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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이번 주말에 원주민 지역을 가보고 싶은데, 안내 좀 해주겠나? 중심가 말고 민간 거주지역. 시간 외 수당은 계산해서 주겠다.”
무심한 듯 툭 내뱉은 사내는 약간 피로한 듯 정모를 벗어 책상 한 켠에 밀어두었다. 짧지만 눈부신 은발이 강한 햇살에 반들거렸다. 원주민 부관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중위가 여자를 찾는다고 생각했다. 지구 본성 사람이 원주민 토박이 마을을 찾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저, 홍등가라면, 죄송하지만 제가 잘 모릅니다. 마누라가 발만 디디면 찢어 죽인다고 패악을 떨어서요. 다른 사람을 붙여 드릴까요? 덴그리아가 잘 알 겁니다.”
“아하하, 아니. 그곳을 말한 게 아니다, 누트루그.”
그는 하얀 이를 활짝 드러내며 파안대소했다.
“자네가 사는 동네 말이다. 시장도 있고, 집도 있고, 식당도 있는 보통 마을. 가서 시장 구경도 하고, 마을도 둘러보고, 사람도 만나보고.”
지구 본성 사람이, 굳이 왜 그런 곳까지 찾아오려 하누? 그것도 정식 장교가. 반란이 난 것도 아닌데.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괜찮으시겠습니까, 중위님?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슨 말이야, 자네가 사는 동네 아닌가? 자네가 안내할 거고. 난 믿지 않는 사람한테 안내 따위 맡기진 않아.”
누트루그는 멍청한 얼굴로 론 중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슴에 뜨끈한 감정이 차올랐다.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준다는 것이 이렇게 기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보통 지구인 정식 관리들은 원주민 마을에 발을 대는 것 자체를 꺼리는데.
공평무사하고 원주민을 차별하지 않는 상관은 여러 면에서 특별했다. 그는 능률적이고 기민하며 집중력과 추진력이 대단한 사내였다. 당근과 채찍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사람을 수족처럼 부리는 건 거의 본능적이었다. 타고나길 애초부터 윗사람으로 태어난 것 같았다. 일개 소위 따위에겐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이 항상 넘쳤다. 그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들고 오금이 저렸다.
누트루그는 냉큼 얼빠진 표정을 지웠다. 그는 여전히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부관을 응시했다. 그나저나 얼굴까지 잘났다. 여자들 호리게도 생겼다. 그는 무표정할 때에도 단아한 맛을 풍겼지만 웃을 때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한 번 더 줄 정도로 빛나는 매력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지구에서 여자깨나 울렸을 거라 생각했지만 요새는 생각이 바뀌었다. 오미크론에서도 숱한 여자들이 울겠군. 여자 원주민들이 론 중위를 먼발치로 보고도 홀랑 넋을 잃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 얼굴에 넘어가면 안 되지.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데. 누트루그는 자신의 선임이 어떻게 밀려났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등이 서늘했다.
* * *
“해오던 방법이 있습니다, 소위님. 걱정 마시고 내일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론은 태연하게 웃으며 명을 무시하는 중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붉은 눈에서 냉기가 확 일었으나 론은 차분하게 그것을 눌렀다. 네가 그 유명한 리만 중사로군.
론 소위에게 배속된 부대의 리만 중사는 고참 중 고참이었다. 식민행성 근무 기간도 20년에 가까웠고 오미크론에서 원주민들과 위관, 영관급 장교들 사이에서 거북스런 대민 업무를 처리하는 데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몇 건의 구설에 휘말려 진급은 지지부진했지만 오미크론에서 리만 중사를 모른다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유명했다.
오미크론은 3공화국의 오랜 식민행성이었고, 따라서 주둔하고 있는 군대의 총사령관이 총독으로서 원주민들을 통치했다. 관리들도 대부분 지구 본성 사람이었다. 그들은 원주민을 인간으로 대하는 대신, 동물과 인간의 중간 정도, 말할 줄 아는 짐승 정도로 취급했다. 인간과 박테리아의 혼합. 개보다 못한 벌레에 가까운 말하는 생명체. 원주민에 대한 경멸과 혐오감의 뿌리는 깊었다.
