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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1(23화)
제5장 환왕 카라얀(2)
다음 목적지는 타마이 성을 지나서, 동방으로 통하는 항구인 야란포 항구까지 가는 것이다. 야란포 항구 위쪽에는 다른 왕국들이 군집해 있었다. 폴커 왕국보다 훨씬 작지만 명색이 다른 왕국이니까 함부로 지날 수 없다. 사실 대륙의 가장 동쪽에 있는 도시인 사스테라인까지 가는 게 제일 빠르겠지만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사스테라인을 통하지 않아도 동방대륙의 관문인 엘 타리오트까진 갈 수 있다.
다음 날 마구간에서 말을 빌려서 타고 가려 할 때였다. 그랑시엘이 떼를 썼다.
“싫어! 걸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난 말 타면 멀미 난단 말야!!”
“…….”
나는 머리가 띵해졌다. 그랑시엘의 마음을 한 번 읽어 보았다.
‘여섯 살 때 말 타다가 떨어질 뻔했어. 거기다가 말은 왠지 무섭단 말야. 죽어도 말은 안 탈 거야!!’
알고 보니 말 멀미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말 공포증이 있는 것뿐이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안 탈 수는 없다. 안 타면 여행 시간이 세 배는 길어진다. 딱히 큰 목적 없는 여행이라지만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긴 싫다.
나는 결국 그랑시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잘 봐. 이건 그냥 동물이란 말야. 가만히 앉아서 몰기만 하면 절대 안 떨어져.”
“……그래도.”
“멀미가 있다고? 멀미라고 해도 나 치료 마법 쓸 줄 알아. 1클래스 캄 다운(Calm Down)만 쓰면 되잖아. 뭣하면 타기 전에 걸어 줄게. 그러니까 말은 타고 가자.”
그 정도 마법은 얼마든지 써 줄 수 있다.
“…….”
그랑시엘은 주저주저하다가 난데없이 제안했다.
“그럼 같이 타 줘. 혼자 타면 떨어질 거 같아.”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제법 말을 잘 타는 편이지만, 둘이서 타면 귀찮고 힘들다. 게다가 타다 보면 서로 땀 냄새가 나고 움직이기 불편하다. 각자 타고 가는 게 아무리 봐도 효율적이다. 나는 결국 신경질을 내고 말았다.
“안 돼! 말 타기 싫으면 초능력 써서 날아오든지. 따라오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시, 싫어. 나 텔레포트 못 쓴단 말야.”
“알아서 해! 난 먼저 간다.”
“…….”
그러자 그랑시엘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을 보자 갑자기 마음이 약해졌다.
[매혹 저항 체크.]
웃…… 뭐야, 제길.
나는 애써 눈을 돌렸지만 그랑시엘이 가까이 붙어서 간절한 눈으로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이 녀석이 여자라는 걸 인식하니까 괜히 얼굴 빨개진다.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그래. 정 그러면 같이 타고 가자. 내가 앞에서 몰면 되지?”
그러자 그랑시엘의 얼굴이 급방긋해졌다.
뭐야, 이런 건 반칙이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는데 어떻게 그런 표정이 되냐! 나는 왠지 약이 올랐지만 말한 걸 바꿀 수 없으므로 신경질적으로 말을 대여했다.
[실패했습니다…….]
글자가 짜증을 부채질했다.
그날은 약 30km 정도를 하루 종일 갔다. 말을 타고 있는 것치고는 상당히 느린 속도지만, 이 근처는 제대로 정비된 가도가 별로 없는데다가 산지가 많다. 게다가 여자인 그랑시엘의 사정도 봐 주면서 가다 보니 열 시간 내내 겨우 부락 하나를 보았을 뿐이다.
타다닥.
나는 이누타브 블레이드로 장작거리를 잘라 모아 왔고, 그랑시엘은 거기에 불을 붙였다. 적당히 화력을 조절해서 수풀을 태우고 누울 자리를 만들었다. 가져온 침낭 세트를 펴면서 그랑시엘이 말했다.
“그럼 지금은 훅스라는 사람을 따라가는 거야?”
“그건 아닌데. 일단은 난 동쪽 끝으로 가 봐야 해.”
“……왜?”
그랑시엘의 질문에 나는 수프를 끓이다가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왜 동쪽 끝으로 가고 있는 걸까.
일단은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들고 있을 때 들리는 목소리 때문이다. 누군가가 이누타브의 샘물 동쪽으로 와달라고 일주일에 한 번 간격으로 부탁한다. 그 목소리는 간절하고 애처로워서 도와줘야 할 것만 같다.
