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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Chapter 1 어둠에 살다(3)
그날 소녀는 사내에게 처녀를 잃었다.
다음 날 너무도 아파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너무 무섭고 아파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중년 사내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돈이 한 푼도 없어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겁이 덜컥 나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채팅 사이트에서 알게 된 또래 오빠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상대가 바로 경태였다.
경태는 기꺼이 소녀를 도와주었다.
경태는 사내가 일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린 후 각목으로 머리를 쳐서 쓰러트렸다.
피가 마룻바닥에 줄줄 흘러내렸다.
경태는 사내의 주머니를 뒤져 돈을 뺏은 다음 소녀의 손을 잡고 그 집을 빠져나왔다.
사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 돈으로 낙태 수술을 했고 월세 방을 얻었다.
그 월세 방은 경태의 아지트나 마찬가지였다.
그 방에서 매일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시도 때도 없이 다른 여자를 끌어들였으며 소녀에게 폭력도 행사했다.
그럼에도 소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안식처를 가졌다는 기쁨에 경태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그의 아이를 두 번이나 임신했고 그때마다 낙태를 했다.
산부인과에서 더 이상 낙태를 하게 되면 다시는 임신을 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그런 것은 개의치 않았다.
작년, 경태가 사람을 죽였을 때도 상관없었다.
그저 경태만 다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달랐다.
처음으로 경태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신이 살고 싶어졌다.
저렇게 죽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녀는 무릎을 바닥에 꿇고는 눈물을 흘리며 월에게 살려 달라고 빌었다.
얼굴에 덕지덕지 그린 마스카라가 번져서 볼품 없는 얼굴이 되었지만, 지금은 그딴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의 바람이 하늘에 닿았는지 월은 소녀를 지나쳐서 경태에게 다가갔다.
“이 씨발. 이 좆 같은.”
경태는 각목을 들고 월을 향해서 휘둘렀다.
하지만 팔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어 평상시와는 꽤나 다른 모습을 보였다.
눈에 맺힌 살기는 사라졌고, 오직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내뱉는 욕설은 더욱 험악해지고 거슬렸다.
“하나 묻지.”
월의 묵직한 저음이 공사장 안을 뚫고 널리 퍼져 나왔다.
저승사자가 있다면 저런 목소리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월의 낮은 중저음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이 강했다.
“뭘 말이야?”
“너는 한 가정의 가장을 죽이고서 그 집에 진심으로 사죄를 한 적이 있나.”
“무슨 개소리야? 그 아저씨가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먼저 이래라저래라 그랬다고. 빌어먹을 아저씨. 죽으려면 곱게 죽지, 왜 나를 물고 늘어져? 그리고 난 벌을 받았다고. 2년이나 썩어야 되는 내 엿 같은 심정을 알아?”
“너희 부모는 너에게 야단을 치지 않았나?”
“야단? 야단 같은 소리 하네. 우리 꼰대는 가만히 있으라고 그랬어. 자기가 다 알아서 한다고. 그동안 사고치지 말고 가만히만 있으라고.”
“그렇군.”
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태는 월이 무엇을 하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슥.
갑자기 월의 모습이 사라졌다.
경태는 각목을 들고 좌우를 살폈지만, 월의 모습을 눈으로 쫓을 수는 없었다.
마치 유령을 앞에 두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경태는 이때다 싶어 도망을 치기 위해 등을 돌렸다.
퍽!
하지만 경태는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월이 어느새 그의 등 뒤로 돌아와 서 있던 것이다.
월의 손에는 경태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도대체 왜?
경태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고 그 궁금증은 1분도 되지 않아 드러났다.
“너는 산 채로 식혼의 먹이나 되라.”
월의 손바닥에서 나온 식혼이 경태의 다리를 덥석 물었다.
무는 힘이 얼마나 강한지 경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못 움직이기만 하면 견딜 만할 텐데, 수많은 이빨들이 종아리의 근육과 뼈를 뚫고 들어왔다.
“으아아아악!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그 상황에서 월은 누군가에게 화상 통화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여보세요.
생각보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외모도 상당히 젊어 보였다.
보통의 아줌마들과는 다르게 긴 생머리에 동그란 귀걸이를 걸쳤다.
하지만 화장이 너무 진해 아름답다는 느낌보다는 추하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여인은 경태의 엄마였다.
월은 서로가 바라볼 수 있게 화면을 비쳤다.
엄마 쪽에서는 아들이 아귀에 잡혀 먹는 모습을 볼 터이고, 아들은 죽는 순간까지 어미의 경악한 두 눈을 볼 것이다.
절대로 서로가 어쩔 수 없는 경계의 선에서 비참함과 미칠 것 같은 분노에 휩싸이겠지.
―아들! 아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역시나 여인은 당황하며 아들을 불렀다.
“엄마, 살려 줘! 제발 살려 줘! 아파! 너무 아파!”
―도대체 어떤 놈이야? 누가 널 납치했어? 돈이야? 바꿔 봐.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까 바꿔 봐.
제 자식은 중요한 줄 알면서 남의 자식은 길 가는 개똥만으로도 취급하지 않는 여편네.
