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8화


“에구야, 마스터는 머리카락이 워치케 이르케 느리게 자란디유? 그려두 지끔은 꽤 볼 만혀 졌으니 인저 지가 한번 모냥 좋게 맹글어드릴까유?”
시아 리는 오늘따라 탁한 금발에 고불고불 컬을 잔뜩 말아 넣고 와서 오히려 보는 사람이 정신없었다. 오늘의 머리 스타일이 영 맘에 안 드는지 연신 잡아당기며 투덜대던 그는 결국 표적을 부석부석한 머리카락을 가진 시오 헤이브로 바꾸었다.
“아, 괜찮습니다. 시아 리.”
당황해서 황급히 말을 끊는 그를 시아 리는 허허대며 무시했다. 어느새 시오 헤이브의 뒤에 가서 선 시아 리는 수사복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꼬리 빗과 젤과 스프레이, 머리핀들을 연줄연줄 끄집어냈다. 페르 케프터가 질린 얼굴로 내뱉었다.
“대체, 자네는 주머니에 뭘 담아 다니는 거야?”
“보면 모르유? 지가 주머니에다가 108경구라두 넣어 갖구 댕기는 중 알았는개비유?”
살이 가는 꼬리 빗이 부석한 머리에 박히자 돌짝 밭에 박힌 호미처럼 그대로 멈춰버렸다. 마스타, 생즌 빗질 안 허구 사시는 거유? 시아 리의 쬐그만 눈이 깜박깜박했다. 시오 헤이브는 무안한 듯이 잠시 웃었다. 그는 익숙한 손으로 보라색 머리카락을 곱게 다발 지었다. 시아 리의 큼직한 손을 거치자 부석하고 들뜬 머리카락이 금세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다들 마술이라도 보는 눈으로 그의 머리를 쳐다보았다.
“이르케 고운 걸 개산발을 허구 댕기셨슈, 허허. 마스타 이제 보니 엥간히 미남이셨구만유.”
갑자기 터지는 폭소에 시오 헤이브도 가만히 웃었다. 이렇게 웃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시아, 여기서 대수사가 되지 않았으면, 미용실을 해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온, 베락 맞을 소릴 허시네유. 지 낯짝으루다가 워떤 년들을 꼬신대유? 응, 허긴. 지가 손꾸락에 재주 하나넌 타구 났구만유. 면상만 좀 받춰줬어두……. 에이. 요 손으루다가 대갈통만 요롱요롱 만지줘두, 지집년들 주르르 다리 꼬고 부르르 싸게 혔을 틴디.”
“시아 리. 미용실에서 왜 여자들을 유혹하신단 말입니까?”
시오 헤이브는 의외로 얌전히 앉아 머리를 맡겼다. 시아는 손바닥에 젤을 비비더니 시오의 머리에 착착 발랐다.
“에에. 그러문 안 되는 게유? 지는 미용실이 작업 거는 덴 중 알었구만유.”
“…저, 저 몹쓸 주둥이.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보고 온 놈이니 저 모양이지.”
페르 케프터는 칼칼하게 투덜거렸다. 시아의 대거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려유, 니가 보태준 거 있슈? 댁은 졀혼꺼정 해보구 여그 왔응게 아쉽지 않다 이거지유. 좆나 많이 해봤다 이거지유. 드러워서.
“시끄러워! 더 말하면 운트 위비가 자계실에 처박아버릴 거다.”
페르 케프터의 말에 시아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눈을 찔금하더니 운트 위비와 페르 케프터를 둘레둘레 쳐다보았다.
페르 케프터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심한 우울증을 겪다가 섬에 들어온 케이스였다. 인생 다 살았다 싶은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여기서 이렇게 징그럽게 오래 살 줄 누가 알았담. 망할 힐링 스톤 같으니, 7인 위원회 중 가장 연장자인 페르 케프터는 콧방귀를 뀌고 입을 다물었다. 시아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눈치를 살그머니 살피다가 웃고 있는 시오 헤이브를 보고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마스타, 지가 손끔을 봐 드릴 텡게, 손 쪼매만?”
