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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Chapter 6 월의 고민(3)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이라 여겼다.
의뢰 금액도 상당했고, 난이도는 A 클래스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무난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잠식자들이 찾아올 것이라 여겼건만, 첫날 이후는 그런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잠식자들의 소망은 불사(不死)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인류가 잉태된 후, 사유 재산을 가지고 난 후부터 발생한 악의 마음이었다.
죽은 후까지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순장이라는 극악무도한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
오랜 시간 내려온 위정자들의 꿈.
그리고 힘을 가진 잠식자들의 꿈이기도 하다.
상급 뱀파이어인 헬튼 로즈가 커밍아웃을 한 순간부터 그들은 합법적으로 불사가 될 기회를 손에 넣었다.
한데 일분일초라도 아까운 상황에서 잠잠한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의 꿍꿍이를 알 수 있는 날은 내일모레로 다가온 30년 전통의 학교 축제날이었다.
학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을에서 노인부터 어린아이들까지 자그마치 300명이나 몰려온다고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제군에 있는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좀처럼 개봉되지 않는 토이즈 국제고등학교를 구경하기 위해 대량으로 몰릴 것으로 보였다.
물론 토이즈 국제고등학교를 지망하는 중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속셈이 명확하지 않기에 더욱 불안했다.
하지만 헬튼 로즈에 대한 소문을 들은 잠식자들이 잠입해 올 것은 확실했다.
왜 굳이 학교를 개방하는 것일까?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헬튼 로즈 하나만 잡기 위해서는 축제 행사 따위는 없는 것이 훨씬 편할 텐데.
어떤 식이든 축제날 마각이 드러날 것이다.
문제는 그들 중에서 과연 누가 잠식자인지 찾아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월과 슈나비츠도 숨을 죽이고 있는 잠식자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여 붉은 보름달이 떠서 잠식자들의 요기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지면 모를까.
“싫어.”
월은 팔짱은 낀 채 경진의 말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경진은 3―A반의 반장인데,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쓴 것만으로도 공부벌레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더군다나 몸집도 작고 가냘파서 조금 세게 밀면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헬튼 로즈와 함께 선생님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학생이기도 했다.
맡은 일에 대해서 책임감이 강하고 친구들과의 신뢰도 깊었다.
한마디로 늑대의 우두머리와 같은 월과는 상당히 다른 성향의 남자였다.
그런 경진이 다가와 월에게 무엇인가 부탁을 한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월은 두 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조건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번 기회로 반 친구들과 친해졌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이번 축제에 동참하지 않을래?”
경진은 반쯤 애원조로 말했다.
꼭 참여시키고 말겠다는 신념이 담긴 강한 눈빛이지만 말투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싫어.”
그래도 안 될 일은 안 될 일이다.
월로서는 도저히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
슈나비츠와 헬튼 로즈는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옆에서 배꼽을 잡으며 웃고 있었다.
저것들을 죽여, 살려?
슬금슬금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월이었다.
“그러지 말고 제발 다시 한 번 재고해 줘. 너밖에 없단 말이야. 네가 하지 않으면 다른 한 명이 축제에 참가하지 못한다고.”
월은 경진이 가리킨 학생을 슬쩍 쳐다봤다.
그러고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싫어.”
“제발 그러지 말고 부탁이다. 이러다가는 너 때문에 우리 반이 공중분해가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나보고 이상한 옷을 입고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탱고를 추라고? 저 여자하고?”
월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이쪽을 힐끗힐끗 쳐다보며 과자를 입으로 쏟아붓고 있는 여학생을 가리켰다.
일명 고질라.
키는 160㎝가 조금 넘지만 몸무게는 무려 100㎏이 훌쩍 넘어 보였다.
집에서 꽤나 많은 용돈을 보내오는지 1교시부터 종례까지 단 한시도 손에서 음식을 놓는 일이 없었다.
뚱뚱해서 그런지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사실 고질라라는 별명보다는 하마라는 표현이 더 알맞겠지만, 이미 그녀의 별명은 괴수로 낙인찍히고 난 후였다.
“저 여자라니. 쟤도 우리 반 친구야.”
“그럼 네가 저 여자하고 탱고를 추면 되겠네.”
