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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Chapter 7 광란의 축제(1)
어느덧 축제날이 다가왔다.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꽤나 많은 비가 내려 축제가 취소될 수 있다는 기대를 걸었지만, 당일이 되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이고 말았다.
가을하늘처럼 맑고 높았으며 후덥지근한 습도도 축제날만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라 그런지 공기 또한 폐부를 시원하게 해 줄 만큼 깨끗했고, 그늘에만 앉으면 에이콘이나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월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이 아닐 수가 없었다.
축제날이 다가오자 그의 입장에서는 헬튼 로즈를 보호하는 일보다 고질라와 탱고를 춰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제껏 단체 생활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던 월.
과거 고려의 무신정권 시절에 동료 무사들과 수련을 쌓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단체 생활로 기억된다.
물론 당시에도 성격상 다른 이들과 그다지 어울리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일주일간 월은 끔찍한 단체 생활을 했다.
슈나비츠도 월과 같은 단체 생활을 했지만, 그는 꽤나 적성에 맞는지 땀까지 뻘뻘 흘리며 축구를 즐겼다.
하지만 월은 춤을 춘다.
여섯 명의 조원들과 함께.
여섯 명 중 조장인 캐롤을 빼고 나머지 다섯 명은 끝까지 버티다 억지로 탱고를 추게 된 경우였다.
캐롤은 북유럽 사람이다.
그런데 남미의 춤이라 할 수 있는 탱고를 무던히도 좋아한다.
또한 그녀는 꽤나 눈치가 없었다.
그녀를 제외한 다섯 명 모두가 춤을 추기 극도로 싫어하는데도 열정적으로 가르침에 임했다.
뭐라더라.
조금만 더 하면 탱고의 늪에 빠진다고 했던가?
월은 죽어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외국인과 정서가 맞지 않는 것이라 여겼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융통성이 없었고 눈치도 없었다.
아무리 다른 조원들이 싫은 내색을 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약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여자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월은 고질라의 이름이 원미라는 것을 축제 전날에서야 알았다.
사실 관심도 없었지만, 이름표를 만들어서 붙여야 했기에 싫어도 보게 된 것이다.
원미라…….
이렇게까지 했으니 원한이나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겉모습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춤을 추고 있을 때면 원미는 월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겨 왔다.
워낙 덩치가 옆으로 커서 월이 그녀를 안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무작정 덤벼들었다.
그리고 무슨 땀을 그리도 흘리는지.
월의 품 안에서 허우적거릴 때면 씻지 않은 시큼한 냄새가 콧속을 관통했다.
월은 하마터면 손바닥에서 잠자고 있던 식혼을 깨워 원미를 잡아먹으라 할 뻔했다.
그야말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너무도 거침없이 들이대서 혹여 잠식자 중에 한 명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그녀에게서 잠식자의 모습은 감지되지 않았다.
무학 법사 밑에서 3년간 수련을 쌓았을 때보다 이번 일주일간의 탱고 연습이 월에게는 더욱 고난의 연속이었다.
월은 진정한 인내라는 것을 이번 탱고 연습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는 어떤 상대가 와도 인내 대결에서만큼은 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이윽고 마지막 한 관문만이 남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인제군에 위치한 많은 학교에서 온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탱고를 춰야 한다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말이다.
축제는 오전 9시부터 시작한다.
가장 먼저 클럽 위주로 축제가 진행되고, 그다음에 각 반별 장기자랑이었다.
학교 클럽은 물풍선 게임, 축구, 야구, 배드민턴, 유령의 집, 각종 음식점 등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학교 내에 얼마의 공탁금을 지불하고 학생들이 직접적인 수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수익과 관련된 일이니 3학년 대부분이 가장 좋은 자리와 물건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날뛰어도 이길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바로 학생회장이 속한 학생회였다.
학생회란 학교에서 공부만 잘하는 학생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다.
학생들을 선도하기 위한 지도부도 학생회에 속한다.