“수사가 손금이라니요. 괜찮습니다.”
“엥이, 장난이랑게유. 안 믿으문 그만이지유.”
하하. 그는 조용히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지는 따른 건 모르구, 사랑점 하나뿐이 안 쳐유.
“독신 수사들한테 사랑점이라뇨.”
“워메, 지가 지끔꺼정 본 수사덜 손끔엔 지집들이 차구 넘치든디유? 워칙혀, 마스타헌티두 좋다넌 연눔들이 떼루다가 잔뜩 붙어서 숫자럴 실 수도 없겠구만유. 으히히. 매일 밤마다 몸땡이가 열 개두 모자라실겨. 워메, 지는 부러운디유.”
푸하하. 모여 있던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돌팔이 손금쟁이 같으니. 어려서 이 섬에 들어와 평생 여자를 대면한 적도 거의 없는 몽크 마스터에게 좋다는 연놈들이 떼로 붙어 있다니. 하지만 그는 이내 뜬금없어졌다.
“근디, 운명은 딱 한 명이네유. 딱 하나.”
잠시 걸렸던 시오 헤이브의 미소가 사라졌다. 알파는 그쯤 해서 저놈의 주둥이를 막아야 하나 망설였지만 시오 헤이브가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아, 저한테도 그런 게 있긴 합니까?”
“하이구, 없는 사람은 없지유. 마스타두 분명 있구만유. 아주 아주 확실한 선이 있구만유. 에에……. 근데. 에이, 불쌍년이여 이거. 막 바람 피우구, 이르케 멋진 마스타를 내박치두구, 마스타 맘고생이 심허시겄슈. 걍 포기하구, 여기서 천년만년 몽크 마스터루다가 지시는 기 제일 좋을 거 같은디유.”
시오 헤이브의 눈빛이 아득해진다. 포기라. 벌써 포기는 했다. 미련만 질기게 남았을 뿐이지. 시아 리는 시오 헤이브 앞에 놓인 찻잔을 눈 빠지게 들여다보더니, 부실부실 떠오른 머리를 북북 긁으며 덧붙였다. 얽히는 소용돌이 문양은 잘 안 나오는디, 워치케 마시믄 이 모양이 나온대유?
“차 찌꺼기로 점도 치십니까?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치욕과 영광.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눈물과 웃음이 하나의 운명 안에 극단의 대립을 이루고 있는 모습. 시아는 눈동자를 뱅그르르 돌렸다.
“…요 모냥은, 태산의 눈물, 천년의 웃음이라는 건디유. 에에, 워째…….”
“무슨 뜻입니까?”
“마스타가유, 사랑에 빠지믄 눈물두 태산만치루 흘리야 허구, 웃음두 천년만치루 웃게 된다는 거지유. 천년으치 웃음이야 좋겄지만 어느 시월에 태산만치루 눈물을 뽑으시겄슈. 걍 여그 섬에서 지시는 기 젤루 속이 편컸구먼유.”
다들 슬금슬금 찻잔과 시오 헤이브의 펼쳐진 손과 시아의 얼굴을 멀뚱거리며 쳐다보는 게 이야기에 쏙 빠진 모양이었다. 갑자기 길고 가는 손이 쑤욱 탁자 위로 얹혔다.
“시아 리. 내 손금은?”
냉랭하고 억양 없는 말투에 다들 멍한 얼굴로 손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운트 위비였다. 모인 이들이 턱을 덜렁 내려놓았다. 하지만 시아 리는 태평한 얼굴로 운트의 손바닥을 꼼꼼히 살폈다.
“니눔은 밖으루 나가믄 미녀와 야수 영화럴 찍것구만. 허이구, 너 같은 놈덜 때미 나가 돌팔이가 되는겨. 요 지럴 맞은 팔푼이 화상이 뭔 재주루다가 미녈 낚것어?”
기가 막힌 듯 한꺼번에 터지는 웃음소리가 개인실의 창밖을 쉽게 넘었다.

