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Chapter 2 카페 슬라브(2)
그것이 바로 시독.
독 중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독이었다.
서양의 흑마법사와 어둠의 귀족인 뱀파이어만이 쓸 수 있다고 전해지는 극악의 독이다.
인간의 몸에 침투를 하게 되면 사망까지 이르는 시간은 겨우 12초.
시독에 당한 인간은 혈관과 뇌세포가 모두 파괴되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오늘따라 말이 심하군, 조이.”
“이것 좀 치워 줄래요? 나도 이제 화나려고 하니까. 방금 전에 한 말은 명백히 제 실수입니다. 야구로 치면 실투. 죄송해요.”
조이가 양손을 들고 항복한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것이 진심으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월과 슈나비츠는 알고 있었다.
이자는 그들이 알고 있는 한 유일한 중개자.
인간과 자신들의 끈이었다.
표정을 굳힌 조이는 금고에서 꺼낸 신문지로 감싼 덩어리를 내놓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세어 보세요.”
“됐어.”
월은 돈을 받아 슈나비츠에게 건넸다.
“아후, 돈 냄새. 난 이 냄새가 인간들 냄새보다 좋더라.”
언제 심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슈나비츠는 희희낙락하며 신문지에 싸인 돈뭉치를 품에 넣었다.
“정확히 삼 등분. 상부에서 1, 제가 1, 그리고 월 님이 1입니다. 언제나 이야기하지만, 불만은 없죠?”
“그래.”
“그럼 여기에 도장을.”
조이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월은 자신에게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종이에 도장을 찍고는 물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참으로 다급하셔라. 일단 맥주 한 잔 더 하세요. 시원하게.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니까.”
월과 슈나비츠는 아무런 말 없이 두 잔의 맥주를 더 비웠다.
역시 맥주란 처음 마실 때가 최고다.
처음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의 시원함과 톡 쏘는 느낌은 약간의 쾌감마저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두 번째 잔부터는 그저 술에 불과했다.
처음과 같은 시원함을 더 이상 주지 않는 것이다.
월은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여기.”
조이는 두 장의 사진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첫 번째 사진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학교의 풍경이었다.
보통의 학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을 작게 축소하여 세운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학교였다.
유럽의 성을 모델로 건축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한국에서 본 적이 없는 학교라는 것은 확실했다.
두 번째 사진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의 굉장한 미녀가 잘 어울리는 교복을 입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을 내는 화려한 금발이지만 눈동자는 검은색.
동양과 서양의 장점만을 절묘하게 모아 놓은 것 같은 여학생이었다.
“이게 뭐지?”
“강원도에 있는 국제고등학교예요.”
“강원도에 국제고등학교가 있어? 처음 듣는 말인데.”
“그러게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죠 뭐. 언론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세운 것일 수도 있고, 잠식자들이 세운 학교일 수도 있고요.”
잠식자(蠶食者).
한때 미국을 뒤에서 조종을 하고 있는 것이 프리메이슨 혹은 유태계 비밀 조직인 일루미나티라는 소문이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뜬소문이라고 치부했지만, 아는 사람들은 실제 그들의 세력이 세계 곳곳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그들 세력 역시 불사를 추구하는 잠식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잠식자들은 이곳 대한민국 내부에도 깊게 박혀 있었고.
“그럼 이 여자는?”
“가장 핫한 인물이죠.”
“누군데?”
“여왕벌.”
“여왕벌?”
“네. 대한민국 뱀파이어의 여왕벌. 이름은 헬튼 로즈. 나이는 불명. 최초로 뱀파이어가 된 시점도 불명. 하나 분명은 한 것은 최상급을 넘어선 S급일 것이라 추정합니다.”
S급 뱀파이어.
입에서조차 두려운 존재들이다.
월이 처음 만난 뱀파이어는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인 고려까지 긴 여행을 하고 있던 블라드 테페슈였다.
블라드 테페슈도 당시에는 S급 뱀파이어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S급이란 말은 월과 같은 처형자들이 잠식자들에게 붙여놓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D급, C급, B급, A급처럼 말이다.
그러나 S급이란 급수가 매겨지게 되면 그때는 어떤 처형자들도 감당하지 못한다.
