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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1(2화)
제1장 레벨 1(2)
덜컹.
‘으으으.’
나는 에서론 자작님과 일대일로 앉자 초긴장했다. 나는 백인장들 하고는 친하게 지냈지만, 설마 천인장들조차도 얼굴 바라보기 힘들어하는 에서론 자작님과 개인 집무실에서 마주 보고 있게 될 줄은 몰랐다. 평소에야 웃고 이야기도 하는 사이지만 집무실에 들어오는 건 이야기가 다르다.
달그락.
아름다운 메이드가 차를 내왔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라 침을 꿀꺽 삼켰다.
전신에서 땀이 뻘뻘 난다.
에서론 자작님이 홍차를 마시고는 기품 있게 내려놓았다.
“자, 이야기를 꺼내 보게.”
“에…… 이야기라고 해도 뭐라고 해야 할지…….”
에서론 자작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먼저 말하라는 뜻인가? 어쩔 수 없군.”
스윽.
그러더니 에서론 자작님은 등 뒤에 놓아두었던 웬 거대한 장검을 꺼냈다. 저 장검은 나도 본 적이 있다. 크렌도스 성에 부임한 이후, 에서론 자작님은 늘 붉은빛의 비늘 가죽에 뒤덮인 장검을 지니고 다녔으나 한 번도 검을 꺼낸 적은 없었다. 무력을 쓸 때가 있으면 고작해야 숏소드를 쓸 뿐이었다.
그 숏소드에 장안의 대도, 마스터시프(Master thief)가 10초 만에 무릎을 꿇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지만. 마스터시프는 대륙 누구도 잡지 못했다는 최고의 도둑이다. 비록 도망치긴 했지만 암살술과 단검술로 대륙에 명성을 떨친 마스터시프조차 제압한 에서론 자작님은 크렌도스 성의 수호신으로 불린다.
턱.
둔탁한 소리.
에서론 자작님이 탁자 위에 붉은 비늘장검을 올려놓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묘한 불꽃처럼 넘실거린다. 나는 이런 보검은 처음 보는지라 침을 꿀꺽 삼켰다. 집 열 채를 팔아도 이 장검 값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에서론 자작님이 손을 떼었다.
“동쪽의 신(神), 이누타브에게서 빌린 검은 아직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네. 그렇다기보다 적이 교묘하게 형체를 감추어서 마주칠 기회조차 없었네. 내 불민함을 용서하게. 내가 이 검의 주인이 되지 못함을 인정하고, 이누타브의 사자에게 돌려주겠네.”
“…….”
이누타브의 사자?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있는 에서론 자작님이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깜짝하고 놀랐다. 어쨌든 간에 자작님이 내게 이 보검을 내어준다는 것이다.
이거 땡잡았다! ……가 아니라.
나는 크게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에ㅡ 에. 그러니까 제가 헛소리를 한 거 같은데. 하하하…….”
“세상에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에서론 자작님이 흠, 하고 턱을 만지작거렸다.
“사제(Priest)라고 불리는 자들은 이미 250년 전에 이 대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고 하지. 지금은 폴커 왕국에서도 민간신앙이 겨우 잔존하고 있는 정도이고, 폴커 왕국에서 신을 믿는 사람은 1,000명 중 한 명 꼴에 불과해.”
“…….”
네 저도 신 같은 건 안 믿어요……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되니까.
“이 신앙의 볼모지인 폴커 왕국에서, 동쪽의 신 이누타브의 이름을 언급하고…… 그가 봉인되어 있는 봉인지인 [샘물]을 말했다는 건 우연으로라도 있을 수 없네. 성왕은 이누타브와 관련된 서적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니까.”
“그, 그게.”
나는 황당해졌다. 별의별 지식이 다 나온다. 나는 일자무식은 아니지만 그리 똑똑하지 못한 병졸이다. 그런데 에서론 자작님 같은 대단한 분이 신이니 사제니 언급하는 걸 듣고 있으니 머리가 꼬이는 느낌이 든다. 신기한 건 그 내용이 머릿속에서 다 이해된다는 거지만.
[지능(Intelligence) 보정. 영구 +2 Enchantment]
응?
나는 눈을 부볐다. 방금 눈앞에 뭔가 이상한 문구가 스쳐 지나간 느낌이……?