지도부란 학교 내부에서 알아주는 주먹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학생회이 입김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장 이득이 많이 남는 음료와 분식을 확보하고 비싸게 되팔았다.
어쨌든 월이 있는 3―A반의 탱고는 그들에 의해 저 멀리 뒤로 밀리게 된 것이다.
캐롤은 갑의 횡포라면서 맞섰지만, 다른 아이들은 쌍수를 들고 학생회를 지지했다.
물론 월도 마찬가지였고.
예외라면 원미만이 무언가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3―A반의 장기자랑인 탱고는 축제의 마감 시간 30분 전에 시작하기로 하였다.
슈나비츠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학생회에 밉보였는지 가장 더울 시간인 2시에 축구 결승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축제 당일의 날씨가 아무리 선선하더라도 7월 초의 한여름이다.
슈나비츠야 그렇다 쳐도 다른 학생들은 뛰다가 더위를 먹고 열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최고 낮 기운을 경신하여 36도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슈나비츠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런 슈나비츠를 보며 월은 비웃음을 흘렸다.
더워서 그런가.
슈나비츠는 자신도 모르게 마력을 풀어 월을 덮칠 뻔하였다.
헬튼 로즈는 그런 두 사람과는 다르게 자신의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맡겨진 것은 분식점이었다.
웅장한 고상 본관 1층 앞의 천막으로 만들어 놓은 분식점에서 라면, 쫄면, 만두, 김밥, 슬러시, 냉커피, 핫바, 핫도그, 아이스크림 등을 팔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손맛이 좋다고 알려진 헬튼 로즈였기에 그녀가 분식점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녀의 옆에서는 현우와 명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한시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9시가 되어 축제가 개장했지만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은 아직 보이지가 않았다.
최소 10시가 지나야만 구경꾼들이 모이기 시작할 것이다.
작년의 경험으로 봐서는 점심시간이 되면 넓은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오후 4시가 지나면 축제의 분위기는 최고점에 이를 것이다.
한편, 월과 슈나비츠는 헬튼 로즈가 있는 분식점에 앉아 핫바를 우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마스터, 조이에게는 연락이 없었죠?”
“그래.”
“이상하네요. 내일이 계약 마지막 날인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요. 아마도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이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슈나비츠의 말에 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조이는 보름 동안만 헬튼 로즈를 보호해 주면 도주로를 확보해 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최소 3일 전에는 어떤 지시 사항을 전달해 줘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월과 슈나비츠가 모르는 어떤 음모가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들에게는 꽤나 답답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답답하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이곳은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곳이다.
공중전화는 있지만 핸드폰의 사용도 금지되었다. 10시가 되면 공중전화도 사용이 금지된다.
밤이 되면 홀로 바다에 떠 있는 무인도처럼 고립되는 것이다.
“우선은 내일까지 버틴다.”
“조이가 약속을 어기면요?”
“이곳에서 탈출한다.”
“그럼 로즈는?”
슈나비츠가 슬쩍 헬튼 로즈를 바라봤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금발 소녀였다.
거기에 상급 뱀파이어로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정이 많은 소녀였다.
그녀의 손으로 인간의 목을 물어뜯어 피를 흡수했다는 것 자체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런 그녀를 잠식자들과 사이코패스들이 가득한 이곳에 버려 두고 간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어쩔 수 없지.”
“두고 간다고요?”
“계약은 거기까지니까.”
“저 여자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해요. 저 호위병들의 재생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말이에요.”
“알아.”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세요.”
“어쩔 수 없어. 방금 내가 탈출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바보같이 너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뭘 말입니까?”
“열흘 전부터 점점 요기가 사라지고 있다.”
“그거야 느꼈죠. 요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저희에게 좋은 일 아닙니까.”
“멍청아, 요기가 하나씩 사라진다면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씩 엷어진다는 것이 말이 되냐?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이곳 학교를 둘러싼 요기를 야금야금 먹고 있다는 소리잖아.”
“아!”
그제야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슈나비츠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이 났나?”
“예. 그때 그놈.”
