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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Chapter 6 월의 고민(2)
슈나비츠는 도저히 지겨운 수업 시간을 이겨 내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수학은 어렵다.
도저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영어는 그런대로 버틸 만하다.
슈나비츠는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생존에 필요한 다국적 언어를 익혔으니 말이다.
화학과 물리는 외계어다.
도대체 왜 이런 학문을 만들어 냈는지 슈나비츠는 절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연신 아이슈타인을 욕했다.
다른 대부분의 과목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수학 시간은 쥐약이었다.
칠판에 적힌 숫자들이 수마(睡魔)가 되어 덤벼든다.
이를 악물고 버텨 보지만, 수마 앞에서는 제아무리 슈나비츠라 할지라도 이겨 낼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더니, 그 말이 진실이다.
어찌 이토록 무거울 수가 있단 말인가.
슈나비츠는 슬쩍 옆자리에 앉은 월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끼고는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경청한다.
도대체 알아듣고는 있는 것일까.
공부까지 잘하는 월이라고 생각하니 다시금 심사가 뒤틀렸다.
그나저나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다.
끝내 슈나비츠의 머리가 책상에 박히고 말았다.
드르렁, 드르렁.
작게 코까지 곤다.
그런 슈나비츠를 보며 헬튼 로즈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슈나비츠나 월과는 다르게 모범생의 전형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것처럼 치마를 짧게 줄이지도 않았고, 머리도 단정했다.
화장도 하지 않고 입술에 뭔가를 바르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반의 분위기가 달라질 정도였다.
고약한 심보를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녀와 같은 공간에 있다면 싫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보는 남학생들의 눈은 첫사랑에 빠진 그것이다.
여학생들이 보는 눈은 동경이었고, 선생들이 보는 눈은 대견함이었다.
그런 그녀가 전학생인 월과 슈나비츠를 꽤나 신경 쓰니 남학생들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반을 주름잡고 있던 민수가 있었다면 진작 사단이 났을 테지만, 그는 전학을 가고 없었다.
덕분인지 3―A반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딩동딩동―
4교시가 끝나며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로즈, 우리 밥 먹으러 가자.”
친구들이 로즈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로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친구들은 실망한 얼굴로 자리를 떠야만 했다.
로즈는 월과 슈나비츠가 전학을 온 다음 날부터 그들을 챙겼다.
처음에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라는 의미로 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들과 가깝게 지냈다.
아이들에게는 로즈가 월과 슈나비츠 중 누군가에게 반한 것이 아닌가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 소문은 금방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
둘 모두 키가 상당히 크고 몸도 좋다.
월은 야성미가 넘쳤고, 슈나비츠는 모델 뺨치게 생겼다.
그러나 그들이 하고 다니는 행색이 문제였다.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을 머리스타일과 만화 캐릭터가 들어간 가방을 들고 다닌다.
제정신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짓이었다.
황당한 것은 월과 슈나비츠, 두 명 다 그것이 왜 문제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월, 슈나비츠. 일어나요. 점심시간이에요.”
헬튼 로즈가 월과 슈나비츠를 흔들어 깨웠다.
꿋꿋하게 버티던 월도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현우와 명호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헬튼 로즈가 전투력이 없기는 하나 고귀한 어둠의 귀족이다.
평범한 뱀파이어와는 태생 자체가 달랐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
뱀파이어로 눈을 뜨면서부터 가지게 된 가공할 능력은 여타 뱀파이어와 비교를 불허한다.
인간이었다면 로열 블러드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다.
바로 왕족으로서.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1587년, 도릴 지방의 약 200여 촌락에서 수백 명이 넘는 여성들이 마녀로 화형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작위로 벌어지는 종교재판으로 인해 사람들은 공포에 젖어 숲 속으로 도망을 쳤고, 헬튼 로즈는 그들과 함께 있었다.
숲 속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겨우 200명도 되지 않는 나약한 사람들뿐이었지만, 독일군은 그들을 죽이기 위해 자그마치 천 명이나 되는 중무장한 군사들을 출진시켰다.
어쩔 수 없이 모두가 죽기만을 기다렸다.
그때, 한 사내가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로이라는 평범한 대장간의 아들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활과 검을 주었고, 숲 안으로 진입하는 독일군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일개 평민들이 잘 훈련된 정규 병사와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헬튼 로즈가 나섰다.
팔다리가 잘린 마을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던 사람들은 언데드처럼 벌떡 일어나 마녀사냥을 하던 독일 군대와 싸웠다.
독일 군대가 아무리 그들을 조각내도 계속해서 되살아났다.
그날, 독일 군대는 지옥을 맛봤다.
결국 천 명에 달했던 독일 군대는 겨우 2백 명만이 남아서 퇴각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헬튼 로즈의 힘.
세상 모든 위정자들이 그녀를 탐내는 이유였다.
“으으음.”
헬튼 로즈가 월과 슈나비츠를 한참 흔들자 두 사람은 그제야 간신히 눈을 떴다.
“점심 먹으러 가자고요.”
“벌써 점심시간인가.”
“배 안 고파요?”
“고파.”
월과 슈나비츠가 건장한 체격을 일으켰다.
둘이 같이 일어서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내공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지만 은연중 그동안 쌓아 왔던 기운이 조금씩 밖으로 배출되는 것이다.
“아하하하하.”
그러자 또다시 헬튼 로즈의 웃음이 터졌다.
