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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1(22화)
제4장 신의 존재 증명(5)
엘파인이 허공에 침묵하고 섰다. 그의 이마에 이누타브 블레이드가 만들어 낸 상흔이 톱니바퀴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상처는 재생되지 않은 채 점차 갈라지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뇌운이 감돌고 하늘을 기묘하게 맴돌던 비행선과 마법진이 정지했다. 하늘의 소요가 정지되자 지상도 낌새를 챘는지 점차 조용해졌다. 나는 검을 던져 내면서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엎드린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엘파인이 고요히 말했다.
[죽음을 거부하다니…… 지금까지의 그 어떤 사방신의 사자나 반신도 그런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너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지도…… 이 세계는…… 이제……!!]
퍼엉!!
그러더니 허무하게 터져 나갔다.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혔던 것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힘이 빠져서 털썩하고 드러누워 버리고 말았다. 이젠 진짜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
스으으.
하늘의 궤적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뇌운 사이로 희끗 맑은 달이 비쳐 오고 있다.
나는 월광이 따사롭다고 느끼면서 점차 눈을 감았다.
자고 싶다…….
눈앞에 익숙한 글자가 떠오른다.
[HP가 0이 되었습니다. 끝내시겠습니까? Yes/No]
“말했잖아…….”
나는 졸린 목소리로 하품을 했다.
“내 대답은 하나뿐이라고.”
제5장 환왕 카라얀(1)
깨어났을 때는 나흘이 지나 있었다.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고마운 적이 없다.
“크윽.”
나는 퀘른의 한 병원으로 옮겨져서 사이오니스트들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것치고는 일어나서도 몸이 만신창이인데다가 거의 회복이 되지 않았다. 등뼈도 여전히 부러진 채다.
가만히 앉아 있자 잠시 후에 여러 명의 백의를 입은 자들이 몰려와서 내 몸을 살펴보았다. 이 사람들은 자신을 [의사]라고 했다.
치료 계열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하는 어떤 초능력자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내게 말했다. 그가 내 목에 대고 피에 젖은 붕대를 갈아 준다.
“이상하군. 이 퀘른에서 내로라하는 치료 능력자가 스무 명이나 모여서 자네를 회복시키려고 했는데도 들어먹지를 않아. 초능력에는 마법 내성이 적용되지 않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 쿨룩!!”
나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피를 한 사발 토해 내고 말았다. 나는 정신이 나가 버릴 정도로 아팠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신기하다. 이불을 걷어찰 힘도 없다. 눈물이 아릿하게 맺힌다.
……이럴 거면 난 대체, 뭐 하러 삶을 선택한 거야. 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두려워진다. 다음번에도 No라고 대답할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 능력자는 쯧, 하고 혀를 한 번 차더니 말했다.
“초능력도 마법도 통하지 않지만 자네의 몸은 회복되고 있네. 등뼈와 목뼈…… 열상과 창상도 점차 아물고 있어. 한 달이면 걸어 다닐 정도는 될 거야. 물론 그것도 인간의 회복 속도는 아니지. 원래 자네는 시체나 다름없었다고? 장애도 안 남는다는 게 기적이야! 북방 하라바인에서 양성한다는 트롤(Troll) 생명력의 5%는 되는 걸세. 시간이 있었다면 자네를 해부해 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일일세.”
하라바인 제국은 몬스터 병단을 양성하고 있다. 폴커 왕국을 비롯해서 대륙의 다른 국가들에는 몬스터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하라바인에서는 천 걸음에 한 마리씩 만난다고 할 정도로 자주 출몰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몬스터를 잡아서 군사력으로 키우는 상태였다.
트롤은 그중에서도 재생력이 출중하기로 유명한 몬스터로, 팔을 잘라 버려도 들어서 다시 붙이면 그만이라고 한다. 그런 몬스터 병단이 수십 개도 넘게 있다. 폴커 왕국의 마법력이 월등한데도 하라바인 제국을 침공하지 못하는 건 몬스터들 때문이다.
