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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벌써 적적하신 모양입니다, 몽크 마스터.”
집무실에 앉아 과학 부처의 하반기 예산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느리게 올라왔다. 창밖은 어느새 진한 초록의 물결이 들어차 있었다. 주변은 조용했다. 봄이 되며 시오 헤이브는 좀 더 과묵해졌다. 붉은 머리 대수사는 무슨 좋은 소식을 감추고 있는지 슬쩍 웃다가 표정을 바로잡았다. 어쨌든 지금은 예산안을 올리러 온 거고, 이 인간을 통과해야 백인회에 상정이 돼서 통과가 되어야…….
내 부서에 돈이 나올 거란 말이지.
“바빠서 그럴 틈도 없습니다, 알파 대수사.”
“3공화국 통합 사관학교 넬 켄티 교장에게 소식이 왔습니다. 졸업 시험 때 론이 수석을 했다 했습니다. 임관식도 했고, 일주일 안에 임지로 떠난다 했습니다.”
으흠. 시오 헤이브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론은 나간 이후로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섭섭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이곳에 올 일이 없는 사람이니까.
“넬 켄티 교장은, 그를 잘 교육해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습니다. 에에, 뭐라더라, ‘본교의 학생을 훌륭한 인재로 양성시켜, 본 공화국을 받치는 귀한 동량으로 거듭나게 해주신 데 대해 심심한 사의를 표명합니다. 본 통합 사관학교는 힐링 마운틴 시티 몽크 마스터 및 고귀한 수사님들의 호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 예.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우습기까지 한 장중한 미사여구에도 시오 헤이브는 여전히 무감한 얼굴이었다. 그게 평소 공석에서의 시오 헤이브이기도 했다. 알파는 잠시 망설이다 덧붙였다.
“론은 오미크론 식민행성의 원주민 감독직으로 임관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그렇군. 아무리 차석 입학에 수석 졸업이라 해도 F등급 유전자는 어쩔 수 없다. 겨울 동안 조금 윤기를 얻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아쉽다는 뜻이겠지. 혹은 시오 헤이브의 아버지가 거주하던 지역이니 그것이 신경 쓰이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F등급이니까요. 하지만 몽크 마스터께서 친히 써주신다는 추천서를 론 자신이 거절했으니, 알아서 할 겁니다.”
시오는 과학 부처 예산안을 내밀었다.
“예산안 짠 팀을 소집해주십시오. 추가로 편성된 예산안에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 판공비로 책정된 27% 추가분에 대한 명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작년 판공비 예산과 집행 명세를 준비해오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엉성하게 짜놓으면 백인회는 고사하고 제 손도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며칠간 밤샘 준비를 해야 할 거라고 전해주십시오.”
알파는 얼굴을 와락 찡그렸다. 제기랄, 신경질 나면 차라리 말로 표현을 해.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볶지 말고.
* * *
레암 세케르스가 힐링 마운틴을 방문한 것은 뜻밖이었다. 그의 일상적인 근황이나 14공화국의 내부 상황을 알려주는 주치의 라셰는 지난 주 보고에서 한동안 레암의 외유 예정이 없을 거라 했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케르스 통령.”
시오 헤이브는 급작스런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비행장까지 직접 나가 그를 맞았다. 정식 의전 절차가 필요 없는 비공식 방문이라 해도 이제 그는 이곳의 수사 후보생이 아니라 일국의 통치자였다. 더구나 이곳보다 훨씬 넓고 인구수도 많은 14공화국의 수장이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조금은 사실일지 모른다. 레암은 예전처럼 불안해하거나 이리저리 눈치를 보지도 않았고, 아해해하며 어린애처럼 웃지도 않았다. 남성 호르몬을 안정적으로 투여해서인지 키도 커졌고, 뼈도 실해진 모양이었다. 턱밑에 파르스름하게 잡힌 수염자리도 예전의 레암에게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다. 웃음소리는 다소 묵직해졌으나 히스테릭한 떨림이 섞여 기이하게 들렸다.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세케르스 통령 각하. 14공화국 소식은 간간 듣고 있습니다.”