나는 무슨 말이라도 꺼내려고 했는데 그만 이상한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건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문장을 말로 이어 나가는 작업 같았다.
“도, 동쪽의 신이 있으면 사방(四方)신이 다 있습니까?”
“흠.”
에서론 자작이 침중하게 굳은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 짓궂군. 이누타브의 사자라면 그 정돈 당연히 알고 있지 않은가? 사방신은 실존(實存)하나 지금은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일 뿐이잖나.”
“하, 하하하.”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물을 간신히 마셨다.
긴장이 되어서 머리가 빠질 것만 같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요는 이런 것이다. 에서론 자작님은 누군가 [적]을 베기 위해서 동쪽의 신 이누타브에게서 이 붉은색의 보검을 빌려왔다. 그런데 10년 동안 적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이누타브의 사자가 보검을 되찾으러 온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나는 상황 정리가 잘 되자 나 스스로 감탄했다.
내가 이렇게 똑똑했었나?
“제가 그 사신이라면…… 그냥 못 본 척하고 돌려보낼 수도 있지 않으십니까? 이 붉은 검은 굉장한 보검 같은데요.”
으아악. 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주제에 에서론 자작님을 도발하다니?!
손끝이 저려 오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하지만 에서론 자작님은 크게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천천히 대답해 주셨다.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나를 또 시험하는군. 물론 같은 용병단에 있던 릴카스나 모우겐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허나 나는 더 이상은 외적인 강함에 현혹되지 않기로 결심했네. 더욱이 이기심 때문에 신뢰를 저버리는 짓은 할 수 없지.”
“릴카스…… 모우겐…….”
나는 그 이름은 알고 있다.
릴카스.
대륙에서 다섯 번째로 등장한 9클래스의 대마법사. 동왕국 헤세랄드의 마법병단을 통솔하는 대귀족이자, 마법 ‘파이어 볼’을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이론상 [유성]을 소환할 수 있는 마법이론을 발표했다고 한다.
모우겐.
대륙에 우뚝 선 최고의 검사 중 한 명. 청은 늑대용병단의 단장이다. 모우겐은 한때 에서론 자작님과 같은 용병단에 있었던 자로서, 지금은 전설이 된 용병왕의 오른팔이었다. 용병왕의 사후 독립해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하나같이 대륙의 정상에 존재하는 강자들이다.
나는 새삼스럽게 에서론 자작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릴카스나 모우겐은 각국의 왕족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거물들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름을 마치 옆집 강아지처럼 부르고 있다.
[지식 스킬이 늘어났습니다.]
[릴카스 카르멘스 42세 헤세랄드 대마도사 Level 55
모우겐 파크 40세 청은 늑대용병단장 Level 45]
[스킬 습득과 분기획득 성공에 따른 경험치 분배]
……자꾸 이상한 글자가 눈앞에 아른거리다가 사라진다.
그러더니 확고하게 한 글자가 떠올랐다.
Level Up.
J. S.
Level 2 경비병
어, 그러니까 레벨이 오른 건가?
그럼 나 강해진 거야?
뭐가? 어떻게? 무엇이?
…….
어쨌든 레벨이 올랐으니까 뭔가 좋은 거겠지. 암, 그렇고말고. 절대 쓸데없는 일은 아닐 거야. 내가 그렇게 납득하고 있을 때 에서론 자작님이 홍차를 마시며 느긋하게 말했다. 이미 일이 다 끝났다는 여유로운 분위기셨다.
“검을 가져가게.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내가 조심스럽게 검을 집어 들며 여쭤 봤다. 이런 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아무리 에서론 자작님이라고 해도.
“……이거 가져간다고 월급 깎거나 하시는 건 아니죠?”
경비병 월급만큼은 사수한다! 나는 필사적인 눈빛을 했다. 그러자 에서론 자작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어조였다.
“응? 자네라면 더 이상 우리 성의 경비병을 할 이유가 없을 텐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당차고 씩씩하게 외쳤다. 이럴 때 점수를 따야 된다.
“나름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멸사봉공!”
“자네 말고도 좋은 경비병이 많으니까 신경 끄게.”
“…….”
저기, 에서론 자작님.
저 신의 사자라면서요? 그것도 동쪽의 신씩이나 되는…… 근데 어째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요?
에이, 설마 아니겠죠.
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저, 여비가 부족할 것 같은데 돈을 좀 보태 주시면…….”
