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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철문이 덜컹 열렸다. 덩치 큰 시아 리가 등짝이 피투성이가 되어 늘어진 사내를 부축하고 나왔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피투성이가 된 등에 들러붙어 벌겋게 물들었다. 평소 단정하고 완고하던 표정 대신 넋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는 눈을 꽉 눌러 감은 채, 성한 한 팔로 시아 리의 어깨를 붙잡고 휘청대며 걸음을 옮겼다. 시아 리의 작은 눈에선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알파는 맞은편에서 시오 헤이브를 부축했다.
“운트 위비, 이 개자식. 이제 속이 시원한가? 꼭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어?”
“닥쳐라, 알파 리온. 대신할 수만 있었다면, 내가 그를 대신했을 것이다.”
짙은 색안경 뒤로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검은 머리 대수사의 이마 위로도 흠뻑 진땀이 올라와 있었다. 응급 처치는 끝난 듯, 페르 케프터가 의료 도구를 챙겨들고 따라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괜……. 스승님. 시오, 시오 헤이브, 스승님.”
론은 자신의 눈에 눈물이 괴어오르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시오 헤이브는 힘겹게 걸음을 옮기다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론이 와 있었다. 번들번들 젖은 눈을 한 채, 입술을 움질대고 있었다. 할 말이 있나? 그는 제자가 미안하다는 말을 애타게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안 된다. 나와서는 안 될 말. 그는 쉬어터진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전 괜찮습니다. 론.”
저 애타는 눈을 믿고 싶다. 진심으로 믿고 싶다.

레암 세케르스는 돌아가는 일을 흥미 있게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론의 며칠 동안 행적이 마뜩잖다. 봉쇄령이 해제됐는데도 선뜻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다. 그 유들대던 날건달 녀석이 정신을 빼놓은 모양인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한다.
“웃기게 됐지 뭐야. 다들 쉬쉬하는 모양이지만, 야단이 났었나 봐. 하! 몽크 마스터를 따먹은 간덩이 큰 수사가 있다니. 아주 속이 다 시원하다. 상 주고 싶어. 근데 시오 헤이브는 쪽팔려서 자기가 얻어터지고 덮어두자고 그랬다지?”
“시끄러우니 입 좀 다물어, 레암.”
다시 살벌한 반응이 되돌아왔다. 흥. 레암은 콧방귀를 뀌었다.
“론, 인마 자식아. 나한테 그런 큰 부탁을 했으면, 좀 고분고분해야 하는 거 아냐?”
“워프 게이트 한 번 열어주는 거 가지고 더럽게 큰소리는.”
무슨 일인지 어제까지는 떠났어야 할 론이 시오 헤이브가 징벌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제시간에 임지로 가지 않으면 바로 탈영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는지 그는 레암에게 워프 게이트를 열어 오미크론으로 보내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다. 워프 게이트 개폐는 통령 직권이지만 함부로 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결코 쉬운 청이 아니란 것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왜 사람들이 네 말이라면 꼼짝 못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론. 나도 이런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 레암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원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있으면 기꺼이 해드리지. 레암 세케르스 14공화국 통령 각하.”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면.”
무언가 어물어물 망설이는 눈치다. 론은 고개를 좀 더 기울였다.
“오늘 나랑 섹스 한 번 어때? 깔끔하게.”
덤덤한 듯 말하는 레암의 말꼬리가 약간 진동했다. 론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미쳤나. 지금은 취한 것도 아닌데.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자고로 저 좋다고 안기는 연놈들은 사양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모토였다.
“언제?”
“언제든 나쁘지 않지. 지금도 괜찮고.”
“넌 좀 골치 아픈데. 굴착 공사가 앞쪽이야, 뒤쪽이야?”
흥. 밝은 갈색 머리 사내의 입에서 다시 콧방귀가 터졌다. 선택의 여지가 있으니 더 좋지 않나? 앞쪽이든 뒤쪽이든 무슨 상관이야? F급이면 이런 맛도 있어야지.
“관장하기 귀찮으면, 그냥 앞마당을 파는 게 낫겠다. 난 똥밭 매는 취미는 없거든.”
“개자식. 난 섹스 처음인데 분위기 아주 깨라.”
