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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Chapter 5 스쿨 오브 서바이벌(2)
뱀파이어와 비교도 안 되게 열등한 종족이라 여겼던 인간들.
헬튼 로즈는 한 번도 인간들을 무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혈족들은 아니다.
그들은 인간을 하등 종족으로 규정하고 지배하기를 바랐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세상은 인간들의 차지다.
뱀파이어와 수많은 잠식자들이 이를 악물었지만, 단 한 번도 인간들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그만큼 인간의 저력이라는 것은 대단했다.
헬튼 로즈가 바라는 것은 뱀파이어와 인간들의 공존이다.
그렇기에 목숨을 걸고 커밍아웃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인간들의 이기심과 뱀파이어들의 우월감.
결국 그녀는 양쪽으로부터 모두 배척을 받았다.
지금까지는 뱀파이어들의 보호를 받아 왔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뱀파이어들은 헬튼 로즈의 능력을 인간들에게 넘기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습격을 해 왔다.
이제 믿을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 헬튼 로즈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벽에 붙어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지금 시각은 10시 50분.
10시가 넘으면 사감도 방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한데 누굴까?
문밖에서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불길한 기운.
헬튼 로즈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같은 방의 룸메이트였던 제인은 일주일 전에 사라졌다.
들리는 말로는 급히 서울로 전학을 갔다고 하지만 꺼림칙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제 이 방에 남은 사람은 헬튼 로즈, 한 명뿐이었다.
누군가 침입하여 그녀를 힘으로 제압한다면 알아차릴 수 있는 친구들은 없었다.
맞서서 싸울 수도 없었다.
그녀의 최대 약점.
그것은 바로 전투력이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른 뱀파이어와 다르게 싸울 수 있는 능력이 하나도 없었다.
대신 방어형 뱀파이어 중에서는 극상에 위치한다.
그녀가 후방에 포진만 하고 있다면 아군의 전투력은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 높일 수가 있었다.
문제는 혼자 있는 경우다.
그녀 혼자서는 일반 연약한 소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남녀 기숙사는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호위병인 현우와 명호는 남자 기숙사에 있었다.
한마디로 종례를 하고 나서 기숙사에 혼자 있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가장 취약점인 셈이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호신용 스프레이와 전기 충격기를 가지고 있지만, 잠식자들을 상대로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녀는 호신용 스프레이를 들고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나야, 사감.”
조금은 히스테리적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사감의 음성이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문 좀 열어 봐. 소포가 왔어.”
소포? 자신에게 소포를 보낼 사람이 있던가.
머릿속을 모두 뒤져도 그럴 사람은 생각나지 않았다.
“내일 받으면 안 돼요?”
“늦은 시간에 소포가 잔뜩 와서 그래. 사감실에 쌓아 두기에는 너무 많아. 지금 받았으면 좋겠다.”
“알겠어요.”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문을 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사감에게 찍히기라도 하면 학교생활이 상당히 곤란해질 테니까.
덜컹.
힐튼 로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보통 잠금장치만 해놓지만 그녀는 2중으로 문을 잠그고 있었다.
문을 열자 날카로운 인상의 사감이 보였다.
머리를 올백으로 단정하게 넘기고 날카로운 뿔테 안경을 썼다.
항상 검은색 정장을 입고 다니며 5㎝ 하이힐을 신는다.
한 번도 이런 차림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인간이다 보니 혹여 뇌는 컴퓨터로 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감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 헬튼 로즈는 나머지 잠금장치를 풀었다.
“소포는 어디…… 헉!”
힐튼 로즈는 너무 놀라서 입을 손으로 막고는 뒤로 몇 발 물러섰다.
사감의 입으로 손이 뚫고 들어와 있던 것이다.
그녀의 입이 위아래로 벌어졌다.
누군가 그녀를 가지고 인형처럼 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 왜 놀라니? 소포 받아야지.”
사감의 뒤통수를 손으로 뚫고 손으로 입을 움직이며 그녀의 목소리를 누군가 흉내 냈다.
“누, 누구야!”
그때, 사감 선생의 옆으로 불쑥 젊은 사내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세련된 안경을 쓰고 은은한 남자만의 향수 냄새가 풍겼다.
하나 사감 선생의 입에서 풍기는 피 냄새와 뒤섞여 좋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수, 수학 선생님.”
수학 선생 김덕기.
그는 한 달 전에 새로 부임을 해 온 수학 선생이었다.
잘생긴 외모에 총각이라는 타이틀로 인해 여학생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에 더해서 깔끔한 매너와 유머까지 갖췄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까지 곧잘 흉내를 내기도 했는데, 지금도 그가 사감의 목소리를 따라 한 것이었다.
인간의 두개골을 손가락으로 뚫을 수 있는 자는 흔치 않다.
오랜 시간 수련을 해 오거나 전문적으로 격투기 훈련을 받은 자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수학 선생은 사감의 두개골을 일격에 뚫은 것도 모자라 한 팔로 무너진 그녀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런 능력을 가진 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잠식자.
잠식자들 중에서도 살인에 대한 쾌감을 잊지 못해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는 이상 성욕 변태의 욕구를 가진 자가 분명했다.
“자, 내가 소포야. 어서 와서 받아 가.”
수학 선생은 사감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흉내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업 때 봤던 온화한 눈빛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마약을 한 것처럼 반쯤 맛이 가 있었다.
“다가오지 마세요.”
“어마, 왜 이러니. 어서 소포를 받으라니까.”
완전히 미쳤다.
치이익―
헬튼 로즈는 수학 선생의 눈을 향해 손바닥에 쥐고 있던 호신용 스프레이 뿌렸다.