* * *

“오미크론 행성……. 론에게 연락 온 적 있었나, 알파?”
고즈넉한 저녁이었다. 시오 헤이브는 담담하게 친구에게 말을 붙였다. 편안하게 나온 목소리에 알파는 찻잔에서 입을 떼고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제는 떨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흘러간 세월이 몇 년인데. 그에 대해 찾아보지 않고 애써 외면한 게 얼마나 오래되었는데.
“그가 직접 연락한 건 5년 동안 한 번도 없었어. 넬 켄티나 세케르스가 가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군. 론은 가끔 14공화국으로 휴가를 갔던 모양이야. 레암이 그를 위해서 워프 게이트까지 열어주었다더군.”
그랬었군. 레암과 론은 예전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지. 레암에겐 의지할 만한 친구가, 론에겐 유용한 지지기반이 필요하기도 했을 게고.
“뭐, 굳이 그들이 아니더라도, 오미크론 행성 쪽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론 소령에 대해 알고 있을 거야. 조금 있으면 중령으로 진급한단 말 들었어. 초고속이잖아.”
“아아, 그래. …외인부대의 규모가 많이 커졌다고 들었다.”
“현재 오미크론 행성은 론과 휘하의 외인부대가 없으면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원주민들하고 마찰도 거의 없어졌고 반란도 그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지. 외인부대를 끌고 새로 개척한 식민행성군도 새로 다섯 군데나 되고. 11공화국하고 1공화국에서 오미크론 쪽을 집적대다가 외인부대한테 세 번이나 몰살당하기도 했고. 3공화국 쪽에선 론이 이뻐 죽을 거야.”
“그러면서 본국으로 불러들이지 않는 이유는…….”
“뻔하지. 일단 혼혈인 게 재수 없는 데다, 잘나가는 신참 보는 철밥통들 맘이 오죽하겠어. 생각해봐, 그렇게 능력 있는 놈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데 겁 안 나겠나. 윗대가리에선 론을 어떻게든 좌천시키려고 애쓰고 있는데, 워낙 해놓은 일이 많으니까 아직 건드리지 못하는 거야. 핑계야, 외인부대가 원주민들이라 지구로 들일 수 없다는 건데……. 그렇다고 론이 외인부대를 남의 손에 넘겨주고 오겠어? 게다가 이제 그 부대는 론이 아니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걸? 사실 그렇게 사병화된 군대는 곤란한데. 3공화국 군부는 론을 너무 믿는 것 같아.”
“해준 것도 없으면서.”
“지금까지 고속 승진했잖아. 더 뭘 바라?”
시오 헤이브는 빙그레 웃었다. 론의 소식을 들으면 맘이 설레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면 흐뭇했다. 만나지만 않으면 되었다. 그가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말이 떠오르면, 이제는 아프지 않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시간이란 그러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몸에 남겼던 아픔은 5년의 세월에 묻었다. 좋은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가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를 사랑했었다는 사실만.
“이 얘기가 중요한지 어쩐지 모르겠는데…….”
“음?”
“레암이 호르몬을 투여하지 않겠다고 다시 라셰에게 고집을 부리고 있대.”
한숨이 나왔다. 5년 동안 레암은 종종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였고, 호르몬을 거부한 적도 몇 번 있었다. 메딕 라셰는 총명하고 여러 방면으로 수완이 좋은 사내였지만 설득은 항상 쉽지 않았다.
라셰는 통치자의 자질이 부족한 레암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특별히 뽑아 보낸 사람이었다. 정보 사냥꾼이라고 투덜대긴 하지만 레암도 그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 인간 덕에 아직까지 레암은 큰 실수 없이 통령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암은 라셰가 시오 헤이브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그 위태한 관계가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요새는 여자 옷을 사들이고, 가끔 입어보기도 하는 모양이야. 그러다가 옷을 북북 찢어버리고 발작을 한다는군.”
그럴 수도 있다. 레암이 자신을 여자로 여기고 있었고, 어떻게든 여자로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을 나중에 들은 시오 헤이브는 고개를 수그리고 입술을 짓씹었다.
“난, 레암에게 못 할 짓을 했다. 그에게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거다.”
“절제된 난소에서 난자를 2개 배양해놓았다는 말은 왜 하지 않았어?”
“그가 그 소식을 기뻐할 거라 생각하나? 남에게 그렇게 난도질당하고 이용당했다는 걸 다시 절감하게 될 텐데? 아마, 날 죽이려 할 거다.”
“…….”
“모르겠다. 그가 혹시 나중에라도 후손을 원한다면, 조심스럽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어차피 F급이니까 레암 자신도 후손 생각은 안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알파는 이어지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라셰에게서 들은 보고이며 레암과 관련된 것이니 말하는 것이 옳지만 조심스러운 내용이었다.
“시오. 레암하고 론 말이지.”
“음?”
“론이 14공화국에서 휴가를 보낼 때마다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냈다고 해.”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친구를 보며 시오 헤이브는 한참 동안 먹먹해했다.
“사람, 참. 그게 무슨 어려운 말이라고 그렇게 조심스러운가?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시오 헤이브의 목으로 찻물이 꿀꺽, 큰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목젖이 그 뒤로도 한 차례 더 울렸다.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 시오 헤이브는 싸르르 아픈 속을 표현하는 대신 천천히 웃었다. 이제는 웃을 수 있다. 눈물은, 태산만큼은 아니라도 그동안 흘린 것으로 충분하지 않나. 그리고 이제는 그가 좋은 파트너를 만나 멋진 가정을 꾸리기를 진심으로 기원할 수도 있다. 속은 여전히 아프지만 그래도 시간은 5년이나 지났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너를 포기하고 택한 가치, 그것을 결실하여 네 앞에 보여줄 것이다.
내가 너를 포기한 것 역시 무가치한 일은 아니었다고.
이것은 아마 그를 설득하기보단 나 자신을 설득하기에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지.

