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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Chapter 2 카페 슬라브(3)


“아저씨, 담배 세 갑만 주세요.”
화장을 진하게 한 젊은 여자가 자리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중년 사내에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며 담배를 요구했다.
팬티가 보일 만큼 짧은 푸른색 원피스는 가냘픈 몸매에 잘 어울렸다.
그러나 너무 앳된 얼굴에 화장을 진하게 한 탓인지 뭔가 균형이 맞지 않아 보였다.
잠에서 깬 중년의 사내는 눈에 낀 눈곱을 손가락 끝으로 떼어 내고는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학생 아닌가? 학생한테는 담배 안 파는데.”
“대학생이거든요. 민증 보여 드려요?”
“응, 보여 줘 봐. 미성년자에게 술이나 담배를 팔면 벌금이 크거든.”
“아씨, 진짜 재수 없게.”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여자는 말투가 거칠었다.
보통 성인이 되면 욕설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그것이 사회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들은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언어 중 반은 욕설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말투와 행동거지에서 ‘나는 학생입니다’라는 오라를 풍기고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죄송한데요, 제가 민증을 깜빡 잊고 안 가져왔거든요. 그냥 주시면 안 될까요?”
역시나.
어찌 학생들의 레퍼토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하지 않을까.
민증을 요구하면 지갑을 찾는 척하면서 항상 안 가져왔다고 말을 한다.
자신들이 하는 행동들을 많은 성인들이 이미 해 봤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중년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학생. 민증이 없으면 담배를 팔 수 없어요.”
“아이, 아저씨. 이번 한 번만 봐주세요. 다음에는 꼭 민증 보여 드릴게요.”
이번에는 애교 작전이다.
어찌 이것도 이리도 다르지 않은지.
학생들 대부분은 처음에 고압적으로 나온다.
자신들이 성인임을 몸으로 보여 주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실패하면 안색을 바꿔 부모님에게도 보여 주지 않는 애교를 부렸다.
당연히 이것도 먹히지 않는다.
“미안해요, 학생. 다음에는 꼭 민증 보여 주고 사 가요.”
중년 사내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주, 진짜 짜증나네.”
여자는 이 가게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느꼈는지 버릇없는 소리를 내뱉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여자를 보며 중년 사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츳츳,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애들은 버릇이 없어.”
드르륵.
다시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들어왔다.
하이힐 특유의 또각또각거리는 소리가 작은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여인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릿결을 하고 있었다.
대략 170㎝ 정도 되는 신장에 코트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늘씬한 몸매를 지녔을 것쯤은 대번에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는 짙은 선글라스 안쪽으로는 아름다운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여인은 코트에 손을 집어넣고 중년 사내 앞에 멈춰 섰다. 중년 사내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여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오랜만이네, No. 7, 페리놀트.”
“당신도 오랜만이야, No. 2, 정수.”
여인은 유창한 한국말로 말했다.
얼굴을 보지 않고 귀로만 듣는다면 한국인이라 하더라도 믿을 것 같았다.
“근 10년 만인가.”
정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니 상당한 키였다.
마치 천장에 머리가 닿을 것처럼도 보였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190㎝ 이상.
작은 머리 때문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몸도 일반적이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정수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잡고 앞으로 뜯어냈다.
그러자 중년 사내의 얼굴에서 30대 초반의 젊은 사내로 모습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인피면구를 쓰고는 중년의 행세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페리놀트, 그대가 나를 찾은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페리놀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큰일인가 보군. 다시 우리가 움직여야 하는 것을 보면.”
“모르지. 마스터의 마음은 깊고 넓으니까. 우리가 판단할 것이 아니야.”
“후후. 그래, 맞아. 마스터를 우리의 짧은 생각으로 파악해서는 안 되지. 그나저나 10년이나 해 온 가게인데, 좀 아깝군. 팔면 돈 좀 될 텐데.”
“어차피 인간 세상에서 어울려 살기 위해 위장한 거잖아. 인간처럼 미련을 갖는 것은 좋지 않아.”
“어이, 어이, 말이 좀 그렇군. 7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간이었다고. 페리놀트, 자네도 40년 전까지 인간이었잖아.”
“그런 것 생각 안 나. 난 마스터를 위해서만 존재할 뿐이야.”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마스터에 대한 충성심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군. 알았어, 알았다고. 어서 가자고.”
정수는 자신의 짐을 대략 챙긴 후 페리놀트를 따라나섰다.
허름한 구멍가게 앞에는 근처에서 볼 수 없는 최고급 스포츠카인 붉은 페라리가 서 있었다.
“페리놀트, 당신처럼 멋진걸.”
“쓸데없는 말. 어서 타.”
N0. 2 정수.
N0. 7 페리놀트.
그들은 월과 슈나비츠가 자신 있게 키운 그림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까지 인간들 틈에서 섞여 살아오다 잠에서 깨어 기지개를 켰다.
그들이 조사할 것은 강원도에 위치한 토이즈 국제고등학교와 여왕벌이라 불리는 헬튼 로즈.