“나야 당연히 그러고 싶지. 그러고 싶은데, 난 반장이라고. 축제 운영으로 할 일이 태산이야.”
경진은 정말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월은 지금 그가 하는 행동이 모조리 가식처럼 느껴졌다.
아니, 아마도 가식일 확률이 매우 높을 것이다.
3―A반뿐 아니라 3학년 전체가 고질라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 하니까.
“그럼 바꿔 줘.”
“뭘?”
“저놈하고.”
월은 슈나비츠를 가리켰다.
슈니비츠는 이미 3학년끼리의 결승전인 축구를 하기로 내정이 되어 있었다.
만약 잠을 자지만 않았더라면 슈나비츠 대신 축구 경기에 참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월는 축제에 참가할 학생들을 정하는 시간에 잠이 들어 있었고, 마지막 남은 선택지는 고질라와의 탱고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꼽을 잡고 웃던 슈나비츠가 발끈하며 벌떡 일어섰다.
정말로 얍삽한 마스터다.
설마 물귀신처럼 자신을 끌고 들어갈 줄 예상을 못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항상 과묵함과 냉정함으로 무장을 했던 월이다.
그런 월이 근래 들어 부쩍 치사하고 얍삽해진 것 같았다.
짧은 기간이나마 철없는 고등학생들과 어울린 영향일지도.
어쨌든 그건 그거고, 슈나비츠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저는 이미 축구를 하기로 되어 있어요.”
“안 돼.”
어처구니가 없다.
안 되긴 뭐가 안 된다는 말인가.
강짜도 이런 생강짜가 없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것만큼은 양보하지 못합니다. 본래 제 꿈이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니까요.”
이번에는 월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별 그지 같은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한다.
다급하다 보니 월드컵까지 들먹이는 꼴이라니.
아무리 뱀파이어와 인간의 혼혈이라지만 그 역시 불사자다.
그런 그가 월드컵에 나갔다가는 당장에라도 성 바티칸에서 수많은 기사들이 몰려나와 그를 쫓을 것이다.
어쩌면 수백 명의 기사들이 한국으로 입국해서 뱀파이어의 씨를 말릴지도 모르고.
“바꿔.”
“절대로 못합니다.”
월의 브라운 아이즈가 빛을 냈다.
슈나비츠 역시 홍안을 번뜩이며 맞받아쳤다.
상당한 전투력을 가진 적과 싸울 때도 보이지 않던 격렬한 소용돌이가 둘 사이에서 감지되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경진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일촉즉발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들의 기 싸움을 바라보던 헬튼 로즈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남자들은 너무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건다.
월과 슈나비츠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공할 전투력을 보유한 그들이지만 이런 사소한 일에 감춰진 내기까지도 방출할지는 몰랐다.
“월.”
헬튼 로즈가 월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러고는 봄바람의 꽃향기처럼 나긋나긋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어. 죽어도 바꿀 거야. 탱고 따위는 절대 출 수 없어.”
“어이고, 탱고 배우는 사람들 서러워서 살겠어요? 나름 정렬의 무도인데.”
“그딴 것 알 게 뭐야. 반드시 바꾸고야 만다.”
월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슈나비츠를 끊임없이 노려봤다.
여차하면 무력으로 바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지 마요, 월. 지금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남은 저 여학생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아마 평생 상처 입을지도 몰라요.”
“알 게 뭐야. 고질라와 손을 잡았다가 그대로 잡아먹힐지도 몰라.”
이걸 농담이라고 하는 걸까?
뭐, 썰렁한 농담이라도 이게 어디냐.
헬튼 로즈는 월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러지 말아요. 당신이 진정한 강자라면 남는 자의 슬픔과 남겨진 자의 아픔도 알아야 하잖아요. 당신이 지금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 혼자만 남게 되요. 어쩌면 오늘 일을 그녀는 평생 원망할지도 몰라요. 누구도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다는 자괴감과 함께 그녀의 증오 속에는 오직 당신만이 남게 되겠죠. 마지막까지 손을 내밀기 바랐던 존재니까.”
“협박인가?”
“에이, 설마요. 잘 생각해 보라고요.”
“으음.”
헬튼 로즈의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불길했다.
