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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1(19화)
제4장 신의 존재 증명(2)


화르르륵!!
끼아아아―!!
엘프들이 불타올랐다. 그랑시엘의 화염탄은 너무 빨라서 피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동물 수준의 이성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들이 어떤 종족인지, 뭘 위해서 살아왔는지는 모른다. 단지 죽을 때의 감정이 흘러 들어오니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억울하다.
이 종족은 터무니없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 라는 것.
그건 아마 내게 강림했던 이누타브와 관련 있을 것이다. 불꽃의 후폭풍이 치솟아오르며 마치 불새 같은 형상이 된다. 저건 아마 그랑시엘의 기술일 것이다.
겨우 2분 만에 괴물들을 싹 쓸어버리던 그랑시엘이 갑자기 확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이미 정상으로 돌아와 있다. 그랑시엘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뜻대로 했다고 생각 마! 이미 두뇌의 채널(Channel)을 바꿔서 네 정신 간섭은 이제 안 통해! 이제 네놈이 죽을 차례다……!!”
“엥?!”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누타브의 힘은 정신 영역에 간섭해서, 그랑시엘과 합일한 엘프에게 복종하도록 요구한 거 같다. 그런 건 원래 알아도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데 두뇌의 파장을 바꿔서 그걸 무효화시킨 것이다. 정신의 구조가 달라지면 지배가 안 먹히는 게 당연하다. 이론상 가능하다지만 태연하게 그걸 해내는 초능력자란 건 역시 괴물이다.
“각오해라!”
그랑시엘이 손가락 다섯 개를 허공에 가리키더니 기묘한 도형을 두 번 맺었다. 그건 마법사의 수인과는 다른 것이었다. 시공의 좌표를 확립하는 것이다.
“판타즈마 베인(Fantasma Bane)!!”
쉬리리릭.
그 순간, 그랑시엘의 손가락에서 뿜어져 나온 광선 다섯 개가 내게로 돌진해 왔다. 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아서 나는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갖다 대었다. 디스펠 블레이드로 물리칠 생각이다.
하지만 이누타브 블레이드에 닿는 순간이었다.
파앗.
“블루 크림슨이?!”
놀랍게도 광선이 닿는 순간, 6클래스의 보조 주문인 블루 크림슨이 풀려 버린 것이다! 이론상 블루 크림슨은 디스필드에도 풀리지 않는 완벽한 주문이다. 이런 일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다.
설마 저거, 마법 효과만 제거하는 초능력인 건가?!
[쿠워워워!!]
그때를 노렸다는 듯 뒤에서 촉수 괴물도 같이 덮쳐 왔다. 동시에 그랑시엘도 손가락을 내뻗어서 나를 조준했다.
‘으, 망할!! 이제 진짜 죽는 건가?!’
경황이 없는데 순식간에 닥쳐온 위기! 나는 그만 티마이오스를 쓸 생각도 못 하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기적이 일어난 건 그때였다.
스쾅!!
먼지바람이 일어나더니 지상에서 지하로 누군가가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신의 창이 내리꽂는 것 같다. 90미터나 되는 거리를!
그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괴물의 촉수를 튕겨 내 버렸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나타난 인물이 투 핸디드 소드를 쭉 하고 휘둘렀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풍압에 몸이 휩쓸린다.
희미하게 뜬 내 눈에 무언가가 떠오른다.

필살기必殺技
레벨 4
악몽인(Nightmare Blade) 시전!
대상 생명 체크 실패!
일격사 성공!

새파란 빛으로 이루어진 빛 무리가 허공을 수놓더니 새까만 광선이 되었다. 이윽고는 그물처럼 변해서 엄청난 속도로 날아갔다. 그 장관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퍼억!!
[크아아아아아아악!!]
그는 단지 검을 뻗은 것뿐이었는데,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운이 괴물을 수십 조각으로 절단 내 버렸다. 저 참격이 재생 능력도 막아 버리는지 괴물은 쓰러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괴물은 잠시 촉수를 꿈틀거리더니 축 늘어져서 파란 점액을 흘려내었다. 악몽인을 사용한 인물은 씁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가시게, 페드라크!”
나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 목소리는 낯익은 사람이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쳐 불렀다. 이런 장소에서 볼 사람이 아닌데?!
“훅스 씨?!”
놀랍게도 나타난 건 무기 상점 주인, 훅스 씨였다!