말하는 짐승들을 직접 다루는 건 역한 일이었다. 신참 장교든 영관급 장교든, 원주민을 직접 상대하는 것을 한결같이 꺼렸다. 부사관들이 그 사이에 끼어서 벌레 씹은 얼굴로 원주민들과 접촉하며 민간 업무를 처리했다. 궂은일을 맡아 시원하게 처리하는 리만 중사 같은 존재는 거슬리면서도 천금처럼 귀했다. 리만은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지저분한 일을 도맡으며 자신의 권력을 나름대로 구축한 수완 좋은 사내였다. 짐승이든 사람이든 말만 통하면 되고 부려 먹을 수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권력과 축재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따라다녔다.
리만 중사는 이곳에 부임하는 신참 소위들을 우스워했다. 능력 없고 유전자 맵이 형편없어 밀려난 장교들은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지도, 제대로 진급하지도 못하고 외곽 지역만 전전하다가 평생을 말아먹었다. 처음에 올 때 아무리 패기 넘치는 눈을 하고 있더라도 2, 3년만 지나면 정신끈이 풀리고 술과 노름과 원주민 계집의 밑구멍에 홀려 모든 시름을 잊고 폐인으로 전락한다. 리만 중사는 그들을 잘 어르고 달래며 오미크론에 알맞도록 적응시켰다. 좌절한 젊은 장교들은 무사 안일의 늪에 쉬이 빠져들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하얗고 반들반들한 신참 소위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나를 무시할 순 없을걸. 그는 영관급 장교들과도 끈끈한 인맥이 있었고 대대로 총독과도 안면을 트고 살았다. 지난번 횡령 건으로 누가 투서를 넣지만 않았어도 나름대로 편안한 내직에서 뭉개고 살 수 있었다. 그는 쓰게 웃으며 새로 온 소위가 고분하고 수굿한 사람이면 편하겠다는 얕은 생각을 했다.
신참 소위는 키가 크고 후리후리했지만 강단이 있어보였다. 그는 부임 직후 자신의 부대가 맡은 지역의 민원 창구를 돌다가 배급된 식량 문제로 원주민들이 대대적으로 청원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접 만나본 원주민들은 배분된 곡물의 양이 항상 정량보다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곳에서 먹을 것이 적다면 그것은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먹거리 문제는 원주민 사회에서 해묵은 이슈였다. 창고에 남은 보급품 재고량을 보고하라는 말에 리만 중사는 얼버무리려는 듯 잠시 웃었다.
“그간 처리해오던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 마시고 맡겨두십시오. 내일까지 해결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리만 중사는 되풀이했다. 론 소위는 차분하게 서서 냉랭하게 뱉었다.
“그 방법이란 건?”
리만은 잠시 코끝에 주름을 잡았다. 하지만 어차피 이 소위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왜 이 지역이 다른 지역보다 그래도 분쟁이 덜했는지. 그것은 자신의 수완 덕이었다.
“원주민들에게 배급되는 곡물에 마른 이끼의 비율을 높이는 방법입니다. 정해진 비율을 확인할 방법은 원주민들에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비율보다 무게와 양을 중시합니다. 어차피 맛으로 먹는 건 아니거든요. 그동안 이 지역에서 식량 문제는 그렇게 해결해왔습니다. 개중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약간의 융통성으로 무력 진압을 대신하는 것이니 서로 좋은 일입니다.”
론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그리해왔다라. 그는 눈을 들어 늙은 너구리 같은 고참 부사관을 가만히 응시했다. 길고 서늘한 속눈썹 아래 깃든 붉은 홍채가 너무 선명했다. 중사는 눈을 내리깔았다. 심장이 알 수 없게 눌려 쭈그러들었다.
“리만 중사. 나는, 대민 보급품 재고 상태를 보고하라고 했다.”
“그 정도까지 일일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 이런 하찮은 일은 저희 부사관들이 쭉 처리해왔습니다.”
론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처음 부임해 왔으므로 이곳의 분위기를 모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부하가 대놓고 명을 무시하는 태도가 거슬렸다. 그는 자신의 수족이 마음대로 부려지지 않는 상황은 결코 용납하지 못했다.