……근데 이 양반, 해부가 뭐야, 해부가.
덜컹.
치료 능력자가 나가자 훅스 씨가 걸어 들어왔다. 훅스 씨도 꽤나 다쳤던 것 같은데 아무런 이상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훅스 씨는 웬 커다란 담배를 꺼내 들더니 손가락을 마찰시켜서 불을 일으켰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퍼져나간다.
“쿨룩.”
“담배 연기는 몸에 해롭지만 참아 주게.”
“왜요.”
훅스 씨가 손바닥 아래를 외알 안경에 대면서 말했다.
“내가 피고 싶으니까.”
“…….”
아, 그러신가요…….
팍!
내가 어이가 없어서 항변하려고 할 때 훅스 씨가 손에 들고 있던 뭔가를 휙 하고 던졌다. 나는 엉겁결에 그것을 허공에서 한 손으로 받아 챘다. 팔이 아프고 근육이 끊어질 것 같지만 반사적으로 손이 튀어 나간 것이다. 으그극, 하고 눈물 흘리며 아파할 때 훅스 씨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면서 말했다.
“도적놈들이 주워서 팔려는 걸 찾아왔다. ‘그걸’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으니까 잘 간수하라고.”
“이건…….”
내 손에는 붉은 비늘 보검이 그 풍채를 잃지 않은 채 빛나고 있었다. 이누타브 블레이드다. 왠지 예전보다 훨씬 더 강인해지고 빛나는 것 같다. 실제로 빛이 나는 건 아니지만 내 눈에 그런 게 비쳐 보인다. 내가 고마운 눈빛으로 훅스 씨를 바라보자 그가 훗 하고 웃었다.
“난 떠난다.”
“……컥.”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가 몸을 휘청였다.
이 양반 난데없이 이별 통보야?!
“뭔 소리예요!!”
후우―
훅스 씨가 여유작작하게 담배 연기를 구름 모양으로 피워 냈다.
“블라스팅이 마무리는 다 해 주기로 했거든. 아니, 실제로 다 했지. 엘파인을 쓰러뜨린 직후 비행선을 모두 제압하고 사람들의 몸속에 있는 엘프를 진정시키는 대주술을 써 줬단 말이지. 지금은 쉐레드 왕세자의 명으로 퀘른 성주 대행으로 일하고 있으니까 내가 나설 자리는 없네.”
블라스팅 자작도 골든프릭스 용병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용병왕 사후에 폴커 왕국에 투신했는데, 그가 왕국의 기술력을 20년은 앞당겼다. 듣기로는 멸종한 전설의 종족인 노움(Gnome)이라는 소문도 있다. 그가 이 자리에 도착한 걸 보면, 아마 훅스 씨는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페드라크와 결판을 낼 생각이었던 것 같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훅스 씨는 왜 떠나는 거예요. 무기 상점에서 여생을 보내겠다면서요?”
“생각이 바뀌었어. 자네가 쓰러진 직후에, 10년 전에 죽었어야 할 놈이 내 눈앞에 나타났었거든. ……아무래도 우리는 그때 뒤처리를 깔끔하게 못했던 것 같네. 나는 그 마무리를 하러 가야 해.”
“죽었어야 할 놈이라니…….”
“그런 일이 있네.”
지직.
훅스 씨는 담배를 손가락으로 비벼 끄고는 뒤돌아섰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그렇게 담배를 끄면 손가락이 안 아프신가요?
“인연이 되면 또 보지.”
작별인사는 간단히 한 손을 흔드는 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허무하게 웃다가 스르르 잠이 오는 것을 느꼈다.
에라이, 다 떠나 버려라. 어차피 여행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고. 일단 지금은 졸리니까 자 둘까…….
“……가 아니지!!”