또 다른 이유는 이누타브 블레이드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다. 동방 신 이누타브의 유일무이한 신검(神劍)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다만…… 퀘른 성주를 쓰러뜨릴 때 강림했던 이누타브의 모습. 아무 인정도 없이 적을 경멸하고 학살하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선(善)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누타브의 사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다가 나는 이미 트위스티드와 원한을 졌다. 이제 와서 모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안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모험을 하면서 레벨을 올려서 트위스티드를 이길 정도로 강해지는 게 낫다.
이런저런 이유가 떠올랐지만 확실한 건 하나다.
난 이 모험을 제법 재밌게 생각하고 있고, 즐기고 있다는 것.
지금은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나는 방한용 로브를 뒤집어쓰며 피식 웃었다.
“이것저것 있네.”
“흥. 나한텐 못 말해 주겠다 이거지?”
왠지 그랑시엘은 뾰로통해져서 나뭇가지로 장작더미를 툭툭 건드렸다. 수프가 뒤집어질 것 같아서 기겁을 했다. 급히 말리려고 하자 장난이었다고 하면서 손을 드는 모습에 내 복장이 먼저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여행 첫날 밤은 저물어 갔다.
나는 침낭 안에서 몸을 뒤척이면서 생각했다.
‘이 페이스로는 훅스 씨를 따라잡을 수 없어. 결국 같이 못 가는 건가…….’
훅스 씨는 숙련된 모험자인데다가 전설의 용병단원이다. 그런 사람과 같이 가면 내 앞길도 좀 더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는 혼자서 여행하길 원하는 것 같다. 나는 적지 않게 아쉽게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새벽이슬을 닦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응?”
나는 왠지 모르게 사방에 안개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안개에서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지만 겨우 열 걸음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다. 나는 심상치 않다고 생각하고는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아직까지 쿨쿨 자고 있는 그랑시엘을 속삭여서 깨웠다.
‘야…… 일어나. 어서.’
“히익!!”
갑자기 그랑시엘이 발작하면서 몸을 떨면서 일어났다.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져 있었다. 상황이 심각한데 얘는 또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멍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랑시엘이 손을 휙휙 휘저으면서 외쳤다.
“귀, 귓가에 숨 불어넣지 마!!”
“뭐? 일단 조용히 좀 해 봐. 지금 위험하단 말야.”
“…….”
그랑시엘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되어서 침낭을 개었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말이 사라졌다.
‘말이…… 왜……?’
적들이 와서 말만 끌고 갔을 리가 없다. 그 정도 여유가 있었다면 이미 기습했을 거다. 게다가 말발굽을 보면 강제로 끌려가는 거친 흔적이 없다. 나는 말들이 알아서 떠나 버렸거나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트레이스(Trace).”
지잉.
손에 끼여 있던 반지에서 휘광이 흘러내리더니 느릿하게 광선이 쏘아졌다. 트레이스 링의 능력인 추적 마법이다. 추적 지정할 수 있는 사물은 최대 10개. 원래는 동료들의 위치를 알기 위한 용도로 쓰이지만, 나는 말에 걸어 두었다. 이누타브 블레이드에도 걸어 두려고 했지만 검 자체에 추적을 뿌리치는 항마가 있었다.
침낭을 다 갠 그랑시엘이 말했다.
“어제 근처에 2클래스 경보(Alert) 주문을 걸었다면서, 뭐 감지된 거 없어?”
“없으니까 빨리 추격해야지.”
나는 어제 반경 40미터 이내에 누군가가 살의를 품고 접근하면 바로 내 감각에 들어오는 경보 결계를 쳐 두었다. 그 결계에는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들고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안개는 점점 더 자욱해진다.
“우.”
뒤에서 따라오던 그랑시엘이 등에 부딪혔다.
나는 라이팅 마법을 쓰고 싶지만 왠지 적에게 위치만 알려 주는 것 같아서 관뒀다. 대신에 정신을 집중해서 사방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최소한 반경 450m 이내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위이잉.
‘응? 저건…….’
300미터 밖에서 말들이 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까는 감지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셈이다. 조금 걸어와서 그런 것 같다. 그 옆에는 두세 명의 인간과, 엄청 커다란 무언가가 열 명도 넘게 있었다. 틀림없이 함정이다.
그랑시엘이 낌새를 챘는지 말했다.
“적이야?”
“응. 그런데 그럴 거면 아까 공격하지 왜 지금 이러는지 모르겠네…… 아!!”