그는 중사를 물러가게 한 후, 일반 사병 몇을 거느리고 대민 창구로 나갔다. 그는 힘의 생리와 권력의 이동에 본능과 같은 감각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이 맡은 구역에서 누가 실질적으로 힘을 휘두르는 자인지 반나절도 되지 않아 파악해냈다. 몇몇 병사들만 거느리고 창고의 재고 조사며 지역 조사까지 비밀리에 직접 해 치운 론은 며칠 후 리만 중사를 다시 불렀다.
일벌백계. 론은 위에 있는 자에게 필요한 냉혹함과 가차 없음의 당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내였다. 각 지역에 암덩이처럼 뿌리내리고 있던 부사관들을 휘어잡는 것이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다. 부사관들이란 행정적으로 꼭 필요한 손발 같은 존재이나 손발이 머리를 휘어잡으려 든다면 가차 없이 찍어내야 했다. 그가 아무리 신참이고 경험이 일천하다 해도 자기 사람을 의도대로 부리는 것만큼은, 그의 영역이었다.
“재고에 대해 보고하라, 리만 중사.”
사흘이 지난 후 한결같이 차가운 어조로 명하는 말간 소위를 보며 부사관은 가만히 이마를 우그렸다. 이거 참 끈덕지다. 고집불통에 멍청하고 눈치 모르는 놈이 하나 들어왔군. 그는 잠시 말을 우물거렸다.
“보고하라, 중사! 그동안 착복해왔던 모든 것에 대해.”
서 있던 사내의 얼굴이 갑자기 확 구겨졌다. 뭐야 이건?
앞에 서 있던 은발의 사내가 눈앞에 서류를 집어던졌다. 리만이 상부에 보고를 올려왔던 부분과 직접 재고를 조사해서 차착이 생긴 부분을 모조리 잡아놓았다. 착복의 규모는 생각보다 대단했다. 원주민들에게 그리 많은 것들이 지급되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 와중에 곶감처럼 잘도 빼먹었다.
론은 이런 자들의 비루함을 경멸했다. 욕망 자체는 비루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야짓잖게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짓은 한심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감히 자신을 무시하고 훈계하듯 어물쩍 넘어가려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위님께서 이곳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곳 분위기를 잘 모르셔서 그러십니다.”
순간 리만 중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론의 허리에 걸려있던 의전용 사벨이 형형한 빛을 드러내며 목덜미에 닿았던 것이다. 날카로운 검 끝이 그의 목젖 부근을 가볍게 눌렀다. 중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칼을 잡고 서 있는 신참 소위의 얼굴은 무심했지만 무지막지한 살기가 쏟아졌다. 주변에 있던 사병들도 하얗게 질린 채 그대로 얼어붙었다.
“오미크론 23지구 책임자인 론 소위는, 지역 책임자의 신분으로, 리만 중사를 이병으로 강등하고 태형 20대에 처한다. 불만이 있으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라.”
칼날은 움직이지 않았고, 폭풍과 같은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리만은 그대로 얼어붙은 채 더듬었다. 지금까지 이따위로 자신을 내리누르는 상관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그것도 겨우 소위 따위가. 내가 이곳에서 어떤 자인지 알면 감히 이따위로 대할 수 없을 텐데. 착복 따위는 개나 소나 다 하는 일이다. 총독도 그 혐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텐데? 어때, 그럼 총독까지 물고 늘어질 건가? 일개 새파란 병아리, 물도 안 마른 기생오라비 같은 놈 따위가?
“지금, 착복이라 했습니까, 소위님? 그럼 누가 깨끗한지 제대로 한번 털어 볼까요?”
“귀관은 오해하고 있다. 내가 귀관을 착복했다 해서 강등하는 줄 아나?”
웃음이 나왔다. 현재로선 누가 뭘 먹건 말건 그저 경멸할 뿐이다. 누가 걸렸는지 모조리 캔다고? 나를 멍청이로 아나? 지금 이 상황에서 걸려들지 않을 놈이 어디 있다고? 난 원하는 것을 반드시 이루지만, 미련하게 이루지는 않는다. 나는, 론이다. 하찮은 네놈 따위에게 결코 만만하게 휘둘리지 않는다. 론은 오만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턱선이 위로 미끈하게 올라갔다.