그러나 호신용 스프레이에서 분사된 액은 김덕기 수학 선생에게 닿지가 않았다.
어느새 사감 선생을 자신의 눈앞으로 끌어온 것이다.
그녀의 스프레이는 죽은 사감 선생의 얼굴에 명중했다.
“어머나, 따가워요. 따가워 미치겠쪄요. 우리 착한 로즈 학생이 미쳤나 봐요.”
“누가 미쳤는지 모르겠네.”
헬튼 로즈가 연신 뒤로 물러났다.
저 빌어먹을 선생에게 잡히면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될지 대충 상상이 갔다.
자신을 몸을 꼼짝 못하게 하고는 천천히 살과 뼈를 분리하겠지.
이 방에는 아무도 없으니 밤새 가지고 놀 생각인지도 모른다.
잠식자인지 사이코패스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자에게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녀는 연신 뒤로 물러나다 급히 몸을 틀어 김덕기 선생 옆구리에 전기 충격기를 먹였다.
찌지지지지직.
“으가가가가가!”
그가 마구 몸을 떨었다.
사람의 몸으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개조한 전기 충격기. 어지간한 사람은 3초만 닿아도 심장이 멎을 정도로 강력한 무기였다.
아무리 잠식자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충격이라면 최소 몇 분이라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그 틈에 방에서 나가 현우와 명호를 찾으면 된다.
그들만 있다면 어떤 잠식자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케케케케. 소용 없쩌요. 저는 아프지 않아요.”
“이런 괴물 같은…….”
잠시 몸을 떨던 김덕기가 사감 선생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헬튼 로즈를 향해서 광포하게 덤벼들었다.
그때, 헬튼 로즈의 눈빛이 빛났다.
그녀는 뒤로 넘어가며 김덕기 선생의 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한쪽 발을 들어 선생의 배에 가져다 댔다.
유도 기술 중에 하나인 배대뒤치기였다.
그녀의 기술에 정확히 걸린 김덕기 선생의 몸이 풍차처럼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와창창!
그러고는 창문을 깨고는 밖으로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헬튼 로즈는 공격력이 약하다.
그렇다고 주구장창 호위병들만을 만들어 몸을 사리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대한민국에 정착하기까지 수많은 격투기를 배웠다.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이제껏 쉬지 않고 갈고닦은 셈이다.
대부분의 잠식자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만 보고 약하다고 판단을 했다.
만약 그녀가 순식간에 이런 기술을 쓸 줄 안다는 것을 알았다면 최소한의 방심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비밀 중 하나였다.
“헉헉헉헉.”
갑작스레 큰 기술을 써서 그런지 헬튼 로즈는 숨을 급하게 쉬었다.
방 안은 온통 망가져 있고 사감 선생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었다.
꽤나 시끄러웠을 텐데.
그런데도 한 명의 학생도 나타나지 않는다.
뭔가 잘못됐다.
그녀는 창문 밖으로 다가갔다.
김덕기 수학 선생이 어떻게 됐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보통의 잠식자들은 월등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처럼 절대적인 재생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팔다리 하나쯤 부러지는 정도로 고통을 느끼지도 않고 10분도 되지 않아 움직일 수가 있었다.
혹여 척추가 부러졌다면 치유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테지만 일단은 그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이럴 수가.”
창밖으로 본 헬튼 로즈는 헛바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떨어진 김덕기 수학 선생의 몸이 반 토막이 나 있는 것이 아닌가.
4층에서 떨어져 몸이 반으로 잘릴 가능성은 없었다.
있다면 누군가가 그 짧은 사이에 그의 몸을 잘라 냈다는 말밖에 되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그 순간 누군가 기숙사 벽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헬튼 로즈의 눈에 들어왔다.
구름에 가려 그의 얼굴은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강렬한 살기가 솟구쳐 오르고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구름이 천천히 걷혔다.
그리고 달빛에 의해 기숙사 벽에 붙어 있던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미, 민수.”
김덕기 선생의 몸을 반으로 가르고는 축 늘어진 내장을 입으로 잘근잘근 씹으며 기숙사를 맨손으로 올라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민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조금 비뚤어진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느낀 민수는 또래 아이들을 괴롭히며 일진 놀이에 빠져 있는 전형적인 비행 청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민수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고는 절벽과 같은 기숙사를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이제 그가 누군지 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흉성을 지금 폭발시키려고 하는 중이었다.
위험하다.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수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지금처럼 온몸에 털이 곤두설 정도로 위험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헬튼 로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이곳에서 나가 1층까지 간 후 남자 기숙사로 향할 계획이다.
물론 직선으로 가면 민수에게 잡히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최대한 몸을 숨겨야만 했다.
복도로 나간 헬튼 로즈는 있는 힘껏 소리쳤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요!”
그녀가 소리쳤지만 다른 방에서는 그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정희야, 효정아! 세이나! 모두 어디 있어! 내 말이 들리지 않아!”
다시 외쳤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방문이 열리지 않는다.
인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남은 것은 그녀의 목소리와 뒤에서 다가오고 있는 민수의 서늘한 살기뿐이었다.
“어쩌지? 무슨 수를 써야 돼. 그렇지 않으면 죽고 말 거야.”
불사의 삶이란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력을 가졌으되, 힘의 원천이 되는 심장과 목이 잘리게 되면 그녀 역시 불사의 삶을 마칠 수가 있었다.
그렇지만 김덕기 선생처럼 처참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인간과 뱀파이어의 공존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원하는 것이라면 행복한 죽음이다.
비참하게 죽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