오래된 고서였다.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된 한문으로 쓰인 그 책이 왠지 끌렸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말고 지후는 그 고서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오래된 한자라 그런지 지후가 알아볼 수 있는 글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검은 것은 글자요, 나머지는 종이라는 것밖에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번 호기심이 발동한 지후는 책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옥편을 펼쳐 보려 하였다.
하지만 그 호기심도 뱃속에서 울리는 꼬르륵거리는 소리에 꺾이고 말았는데, 지후가 생각하니 어제저녁부터 한 끼도 먹지 않은 터였다.
친척 한 명 찾아오지 않은 장례식장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지후는 홀로 해야 하는 장례 준비에 막막하였으나 알바를 다니는 보급소 소장이 귀띔해 주어 구청에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찾아온 구청 직원들의 도움을 얻어 지후는 형식이나마 갖추어 장례식을 준비하였는데 한량이었기 때문인지 아버지의 장례식을 찾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손님이라고 찾아온 이는 겨우 지후의 담임선생님과 학급 대표로 온 반장과 부반장이 전부였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어머니와 지은이 오려나, 텅 빈 장례식장을 홀로 지켰는데, 그들은 발인이 있는 마지막 날까지 오지 않았다.
“에이,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이미 인연이 끝난 사람들 생각해서 뭐 해!”
지후는 혼자 큰 소리를 지르며 마음을 다잡고 조그만 부엌으로 들어가 간단하여 조리라고 할 것도 없는 라면을 끓였다.
라면을 끓여 방으로 들어온 지후는 배가 고픈 나머지 냄비 받침을 깜박하고 안 가져왔다.
하는 수 없이 조금 전 보고 있던 고서를 냄비 받침으로 쓰기로 하고 책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정말로 식욕이 반찬이라고 배가 고프니 흔한 라면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지후는 배를 채우고 자신이 먹은 냄비도 정리를 하고 컵에 물 한 잔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라면이 조금 짰던 터라 지후는 가져온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조금 전 보던 고서를 다시 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런 지후의 시도는 금방 밀려드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중단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