외알 안경에 검은 신사복, 희끗희끗한 머리가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에 커다란 투 핸디드 소드를 한 손에 들고 있으니 생뚱맞다. 훅스 씨는 그러거나 말거나 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서 뻑뻑 피웠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허공에 도넛을 만들었다.
훅스 씨는 자신이 쓰러뜨린 페드라크의 시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멍청한 친구. 신에게 마법이 통했다면 어째서 자네 종족이 멸망했겠나……. 아니, 자네는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겠지.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끝장을 보려고 했던 건가? 어느 쪽이든 자네는 바보야.”
“훅스 씨. 여긴 어떻게…….”
내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훅스 씨가 말없이 휙 하고 투 핸디드 소드를 휘둘렀다.
콰앙!!
폭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틈엔가 그랑시엘이 손가락에서 화염 광선을 쏘아 낸 것이다. 그것을 훅스 씨가 무형의 기운을 쏘아 내서 없애 버렸다. 나는 잘못하면 등이 꿰뚫려서 불타고 있었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훅스 씨가 투 핸디드 소드를 어깨 위에 걸치며 담배를 툭툭 털었다.
“이제 일단락 났군. 싸움은 이쯤에서 끝내지.”
“누구 마음대로?”
그랑시엘이 코웃음을 쳤다. 마음이 읽혀 들어온다.
‘평범한 무기 상점 주인은 아닌 것 같네. 뭐 어때. 지금의 나는 최강이야!! 초능력자가 검사 따위에게 질 리가 없어. 이놈들을 모두 해치워 버리고 남은 것들을 먹어 치워야지.’
‘쩝…….’
나는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들면서 입맛을 다셨다.
건방진 소리긴 해도 틀린 건 아니다. 검사는 마법사를 일대일로 이기지 못한다.
이것은 최초의 9클래스 마스터, 티마이오스 3세가 세상에 등장하면서 세워진 철칙이다. 검사들 중에는 대단한 경지에 도달해서 혼자서 수십 명을 상대할 수 있는 고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전투(戰鬪)가 아니라 전술(戰術)으로 싸운다. 상황 조정 능력과, 검사의 접근을 막는 온갖 마법적 능력을 동원하는 하이클래스 마법사 앞에서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
더욱이 상대는 마법사보다 더 강력한 초능력자. 비록 괴물을 한 방에 난도질해 버린 훅스 씨라고 해도 그랑시엘을 이기긴 힘들 것…….
[슈퍼 라이트워크Super Light Walk 시전.]
빠아악!!
……어?
뭔가 흐릿한 게 스쳐 지나가더니 그랑시엘의 몸이 뒤로 젖혀진다. 뭔가 해서 보니, 신사복을 입은 훅스 씨가 칼을 들지 않은 왼손으로 그랑시엘의 배를 때린 것이다.
대체 언제 저기까지 간 거야?! 15미터는 되는데! 그랑시엘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컥 하고 피를 토해 낸다.
“우…….”
[언암드 스트라이크Unarmed Strike 성공. 기절 체크 실패.]
털썩.
그랑시엘은 허무한 눈으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객관적으로 지금의 그랑시엘 정도면 트위스티드의 센마와 싸워도 해볼 만하다. 센마보다 그랑시엘의 공격이 훨씬 빠르기 때문에 센마는 검기밖에 못 쓸 테고, 그러다 보면 센마가 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 그랑시엘을 맨손으로 쓰러뜨려 버린 것이다!!
나는 레벨업에 대해서 회의가 들었다.
훅스 저 사람 분명히 마스터 나이트 Lv. 31였을 텐데…… 비슷한 레벨에서 이 정도의 차이가 나다니? 나는 궁금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도움말 : 직업별 차이에 대해서 궁금하십니까?]
그래!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레벨은 99가 한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장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레벨을 모아서 상위 직으로 승급이 가능합니다. 승급 시 레벨은 1이 되지만 능력은 그대로 남습니다. 상위 직은 총 7차까지 있습니다.]
……그러면 마스터 나이트는?
[칭호 ‘마스터’가 붙는 직종은 총 여섯 개가 존재합니다. 마스터 클래스의 직업은 모두 6차 승급 직이며, 7차 승급 직은 3개입니다. 마스터 나이트 Lv. 29까지 필요한 경험치는 14,928,453,043입니다.]
그게 얼마나 많은 거냐?
[최신 기준 적 ‘센마’를 기준으로 총 328번 승리해야 합니다. 레벨업 패널티를 모두 계산했습니다. 고위 레벨이 될수록 얻는 경험치가 적어집니다.]