명호와 현우는 그녀의 웃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반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기는 하지만 엷은 미소만 보일 뿐, 이렇게 노골적으로 웃음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죽하면 그녀의 별명이 얼음공주였겠는가.
그런데 이 멀대 같은 두 자식을 만나고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폭소를 터트렸다.
도대체 이자들이 뭐기에.
“왜?”
그녀가 왜 웃는지 모르는 월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아하하하. 아오, 미치겠네. 너무 귀여워.”
귀여워?
천 년 만에 처음 듣는 소리였다.
고려의 무사였을 때는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고 조선시대에도,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런 소리는 단연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귀여워?”
“아호, 미치겠네. 일단 그 입술에 묻은 침 좀 닦아요.”
침.
월과 슈나비츠는 서로를 바라봤다.
월은 오른쪽 입술에, 슈나비츠는 왼쪽 입술에 흘러내린 침이 굳어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엎어져 있던 책에는 침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첫날, 무지막지한 힘을 보여 주던 때와는 너무도 비견되는 모습이었다.
“마스터, 쪽팔리게 침이 뭡니까?”
“그러는 너는?”
“저는 잠식자들을 방심시키기 위해서 이런 겁니다.”
변명은.
“나도 그렇다.”
이상한 신경전이다.
“됐어요, 됐어. 어서 밥 먹으러 가요.”
그런 월과 슈나비츠를 보며 한참을 웃던 헬튼 로즈가 둘의 손을 잡고 교실 밖으로 이끌었다.
월과 슈나비츠는 서로를 노려본 채 어정쩡한 자세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국제고등학교라 그런지 식단도 마음에 들었다.
대부분의 식단이 배식이 아닌 뷔페식이었다.
돼지고기, 닭고기, 좀처럼 먹을 수 없는 한우와 양고기까지 식단에 놓여 있었다.
다른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봤다면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불평불만을 내뱉었을 것이다.
아니, 미디어에서 취재를 나오더라도 깜짝 놀랄 것이다.
이곳뿐만이 아니라 다른 국제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99퍼센트의 사람들만이 모르는, 그들만의 세상인 것이다.
물론 이곳에 있는 학생들 역시 그것이 특권인 줄 모르고 당연하다고 여겼다.
“맛있죠?”
헬튼 로즈가 빙긋거리며 월에게 물었다.
“그렇군.”
어쩐지 삐딱한 느낌에 월이었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일개 학교에서 이런 식단을 마련할 수 있다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등록금을 받을 것일까. 아마도 교장과 극소수의 교직원들 빼고는 모를 것이다.
또한 교장과 학부모와의 알려지지 않을 거래가 있을 테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빌어먹을 학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오직 그들만의 세계이며, 다른 중산층들의 가입을 거부하는 곳이다.
역겨운 곳이다.
“월은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드러나요. 그래도 일단은 든든하게 넣어 두세요.”
“내 얼굴에 뭐가 드러나는데?”
“특권층에 대한 분노. 그들만의 세상에 대한 분노요.”
“네가 어떻게 알지?”
“그거야 저도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으니까요. 세상의 쓴맛을 많이 봤다고 해야 할까.”
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녀의 능력으로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기적이다.
그동안 얼마나 치욕스러운 꼴을 당했을지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런 일이야 예전부터 겪어 왔는데 뭘. 위정자들의 탐욕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월은 아무렇지도 않게 비싼 음식들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나저나 이번 축제는 어떡할까요? 전원 참석이라는데.”
축제?
월은 갑자기 목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컥컥거리자 헬튼 로즈가 급히 그에게 물을 가져다주었다.
명호와 현우가 자신들이 하면 되는 일을 그녀가 했다고 핀잔을 줬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무슨 축제?”
놀란 것은 월뿐만이 아니었다.
슈나비츠도 먹던 음식을 입으로 뱉어 낼 정도였다.
“하여간, 이럴 줄 알았어요. 당신들, 잠에 취해 있느라 못 들었죠? 이번 주 금요일이 학교 축제잖아요. 30년간 이어 온 전통의 축제라던데.”
이런 제기랄.
설마 학교 축제일지는 상상도 못했다.
어쩐지 겨우 보름만 헬튼 로즈를 보호해 주고 받는 인건비가 상당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날 이런 트릭이 있을 줄이야.
“표정 보니 괜한 일에 끼어들었다며 후회하는 것 같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매년 있는 학교 축제이기도 하고.”
“알았어.”
월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런 월을 보며 헬튼 로즈는 무엇이 재미있는지 싱글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제 목숨이 가장 왔다 갔다 하는 날이기도 하죠.”
“빌어먹을.”
“잘 부탁드려요.”
월은 헬튼 로즈의 눈을 바라봤다.
약간 장난스러움이 있지만 놀리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믿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알기에 저런 눈빛을 보내는 것일까?
왜 나를 믿는 것일까?
정말로 믿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오직 헬튼 로즈밖에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월은 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축제가 벌어지는 것은 일주일 뒤.
남은 계약 기간도 일주일이다.
그날까지만 헬튼 로즈를 보호하면 월과 슈나비츠의 의뢰는 끝이 난다.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말아요. 잘될 것이라고 믿으니까요.”
헬튼 로즈는 월을 보며 싱그러운 아침 햇살과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떤 방면에서는 참으로 대단한 여자였다.
도대체 무슨 배짱인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