10년 전, 마지막으로 그림자들과 함께 악령을 퇴치했을 때의 일이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은 소련과 미국에 의해 남북한으로 분단이 되고 말았다.
혹자는 그런 현실을 보며 쓰레기 더미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당시에는 월과 슈나비츠가 보기에도 나라의 현실은 처참했다.
몽골이 쳐들어왔던 시기만큼이나,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만큼이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에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로 갈라져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만삭의 여성이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유일한 목격자는 그녀의 남편.
그는 눈이 시퍼렇게 변해서 살인자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남편도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녀와 남편이 빨갱이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상이 워낙 흉흉하다 보니 마을 사람들을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10년 뒤.
죽은 여인이 되살아났다. 한데 서양에서 말하는 언데드와는 성격이 판이했다.
일단 그녀는 스스로 생각할 줄을 알았고, 언데드보다 생명력이 월등했다.
아이와 남편을 잃었다는 분노 때문인지 그녀는 무한정으로 요기를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를 잡기 위해서 월과 슈나비츠, 그림자들은 삼 일 밤낮을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월과 슈나비츠라 하더라도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비슷하다.
그렇기에 슈나비츠가 인상을 쓰고 말았던 것이다.
“설마 또 그런 일이?”
“글쎄. 그때와는 다르게 학교 주변에는 공동묘지가 없다. 그리고 원한이 가득한 요기도 보이지가 않고. 그러나 그때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와 비슷할 정도의 악령이 나타난다면 우리 힘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어. 국가적인 힘이 동원돼야만 해.”
“내일이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겠죠.”
“모르지. 당장 오늘 밤이라도 일이 터질지.”
“흠.”
둘은 다시 핫바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적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듯했다.
“이봐요, 왜 자꾸 돈도 내지 않고 핫바를 먹는 거예요? 어머, 벌써 여덟 개나 먹었네? 이제 곧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안 되죠. 탱고 연습은 안 해요?”
헬튼 로즈가 다가와서 허리에 손을 얹고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현우와 명호도 일도 안 하고 꾸역꾸역 처먹기만 하고 있던 월과 슈나비츠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만데?”
월은 다 먹은 핫바의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음료수 하나를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헬튼 로즈였다.
아무래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표정이다.
“음료수 1,500원, 핫바 개당 2,000원. 도합 17,500원. 당장 내놔요.”
“알았어. 내지.”
고개를 끄덕인 월이 슈나비츠를 바라봤다.
아직 입안에서 핫바를 우물거리고 있던 슈나비츠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너, 어서 돈 내.”
“콜록콜록.”
슈나비츠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안에 있던 핫바를 뱉어 내고 말았다.
“아니, 마스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왜 돈을 내요? 무슨 돈이 있다고요?”
“왜 없어. 어서 내.”
“미치겠네. 잘 생각해 보세요. 저희는 이곳에 현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요. 은행에서 돈을 뽑을 생각이었잖아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 현금 인출기도 없었고.”
“그랬던가?”
“아이고, 무책임해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헬튼 로즈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무전취식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월은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카드 한 장을 꺼내서 헬튼 로즈에게 건네주었다.
“3개월로.”
아, 이래서 살인이 일어나는구나.
나쁜 사람들보다도 속을 뒤집는 사람이 훨씬 살인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헬튼 로즈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녀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꼭 쥐고 어금니를 강하게 물수밖에 없었다.
Chapter 7 광란의 축제(1)
어느덧 축제날이 다가왔다.
전날까지만 하더라도 꽤나 많은 비가 내려 축제가 취소될 수 있다는 기대를 걸었지만, 당일이 되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이고 말았다.
가을하늘처럼 맑고 높았으며 후덥지근한 습도도 축제날만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라 그런지 공기 또한 폐부를 시원하게 해 줄 만큼 깨끗했고, 그늘에만 앉으면 에이콘이나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월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이 아닐 수가 없었다.