* * *

시오 헤이브, 오랜만입니다.
제가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고 온 게 벌써 5년이 넘어가는군요.
여전히 건강하시다고 소식 전해 듣고 있습니다.
오미크론 행성에서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곳은 지구와는 달리 흙이 선명한 붉은색이고, 하늘은 가끔 자기장의 영향으로 무지갯빛을 띠기도 합니다. 힐링 마운틴의 아름다운 차밭만큼 선명한 초록은 없지만 대신 광합성을 하는 부관이 있어서 녹색은 심심치 않게 보는 편입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오미크론 행성의 원주민이라고 했었죠. 이곳에서 당신과 같은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대령으로 진급할 것 같습니다. 조만간 오미크론 행성뿐 아니고 17섹터 전 지역의 총책임자가 될 듯합니다. 아무래도 제가 원주민과 마찰을 해소한 뒤, 외인부대를 창설해 3공화국 군의 세력을 키우고, 영토를 확장한 것이 좋게 작용한 모양입니다.
오미크론 행성과 제가 외인부대를 이끌고 개척한 17섹터 뮤 행성군, 에타, 제타, 이오타 행성들이 식민행성군으로 인정을 받아 원주민 본격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미크론 행성 지역에서 워프 게이트를 사용 않고도 워프 함선만으로 반나절 안에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원주민들은 지구인과 달리 100% 자연출산인데, 인구 증가율이 대단합니다. 성장 속도도, 생존률도 매우 좋은 편입니다.
17섹터 총사령관으로 임관할 때 3공화국에 가게 된다면, 힐링 마운틴 시티도 들러보고 싶습니다. 5년만인데, 어쩐지 그곳은 한결같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알파 대수사님도, 페르 케프터, 시아 리, 운트 위비, 진 한, 르씨 A, 덕 매너스 대수사님도, 그리고 시오 헤이브, 당신도.
평안하시길 빕니다.
론.


당신이 필요해. 시오 헤이브.
내 제국이 도약할 때가 되어가는데, 나를 도와줄 당신 같은 사람이 숨 막히게 절실해.
이제는 당신을 만날 때가 된 것 같아.