여왕벌 헬튼 로즈를 중심으로 변화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Chapter 3 순혈의 아이(1)


―헬튼 로즈. 나이는 불명, 능력도 불명입니다. 그러나 굉장한 능력을 가진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유럽 이능력자 모임인 EEU(European ESP Union)에도 속해 있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S급이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월은 수화기를 들고 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S급은 영어로 Super를 뜻한다.
극도의, 대단히란 말이다.
한국식의 어감은 최강, 최고와 비슷할 것이다.
어쩌면 신과 동격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월과 슈나비츠가 마지막으로 대적한 S급 잠식자는 731부대 책임자 이시이 시로의 숨은 그림자였던 사카모토였다.
그는 절대 자신이 전면에 나서는 법 없이 일본군 장교들을 부추겨 역사상 가장 잔혹한 일 중에 하나인 생체 실험을 이어 갔다.
만약 사카모토가 월과 슈나비츠의 힘 앞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마루타가 되어 죽어 갔을 것이다.
문제는 생체 실험을 통해 축적된 어마어마한 노하우였다.
이시이 시로를 비롯해서 많은 전범자들이 생체 실험 연구물을 미국으로 넘기는 조건으로 모조리 살아남은 것이다.
그로 인해 생체괴물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물론 많은 나라에서 그런 실험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731부대 실험에 의해 인간형 사이보그나 생체 인간, 합성 인간들이 탄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쨌든 거의 모든 유럽의 불사자와 잠식자들은 EEU에 가입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하급 잠식자나 뱀파이어들이 모여 살아남기 위해서 EEU를 만들었다.
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모이면 강해지는 법.
조금씩 잠식자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그 힘은 강대해졌다.
그리고 EEU가 생겨난 지 2천 년이 지난 지금, 어떤 조직보다 무서운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기에 어떤 불사자나 잠식자도 그들의 힘을 거역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거역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자신의 두 주먹으로 그들을 깨부술 수 있는 자들뿐이었다.
그렇기에 헬튼 로즈를 S급의 불사자라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학교에 대해서는?”
―학교 내부를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학교를 중심으로 반경 3㎞까지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에 개의치 않고 잠입을 시도했지만 너무 많은 트랩이 깔려 있었습니다. 군사시설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제가 확인한 경비원만 최소 12명입니다.
정말 웃기는군.
일개 여왕벌이 아니었다.
학교 자체도 뭔가 이상했다.
학교와 헬튼 로즈의 연계, 아니면 학교와 헬튼 로즈의 반목, 그것도 아니면 제3세력이 그들 모르게 자리를 잡고 있을지도 몰랐다.
분명 월이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의문에서 확신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알았어. 계속 보고해.”
―네. 언제 가시는 겁니까?
“내일 아침.”
―조심하십시오. 보통 음습한 학교가 아닙니다. 뿌려져 있는 음기는 6.25 당시 교회에 갇혀 있던 120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었을 때와 비슷할 정도입니다.
사내가 말한 120명 마을 주민 사살 사건에 대해서 월은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작전에 투입된 사내는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었다.
혼란이 극으로 달했던 6.25 초반,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전선을 초토화시키는 함포가 끊임없이 발사되었고, 그 작전으로 인해 상당수의 북한군이 고립이 되고 말았다.
악에 받친 북한군은 그들이 점령하고 있던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교회에 몰아넣고 총을 싸서 사살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마을은 연합군에 의해 탈환되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연합군 중 한 부대가 그 마을에 주둔하며 2차 반격을 준비하던 시점에 문제의 사건이 벌어졌다.
붉은 보름달이 떠오르던 날, 원한을 가진 마을 사람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 마을에 주둔하던 모든 연합군 병사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연합군 측에서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괴이한 일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한데 그 조사단마저도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그다음 조사단도…….
이제는 연합군뿐만 아니라 한국군도 그 마을에 가기를 꺼려했다.
귀신을 믿지 않는 서양인들이지만 계속해서 일어나는 실종에 대해서만큼은 부인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을 이름만 언급해도 패닉 상태에 빠져 버렸다.
전쟁터에는 수많은 죽음으로 인해 음기가 엄청나게 늘어난다.
산송장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며 악령들이 눈을 번쩍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을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음기와 요기가 폭주했다.
그때, 사내가 파견되었다.
120명의 원한이 맺혀 있는 마을.
그곳은 이미 마을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명부의 입구와 연계되면서 12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언데드가 되어서 되살아났고, 그런 줄도 모르고 자리를 잡은 연합군 병사들은 하루아침에 먹이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명부의 입구를 닫지 않으면 마을의 오염은 점점 가속화된다.
그리고 점점 더 오염 지역은 넓어질 것이다.
과거 서양에서 페스트로 인해 유럽 인구의 1/4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한데 그것과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사내는 목숨을 걸고 명부의 입구를 막았다.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그때마다 엄청난 정신력을 발휘해 간신히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그때의 일이 사내가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위험했다.
한데 그런 그가 조심하라는 말을 언급했다면 학교는 정말로 위험한 곳이란 소리였다.
“참고하도록 하지.”
월은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사내의 목소리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