축제날이 다가오자 그의 입장에서는 헬튼 로즈를 보호하는 일보다 고질라와 탱고를 춰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이제껏 단체 생활을 거의 해 본 적이 없던 월.
과거 고려의 무신정권 시절에 동료 무사들과 수련을 쌓은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단체 생활로 기억된다.
물론 당시에도 성격상 다른 이들과 그다지 어울리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일주일간 월은 끔찍한 단체 생활을 했다.
슈나비츠도 월과 같은 단체 생활을 했지만, 그는 꽤나 적성에 맞는지 땀까지 뻘뻘 흘리며 축구를 즐겼다.
하지만 월은 춤을 춘다.
여섯 명의 조원들과 함께.
여섯 명 중 조장인 캐롤을 빼고 나머지 다섯 명은 끝까지 버티다 억지로 탱고를 추게 된 경우였다.
캐롤은 북유럽 사람이다.
그런데 남미의 춤이라 할 수 있는 탱고를 무던히도 좋아한다.
또한 그녀는 꽤나 눈치가 없었다.
그녀를 제외한 다섯 명 모두가 춤을 추기 극도로 싫어하는데도 열정적으로 가르침에 임했다.
뭐라더라.
조금만 더 하면 탱고의 늪에 빠진다고 했던가?
월은 죽어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외국인과 정서가 맞지 않는 것이라 여겼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융통성이 없었고 눈치도 없었다.
아무리 다른 조원들이 싫은 내색을 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약 그것이 의도적인 것이라면 참으로 대단한 여자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월은 고질라의 이름이 원미라는 것을 축제 전날에서야 알았다.
사실 관심도 없었지만, 이름표를 만들어서 붙여야 했기에 싫어도 보게 된 것이다.
원미라…….
이렇게까지 했으니 원한이나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겉모습보다 훨씬 적극적이었다.
춤을 추고 있을 때면 원미는 월의 품에 자연스럽게 안겨 왔다.
워낙 덩치가 옆으로 커서 월이 그녀를 안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녀는 개의치 않고 무작정 덤벼들었다.
그리고 무슨 땀을 그리도 흘리는지.
월의 품 안에서 허우적거릴 때면 씻지 않은 시큼한 냄새가 콧속을 관통했다.
월은 하마터면 손바닥에서 잠자고 있던 식혼을 깨워 원미를 잡아먹으라 할 뻔했다.
그야말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너무도 거침없이 들이대서 혹여 잠식자 중에 한 명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그녀에게서 잠식자의 모습은 감지되지 않았다.
무학 법사 밑에서 3년간 수련을 쌓았을 때보다 이번 일주일간의 탱고 연습이 월에게는 더욱 고난의 연속이었다.
월은 진정한 인내라는 것을 이번 탱고 연습으로 알게 되었다.
이제는 어떤 상대가 와도 인내 대결에서만큼은 지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이윽고 마지막 한 관문만이 남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인제군에 위치한 많은 학교에서 온 학생들 앞에서 눈물을 머금고 탱고를 춰야 한다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말이다.
축제는 오전 9시부터 시작한다.
가장 먼저 클럽 위주로 축제가 진행되고, 그다음에 각 반별 장기자랑이었다.
학교 클럽은 물풍선 게임, 축구, 야구, 배드민턴, 유령의 집, 각종 음식점 등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학교 내에 얼마의 공탁금을 지불하고 학생들이 직접적인 수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수익과 관련된 일이니 3학년 대부분이 가장 좋은 자리와 물건을 선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날뛰어도 이길 수 없는 이들이 있다.
바로 학생회장이 속한 학생회였다.
학생회란 학교에서 공부만 잘하는 학생들이 모인 집단이 아니다.
학생들을 선도하기 위한 지도부도 학생회에 속한다.
지도부란 학교 내부에서 알아주는 주먹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학생회이 입김이 가장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장 이득이 많이 남는 음료와 분식을 확보하고 비싸게 되팔았다.
어쨌든 월이 있는 3―A반의 탱고는 그들에 의해 저 멀리 뒤로 밀리게 된 것이다.