알 수 없이 속이 쿡쿡 눌렸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아리고 불편한 감정이 솟았다. 불쾌했다.

내게 아직도 자책이라는 감정이 남아 있었나? 그것참, 더럽게 질기군.

론은 천천히 전송이라 쓰인 단추를 눌렀다.




10.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졌다


누트루그는 흙빛 눈동자를 돌려 책상 앞에 서 있는 흰 제복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론은 날카로운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듯했으나 실제로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론 중령은 최근 넋을 놓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잦았다. 오랜만에 지구로 돌아가는 것 때문에 그러시나. 하지만 휴가는 종종 지구로 다녀오지 않았나. 지구에서 그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는 모르나 그가 간다고 할 적마다 워프 게이트를 열어주는 사람도 있으니 확실히 자신의 상관은 대단한 사람이다.
벌써 대령 진급이라니. 소위로 이 오지 행성에 발을 들여놓은 게 아직 5년밖에 안 되었는데. 그런 초고속 승진은 지구 본성에선 전시가 아니라면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하긴 오미크론 행성은 준전시라 해도 될 만큼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원주민 부대를 만든 후 론은 그들을 거느리고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는 데 열심이었고, 다른 공화국과의 공방에서도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론의 행성 개척을 필두로 다시 불붙은 식민행성 다툼에서 론의 외인부대는 불패의 부대로 불렸다. 지구에서 온 해사한 신참 장교는 사병들이 먹는 흙이 섞인 빵과 탁한 물을 함께 삼키면서 말 그대로 야전에서 굴렀다. 치고 빠져야 할 때를 귀신같이 알고 용병술을 구사하던 론은 대기와 액체 상태의 물이 발견된 행성마다 휩쓸고 다니며 3공화국의 깃발을 꽂았다. 원주민의 생존과 지의류 재배가 가능하다는 분석이 나오면 원주민을 이주시켰다, ‘울타리를 치는 곳까지 우리 땅’이라는 슬로건에 원주민들은 줄지어 개척을 자원했다. 원주민의 생존력은 지구 본성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했다.
채굴 작업도 3배 이상 효율이 높아졌다. 론과 원주민의 대화가 원활해지자 중간에서 군수품이나 대민 보급품을 빼돌리는 부정도 대폭 줄어들었다. 중간에서 착복하던 관리들에게 론은 야차같이 무서운 자였다. 하지만 능력 있고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든든하게 비빌 언덕이었다. 상과 벌을 확실히 하는 것만큼 사람들의 의욕을 고취하는 것은 없었다.
론은 대령 진급을 앞두고 내내 씁쓸한 기분이었다. 자신은 3공화국에 대한 충성심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다. 때가 되면 자신이 키워놓은 부대를 이끌고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때는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지구 본성에서 식민행성을 관리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허술했다. 마음만 먹으면 오미크론 행성 따위야 간단하게 접수할 수 있다. 17섹터는 이미 자신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본성에서 물자 보급을 끊으면, 이곳에 있는 이들이 고스란히 말라죽는다는 것뿐이다. 식량은 온전히 자급되지 않았다. 만약 이곳에서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면, 지구에서의 지지 기반이 반드시 필요했다. 식량의 자급만 된다면 어찌해볼 수도 있겠지만 이곳 토양에서 버틸 수 있는 식물은 여전히 드물었다. 유전자 개량에도,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도 시간과 기술이 필요했다.
아직 때가 아닌가?
천만에. 나이가 50, 60 될 때까지 기다린다면 때가 될 것 같은가?