“하하. 제 전속 메딕이 워낙 정보 수집력이 뛰어나서 말이죠. 정기적으로 제 근황을 열심히 보고하고 있을 테니, 충분히 만족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비아냥에도 시오 헤이브는 태연했다. 레암이 모를 턱이 없지. 원래 통치자들이란 아무리 바보 같아도 그런 쪽으론 감이 좋은 법이다. 하지만 일정 선만 넘지 않으면 서로 뻔히 알면서 시치미를 떼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각국의 정보 외교 전쟁이다. 외려 이런 것을 입 밖으로 올리는 레암이야말로 미숙한 것이다. 하지만 시오 헤이브는 그를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레암은 나이도 어린 데다 애초부터 정치를 할 만한 그릇이 못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라셰를 레암에게 붙여 보냈는지 말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고.
레암의 눈이 사르르 가늘어졌다. 어차피 정보란, 캐고자 하는 자에겐 얼마든지 열려 있는 것. 딱히 라셰라는 메딕이 아니더라도 시오 헤이브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긁어 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안다. 그저 심술기로 한 번 찔러본 것뿐이다. 시오 헤이브는 덤덤하게 웃었다.
“저런. 제대로 된 보고가 아무것도 없어서 해고하려 했는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물론 저한테 부탁하거나 저를 이용하실 일이 있으면 부담 없이 그를 사용하셔도 됩니다.”
‘시오 헤이브도 여우가 다 됐단 말야.’
앞에 앉아 있던 알파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아직 그만큼 노회하지 못한 레암 세케르스는 한 방 먹은 얼굴로 눈만 껌벅껌벅했다.
“1공화국 쪽에 일정이 있어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렀습니다. 예전엔 힐링 마운틴이 1공화국 소속이기도 했다지요. 까마득하게 먼 시절 이야기지만.”
“그러는 1공화국도 한때 3공화국의 속국이기도 했었죠.”
제기랄. 레암은 그제야 자신의 14공화국 역시 오래전에 3공화국의 속국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너희 나라도 별수 없다는 뜻이겠지. 소문에서는 시오 헤이브가 몹시 과묵한 사람이라 했는데 의외다. 이 인간하고 말씨름하면 밀리기에 십상이겠다.
“친구도 만나보고 싶고, 한때 제가 그렇게 궁금해했던 몽크 마스터에게 정식으로 인사도 하고 싶어서 들렀습니다. 론은 여전하겠죠? 그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시오 헤이브의 눈썹이 가만히 움직였다. 설마, 레암이 론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물론 레암이 그동안 론의 안부를 꾸준히 묻기도 했고, 론과 개별적으로 연락이 있던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레암은 일국의 통령 아닌가?
“세케르스 통령 각하, 론은 이곳에 없습니다. 모교인 사관학교로 돌아가서 졸업했고, 임관식도 끝나서 오미크론 식민행성의 원주민 감독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아마 이곳에 올 일은 없을 것입니다.”
레암의 얼굴의 와르르 일그러졌다.
“론을 보기 위해 오신 겁니까? 그렇다면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연락도 어렵고……. 유감입니다.”
“연락이 어렵다고요? 론은 당신이 아끼던 제자 아닙니까?”
“죄송합니다만 개인적인 연락처는 갖고 있지 않습니다. 3공화국 통합 사관학교 쪽으로 직접 전언을 넣으시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시오 헤이브는 론이 이곳에 다시 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론이 다시 온다면, 자신은 더 괴로워질 것이었다. 감정이든 만남이든 이쯤에서 맺는 게 현명한 일. 레암 세케르스는 굳은 얼굴을 감추지 않고 몸을 돌렸다.