나는 안개를 보고서야 눈치를 챘다. 이 안개가 생겨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다. 이 정도로 강력한 안개 결계를 치려면 술사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 저 녀석들은 매혹 마법이나 무언가로 말을 끌어들이고는 안개 마법을 쳤다. 경보 결계를 나와서 안개를 헤매는 사이에 기습할 작정인 것이다.
상대가 아주 단단히 작정하고 왔다는 사실을 눈치챈 나는 흥, 하고 웃었다. 왠지 싸움엔 이골이 난 녀석들 같지만 충분히 이길 자신이 있다.
나는 그랑시엘에게 링을 던져 주었다.
“이거.”
“알았어.”
그랑시엘은 바로 말을 알아먹고 반지를 꼈다. 나는 그대로 적들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안개 때문에 어설프게 그랑시엘이 따라오면 방해만 될 것이다. 내가 먼저 적들한테 선공을 가하고, 그랑시엘은 추적 링의 광선을 따라와서 가세해 주면 된다. 더 이상 말은 필요 없다.
타다다닷.
나는 200미터 정도를 달려가다가 멈춰 서서 주문을 걸었다.
“블루 크림슨.”
파아앗.
이누타브 블레이드에서 청색 불꽃의 용이 치솟아오르자, 나는 나 자신에게 마이너 헤이스트까지 걸고 다시 달려 나갔다. 조금이라도 주문 지속 시간을 아끼고 싶다. 이윽고 적들의 20미터 앞까지 오자, 그제야 적들이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마음속이 점차 읽혀 온다.
‘저놈, 안개 속에서 어떻게 정확히 온 거야?!’
하얀 로브를 입은 자가 외쳤다.
“가라, 오우거(Ogre)!!”
부웅.
그와 동시에 빠른 속도로 세 마리의 거대한 동체가 나를 향해 점프했다. 서전트 점프만 2.5미터를 넘는 느낌이다. 저놈들 하나하나의 몸에서 갑옷이 번쩍였다. 나는 찰나의 순간에 그 공격을 감지하고는 빠르게 2단 강베기를 시전했다.
카캉!!
육중한 덩치가 떨어지려는 찰나, 한 놈이 허공에서 다시 제비를 돌며 피했다. 두 놈은 미처 대응하지 못했는지 그대로 블루 크림슨으로 길쭉해진 검에 맞았다. 그놈들의 전신이 불타며 괴음을 내었다.
“크어어어어!!!”
“이…… 이런!”
흰색 로브를 입은 자가 당황하더니 손에 불꽃을 만들어 내어 던졌다. 2클래스의 파이어 볼트(Fire Bolt)다.
“흥!”
나는 디스펠 블레이드로 우습지도 않게 그 화살을 쳐 내고는 그대로 돌격해 들어갔다. 영창 없이 파이어 볼트를 쓴 걸 보면 최소 4클래스 시전자지만 내게는 안 통한다. 두 걸음이면 목을 벨 수 있는 간격까지 왔을 때였다.
부웅.
콰광!!
“윽!!”
오우거라고 불린 놈들 중 하나가 거대한 라지실드를 방패 삼아서 내게 차지(Charge)를 걸어온 것이다! 나는 그 충격량이 만만치 않아서 팔이 뻐근해짐을 느끼면서도 강베기로 차지를 막아 내었다. 오우거란 놈의 능력치가 보인다.
오우거
Lv. 6 실드파이터
Lv. 8 오우거
‘이 자식, 종족 자체가 직업이야?’
“쿠워어!!”
“우어어어!!”
사방에서 괴성을 지르며 다섯 마리나 되는 오우거들이 나를 둘러싸고 공격해 들어왔다.
나는 그만 오싹해지고 말았다. 한 놈만 해도 힘이 28에 이르는 내 괴력에 비해서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철갑옷을 입고 민첩하기까지 한 놈들이 라지실드가 프레일(Frail, 쇠도리깨)을 휘둘러 오는 모습은 공포였다.
하지만 나도 믿는 게 있으니까 혼자 왔다. 각오하라고.
나는 그 순간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빼 들며 며칠 전 완전 회복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경험치는 3,892,012입니다. 레벨업 하시겠습니까?]
나는 검사도, 마법사도 지금의 내게는 크게 필요 없다고 느꼈다. 나 정도로 검술을 할 줄 아는 자는 대륙에 수만 명이나 될 것이다. 나 정도로 마법을 하는 자도 그 정도는 된다. 레벨을 올려 봤자 대륙 상위의 강자들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홀리 파이터 Lv. 18이 되었습니다. 3차 직업 전승. 신검술사(神劍術師)가 되시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