힌드교의 신 시바, 북유럽의 신 바니르, 이집트의 태양신 라, 인도의 신 라마…….
이들 모두가 S급에 속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의 뱀파이어가 왜 한국의 고등학교에 있는 거지? 그리고 이 여자를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인가?”
조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월과 슈나비츠는 그녀를 보호해야 합니다.”
“뱀파이어를 보호해? 그것도 S급을?”
“네. 일단 신분적으로는 불가리아 외교관의 딸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양녀든지 불가리아 외교관도 잠식자든지, 둘 중 하나겠죠. 어쨌든 그녀가 돌연 커밍아웃을 한 거예요.”
“커밍아웃이라니…….”
“나는 더 이상 불사자로 살지 않겠다. 죽음을 찾겠다. 그리고 인간과 자신은 화해를 모색하겠다. 뭐, 요지는 이런 거죠.”
죽음을 찾겠다는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월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꿈도 죽음이 아니던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늙음을 즐기고 싶었다.
보잘것없는 노인이 될지라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그렇기에 죽음을 입에 담은 것인가?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어떤 문제?”
“잠식자들, 특히 뱀파이어들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녀에게 물리는 것이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축복. 심지어 그녀를 신으로 모시는 사이비 종교 집단도 있을 정도니까요.”
“그 말은?”
“그녀를 다른 자들에게 뺏기느니 차라리 직접 여왕을 처치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죽은 그녀의 피를 마셔 불사자가 되려는 속셈이죠.”
“죽은 뱀파이어의 피를 마신다고 해서 불사자가 되는 것은 아닌데?”
“보통 사람들은 모르죠. 대부분의 하급 잠식자들은 상급 뱀파이어의 피와 고기만 먹어도 불사자가 된다고 착각하고 있죠. 이제 여왕벌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대한민국 하수구에서 살아 오던 수많은 잠식자들이 모조리 그곳으로 몰려들 거예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군.”
여왕의 배신이라…….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대한민국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흡혈귀들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불만과 분노, 억울함과 슬픔이 교차되어 감정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겠지.
자신들의 여왕을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고.
맹목적인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할 것이다.
“흐흐, 재밌는 것 하나를 알려 드리죠.”
“얘기해 봐.”
“대한민국 내에 사이코패스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나야 모르지. 사이코패스는 정신적인 질환.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상부에서 파악하기로는 대한민국 내에 존재하는 사이코패스는 276명, 잠재적인 사이코패스는 3,239명. 그중에서 잠식자 사이코패스는 24명입니다.”
“그렇게 많아?”
“네. 80년대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입니다.”
“왜 그렇지?”
“지랄 같은 사회 때문이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좋든 싫든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죠. 하지만 요즘 시대가 어디 그럽니까.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도 수백만 명입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영화 보고, 혼자서 잠을 잡니다. 더군다나 TV 만 켜면 누군가는 수백 억씩 처먹고도 잘사는데 나는 왜 이런 꼬라지로 살아가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자괴감이 지나서 찾아오는 것은 분노. 사회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괴물이 눈을 뜨게 되는 거죠.”
“흠, 그다지 유쾌한 소식은 아니군.”
“뭐, 선진국에서는 한 번쯤 겪는 홍역입니다만, 대한민국은 유독 심하죠. 옆 나라 일본에서 나쁜 것만 배워 와서요.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조이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왕벌 헬튼 로즈가 다니는 학교에 사이코패스들이 자그마치 열다섯 명이나 있다는 겁니다. 사이코패스끼리 마주칠 확률은 로또만큼이나 희박하죠.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이코패스들이 한꺼번에 같은 학교에 다닐 확률은 100조 분의 1일나 될까요? 아니, 1경분의 일? 그만큼 말도 안 되는 거죠.”
“인위적인 조작이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헬튼 로즈는 이름대로 강렬한 향기를 뿜어대는 여왕입니다. 알 수 없는 그녀의 마력에 도취되어 찾아드는 말벌들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를 제거하기 위한 다른 세력들일 경우도 있죠. 어찌 되었든 월 님과 슈나비츠 님은 그 학교로 가서 헬튼 로즈를 보호해야 합니다. 워낙 잠식자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저희 쪽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들 눈치 못 채게 그녀를 보호했으면 합니다. 눈치를 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로 다른 잠식자들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것. 만약 그랬다가는…….”