그는 주변으로 모이는 사람들의 세력을 주의 깊게 분석했다. 3공화국 군부뿐 아니라 각 지역 공화국에서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신참 장교들이 이곳으로 자원하기도 했고, 과학자나 기술자들이 제 발로 찾아오기도 했다. 급속히 세를 확장하는 식민행성이란 불편을 감수하고 투자할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신천지였다. 물론 론은 그들 대부분이 유전자 등급이 낮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능력은 있지만 사회에서 제대로 꿈을 펼칠 수 없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론의 가장 큰 지지 세력은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이미 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재능 있는 자들은 론의 휘하에 다투어 자원입대해 난도 높은 교육을 받았다. 오미크론 뿐 아니고 람다 소행성 지구나 베타, 크세논 행성 등 타 공화국 식민행성의 원주민들도 이주해 외인부대에 입대했다. 론의 휘하에 드는 것을 출세의 지름길로 여기고 자랑스러워했고, 상처를 입는 것조차 영광으로 여겼다.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인재는 많았다. 하지만 전 세계 힘의 균형이나 군사 문제, 각국에 얽힌 경제 사정 따위를 폭넓게 헤아리고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는 없었다.
치밀한 사고, 해박한 지식, 균형 잡힌 판단력, 무시무시한 추진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시오 헤이브 단 한 명뿐이었다.
“빌어먹을!”
중령의 입에서 짧게 터진 욕설에 누트루그는 움찔했다. 저 사람, 요새 뜬금없이 계속 저런다.
그러나 론은 누트루그를 신경쓸 새가 없었다. 보낸 편지가 수신 거부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이 힐링 마운틴에 가보았자 시오 헤이브의 코빼기도 보지 못한 채 쫓겨날 거란 뜻이었다. 어쩌면 입국조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모자를 벗어 집어던졌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를 생각하면 뒤통수에 혹이 들러붙은 것처럼 항상 불쾌하고 찜찜했다.
그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은 감탄, 존경심, 혹은 맹렬한 소유욕. 그리고 질기고 무거운 가책, 가책, 가책. 그렇다. 아마 그게 가장 비중이 큰 감정일 것이다.
그중, 소유욕을 빼놓으면 죄다 지독하게 이질적인 감정이다. 생전 남에게 맛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시오 헤이브에 대해서만 오롯이 존재한다. 불쾌하다. 대체 내가 언제부터 남에게 가책 따위를 느끼게 된 거지?
‘론, 그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가서, 다시는 오지 마십시오.’
론은 손톱을 지근대고 씹었다. 흠뻑 젖은 적갈색 눈동자가 끈덕지게 눈앞에 들러붙었다. 지독한 통증을 참느라 이를 악물고 자신의 폭행을 견디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너무 성급했어. 제기랄. 그는 손가락을 머리카락 사이에 넣고 팍팍 흔들었다. 자신의 입맞춤을 받은 그는 너무나 조심스럽고 수줍게 혀를 움직여 반응했다. 그것도 헤어지면서, 철벽 같은 가면이 깨어졌을 때, 단 한 번.
멍청한 영감.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대체 뭐하고 살았어.
무엇인가 울컥 올라왔다. 푹푹 후비는 것처럼 찌르는 통증이 속을 훑었다. 이건 성욕도 동정도 안타까움도 아니다. 정체를 모르니 끈끈하고 짜증스럽기만 하다.
시오 헤이브, 당신에게 다시는 그따위 짓 하고 싶지 않아.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한 적 없다. 아니 그런 감정 따윈 애초부터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것. 당신같이 현명하고 냉철한 사람이 그런 환상이 실재한다 믿다니 웃기는 일이다. 당신은 그런 같잖은 환상보다 백만 배는 더 가치 있다. 있지도 않은 감정 따윌 씨부려 내 곁으로 끌고 오고 싶진 않지만 그 방법이 아니면 당신을 움직일 가능성은 아예 바닥이잖나. 론은 이마에 짚은 손을 떼고 잠시 표정을 풀었다.
당신, 아직도 그 감정이 있나?

시오 헤이브라면, 그렇게도 속 무르고 겁 많고, 겉으로만 힘을 꽁꽁 주고 사는 종자라면, 분명히 그럴 것이다. 여전히 내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몰래 알아보며 가만히 웃고 있을지 모른다. 은발의 청년은 창밖을 내다보며 긴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