“아, 씨발. 난 초짜도 질색인데. 괜히 내숭 떨면 흥 떨어지거든.”
“내숭 안 떨 테니 걱정 마. 섬에 들어오기 전에 빨간 딱지는 충분히 봤어. 내 꼴이 이렇지 않았으면 나도 지금쯤 너만큼 도사가 되어 있었을걸. 그치만 나 같은 놈이 대체 누굴 불러서 섹스를 할 수 있겠냐?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건……. 아! 메딕 라셰?”
파하하! 레암의 말에 론은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일이지. 섹스란 원래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니까. 아니 사랑이란 거 자체가 웃기는 허상인데 지고지순 따위를 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가볍게 만나 뒤끝 없이 즐기는 것도 좋고, 좋아하는 감정이 있는 것 같다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용해도 좋다. 유용한 사람이 나를 좋아할 때, 섹스라는 짓거리는 정말 편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워프 게이트를 열어주는 대가가 섹스 한 번이라니. 이건 공짜보다 낫다.
“지금?”
“지금.”
레암은 대기하던 수행원들을 모조리 숙소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잠갔다. 론은 커튼을 내리고 자그마한 체구의 사내를 팔로 휘감아 끌어당겼다.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여전히 강아지 같다. 깜박거리며 가만히 올려다보는 눈에 들뜬 열망과 두려움과 긴장이 얽혔다. 조금 남자다워졌다 생각한 놈은 벗겨놓으니 작고 야들거리고 여전히 애처로웠다. 론은 그를 침대에 눕힌 후, 입술을 마주 대고 힘주어 눌렀다. 레암의 자그마한 입술이 일그러져 옆으로 밀렸다. 애처롭게 발기한 작은 살덩어리가 론의 허벅지를 찔렀다.
“크기는 뭘 커. 말만 해지려면 백만 년은 걸리겠군.”
그가 살덩어리를 움켜잡고 지그시 누르자 아래 깔린 강아지 같은 녀석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자지러지는 소리를 뱉었다. 손가락을 아래로 집어넣자 가운데에서 확실한 여자의 공간이 잡혔다. 레암이 이를 악물고 잠시 후드득, 몸부림쳤다. 쉬이, 그는 다시 깊이 입을 맞추며 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예전에 봤을 때는 작고 봉긋 솟은 게 계집애 젖가슴을 보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남자의 가슴이다. 아쉽군. 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전히 이뻐. 젖이 작아도 예쁘고 귀엽다니까. 그는 속삭이며 그의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몽글몽글. 입안에 넣고 굴리는 동안, 하아아, 제기랄, 이, 이 개자식……. 레암의 남자 같지도, 여자 같지도 않은 목소리가 띄엄띄엄 올라왔다.
론이 레암의 두 다리를 벌려 들고 곧추선 자신의 성기를 깊이 그의 몸에 찔러 넣었을 때, 아래에 깔린 레암은 허리를 확 꺾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거부하는 몸짓도, 몸싸움도, 비명도, 애원도 없었다. 그의 두 다리가 단단히 론의 허리에 휘감겼다. 아아아, 하아아. 자지러드는 비명이 너무 쉽게 튀어나왔다. 론은 그의 다리 사이로 연신 몸을 밀어 넣으면서도, 시오 헤이브, 그의 스승의 억눌린 신음과 격렬한 거부의 몸짓을, 그리고 처연하게 흘리던 눈물방울을 생각했다.

론은 천천히 차밭으로 걸어 나왔다. 플라잉 소서를 내려놓고 걷자니 꽤 먼 거리였다. 샘을 지나 예전에 자신이 불시착했던 곳까지 걸었다. 오늘쯤 시오 헤이브가 풀려나려나. 차의 첫 수확기가 시작되려는지 어린잎들이 고개를 내민 채였다. 시오 헤이브를 몇 년 따라다닌 그는 어느 정도 자란 잎을 따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샘 곁에서 누군가 작업복 차림으로 바구니를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일하러 사람이 나올 시기는 아닌데. 며칠 후부터 본격적으로 수확한다 들었는데 어떤 쓸데없이 부지런한 수사가 설레발을 치시나. 그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샘 쪽으로 천천히 마주 걸어갔다. 신참 수사인 모양이다. 머리를 보얗게 깎은 상태였다. 한쪽 팔이 불편한 듯, 그는 바구니를 어정쩡하게 내려놓고 샘 곁에 쭈그리고 앉아 한 팔로 물을 떠 마셨다. 론은 속이 점점 거북해졌다. 불편한 듯, 아픈 기색이 역력한 몸짓으로 그 사내가 몸을 일으켰을 때 론은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달려갔다.
