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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1(16화)
제3장 퀘른 대결전(6)


촤좌좌좍.
“크억!!”
어…… 얼굴에!!
나는 정체 모를 털과 거무튀튀한 것으로 범벅이 된 덩어리가 뺨에 묻자 미칠 것만 같았다. 급히 털어 냈지만 소용없었다. 마구 물이 튀겨서 하의를 적셨다. 그래도 나름대로 아껴 입던 바지인데 이젠 입기도 힘들어졌다.
[쿠오오오!!]
저만치 뒤에서는 이제 정신을 차린 촉수 괴물이 쫓아오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어쨌든 뛰어야 한다. 저런 괴물하고 실랑이하는 건 너무 위험하다. 그래, 이렇게 미친 듯이 달리는 건 맞는 일이야. 하지만 내 미늘 갑옷에…… 손에…… 얼굴에…… 자꾸만…….
“으아아아아아악!!”
나는 눈물을 흘리며 발악했다. 출구가 보였다.
나는 사다리처럼 생긴 성의 지하 하수구를 뛰어 올라가며 계속 울었다. 내 신세가 너무 서러워서!
도대체 어떻게 강철 뚜껑을 열었는지 알 수 없었다.
덜컹.
철퍽.
……하하, 터억이 아니라 철퍽이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갈색 액체와 건더기에 가득 물들여져서 한 걸음 한 걸음 홀에서 기어 나왔다. 저쪽 뒤에서 쫓아오는 괴물의 소리가 들리지만 이젠 상관없다.
나는 맨홀 뚜껑을 덮고는 엎드려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아무래도 내성의 외곽에 있는 초소 근처인 것 같다.
곧 얼굴을 다리 사이에 처박고 울었다.
“흐흑…… 젠장…… 엄마…… 나 힘들어…….”
지금 당장 제일 하고 싶은 일은 퀘른의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게 아니다. 그랑시엘에게 생겨난 괴상한 변화를 알아내는 게 아니다. 저 구더기 괴물을 쓰러뜨리는 것도 아니다.
씻고 싶다.
진짜로.
“…….”
나는 얼굴에 질척질척 묻은 것을 쭈욱 걷어 내었다. 그러자 웬 딱딱한 게 손가락에 잡혔다. 옷에 묻은 걸 털어 내고 있는 중에 손에 잡혔다. 나는 똥물이 눈에 들어갈까 봐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 정체를 알아내 보려 했다.
딱딱하고 둥그런 것.
그것은 반지였다.

트레이스 링(Trace Ring)
장비 종류 : 반지
등급 레벨 : 3
마법부여 레벨 : 2
속성 : 화염, 교환, 영혼
소유주 : J. S.
현재 사용가능 기술 : 없음
현재 사용가능 마법 : 트레이스(trace), 스태미나 힐링(Stamina Healing)
자동 소유 능력 : 장착하고 특정 상대를 지정해 접촉할 경우 추적에 +20의 효과를 받는다.

[트레이스 링을 획득했습니다!]
[찾기 스킬이 상승했습니다!]
하수구에 진짜 마법 아이템이 있을 줄이야…….
하긴 마법과 기술이 하도 발전하고 있어서 이제 2레벨 정도의 마법 아이템은 시내에서 돈만 좀 있으면 살 수 있게 되었다. 만들어진 지 10년이나 되었으면 이런 게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이어진 글자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체력이 떨어지고 있으니 서둘러 독을 제거해 주십시오.]
무슨 독인지는 생각하기도 싫다.
나는 전신에 묻어 있는 기묘한 액체, 덩어리 같은 걸 털어 내었다. 시간이 많이 없어서 2분 동안 미친 듯이 몸을 털어 내었다. 안티포이즌 스크롤까지 써 버렸다. 방음 결계 안에 들어와서 내 청력이 적용되기 때문에 사람이 오는지 아닌지는 바로 알 수 있다. 아직까지 이 주변에 인기척은 없다.
한참 털어 내도 씻어지지 않고 냄새가 났다. 나는 결국 바지를 벗어야 하는지 마는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상의는 그럭저럭 넘어간다 치더라도 바지는 허벅지까지 물에 빠진 것처럼 되어 있었다. 이런 걸 입고 잠입하면 당장 붙잡힌다.
“크윽.”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이 없다.
잠시 후, 나는 조심스럽게 벽을 따라서 성 내부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경비병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내성 전체가 마치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사람의 존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다행이다.’
휘이잉.
약간 높은 곳을 걷고 있자니 찬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약간 추워서 다리를 떨었다. 어쩔 수 없이 지금 팬티만 입고 있는 상태다. 그것도 병사가 입는 삼각팬티. 위에는 미늘 갑옷을 입고 밑은 벌거벗은 모습이라니, 제기랄.
아마 늙어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대모험가 J. S. 옛날 일 중에 가장 부끄러운 게 뭡니까?]
틀림없이 이 일일 것이다.
[…….]
[J. S?]