“…….”
즉, 겉으로 보이는 레벨은 낮아도 검사 레벨로 치면 50대를 훌쩍 넘기는 초고수잖아?! 무기 상점 주인이 뭐이렇게 세?! 앞으론 무기점도 함부로 못 가겠군! 설마 여관 주인도 사실 초고수라던가…….
나는 훅스 씨한테 외쳤다.
“이봐요!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그건…….”
쏴아아아―
그랑시엘은 기절하고 괴물은 죽었다. 엘프들도 거의 다 사라졌다. 이제 장내에는 담배를 꼬나물고 있는 신사복의 투 핸디드 소드 무기장인과, 나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자 훅스 씨가 무언가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꾹 다물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외쳤다.
“훅스 씨?! 말 좀 해 봐요! 왜 훅스 씨가 내궁까지 와 있는 겁니까!”
“그건…….”
비 내리는 폐허. 그 사이에서 훅스 씨의 입이 조금씩 열렸다. 곧 훅스 씨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바지부터 좀 입지 그러나.”
“…….”
아.
바지를 안 입었구나.
망했어요…….

훅스 씨와 함께 내궁을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도시가 아비규환이었다. 천공에 떠 있던 비행선 다섯 대에서 시커먼 구름 같은 게 뭉게뭉게 뿜어져 나오고, 초능력자들은 전신을 고통으로 떨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도시의 1/5가 초능력자라는 걸 생각하면 생지옥이다.
“아아아아아악!!”
“시끄러!”
까앙!
그 덕분에 퀘른 성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거의 다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가끔씩 공격해 오는 자들이 있었지만 그리 강하지는 않아서 손쉽게 물리칠 수 있었다. 나만 나서도 충분할 정도다.
이미 두세 명 쓰러뜨리며 바지는 챙겨 입었다.
나는 달려드는 경비병의 창날을 칼로 쳐 내며 외쳤다.
“난리도 아니군!!”
“시민들 몸속의 워터 엘프들이 수장의 죽음을 느끼고 공황 상태에 빠졌네. 저들을 진정시키려면 고위 성직자(High Priest)의 기적(Miracle) 주문이 필요해.”
“고위 성직자?! 그게 뭔데요!”
내 질문에 훅스 씨가 잠시 침묵하더니 씁쓸하게 말했다. 말을 꺼낸 자기가 바보라는 말투다.
“……하긴 폴커 왕국에서 그런 걸 찾는 게 바보짓이지.”
그러더니 휙 하고 나이트메어를 휘둘러 내가 상대하던 경비병을 바닥에 패대기쳐 버리는 것이었다. 으아, 키가 2미터도 넘는 장골을 저렇게 쉽게?
다섯 걸음쯤 뛰었을 때 경비병이 골목에서 뛰쳐나왔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는 상단, 하나는 하단을 베어 왔다. 원래는 알아도 못 피할 공격이지만 지금이라면 간단해!
까앙!
“크헉!”
내 검이 뱀처럼 미끄러져 내리더니 경비병 두 명의 창날을 동시에 부러뜨려 버렸다. 눈앞의 경비병들은 둘 다 레벨이 6이었는데 너무 쉽게 당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내가 강해졌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막 열 명 정도를 쓰러뜨리고 마을로 나가려고 할 때 정문에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 자식들을 막아!! 성주님을 시해했다!!”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시해하긴 했는데 내가 안 죽였어! 훅스 씨가 죽였다고!
살의는 있었지만 실행을 안 했으면 무죄라고!
아니, 그리고 빠져나온 지 5분밖에 안 되었는데 그런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쓰잘데기 없이 유능해!
뭐라고 항변하기도 전에 우르르하고 가드(Guard)들이 몰려왔다. 정규 갑옷과 무기를 들고 있는 병사들 오십여 명이 대열을 갖추는 것은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친다. 개개인의 레벨은 6∼8에 불과하지만 저들이 힘을 합치면 수십 배로 강해지는 것이다. 그건 경비병 출신인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끼이이익.
거기에다가 성벽 위에서는 십여 명 정도의 궁수들이 사위를 매긴 채 이쪽을 겨누는 소리가 들렸다. 더 안 좋은 것은, 가드들 뒤쪽에는 다섯 명 정도의 초능력자들이 능력을 준비한 채 쏘아 내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필드 오브 아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