* * *
늦은 저녁 시간, 한 무리의 플라잉 소서가 메인센터 앞에 착륙했다. 3공화국 소속의 외부 비행체였다. 출입 허가서의 코드를 입력하지 못했으니 분명 불법 입국이긴 했다. 보안 담당 로봇과 차량들이 플라잉 소서를 둘러싸고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는 동안, 플라잉 소서에서 훤칠한 제복 차림의 사내가 껑충 뛰어내렸다. 말갛게 빛을 반사하는 은발, 이글이글 힘이 넘치는 붉은 홍채가 선명했다. 몹시 키가 커서인지 플라잉 소서 너머로 고개가 솟아올랐다.
“…론?”
그를 알아본 수련사 한 명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몇 달 되지 않았는데, 그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를 감싼 흰 제복이 잘 어울렸다. 신참 소위를 나타내는 가슴의 계급장과 어깨의 견장이 반들반들했다.
“내려! 도착했어!”
뒤에 엉겨 붙은 플라잉 소서의 문이 열리며 그의 동료들이 호기심에 찬 얼굴로 내려섰다. 열 명 가까이 되는 그의 일행이 론을 옹위하듯 붙어 섰다.
“첫 임지에 가기 전에 스승에게 인사라도 드리고 가는 게 예의지, 안 그런가?”
론은 자신과 함께 오미크론 행성으로 가겠다고 자원한 녀석들을 둘러보고 가볍게 웃었다. 그와 안면이 있던 수련사가 황급히 통신 단말기를 열어 무언가를 큰 소리로 보고했다.
시오 헤이브는 보고를 받고도 선뜻 나가지 않았다. 대신 나간 것은 레암 세케르스와 그의 보좌관들이었다. 론은 레암이 이곳에 자신을 보기 위해 와 있다는 것에 놀랐으나 바로 활짝 웃음을 지었다. 지지 기반은 많을수록 좋다. 레암은 허수아비라곤 하지만 엄연히 14공화국의 통령이다. 친해두어 손해날 것은 없다. 게다가 그는 무슨 일인지 자신에게 관심과 호의를 갖고 있었다.
몽크 마스터 전용 접빈실 사용 허가를 받은 그들은 아예 그곳에서 걸판지게 술판을 벌였다. 반가울 것도 친구랄 것도 없는 놈이었지만, 그래도 강아지처럼 살살대는 게 나름 보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는데. 들어온 녀석은 선이 곱고 자그마한 그놈이 아니고 조금은 사내다워진 물건이었다.
확실히 레암이 변하긴 했다. 론은 각하, 라고 부르는 대신 대뜸 어이 땅콩, 오랜만이다, 하고 손을 흔들었다. 퍼렇게 질린 수행원들과 동료들은 1분도 못 되어 쫓겨났다. 둘은 술을 박스째 갖다놓고 퍼마시기 시작했다. 론은 그가 소탈한 친구로서의 대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통령으로 있으며 연락할 동안, 론은 그가 원하는 대로 지위 따위 개의치 않는, 허물없는 친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레암은 그것을 눈물 나게 고맙게 여겼다. 주변엔 편하게 말을 할 사람도 없었고, 자신의 성 정체성이 뒤집힌 것을 알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론은 적어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론은, 레암이 가장 좋아하던, 눈부시게 매력적인 친구이기도 했다.
“허? 키 컸다? 겁나 좋군그래, 좆도 커졌겠다?”
“헤헤, 뭐……. 남성 호르몬 나쁘지 않더라. 물론 커졌지. 부러우면 너도 몰래 써 보든가. 말만 해질걸?”
“씨발, 말만 한 좆을 어따 써. 들어갈 구멍도 없는데. 암말이랑 붙으란 말야?”
파하하. 레암이 제법 굵어진 목소리로 홍소를 터뜨렸다. 론은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7지구 날건달로서의 모습을 본때 있게 보여주었다.
“난 네가 몹시 보고 싶었는데, 넌 안 그랬나 보지, 론? 내 생각난 적 없었어?”
“징그럽다 새끼. 들러붙지 마! 냄새나는 사내놈 따윌 내가 왜 만나고 싶어 해?”
“…내가 여자로 있을 때가 더 나았나?”
“둘 다 징그러워 새꺄, 아무리 이뻐도 가랑이에 뭐 달린 년은 싫다구. 하지만 어쨌든 땅콩처럼 쬐끄마할 때가 더 나았어. 그건 예쁘고 귀엽기라도 하지. 에이, 췌!”