“그랬다가는?”
“저들도 막 나올지 모르거든요. 예를 들면 자가 폭탄.”
자가 폭탄이라…….
이 빌어먹을 뱀파이어들은 불리하다 싶으면 자가 폭탄을 이용해서 자폭을 하고 만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7층짜리 건물을 한꺼번에 무너트릴 정도였다.
물론 고위급 뱀파이어들은 결코 그러지 않는다.
100퍼센트 뱀파이어가 된 지 10년이 채 안 되는 어린것들이다.
근래 들어 유행하는 젠장 맞을 자폭으로, 중동의 자살 폭탄 테러와도 비슷했다.
상대가 헬튼 로즈를 확보하지 못하고 다급한 상황에 처하면 어린 뱀파이어들을 이용해서 자가 폭탄을 터트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놈들은 인간일 적에도 인간미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명심하지. 기한과 보수는?”
“보름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완벽하게 탈출로를 확보하겠습니다. 그리고 A급 난이도의 임무이나 보니 보수는 꽤나 많을 겁니다. 2억.”
2억이라…….
심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출발하면 되지?”
“준비되시는 대로 바로.”
“알았어.”
월은 거의 다 비워진 맥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나비츠도 마치 그림자처럼 월을 따랐다.
500년간 월의 반쪽으로 살아온 슈나비츠였다.
그런 탓에 두 사람을 밤에 보게 되면 정말로 그림자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림자 속에서 홍안을 번뜩이는 괴물, 슈나비츠.
그를 알아보는 자가 있으면 죽는다.
그의 눈빛을 마주 보는 자가 있어도 죽는다.
슈나비츠의 존재를 느끼면 숨을 멈추고 눈을 감고는 신께 빌어야 한다.
그와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이다.
“나중에 보자고.”
그런 슈나비츠가 살짝 드러난 날카로운 어금니를 보이며 조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이도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고요.”
둘이 짓는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 정도로 호쾌했다.
그러나 둘 다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 정도였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모든 패를 내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과 슈나비츠는 조이의 정보를 이용하고, 조이는 월과 슈나비츠의 무력을 이용할 뿐이다.
언젠가는 서로의 등에 칼을 꽂아야 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스터.”
“응.”
카페 슬라브를 나온 슈나비츠는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에 미행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나서 월을 불렀다.
“냄새가 나는데요.”
월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대번에 이해했는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슈나비츠의 말대로 조이의 말에서는 구린내가 풀풀 풍겼다.
중개자는 절대로 정보 조작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보를 숨기는 것은 가능하다.
즉, 100의 정보 중에 90의 정보만 넘겨주고 남은 10은 은폐하더라도 크게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조이는 이 세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리고 월과 슈나비츠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많이 봐 왔다.
조이는 적이 아니지만 아군도 아니다.
거짓은 아니지만 믿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손을 잡고 있지만 언제라도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사내였다.
조이의 의도가 정보의 누락이라면 그것은 찾아내는 일은 월과 슈나비츠가 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의뢰에서는 너무도 지독한 구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그림자들을 움직여.”
“그림자들이요?”
“그래. 여왕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봐. 모든 것, 하다못해 그녀의 속옷 색깔부터 성적 취향까지.”
“후후, 알겠습니다.”
슈나비츠는 예의 아름다운 홍안을 번뜩이며 보기 좋은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다름없이 그의 웃음은 매력적이지만 눈동자만큼은 차가웠다.
특히 그림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시퍼런 혈향마저 풍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림자.
월과 슈나비츠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운 최강의 마신(魔神)들이 10년 만에 다시 가동되었다.
Chapter 2 카페 슬라브(2)
그것이 바로 시독.
독 중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시독이었다.
서양의 흑마법사와 어둠의 귀족인 뱀파이어만이 쓸 수 있다고 전해지는 극악의 독이다.
인간의 몸에 침투를 하게 되면 사망까지 이르는 시간은 겨우 12초.
시독에 당한 인간은 혈관과 뇌세포가 모두 파괴되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오늘따라 말이 심하군, 조이.”
“이것 좀 치워 줄래요? 나도 이제 화나려고 하니까. 방금 전에 한 말은 명백히 제 실수입니다. 야구로 치면 실투. 죄송해요.”