“시오 헤이브! 시오! 맙소사! 이, 이 꼴로 일하러 나왔습니까?”
“론? 왜, 아직 가지 않으셨습니까? 봉쇄령은 풀렸잖습니까? 왜 남은 겁니까!”
덜덜 떨리는 목소리. 멍하니 벌어지는 눈동자. 시오 헤이브는 3일간 자계실에서 물만 마시고 지냈다. 눈이 푹 꺼지고 얼굴엔 그늘이 내렸다. 온몸을 휘청거리는 꼴이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었다. 자괴감과 걱정, 속을 뒤집는 열병이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았다.
“당신을 보고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머리, 머리는? 머리는요!”
“오, 오늘 재서원을 했습니다. 재서원을 하려면, 다시 초, 초임 수사처럼, 삭발을 해야 합니다.”
더듬대는 목소리, 그 흔들림에 더 이상 철혈의 지배자는 없었다. 재서원? 그랬군. 존경받는 몽크 마스터가 계를 어겨 다시 삭발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큰 치욕이었을까. 등 위로 두텁게 감긴 붕대, 팔을 고정한 석고, 얼굴에 검붉게 새겨진 피멍 자국, 통제할 수 없는 발작 같은 떨림이 고스란히 보였다. 론은 목이 메는 것을 애써 누르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가슬가슬한 감촉. 그는 머리에 입술을 대고 미친 듯이 부볐다. 그의 입술이 뺨을 타고 내려와 스승의 입술을 덮을 때, 시오 헤이브는 더 이상 감정을 누를 수 없었다. 한쪽 팔로 더듬대며, 아름다운 은발의 제자를 강하게 품에 들였다. 시오 헤이브의 혀가 조심스럽게 그의 혀를 받아들였다. 거부하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론이 그의 등을 와락 끌어안자 시오 헤이브는 아윽, 짧게 비명을 질렀다.
“미안합니다! 시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 제가, 제가 나빴습니다. 제가…….”
론은 그를 다시 감싸 안고 미친 듯 중얼거렸다. 두 번째의 긴 입맞춤이 끝나고, 제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사내는 목이 멘 소리로 하염없이 떨며 띄엄띄엄 말했다.
“론. 제발, 가십시오, 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시오,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가 당신을 강제로 품었던 것, 용서하십시오. 그건 사랑이 아니고, 폭행이었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제발 절 봐주세요.”
론은 자신의 가슴께가 흠뻑 젖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인 사내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그의 얼굴도 젖어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더듬거렸다.
“론, 그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가서, 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시오!”
론이 비통하게 부르짖는 소리에도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바구니를 주워 들고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황급히 뒤따르던 론은 걸음을 멈추었다. 완고한 벽.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특히 지금은, 지금은 다가가선 안 됐다.

론, 오지 마십시오. 그대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아니, 지난겨울로 끝나는 게 가장 좋았습니다.
새로운 눈물이 넘쳐흘렀다. 그는 불편한 팔로 그것을 문질러 닦는 대신 흘러넘치도록 내버려두었다.




9. 식민행성 오미크론


론은 식민행성이란 곳에 처음 왔을 때, 그 이질적 환경이 너무 친숙하게 느껴져서 오히려 놀랐다. 함께 온 동료 중 많은 이들은 F급까지는 아니라도 유전자 맵이 좋지 못했다. 그러니 자신을 따라 이곳에 자원했겠지. 그러나 그들은 혼혈이 아닌 순수 지구 출신들이었고, 이곳의 환경에 적응하는 데 몹시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론은 고향에 온 듯한 편안함을 즐기고 있었다.