캐롤은 갑의 횡포라면서 맞섰지만, 다른 아이들은 쌍수를 들고 학생회를 지지했다.
물론 월도 마찬가지였고.
예외라면 원미만이 무언가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결국 3―A반의 장기자랑인 탱고는 축제의 마감 시간 30분 전에 시작하기로 하였다.
슈나비츠도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학생회에 밉보였는지 가장 더울 시간인 2시에 축구 결승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축제 당일의 날씨가 아무리 선선하더라도 7월 초의 한여름이다.
슈나비츠야 그렇다 쳐도 다른 학생들은 뛰다가 더위를 먹고 열사병으로 쓰러질 수도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최고 낮 기운을 경신하여 36도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슈나비츠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런 슈나비츠를 보며 월은 비웃음을 흘렸다.
더워서 그런가.
슈나비츠는 자신도 모르게 마력을 풀어 월을 덮칠 뻔하였다.
헬튼 로즈는 그런 두 사람과는 다르게 자신의 역할을 잘 소화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맡겨진 것은 분식점이었다.
웅장한 고상 본관 1층 앞의 천막으로 만들어 놓은 분식점에서 라면, 쫄면, 만두, 김밥, 슬러시, 냉커피, 핫바, 핫도그, 아이스크림 등을 팔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지금까지 손맛이 좋다고 알려진 헬튼 로즈였기에 그녀가 분식점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그녀의 옆에서는 현우와 명호가 땀을 뻘뻘 흘리며 한시도 떨어지지를 않았다.
9시가 되어 축제가 개장했지만 구경을 하러 온 사람들은 아직 보이지가 않았다.
최소 10시가 지나야만 구경꾼들이 모이기 시작할 것이다.
작년의 경험으로 봐서는 점심시간이 되면 넓은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오후 4시가 지나면 축제의 분위기는 최고점에 이를 것이다.
한편, 월과 슈나비츠는 헬튼 로즈가 있는 분식점에 앉아 핫바를 우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마스터, 조이에게는 연락이 없었죠?”
“그래.”
“이상하네요. 내일이 계약 마지막 날인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요. 아마도 어떤 꿍꿍이가 있는 것이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슈나비츠의 말에 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조이는 보름 동안만 헬튼 로즈를 보호해 주면 도주로를 확보해 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최소 3일 전에는 어떤 지시 사항을 전달해 줘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월과 슈나비츠가 모르는 어떤 음모가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들에게는 꽤나 답답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답답하다고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다.
이곳은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곳이다.
공중전화는 있지만 핸드폰의 사용도 금지되었다. 10시가 되면 공중전화도 사용이 금지된다.
밤이 되면 홀로 바다에 떠 있는 무인도처럼 고립되는 것이다.
“우선은 내일까지 버틴다.”
“조이가 약속을 어기면요?”
“이곳에서 탈출한다.”
“그럼 로즈는?”
슈나비츠가 슬쩍 헬튼 로즈를 바라봤다.
다시 봐도 아름다운 금발 소녀였다.
거기에 상급 뱀파이어로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정이 많은 소녀였다.
그녀의 손으로 인간의 목을 물어뜯어 피를 흡수했다는 것 자체도 믿기지가 않는다.
그런 그녀를 잠식자들과 사이코패스들이 가득한 이곳에 버려 두고 간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어쩔 수 없지.”
“두고 간다고요?”
“계약은 거기까지니까.”
“저 여자 혼자서는 절대로 살아남지 못해요. 저 호위병들의 재생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말이에요.”
“알아.”
“알면서 그런 소리를 하세요.”
“어쩔 수 없어. 방금 내가 탈출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바보같이 너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뭘 말입니까?”
“열흘 전부터 점점 요기가 사라지고 있다.”
“그거야 느꼈죠. 요기가 사라진다는 것은 저희에게 좋은 일 아닙니까.”