“나도 내가 여자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아. 나한테 수염이 나고 아래서 뭐가 무겁게 커지고 그러는 게 영 싫어. 내 몸 같지 않아.”
“관두라고. 멋진 사나이로 평생을 가는 거라니까. 너 젖도 다 들어갔나 보다?”
“…알고 있었어?”
“씨발아, 검사실에서 봤다. 어쩔래? 튀어나오다 만 콩알만 한 거 봤다고 지랄할 거냐? 난 그딴 건 젖으로 안 쳐. F컵은 돼야 만져줄 맛이 나지. 난 열두 살 때 벌써 딱지를 떼고 말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붉으락푸르락하던 레암은 기가 막힌 듯이 웃어버렸다.
“세상에 F컵이 어디 있어? 어느 정도가 되어야 F컵인데?”
흐응? 둘 다 얼근히 술이 올랐는지 혀가 꼬부라졌다. 론의 주먹이 올라갔다. 이거 두 배만 한 거. 그쯤 될 거야. 론은 생각난 듯 덧붙였다.
“시오 헤이브도 커.”
뭐? 레암은 턱을 덜렁 내려놓았다. 몽크 마스터가…? 뭐가 어째?
“F까지는 안 가지만……. 하여간 본 적 있어. 대흉근이 어마어마하지. 아 제기랄, 근데 그게 말랑한 게 아니고 돌멩이 같다는 게 문제야. 말랑하면 녹진하게 주물러주기 딱 좋은데.”
와하하하! 레암은 바닥을 구르면서 미친 듯이 웃었다. 스승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는 놈이 이렇게 방자할 수가. 레암은 끄득거리며 눈물 콧물을 닦았다.
“이 말이 몽크 마스터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이래?”
“무얼. 난 시오 헤이브를 처음 만났을 때 님하, 젖이 크십니다. 여잔 줄 알았어요, 그랬는데?”
레암 세케르스는 아예 눈을 주먹만큼이나 크게 벌리더니 이내 숨도 못 쉬고 웃기 시작했다. 여잔 줄 알았다니. 그 덩치에, 그 얼굴에, 그 성격에?
알파는 론이 레암 세케르스와 즐겁게 회포를 풀고 있다고만 전했다. 그따위 개 같은 말본새까지 전할 이유는 없었다. 시오 헤이브는 눈썹을 살짝 움직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즐겁게 회포를 풀고 있다면 좋은 일이지. 과학 부처 예산팀의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시오 헤이브가 개인실로 돌아온 것은 밤 2시가 가까워서였다. 그는 홍채 인식기 앞에서 락을 해제하고 들어서다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술 냄새가 났다. 안에 누가 들어와 있는 것 같다.
“누구?”
“…….”
“론입니까?”
“금방 아시는군요, 접니다.”
론이 침실 문을 열고 나왔다. 술을 꽤 많이 마셨다 들었는데 얼굴은 그리 취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제복이 잘 어울립니다, 론. 수석 졸업을 했다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인식기 세팅을 다시 해야겠군요. 아무리 그대라 해도 허락 없이 들어와선 곤란합니다.”
“예전엔 별도의 허락 없이 드나들지 않았습니까, 시오 헤이브?”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 당신은 이곳 사람이 아니고, 더 이상 제게 가르침을 받지도 않잖습니까.”
“…뵙고 싶었습니다. 나와주실 줄 알았는데 끝까지 안 오셔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내일 낮에 보려 했습니다. 이렇게 밤에 개인실로 찾아오는 건 좋지 않습니다, 론.”
“좋지 않을 건 또 뭡니까? 예전엔 같이 마시고 여기서 자고 간 적도 있는데요.”
“남의 오해를 살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숙소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론의 입이 빙그레 위로 올라갔다. 천연하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수련사복을 입고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단호하고, 화려하며, 이글대는 힘이 느껴졌다.