지금은 어떤 기분이 들까?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낄까, 아니면 자식을 이렇게 만든 자신에 대한 증오와 분노만을 쏟아 낼까?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
이제 그녀가 보는 앞에서 자식이 자근자근 씹혀서 사라질 테고, 경태란 소년이 죽었다는 사실은 영원한 미궁 속으로 빠질 테니까.
꽈드드득.
식혼이 경태의 하체를 씹어 먹는 소리가 명확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어미에게 생생하게 들리리라.
―으아악! 어떤 미친놈이야! 얘야, 얘야! 조금만 참으렴. 엄마가 그곳을 금방 찾아낼게! 그곳이 어디니?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 울지 마! 울지 말고 기다려!
“여, 여긴…… 쿨럭쿨럭.”
경태는 이를 악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몸이 먹혔다.
이미 하체를 넘어서 가슴 부위까지 먹혀 가고 있었다.
내장이 식혼의 입 밖으로 튀어나와 지저분하게 흘러내렸다.
경태는 힘겹게 팔을 뻗어 자신의 내장을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했지만, 이미 힘이 다하고 말았다.
경태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허공을 향해서 뿜어졌다.
눈동자는 공허하게 검은 하늘을 바라봤고 손끝은 힘을 잃었다.
식혼이 목까지 먹어치우는데도 경태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아아아악!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반드시 찾아내서 죽여 버릴 거야!
경태의 어미가 반쯤 미쳐서 소리를 질렀다.
그래, 환장하겠지.
고통스러워서 미쳐 버리고 싶겠지.
그런데 말이야,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줬다고.
최소한 당신 아들이 죽인 가족에게 찾아가 사죄를 했어야 했어.
그것만이라도 했다면 당신들은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월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구둣발로 짓밟았다.
더 이상 미쳐서 날뛰는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저기서 울고 있는 소녀뿐인가.
소녀는 아직도 그 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일어설 힘이 없는 것인지, 두려움 때문에 목숨을 구걸하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꽤나 수동적인 소녀라는 것은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월에게서 ‘가라’는 말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녀는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을 확률이 높았다.
저 소녀는 월의 살인 명단에 들어 있지 않다.
정확히는 경태 한 명만 처리하면 되었다.
다른 소년들은 스스로 죽고 싶어서 날뛴 것이 지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수백 마리의 박쥐 떼가 갑자기 나타나 비구름을 부를 것 같은 어둠 속을 한 바퀴 돌았다.
구름에 가렸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수많은 박쥐들로 인해 더욱 기괴한 모습만 가중될 뿐이었다.
푸드드득.
박쥐들은 소녀의 곁으로 사납게 날아왔다.
“아아악! 이게 뭐야? 살려 주세요! 제발요!”
그러나 소녀의 울부짖음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박쥐들이 소녀의 모습을 완전히 가려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저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월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식혼이 소년들을 집어삼켰을 때와 비슷한 소리.
빠드득, 빠드득.
뼈를 통째로 씹어 먹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밤하늘에 넓게 퍼져 나갔다.
박쥐는 점차 인간의 형태로 변해 갔다.
검은 정장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릿결, 월과 비슷할 정도로 큰 신장에 여자인지 착각할 것만 같은 아름다운 미남자였다.
그러나 붉은 태양처럼 빛나는 그의 입술에서는 한줄기의 핏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슈나비츠.”
“예, 마스터. 황홀한 그대의 빛에 이끌려 반딧불이 되어 버린 노예 슈나비츠입니다.”
사내는 공작과 같은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손을 배 위에 올리고는 한 발을 뒤로 빼고 허리를 숙였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이지?”
월의 음성에서는 은은한 노기가 서려 있었다.
자신은 살인마가 아니다.
죽여야 할 때는 망설임 없이 죽이지만, 함부로 살생을 하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랜 시간 살아왔다 하더라도 천성은 변하지 않았다.
하나 그의 반쪽이라고 할 수 있는 슈나비츠가 나타나 살려 주려 마음먹은 소녀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발기고 만 것이다.
소녀의 육체는 팔과 다리가 완전히 분리되어 피를 흘리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마스터의 번뇌를 없앴습니다.”
“누가 나의 마음을 마음대로 파악하라고 했는가.”
“그대의 심장은 나의 심장, 나는 그대의 손과 발이외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내가 알고 있으며, 그렇기에 지금의 행동도 과감하게 행할 수 있었습니다.”
달콤한 말, 그러면서도 위험한 말이다.
저 아름다운 사내에게 틈을 보이면 얼마든지 자신을 먹어치울 수 있다는 것을 월은 잘 알고 있었다.
타오르는 홍안의 깊은 곳에는 자신의 심장을 파먹고 싶다는 강렬한 파괴 욕구가 은연중에 내비쳐졌다.
그것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월은 언제나 느끼고 있었다.
그때가 언제였을까.
슈나비츠와 처음으로 만났던 때가.
아마도 불사(不死)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자신을 잃고 반쯤 미쳐서 헤매던 때였던 것 같다.
월은 서늘한 얼음과 같은 눈빛으로 슈나비츠를 바라보았다.
그는 월과는 다른,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마주 보았다.
둘은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사이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적도 아니다.
단지 함께하며 서로를 죽이기 위해서 목줄을 노리는 특이한 사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