조이가 양손을 들고 항복한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것이 진심으로 느껴지지는 않지만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월과 슈나비츠는 알고 있었다.
이자는 그들이 알고 있는 한 유일한 중개자.
인간과 자신들의 끈이었다.
표정을 굳힌 조이는 금고에서 꺼낸 신문지로 감싼 덩어리를 내놓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세어 보세요.”
“됐어.”
월은 돈을 받아 슈나비츠에게 건넸다.
“아후, 돈 냄새. 난 이 냄새가 인간들 냄새보다 좋더라.”
언제 심각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슈나비츠는 희희낙락하며 신문지에 싸인 돈뭉치를 품에 넣었다.
“정확히 삼 등분. 상부에서 1, 제가 1, 그리고 월 님이 1입니다. 언제나 이야기하지만, 불만은 없죠?”
“그래.”
“그럼 여기에 도장을.”
조이는 계약서를 내밀었다.
월은 자신에게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종이에 도장을 찍고는 물었다.
“그래서 이번 일은?”
“참으로 다급하셔라. 일단 맥주 한 잔 더 하세요. 시원하게.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니까.”
월과 슈나비츠는 아무런 말 없이 두 잔의 맥주를 더 비웠다.
역시 맥주란 처음 마실 때가 최고다.
처음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의 시원함과 톡 쏘는 느낌은 약간의 쾌감마저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두 번째 잔부터는 그저 술에 불과했다.
처음과 같은 시원함을 더 이상 주지 않는 것이다.
월은 그것이 조금 아쉬웠다.
“여기.”
조이는 두 장의 사진을 꺼내서 보여 주었다.
첫 번째 사진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학교의 풍경이었다.
보통의 학교와는 완전히 달랐다.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을 작게 축소하여 세운 것 같은 특이한 모양의 학교였다.
유럽의 성을 모델로 건축한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한국에서 본 적이 없는 학교라는 것은 확실했다.
두 번째 사진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의 굉장한 미녀가 잘 어울리는 교복을 입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빛을 내는 화려한 금발이지만 눈동자는 검은색.
동양과 서양의 장점만을 절묘하게 모아 놓은 것 같은 여학생이었다.
“이게 뭐지?”
“강원도에 있는 국제고등학교예요.”
“강원도에 국제고등학교가 있어? 처음 듣는 말인데.”
“그러게요.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죠 뭐. 언론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세운 것일 수도 있고, 잠식자들이 세운 학교일 수도 있고요.”
잠식자(蠶食者).
한때 미국을 뒤에서 조종을 하고 있는 것이 프리메이슨 혹은 유태계 비밀 조직인 일루미나티라는 소문이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뜬소문이라고 치부했지만, 아는 사람들은 실제 그들의 세력이 세계 곳곳에 침투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조금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그들 세력 역시 불사를 추구하는 잠식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잠식자들은 이곳 대한민국 내부에도 깊게 박혀 있었고.
“그럼 이 여자는?”
“가장 핫한 인물이죠.”
“누군데?”
“여왕벌.”
“여왕벌?”
“네. 대한민국 뱀파이어의 여왕벌. 이름은 헬튼 로즈. 나이는 불명. 최초로 뱀파이어가 된 시점도 불명. 하나 분명은 한 것은 최상급을 넘어선 S급일 것이라 추정합니다.”
S급 뱀파이어.
입에서조차 두려운 존재들이다.
월이 처음 만난 뱀파이어는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머나먼 이국땅인 고려까지 긴 여행을 하고 있던 블라드 테페슈였다.
블라드 테페슈도 당시에는 S급 뱀파이어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S급이란 말은 월과 같은 처형자들이 잠식자들에게 붙여놓은 명칭에 지나지 않는다.
D급, C급, B급, A급처럼 말이다.
그러나 S급이란 급수가 매겨지게 되면 그때는 어떤 처형자들도 감당하지 못한다.
힌드교의 신 시바, 북유럽의 신 바니르, 이집트의 태양신 라, 인도의 신 라마…….
이들 모두가 S급에 속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그 정도의 뱀파이어가 왜 한국의 고등학교에 있는 거지? 그리고 이 여자를 처리하는 것이 우리의 일인가?”