“귀관의 강등 사유는 명령 불복종이다.”
리만 중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이, 여우 같은 새끼. 하지만 그는 론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론은, 여우 따위로 불릴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격이 무언가 다른 사내였다. 몸을 잔뜩 낮추고 나직하게 그르렁대는 고양잇과의 맹수. 놈은, 호랑이다. 살기와 발톱을 한껏 감추고 엎드린 거대한 호랑이. 식은땀이 다시 흠뻑 올라왔다. 사벨의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좀 더 아프게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태형은 오미크론 광장, 원주민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에서 공개 집행되었다. 다들 리만 중사의 강등과 태형에 턱을 한 발이나 내려놓았고, 그와 연결되어 있던 다른 부사관들은, 멋모르고 그 짓을 해치운 야릿해 보이는 신참 소위를 뒤에서 찧어댔다.
그 후, 이를 갈고 있던 리만이 자신의 유전자 지도 및 개인 정보를 뒷조사한 것을 발견한 론은 가벼이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다. 연루된 자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너희가 내 손으로 걸어 들어오는구나. 론 소위는 본국에 정식으로 조사를 의뢰했고 넬 켄티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본국의 명령은 그대로 집행되었다. 그곳에서 잔뼈가 굵은, 매너리즘에 빠진 부사관들, 중간 관리들이 줄줄 걸려들었다.
론은 약간의 소문을 푸는 방법으로 선처를 강요하는 영관급 장교들과 총독을 순식간에 잠잠하게 만들었다. 지금 본국에서 착복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하려는 모양이다. 리만 중사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거나 강요하는 자들이 우선 내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론은 변명 한마디 없이, 고스란히 그들의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론은 걸려든 자들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리만 중사의 경우 기밀 유출, 군수품 착복, 거짓 보고, 명령 불복종 혐의 등을 걸어 참형에 처했다.
론은 순식간에 오미크론에서 유명해졌다. 단호함과 무지막지한 힘, 사람을 휘두르는 방법 등에서 부족함이 없는 신참 소위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론은 대민 업무를 쉽게 파악하고 담당 지역을 수월하게 장악했다. 원주민을 스스럼없이 대하던 소위는, 담당 구역에 대해 어떤 부사관이나 족장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론이 직속 부사관으로 원주민 젊은 족장인 누트루그를 발탁한 것도 그때였다. 그리고 자신의 휘하 부대에 전역자가 생기자 기다렸다는 듯 혼혈 및 원주민들을 뽑아 올렸다. 기존 군인들의 반발이 심해지자, 그는 자신이 뽑은 원주민 병사들로 따로 하나의 부대를 만들겠다고 건의를 올렸다. 그러잖아도 지구 본성 군인과 원주민의 마찰로 골치를 앓던 3공화국에서는 흔쾌히 수락하고 론에게 특수부대의 편성과 지휘를 맡겼다. 소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그는 중대 규모의 부대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론은 그들에게 사비까지 들여가며 특수 훈련을 시켰다. 그는 자신이 뽑아 올린 원주민이나 혼혈 군인들이 지구 본성에서 온 군인들보다 질적으로 우수한 자들이 되기를 원했다.
그가 중위로 올라서며 원주민 부대라는 별칭이 붙은 외인부대가 슬슬 뼈대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미크론 행성의 외인부대는 3공화국이 아닌 론 중위에 대한 충성심이 넘쳤다. 외인부대는 자원병들이 항시 넘쳤다. 선발된 자들의 표정에는 한결같이 자부심이 넘쳤다.
* * *
“누트루그. 다음 달쯤 해서 워프 가능한 함선을 며칠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소행성 외곽 지역 탐사를 다녀왔으면 좋겠어. 내 동료도 몇몇 갈 거고. 미생물 분석기하고 방사능 차폐기도 싣고 갈 거니 함께 갈 인원 좀 뽑아주겠나? 똘똘한 녀석으로. 물론 자네도 꼭 가야하고.”