화장실에 가서 큰 것을 보고는 닦지 않고 나온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기는 했다.

당시 월은 조이의 선대 중개자로부터 의뢰를 받고 동해로 향하고 있었다.
의뢰 내용도 특이하여 설악산 신수(神獸) 중 하나인 토끼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삶이 삶인지라 월도 신수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모든 신수는 100년 이상 산의 정기를 받아야만 태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신수들은 대체로 월등한 육체와 지능을 갖췄다.
그렇기에 토끼와 같은 작은 동물들은 신수가 되기에 극히 어려웠다.
토끼가 신수로 있는 곳이라…….
월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가 토끼를 지켜야 되는 이유는 간 때문이었다.
동해 용왕이 심하게 아파 낫게 하기 위해서는 신수인 토끼의 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파견된 용왕의 대신이 바로 거북이었다.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거북이는 애완용으로 키울 수 있고 귀엽게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거북이란 존재는 200년을 넘게 산다.
그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자연스럽게 바다의 정기를 받아 신수가 되기도 한다.
당연히 동해 용궁에는 거북이가 가장 많은 신수였다.
일단 신수가 되면 변신술을 쓸 수 있게 된다.
또한 내공이 자연적으로 생겨나서 인간들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선보일 수가 있었다.
지옥의 아귀인 식혼을 마음껏 부리고 무학 법사에게 태진심법(太震心法)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동해 용궁 좌천장군과의 승부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좌천장군이 바로 거북이인 것이다.
그렇기에 월은 한 가지 꾀를 냈다.
그것은 바로 신수끼리의 경주.
토끼와 거북이가 설악산을 완주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설악산의 모든 신수들은 토끼가 이길 것이라 예상했다.
단 한 존재, 거북이만 빼고.
월은 거북이에게 속삭였다.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토끼가 길을 가다 낮잠을 자게 될 것이라고. 또한 잠이 잘 오는 음식을 듬뿍 먹여 놨다고.
거북이는 크게 기뻐했다.
속도의 상징인 신수 토끼를 자신의 느린 걸음으로 잡을 수 있다는 상상만 해도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거북이는 월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둘의 경주는 시작됐다.
그리고 경주는 아주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토끼는 잠이 들지 않고 그대로 결승점을 통과한 것이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북이는 대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문이었다.
결국 거북이는 빈손으로 용궁으로 돌아갔고 토끼는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이후 토끼의 간을 얻지 못한 용왕은 크게 앓았다고 했다.
다른 거북이가 토끼의 간을 얻어 오지 않았다면 용왕은 그대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한데 좌천장군 거북이는 그 일로 인해 진짜 좌천이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월에 대한 거북이의 원한이 시작되었다.
월이 동해 근처에만 오면 어김없이 거북이가 등장했다.
월이 탄 배가 침몰되기도 하였고, 인어들이 나타나 그를 바닷속으로 끌어당기기도 했다.
아무리 불사자인 월이라 해도 여기서 죽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북이의 원한은 깊었다.
이후 월은 동해 근처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가 동해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될 수 있게 된 날은 거북이가 수명을 다해서 죽었을 때부터였다.

월은 고질라를 바라봤다.
만약 저 고질라가 자신에게 또 다른 원한을 품게 된다면 어찌 될까?
설마 악령으로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겠지?
크게 한숨을 내쉰 월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할게.”
“정말이지?”
월의 승낙을 받은 경진이 크게 기뻐했다.
옆에 있던 슈나비츠와 헬튼 로즈도 손바닥을 치면서 잘 생각했다며 응원을 해 줬다.
슈나비츠, 이 개자식.
이놈은 진심으로 응원을 해 주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뛸 종목인 축구와 바뀔까 봐 억지로 응원을 해 주는 것이었다.
월은 슬그머니 고질라를 바라봤다.
아직도 과자를 입에 물고 있다.
얼마나 포화 상태로 음식을 먹어대는지 얼굴에는 기름기가 가득했으며, 청춘의 꽃 여드름이 한라산처럼 사방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월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빌어먹을.
나, 정말 잘하는 일일까?
이 나이에 탱고라니.
그것도 고질라와 함께.
어쩐지 월은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기분을 느낄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