조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월과 슈나비츠는 그녀를 보호해야 합니다.”
“뱀파이어를 보호해? 그것도 S급을?”
“네. 일단 신분적으로는 불가리아 외교관의 딸로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양녀든지 불가리아 외교관도 잠식자든지, 둘 중 하나겠죠. 어쨌든 그녀가 돌연 커밍아웃을 한 거예요.”
“커밍아웃이라니…….”
“나는 더 이상 불사자로 살지 않겠다. 죽음을 찾겠다. 그리고 인간과 자신은 화해를 모색하겠다. 뭐, 요지는 이런 거죠.”
죽음을 찾겠다는 말.
그 말을 듣는 순간 월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꿈도 죽음이 아니던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어 늙음을 즐기고 싶었다.
보잘것없는 노인이 될지라도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고 싶은 것이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았을까?
그렇기에 죽음을 입에 담은 것인가?
그녀의 입에서 직접 듣기 전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리라.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어떤 문제?”
“잠식자들, 특히 뱀파이어들이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녀에게 물리는 것이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축복. 심지어 그녀를 신으로 모시는 사이비 종교 집단도 있을 정도니까요.”
“그 말은?”
“그녀를 다른 자들에게 뺏기느니 차라리 직접 여왕을 처치하겠다는 거죠. 그리고 죽은 그녀의 피를 마셔 불사자가 되려는 속셈이죠.”
“죽은 뱀파이어의 피를 마신다고 해서 불사자가 되는 것은 아닌데?”
“보통 사람들은 모르죠. 대부분의 하급 잠식자들은 상급 뱀파이어의 피와 고기만 먹어도 불사자가 된다고 착각하고 있죠. 이제 여왕벌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대한민국 하수구에서 살아 오던 수많은 잠식자들이 모조리 그곳으로 몰려들 거예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말이군.”
여왕의 배신이라…….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대한민국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흡혈귀들의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불만과 분노, 억울함과 슬픔이 교차되어 감정으로 튀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겠지.
자신들의 여왕을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고.
맹목적인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할 것이다.
“흐흐, 재밌는 것 하나를 알려 드리죠.”
“얘기해 봐.”
“대한민국 내에 사이코패스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습니까?”
“나야 모르지. 사이코패스는 정신적인 질환.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상부에서 파악하기로는 대한민국 내에 존재하는 사이코패스는 276명, 잠재적인 사이코패스는 3,239명. 그중에서 잠식자 사이코패스는 24명입니다.”
“그렇게 많아?”
“네. 80년대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입니다.”
“왜 그렇지?”
“지랄 같은 사회 때문이죠.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좋든 싫든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죠. 하지만 요즘 시대가 어디 그럽니까. 친구 한 명 없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가족 없이 혼자 사는 사람들도 수백만 명입니다. 혼자서 밥을 먹고, 혼자서 영화 보고, 혼자서 잠을 잡니다. 더군다나 TV 만 켜면 누군가는 수백 억씩 처먹고도 잘사는데 나는 왜 이런 꼬라지로 살아가나 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자괴감이 지나서 찾아오는 것은 분노. 사회에 대한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괴물이 눈을 뜨게 되는 거죠.”
“흠, 그다지 유쾌한 소식은 아니군.”
“뭐, 선진국에서는 한 번쯤 겪는 홍역입니다만, 대한민국은 유독 심하죠. 옆 나라 일본에서 나쁜 것만 배워 와서요. 어쨌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조이는 어깨를 으쓱거린 후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여왕벌 헬튼 로즈가 다니는 학교에 사이코패스들이 자그마치 열다섯 명이나 있다는 겁니다. 사이코패스끼리 마주칠 확률은 로또만큼이나 희박하죠. 열다섯 명이나 되는 사이코패스들이 한꺼번에 같은 학교에 다닐 확률은 100조 분의 1일나 될까요? 아니, 1경분의 일? 그만큼 말도 안 되는 거죠.”