오미크론 행성군은 3공화국에서 개척한 식민행성군이고 그 중 가장 큰 소행성 역시 오미크론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약간의 대기와 수분을 함유한 지반이 발견된 소행성은 전부 16개였다. 붉은빛을 띤 흙에는 박테리아가 서식했다. 생명체 서식 여부는 식민행성 개척 시 중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박테리아는 두 종류였다. 붉은 계열인 BV1-루베라, 보라색 계열인 BV2-비올라. 그것들은 태양광과 치명적인 우주선의 파장에도 유전 정보가 손상되지 않았다.
과학자들은 두 종의 박테리아를 인간 유전자와 결합해 인간형 생명체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산소가 희박하고 메탄 성분이 많은 대기에서도 무리 없이 생존했다. 식민행성은 순수 인간이 생존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곳이었다. 하다못해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물조차 마실 수 없었다. 무기 염류가 지나치게 많아, 인간이 마시면 심한 복통을 일으켰다. 하지만 원주민이나 원주민의 유전자가 있는 혼혈들은 문제가 없었다.
“오미크론 행성에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는 산소 캡슐을 복용해주십시오. 나가기 전에는 반드시 태양광 및 우주선 복사 차단 복장을 하시고, 드러난 피부에는 우주선 차단 스프레이를 뿌려주시기 바랍니다. 뿌리지 않으면 20분 내로 화상을 입게 됩니다. 차단 스프레이는 땀에는 사라지지 않으나 비누기가 함유된 수분에는 제거되니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선하기 전, 안내하는 승무원의 주의사항은 끝도 없었다. 그러나 론은 산소 캡슐을 삼키지 않고 손아귀에 쥐었다. 내가 정말 혼혈인가 아닌가. 여기서 살 수 있나 없나. 론은 그것을 알아보고 싶었다.
메탄이 뒤섞인 대기의 냄새는 역했다. 그러나 어차피 그 냄새는 코가 적응하면 이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워프 게이트가 개방되고 비행선의 입구가 열리자마자 그는 힘껏 숨을 들이쉬었다. 모래 섞인 뜨끈한 바람이 입구로 휘몰아쳐 들어왔다.
아니면 말지. 지금이라도 먹으면 되니까.
한참 후, 그는 여전히 멀쩡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나는 혼혈이 확실하군. 이거, 산소 캡슐 안 먹어도 되는 걸 좋아해야 하는 거 맞지?
산소 캡슐뿐 아니고 그 떨떠름한 물을 마셔도, 차단 스프레이를 뿌리지 않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걸 보니 혼혈이란 게 편하기 그지없었다. 지구에 있을 때는 혼혈인 게 좋은 줄 몰랐다. 여기 오니, 원주민이나 혼혈을 오히려 우성이라고 쳐 주어야 할 것 같다. 동료들은 며칠에 한 번씩 꼬박꼬박 산소 캡슐을 먹고, 기지 밖으로 나갈 때마다 구석구석 스프레이를 뿌려대고, 증류해서 물을 마시고, 멀리 지구에서 운송된 음식을 따로 먹어야 했으니까.
좋은 게 좋은 것이지. 출발이 산뜻하니, 느낌이 좋다.

* * *

덩치가 커다란 사내가 고개를 수그리고 손에 든 서류를 넘겼다. 외인부대 N-4소대, N-5소대. 외곽 방어 기지에서 일하고 있는 원주민들의 명단과 사진이 줄줄이 박힌 리스트였다.
론은 명단에 올라온 군인들의 이름과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론은 이번에 새로 편성된 2개 소대를 자신의 밑으로 배치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히 챙기는 편이었다. 만족스러운 듯, 슬그머니 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한참 만에 서류에서 눈을 뗀 그는 앞에 서 있는 부관에게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고생 많았군, 누트루그.”
“별 말씀을.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중위님.”
누트루그라 불리는 원주민 사내는 론 중위의 직속 부관이었다. 시아 리보다 머리가 하나 이상 더 큰 이 원주민 하사가 론 중위의 휘하에 든 지도 반년이 넘었다. 하지만 그는 론 중위를 항상 어려워했다. 알 수 없는 위압감 때문에 그는 항상 고개를 수그리고 설설 기었다.