누트루그는 그의 의도을 이해했다. 사실 원주민은 대부분 문맹이었다. 잘해봤자 간신히 틀리지 않게 돈 계산이나 할 정도였다. 하지만 론은 그들에게 동료 장교들까지 동원해 글을 가르쳤다. 머리가 트인 자들은 기계 다루는 법, 수학, 과학, 전술과 전략까지 배울 수 있었다. 미생물 분석기나 방사능 차폐기는 덩치가 큰 물건이다. 명색은 짐 나르는 일꾼 형식으로 데려가지만 론은 그들이 눈동냥으로 기계의 조작법을 배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고마운 일 아닌가. 누가 자신들에게 그렇게 신경을 써주었다고. 덩치 큰 사내의 초록색 머리통이 아래로 꾸벅, 구부러졌다.
“똑똑한 놈들로 뽑아놓겠습니다, 중위님.”
선이 가느다란 입술이 보기 좋게 웃음기를 머금었다.
* * *
조용한 주말 오후였다. 시아 리와 알파, 운트 위비는 시오 헤이브의 개인실에 앉아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딴 새잎으로 덖은 첫차를 알파가 불쑥 들고 왔다. 시오 헤이브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없이 찻잔과 다관을 내어왔다.
알파는 주말이면 동료 수사 한둘을 대동하고 꼬박꼬박 시오 헤이브를 찾아왔다. 말하지 않아도 왜 그러는지 안다. 눈물겹게 고마운 친구이자 동료들이다. 그는 말없이 새 차를 다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후 익숙한 솜씨로 잔을 데우기 시작했다.
시오 헤이브는 론이 떠난 직후 한동안 몹시 앓았다. 다들 그가 누군가에게 몹쓸 일을 겪고, 태형에 재서원까지 하는 수모를 당해 충격이 커서 생긴 일이라 여겼다. 하지만 알파는 그가 속으로 열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평소의 그라면 강인하게, 표현하지 않고 삭히며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시오 헤이브는 여러 가지 일로 호되게 충격을 겪은 후였다. 론을 향한 애증과 그리움과 자책이 겹쳐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눈을 돌리면 그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고, 끔찍한 그와의 육체관계가 생각났다. 끔찍한 만큼 강렬해 그날의 아픔은 무시로 떠올랐다. 차밭의 샘 곁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입 맞추며 울먹이던 장면도 이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그를 놓아 보내지 않았나. 포기해야지. 하지만 체력 단련실에서 멍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거나 옥상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쳐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가끔은 거슬거슬 새 머리카락이 솟아오르는 머리를 감싸고는 고개를 수그리고 속이 녹아내리는 한숨을 쉬기도 했다. 속이 타들어 갈 때는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바작바작 말랐다. 한동안은 전혀 말이 없었고, 가끔 보여주던 미소 한 자락 짓지 못했다. 그해 여름이 지나가도록 지독한 불면에 시달렸다.
알파는 그의 열병에 대해 채근도 나무람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속이 어떻든 강인하게 자신을 추스를 수 있는 친구였다.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알파는 그렇게 믿고 그의 괴로움이 속히 지나가기만 애타게 기원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아픔. 자신이 책임진 일을 해내기 위해, 평소와 다름없음을 가장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친구의 꼴을 보는 것은 알파에게 또 다른 고문이었다.
알파에게 론의 소식이 가끔 들어왔다. 하지만 그는 시오 헤이브에게 굳이 그 소식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가 론의 소식을 원할지도 모르지만, 이야기해 좋을 것은 없었다. 다만, 시간이 있을 때마다 동료들과 함께 그를 찾아갔다. 시아 리처럼 감정이 격한 인간이나, 운트 위비처럼 메마른 자나, 페르 케프터처럼 눈치 없는 자나, 한결같이 시오 헤이브를 존경하고, 걱정하고, 좋아했다. 그들은 알파와 마찬가지로, 휴일에도 귀찮아하지 않고 몽크 마스터의 개인실을 찾아 쓸데없는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좋은 소식도 있었다. 힐링 스톤이 완벽한 형태를 갖추게 되어, 본격적으로 파장의 복사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시오 헤이브는 간신히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