“인위적인 조작이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헬튼 로즈는 이름대로 강렬한 향기를 뿜어대는 여왕입니다. 알 수 없는 그녀의 마력에 도취되어 찾아드는 말벌들일 수도 있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녀를 제거하기 위한 다른 세력들일 경우도 있죠. 어찌 되었든 월 님과 슈나비츠 님은 그 학교로 가서 헬튼 로즈를 보호해야 합니다. 워낙 잠식자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 저희 쪽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들 눈치 못 채게 그녀를 보호했으면 합니다. 눈치를 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조용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로 다른 잠식자들의 손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것. 만약 그랬다가는…….”
“그랬다가는?”
“저들도 막 나올지 모르거든요. 예를 들면 자가 폭탄.”
자가 폭탄이라…….
이 빌어먹을 뱀파이어들은 불리하다 싶으면 자가 폭탄을 이용해서 자폭을 하고 만다.
그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7층짜리 건물을 한꺼번에 무너트릴 정도였다.
물론 고위급 뱀파이어들은 결코 그러지 않는다.
100퍼센트 뱀파이어가 된 지 10년이 채 안 되는 어린것들이다.
근래 들어 유행하는 젠장 맞을 자폭으로, 중동의 자살 폭탄 테러와도 비슷했다.
상대가 헬튼 로즈를 확보하지 못하고 다급한 상황에 처하면 어린 뱀파이어들을 이용해서 자가 폭탄을 터트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아마도 그놈들은 인간일 적에도 인간미를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명심하지. 기한과 보수는?”
“보름입니다. 그 후에 저희가 완벽하게 탈출로를 확보하겠습니다. 그리고 A급 난이도의 임무이나 보니 보수는 꽤나 많을 겁니다. 2억.”
2억이라…….
심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출발하면 되지?”
“준비되시는 대로 바로.”
“알았어.”
월은 거의 다 비워진 맥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나비츠도 마치 그림자처럼 월을 따랐다.
500년간 월의 반쪽으로 살아온 슈나비츠였다.
그런 탓에 두 사람을 밤에 보게 되면 정말로 그림자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림자 속에서 홍안을 번뜩이는 괴물, 슈나비츠.
그를 알아보는 자가 있으면 죽는다.
그의 눈빛을 마주 보는 자가 있어도 죽는다.
슈나비츠의 존재를 느끼면 숨을 멈추고 눈을 감고는 신께 빌어야 한다.
그와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이다.
“나중에 보자고.”
그런 슈나비츠가 살짝 드러난 날카로운 어금니를 보이며 조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조이도 그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고요.”
둘이 짓는 미소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 정도로 호쾌했다.
그러나 둘 다 눈빛은 웃고 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서늘한 기운마저 감돌 정도였다.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모든 패를 내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과 슈나비츠는 조이의 정보를 이용하고, 조이는 월과 슈나비츠의 무력을 이용할 뿐이다.
언젠가는 서로의 등에 칼을 꽂아야 할지도 몰랐다.
다만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스터.”
“응.”
카페 슬라브를 나온 슈나비츠는 귀를 쫑긋거리며 주변에 미행자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나서 월을 불렀다.
“냄새가 나는데요.”
월은 그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대번에 이해했는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슈나비츠의 말대로 조이의 말에서는 구린내가 풀풀 풍겼다.
중개자는 절대로 정보 조작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정보를 숨기는 것은 가능하다.
즉, 100의 정보 중에 90의 정보만 넘겨주고 남은 10은 은폐하더라도 크게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조이는 이 세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리고 월과 슈나비츠는 그런 종류의 인간을 많이 봐 왔다.
조이는 적이 아니지만 아군도 아니다.
거짓은 아니지만 믿을 수도 없었다.
지금은 손을 잡고 있지만 언제라도 등에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사내였다.
조이의 의도가 정보의 누락이라면 그것은 찾아내는 일은 월과 슈나비츠가 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의뢰에서는 너무도 지독한 구린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그림자들을 움직여.”
“그림자들이요?”
“그래. 여왕벌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아봐. 모든 것, 하다못해 그녀의 속옷 색깔부터 성적 취향까지.”
“후후, 알겠습니다.”
슈나비츠는 예의 아름다운 홍안을 번뜩이며 보기 좋은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다름없이 그의 웃음은 매력적이지만 눈동자만큼은 차가웠다.
특히 그림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시퍼런 혈향마저 풍기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림자.
월과 슈나비츠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운 최강의 마신(魔神)들이 10년 만에 다시 가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