“볕이 좋은 날이군. 오늘 같은 날은 광합성이 잘 되나?”
“아, 저 말씀입니까? 아, 하하, 예. 잘 되는 편입니다. 오늘 정도만 되면 며칠 안 먹어도 살아요.”
그는 실험적으로 엽록소의 유전자 정보를 인간 유전자에 집어넣어서 성공한 케이스의 후손이라 했다. 피부 색깔에 초록빛이 은은하게 비쳤고, 머리카락은 나뭇잎과 같은 선명한 녹색이었다. 날 좋으면 머리카락에서 광합성도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초록색 머리카락을 신기해하던 론에게 그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지구 본성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으레 벌레 보듯 놀라거나 동물원에서 원숭이 구경하듯 만져보려 들었으나, 론은 눈을 약간 크게 뜨더니 의외의 말을 해주었었다.
“그것참 부러운 능력이군.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로 우월한 특성이 많단 말야.”
그때처럼 놀랐던 적이 있었을까. 지구 본성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어지지 않았다. 혼잣말처럼 나온 말이니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한 말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에게 잘 보일 이유도 없었다. 뭔가 특별한 사람이 왔다, 누트루그는 그를 단번에 기억했다.
후일 그의 직속 부관으로 뽑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누트루그는 알 수 없는 기대와 흥분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론은 누트루그라는 원주민 부관을 뽑은 것을 탁월한 선택이라 여겼다. 복잡한 원주민 사회와 문화에 대해 소상하게 알려주는 데 최고의 적임자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법을 인정해주고, 식량만 제대로 배분되면 폭동 대부분은 사라질 것이라는 의견도 누트루그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노역 조건의 개선도 절실했다. 18시간의 노역을 당해도 그들은 고통을 호소할 수 없었다. 많은 원주민이 말 그대로 과로사하는 실정이었다. 이것은 관리자 쪽에서도 골치였다. 하지만 그들과 지구에서 온 관리들 사이엔 허심탄회한 대화의 통로가 없었다. 누트루그는 제대로 된 대화 창구가 있다면 론 중위와 자신의 관계가 유일할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곳 원주민들은 토착 및 유입, 인간과의 혼혈 등등 몇 가지 유형이 뒤섞여 있었으나 한결같이 하층 노역자였다. 누트루그처럼 초록색 머리카락은 엄밀히 말해 오미크론 토착 원주민은 아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지구 본성 사람들과 달리 모습의 차이에 관대했다. 이곳 토착 주민은 머리 색깔이 붉고 푸르고 보라색인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고, 눈의 색깔은 대부분 BV1-루베라 박테리아의 색, 즉 붉은 계열이었다. 붉은 눈에 대한 선입견이 여기서 생긴 건지도 모른다고 론은 종종 생각했다.
론이 판단하기로 원주민들은 인간과 동일한 지능을 가지고 있었고, 생존 능력은 지구 밖으로 나오면 훨씬 우월했다. 앞에 선 부관인 누트루그만 해도 덩치나 인상과는 달리 눈치가 빠르고 무엇을 가르치면 말귀도 잘 알아듣는 축이었다. 그는 마을에서도 꽤 존중받는 위치에 있는 듯했다. 젊은 족장이라 했던가? 그러나 그는 다른 지구 본성 관리들에게 여전히 말하는 짐승 정도로밖에 취급받지 못했다.
원주민들은 지구 행성 따위엔 관심도 없었고, 차별받고 무시당한다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지배하는 나라나 지휘관에 대해서도 무심했다. 흙이 섞인 빵이나 이끼로 만든 죽, 씁쓸한 물에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지구에서 생산되는 설탕이나 과일 같은 것에 환장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관리나 지구에 요구할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개돼지 도살당하듯 떼로 죽어나갈 게 뻔했다. 종종 터지는 원주민의 반란은 거개가 식량난 때문이었는데 대부분은 중간에서 착복하는 중간 관리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구에서 투입한 군대와 원주민 사이에는 엄청난 화력 차가 있어 폭동마저 도축 잔치처럼 끝나곤 했다.
론은 왜 원주민들이 그런 처우를 당해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