내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마지막 힘을 발휘해서 벌떡 일어났다. 어떤 초능력과 마법으로도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건 아마 내 능력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급히 정신을 집중해서 눈앞에 글자를 띄웠다.
[타이틀을 바꾸시겠습니까?]
“전설의 허세왕!!”
[타이틀이 교체되었습니다.]
“으하핫.”
히죽 하고 웃었다. ‘죽음을 거부한 자’ 상태에서는 어떠한 치료 마법이나 초능력도 듣지 않는다. 죽지는 않지만 hp 회복 자체는 극단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 hp가 회복된 상태. 타이틀을 바꾸고 다시 체력 회복을 받으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크게 소리쳐서 사람을 불렀다.
“얼른 와서 치료 좀 해 줘요!! 당장 일어날 테니까!!”
나는 회복될 수 있다는 기쁨에 미친 듯이 웃었다.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의 당황해하는 얼굴도 보인다.
“난, 조금이라도 빨리 모험을 하고 싶다고요!!”
그리고 온갖 종류의 치료 마법과 약물이 내게 시전되었다. 약에 이렇게 쩔어서 살아 본 건 처음이야.
내가 완전 회복된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병원 사람들은 금세 내가 회복되는 걸 보고 신기해했지만 나는 그들의 의문에 답해 줄 여유가 없다. 지금이라도 서둘러 달려가면 훅스 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여행도 같이 하는 게 좋다. 전설의 용병단원과 함께.
내가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허리에 메고 병원을 나설 때였다.
벽을 등지고 웬 여자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넌?”
“그래도 용케 살아났네.”
티끌 하나 없는 흰색 머리칼에 기다란 귀를 가지고 있는 녀석. 여자인지도 잘 모를 정도로 유아 체형. 대정령 엘파인에 같이 맞서 싸웠던 초능력자. 그랑시엘은 벽에 기대어서 황혼빛에 물들어 있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자 그랑시엘이 코웃음을 쳤다.
“흥! 보나마나 성주 포상 같은 건 기대도 안 하고 떠나 버리려는 거지? 모험자란 건 정말 제멋대로잖아.”
뭐 작위를 받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포상은 지금 나한테 중요하지 않다. 나는 무덤덤하게 대답해 줬다.
“주면 받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 훅스 씨는 먼저 가 버렸단 말야.”
“…….”
그랑시엘은 뭔가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이름이 뭐야?”
뭐야.
뭔가 했더니 겨우 그게 궁금해서 기다린 거였나. 그냥 마인드 리딩으로 마음을 읽으면 편할 문제지만 자주 쓰니까 왠지 사람의 추악함을 보는 것 같아서 잘 쓰지 않았다. 나는 일부러 마인드 리딩을 쓰지 않고 대답해 주었다.
“J. S.”
“나도 같이 가.”
나는 슥 하고 그랑시엘을 바라보았다. 눈빛은 진지하다.
“왜?”
“귀가 길어져 버렸단 말야. 이 도시에선 못 고쳐. 엄마 아빠한테는 허락 받았으니까 같이 가. 너랑 같이 모험하다 보면 치료 방법도 나올 거 아냐?”
“뭐, 그러던가.”
나는 별 생각 없이 허락했다.
그랑시엘은 나를 죽이려고 했다. 게다가 힘에 취해서 제멋대로 능력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싸움에서는 정확하게 상황을 판단할 줄 알았다. 지금의 내게 필요한 건 착한 동료보다 유능한 동료이기 때문에, 나는 일단 그랑시엘을 동료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그랑시엘은 초능력의 도시 퀘른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일류 초능력자니까. 그랑시엘이 갑자기 내 팔을 잡고 찰싹 달라붙었다.
“…….”
내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도리어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빨리 가! 멀리 떨어져 있으면 또 그 검으로 날 위협할 거잖아!!”
“참 나.”
나는 투덜거리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 녀석 이해할 수가 없어.
그렇게 퀘른에서의 모험은 일단 끝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