“멍청아, 요기가 하나씩 사라진다면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씩 엷어진다는 것이 말이 되냐?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이곳 학교를 둘러싼 요기를 야금야금 먹고 있다는 소리잖아.”
“아!”
그제야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슈나비츠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이 났나?”
“예. 그때 그놈.”
10년 전, 마지막으로 그림자들과 함께 악령을 퇴치했을 때의 일이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은 소련과 미국에 의해 남북한으로 분단이 되고 말았다.
혹자는 그런 현실을 보며 쓰레기 더미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당시에는 월과 슈나비츠가 보기에도 나라의 현실은 처참했다.
몽골이 쳐들어왔던 시기만큼이나,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만큼이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에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로 갈라져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만삭의 여성이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유일한 목격자는 그녀의 남편.
그는 눈이 시퍼렇게 변해서 살인자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남편도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녀와 남편이 빨갱이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상이 워낙 흉흉하다 보니 마을 사람들을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10년 뒤.
죽은 여인이 되살아났다. 한데 서양에서 말하는 언데드와는 성격이 판이했다.
일단 그녀는 스스로 생각할 줄을 알았고, 언데드보다 생명력이 월등했다.
아이와 남편을 잃었다는 분노 때문인지 그녀는 무한정으로 요기를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그녀를 잡기 위해서 월과 슈나비츠, 그림자들은 삼 일 밤낮을 치열하게 싸워야만 했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월과 슈나비츠라 하더라도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와는 조금 다르지만 전체적인 느낌이 비슷하다.
그렇기에 슈나비츠가 인상을 쓰고 말았던 것이다.
“설마 또 그런 일이?”
“글쎄. 그때와는 다르게 학교 주변에는 공동묘지가 없다. 그리고 원한이 가득한 요기도 보이지가 않고. 그러나 그때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와 비슷할 정도의 악령이 나타난다면 우리 힘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어. 국가적인 힘이 동원돼야만 해.”
“내일이 되면 모든 것이 드러나겠죠.”
“모르지. 당장 오늘 밤이라도 일이 터질지.”
“흠.”
둘은 다시 핫바를 입안에 넣고 우물거렸다.
적의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듯했다.
“이봐요, 왜 자꾸 돈도 내지 않고 핫바를 먹는 거예요? 어머, 벌써 여덟 개나 먹었네? 이제 곧 사람들이 몰려올 텐데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안 되죠. 탱고 연습은 안 해요?”
헬튼 로즈가 다가와서 허리에 손을 얹고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현우와 명호도 일도 안 하고 꾸역꾸역 처먹기만 하고 있던 월과 슈나비츠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만데?”
월은 다 먹은 핫바의 꼬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음료수 하나를 들고 꿀꺽꿀꺽 마셨다.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헬튼 로즈였다.
아무래도 머리끝까지 화가 난 표정이다.
“음료수 1,500원, 핫바 개당 2,000원. 도합 17,500원. 당장 내놔요.”
“알았어. 내지.”
고개를 끄덕인 월이 슈나비츠를 바라봤다.
아직 입안에서 핫바를 우물거리고 있던 슈나비츠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너, 어서 돈 내.”
“콜록콜록.”
슈나비츠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입안에 있던 핫바를 뱉어 내고 말았다.
“아니, 마스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왜 돈을 내요? 무슨 돈이 있다고요?”
“왜 없어. 어서 내.”
“미치겠네. 잘 생각해 보세요. 저희는 이곳에 현금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요. 은행에서 돈을 뽑을 생각이었잖아요. 그런데 막상 와 보니 현금 인출기도 없었고.”
“그랬던가?”
“아이고, 무책임해라.”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헬튼 로즈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무전취식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월은 전혀 기죽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카드 한 장을 꺼내서 헬튼 로즈에게 건네주었다.
“3개월로.”
아, 이래서 살인이 일어나는구나.
나쁜 사람들보다도 속을 뒤집는 사람이 훨씬 살인 충동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을 헬튼 로즈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녀는 부들거리는 주먹을 꼭 쥐고 어금니를 강하게 물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