[네? 그런 거 없는데요.]
난 소중하니까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만.
잡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내궁 근처의 벽까지 와 있었다. 정말로 이상한 게, 밖에는 그토록 많은 경비를 세워 두었는데 정작 내성에는 경비는커녕 사람이 없다. 그건 내 청력으로 감지했기 때문에 확실하다. 심지어 퀘른 성의 상공을 비행하고 있는 거대 비행선들조차 [안쪽]은 들여다보지 못하는 것 같다.
‘수상해서 미칠 거 같은데. 아! 저쪽!’
웅성.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방향은 서북쪽으로 250m 정도다. 한두 명이 아니라 십여 명 정도 되는 인원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숨소리가 그리 크지 않은 게 경박한 무리들은 아닌 듯싶다.
나는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붙잡았다. 하지만 곧 놓았다. 굳이 적과 마주쳐서 싸울 필요는 없다. 도리어 적을 피해서 성주가 있는 곳까지 들어가야 한다. 나는 내가 이곳에 들어온 목적을 떠올렸다.
퀘른의 성주.
그 귀족을 만나기 위해서 와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움직이는 방향과 시선을 피하며 움직였다. 내가 생각한 내궁 심층부하고는 다소 멀어지지만 돌아간다. 전투야 피할수록 좋다.
그때였다.
[대상 이누타브 블레이드에 원격 감지체크. 적 감지성공. Lv. 6의 추적(trace)이 걸렸습니다.]
“……?!”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움직이고 있던 십여 명 정도의 무리들이 뭔가 머리를 싸매고 웅얼거리더니, 이윽고 괴상한 글자가 내 눈앞에 뜬 것이다. 나도 이제 이 글자가 뭘 뜻하는지는 대충 알았다.
탐지 계열의 초능력자들이다!
뭔가 낌새를 채고 내궁을 탐사하려고 안에서 밖으로 나온 것이다. 감지한 건 뭔가의 장치가 있거나 성주의 능력이겠지. 그리고 감지하자마자 바로 내게 원격 추적을 걸어 버렸다.
“젠장!”
너무 방심했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 시작했다. 아까 해독 스크롤로 독을 해결하고 반지로 스태미나를 회복했다. 상태가 나쁘지는 않지만 좋은 것도 아니다. 정체 모를 적들과 싸우고 싶지는 않다.
타다닷.
곧 사이오니스트들이 고함을 지르며 뒤에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체력이 별로인지 약간 힘들어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이다! 잡아!”
“저 자식 어디로 들어온 거야?!”
쉬익!
까, 깜짝이야!
나는 그들과 50미터도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별안간 한 명의 사이오니스트가 내 앞에 뿅 하고 나타났다. 그러고는 손을 확하고 휘둘렀다. 나는 땅을 굴러서 피했다.
콰광.
진공파 같은 게 손에서 터져 나오더니 내가 있던 자리를 터뜨렸다. 아마 사이오니스트들도 텔레포트를 쓸 수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저 녀석들은 마법역장도 안 느껴지기 때문에 감지하기도 성가시다.
나는 재빨리 품속에서 천둥석을 꺼내서 던졌다.
“헉?”
그 초능력자는 레벨이 16이나 되는 놈이었지만 천둥석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처음은 수월하게 피하더니 유도추적 기능이 있는 천둥석에 뒤통수를 맞고 말았다. 마치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뻑.
파지직.
초능력자는 흐늘거리더니 비명도 못 지르고 기절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이놈들이 육체적으로 약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이 천둥석은 두 번이나 써서 위력이 1클래스 뇌전 주문으로 떨어져 있다. 건장한 사내라면 팔다리가 1분 동안 저려서 아픈 정도지만 이 녀석들은 허약했다.
‘오라오라. 천둥석은 네 개 더 있단 말이지∼’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계속 달렸다. 나는 ‘듣기’ 능력으로 이 근처의 지형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일부러 꺾인 곳이나 골목으로 달렸다. 한 놈씩 쫓아오며 흩어지면 그때야 천둥석을 던졌다.
휙.
파지직.
“크윽…….”
두 명까지는 쓰러뜨렸지만 다음부턴 쉽지 않아졌다. 제법 체력이 좋은 놈이 있는지 맞고도 버티는 것이다. 나는 대번에 불꽃과 번개가 날아오는 것을 동체 시력으로 간파하고 피했다. 원래 내 실력이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레벨업 하면서 신체 능력이 좋아진 것 같았다.
“둘러싸!”
사사삭.
녀석들은 근접 텔레포트를 사용해서 나를 포위했다. 나는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빼어 들고 힐끔 살펴보았다. 다섯 명이다. 하나하나의 레벨이 17에서 22 정도다. 잠시 후 초능력을 난사하면 버틸 방법이 없다.
나는 이야기를 꺼냈다.
“성주랑 만날 수 있냐?”
왠지 예상한 대답이 나왔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그게 가능할 거 같으냐?!”