“흠. 그것도 그렇겠군.”
에서론 자작님이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품에서 뭔가를 던져 주었다. 주먹보다 조금 더 커다란 덩어리였다. 나는 엉겁결에 받았는데, 거기서 금빛이 반짝거렸다.
……설마 이게 금, Gold라는 건 아니겠지요? 바꾸면 수백 수천이 넘어간다는 귀금속?
“…….”
“…….”
나는 눈빛으로 마구 물어보았지만 자작님은 멀뚱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어서 가라는 듯한 눈빛이다. 하긴 자작님도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을 텐데 이렇게 붙잡고 있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뭐, 그럼 사양하지 않고…….
“그럼 잘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다시 보세.”
그 말을 하는 에서론 자작님의 눈에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말에 박차를 가했다. 고향을 잠시라도 떠나는 김에 뒤를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쓸쓸히 우수를…….
……느낄 리가 있냐.
“인생 대박!!! 한 방이다!!!”
두두두두.
아싸!!!
나는 말을 타고 관도를 신나게 몰아제꼈다. 보통 말 타고 점잖게 걸어가는 거라고들 하지만, 나는 신이 났다. 이놈이 전설의 명마는 아니라도 내 기분 따라 달려 줘야 한다. 마법으로 가공되지 않은 순수한 금을 무려 주먹 한 덩이나 얻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바람이 귓가를 타고 흐른다. 나는 마냥 좋아서 헤벌쭉 웃었다. 이걸 돈으로 바꾸면 얼마냐?! 적어도 3,000골드는 되겠지? 아니 3,000골드가 뭐야.
만 골드도 넘을 거다!!
“으흐, 흐흐흐흐흐흣!!”
내 표정이 행복으로 일그러진다. 추하게 보여도 상관없어.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에서론 자작님 말로는 이누타브의 샘물은 대륙 동쪽 끝 오지에 있다는 것 같지만, 내가 뭐 하러 거기까지 가야 하나? 보검과 보물을 얻은 이상, 이것들을 팔아서 잘 먹고 잘 사는 것만 남은 것이다!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모험이 끝났다고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승마 스킬이 올랐습니다.]
[기분이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이상한 글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알 바 아니다.
“아 참.”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라레인 성 관광이나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 돈이면 어쩌면 명예로나마 작위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예쁜 여자랑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거야!
이 몸의 황금 미래, Start!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크게 말이 기우뚱하더니 몸이 허공을 날았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딱.
레드라고 자신을 밝힌 험상궂은 놈이 띠꺼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 한둘쯤 죽여 본 인상이다.
“어쩌라고.”
“…….”
산적 한 놈이 나뭇가지로 내 머리를 때렸다. 생각하던 것처럼 더럽고 냄새나는 놈들은 아니다. 오히려 나처럼 롱소드에 가죽 갑옷 입고 웬만큼 검술도 할 줄 아는 놈들이다. 녀석들은 8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몰려다니고 있었다. 레드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손 똑바로 들어. 벌 잘 서고 있으면 약속대로 목숨은 살려 준다.”
“옙.”
누구 명이라고 거역하겠습니까.
“팔을 귀에 붙인다, 실시!”
“실시!”
……젠장, 더러워서…….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관도를 말로 질주하던 나는 갑자기 웬 그물이 쳐져 있는 걸 보았다. 피하려고 해도 가속 때문에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말 다리가 그물에 걸려서 내가 튕겨 나가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한 패들이 그물로 나를 받아 주었다. 우습지만 병 주고 약 준 꼴이다. 안 받아 줬으면 난 목뼈가 꺾여서 사망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절했을 때 이놈들한테 꽁꽁 묶여서 보검과 금덩어리를 한 번에 빼앗긴 것이다. 다행히 그리 나쁜 놈들은 아닌지 손 들고 벌 서고 있으면 목숨만은 살려 준다는 것이다.
뭐, 사실은 경비순찰대한테 걸릴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겠지만.
‘근데 대체 이놈들 뭐지? 강해!’
근육이라던가 걷는 걸 보면 그 사람의 무술 실력을 대충 알 수 있다. 이놈들은 절대 먹고 살기 힘들어서 산적질을 하는 평민이나 농노가 아니다. 하나하나가 나와 같거나 그 이상의 실력을 갖고 있다. 장비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