그들 중에 가장 레벨이 높은 것은, 녹색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10대 후반의 여자애였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흰색 로브를 입은 그 소녀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열 받은 음성으로 외쳤다.
“이 노출변태 팬티남아!”
“…….”
뭐, 뭐라고.
“커흠.”
나이가 좀 되어 보이는 아저씨 초능력자가 헛기침을 했다. 다들 쑥스러워하고 있다. 심지어 외친 당사자도 얼굴이 빨개져 있다.
그리고 나는 순간적으로 태어난 걸 후회할 뻔했다.
어머니 왜 절 낳으셨…….
잠시 동안 내 자신의 존재 가치에 고민하다 정신을 차렸다.
‘쳇. 젠장.’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지금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야 된다. 어차피 적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수월한 문제다. 나는 긴장을 최대한 없애며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치켜들었다. 방법이 생각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나는 정신없이 떠들었다.
“날 붙잡으려면 너희들도 팔다리 하나 정도는 각오해야 할걸! 이 몸은 9클래스 마법도 쓴다! 트위스티드의 센마도 쓰러뜨렸으니까! 그리고 내 무기가 너희보다 좋거든! 공립학사에서 제일 싸움 잘하는 일진이었거든!”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왠지 가면 갈수록 말할 거리가 줄어들어서 초라한 업적이 튀어나오는 건 착각이다. 내가 설마 그렇게 자랑할 거리가 없는 인간은 아니다. 에, 그러니까 내가 좀 더 할 말이…….
……없군.
나는 어떻게든 더 말할 거리를 생각하려고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때 저 녀석들 쪽에서 동요했다. 초록 머리 여자애가 잠시 눈을 떨더니 말했다.
“네가 엘더 룬 마스터 센마를 쓰러뜨렸다고? 그렇다면 설마 그게 동방 신의 검이냐……!!”
응?
저 녀석들 센마를 아는 건가?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도 초능력자인데 이누타브 블레이드를 계속 응시하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그렇기는커녕 이누타브 블레이드의 존재를 아는 것 같다. 나는 그때 머릿속으로 에서론 자작님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사제(Priest)라고 불리는 자들은 이미 250년 전에 이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지.’
‘이 신앙의 볼모지인 폴커 왕국에서, 동쪽의 신 이누타브의 이름을 언급하고…… 그가 봉인되어 있는 봉인지인 [샘물]을 말했다는 건 우연으로라도 있을 수 없네.’

“설마 너희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떠 보았다.
“사제……인 거냐?”
그러자 녀석들은 큭, 하고 당황한 듯했다. 아마도 백색 로브를 입은 까닭은 초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다. 신을 모시는 사제이기 때문이다. 신이 그들에게 내려준 능력이 초능력일 테지. 그러자 중년 사이오니스트가 예리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저놈은 동방 신의 사자(Messenger)다! 반드시 포획해서 데려가야 해!”
“내가 사자라는 보장이 어딨냐!”
나는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초록 머리 여자애가 이죽거렸다. 꼴 보기 싫은 웃음이었다.
“9클래스 마법을 쓴다며? 척 보기에도 그런 마스터 위저드(Masterwizard)는 아닌 거 같은데 그러면 이누타브 블레이드의 힘이잖아. 신검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신에게 인정받은 인간인 사자나 반신(半神)밖에 없어!”
“…….”
나는 점차 내가 궁지에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렇다기보다 이 상황은 내가 내 무덤을 판 상황 같은데. 이대로라면 저 녀석들의 초능력이 퍼부어질 텐데 어떤 마법을 쓴다 해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필드 오브 아이스나 소울 크러쉬가 먹힌다는 보장이 없는 게, 저놈들은 텔레포트 능력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럴 때는 제일 자신 있는 걸로 가는 거다!
“훗, 어리석은 피조물들!”
“뭣!”
[허세 발동!]
피조물이란 이야기가 나오자 녀석들은 움찔했다. 살기가 읽혔지만 왠지 모르게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대충 넘겨짚은 건데 저 녀석들도 신검의 힘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나는 되는대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전설의 허세왕(Master Bluff)이니까!
“그 미천한 목숨을 빼앗기 싫어서 싸우지 않으려 했건만 어쩔 수 없는 건가…… 탈마히라가 너희 년놈들에게 부여해 준 힘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나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내가 바로 이누타브의 사자이니라!! 크와와와와왕!!!”
나는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기세 좋게 울부짖었다. 말 그대로 사자를 연상시킬 정도로 포효했다. 성대를 타고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우웃.”
그러자 사제들이 흠칫하고 물러섰다. 왠지 저 초록 머리 여자의 경우에는 단순히 내가 싫어서 물러난 거 같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나는 속으로 나 자신을 욕했다. 이건 효과도 감동도 없는 실패한 허세인 것 같다.
‘아놔!’
미친 듯이 쪽팔린다. 삼각팬티만 입고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든 채 앙천광소하는 검사라니…….
그런데 뜻밖에 그 허세가 먹혀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