“오해라니요? 제가 이 방에서 나온다고 누가, 무슨 오해를 한단 말입니까? 다만, 전 드릴 말씀이 있어서 온 것뿐입니다.”
그의 목소리에 실린 위압감이 예전에 비해 적나라하게 날을 세웠다. 론은 신중하게 그의 반응을 살폈다. 시오 헤이브는 그러나 속을 감추는 데 철통 같은 자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술에 취한 척하고 미끼를 던져볼 생각이었다. 안 되면 취했다고 덮어버리고, 다른 방법을 강구하면 된다. 그의 감정을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어떻게 물 밖으로 끌어올린다? 이 경우는 직접 찔러보는 게 최고일 것이다. 레암 때문에 시간을 날리긴 했지만, 아주 늦지는 않았다. 시오 헤이브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긴 내용이 아니라면 말씀하십시오. 내일 접빈실에서 하기 어려운 말입니까?”
“예.”
“무슨 내용입니까?”
론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제 시작이다, 시오 헤이브. 연기를 배우라고 했던 건 바로 당신이었지. 그러니 나중에 억울하다 말하지 마라.
“시오 헤이브.”
열렬한 시선이 스승의 얼굴로 쏟아졌다. 시오는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울렁대는 속을 꾹꾹 눌렀다.
“제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습니다. 확실해지기 전엔 말씀드리기 어려웠습니다. 처음엔, 이 감정이 당신에 대한 존경의 염이라 생각했습니다.”
“론?”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 학교로 되돌아갔을 때, 지독하게 앓아누웠습니다. 그때 확신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간 몸이 안 좋았습니까? 론.”
“임지로 가고 나면 당신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속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호되게 열병을 앓았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목에 무엇이 걸린 듯, 론은 속삭였다. 시오 헤이브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의 적갈색 깊은 눈동자에 뻣뻣하게 힘이 들어갔다. 지금, 론이 뭐라 했나? 무어라 했지? 내가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았다고…?
론은 정공법으로 간결하게 치고 들어갔다. 이 사내에겐 그게 가장 효과가 좋을 것이다.
“당신이 좋습니다. 사랑합니다, 시오 헤이브.”
머리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았다. 입이 바짝 말라붙었다.
뭐? 좋아…한다?
나를?
그 역시 나를 사랑한다 했나? 지금?
여인들 말고도 남자에게도 관심이 있었나? 사관학교에서는 내내 여생도들과 염문을 뿌렸다 하지 않았나.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폭발하듯 위로 치밀었다. 온몸이 벌벌 떨리는 것을, 시오 헤이브는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될 일이 아니야. 가능하지 않다.
그 감정은, 나에게 치명적이며, 이 섬 전체에도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론……. 대답하는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말했습니다. 당신의 제안이든 감정이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섬에 뼈를 묻을 것입니다.”
깊은 한숨 속에 알코올 냄새가 함께 흘러나갔다. 시오 헤이브는 취한 듯,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은발의 청년이 몸을 돌려 나갈 듯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이켰다.
“받아들일 수 있다 없다를 말하지 말고, 당신의 감정을 말해! 이 섬 따윈 접어놓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말해! 내가 좋으면 좋다, 아니면 아니다를 말하면 되는 거야, 시오 헤이브!”
와락, 청년의 긴 팔이 수사복의 긴 자락을 휘감았다. 탄탄한 허리를 억세게 붙잡아 안고는 한 손으로 자신보다 키가 작은 스승의 머리를 틀어잡았다. 고개를 깊이 수그렸다. 얼이 나간 듯한 적갈색의 눈이 커지면서 속눈썹이 버르르 경련했다. 이게 무슨! 갈라진 목소리는 이내 으읍, 하는 짓눌린 소리로 바뀌었다. 시오 헤이브의 입안으로 럼의 맵고 강한 향기가 들어찼다. 시오 헤이브는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미끈대는 혀가 밀려 들어와 붙들린 사내의 혀를 얽는 순간, 그는 온몸을 후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화드득, 크게 경련했다.
“놓으십…! 으읍. 놔, 론! 윽!”
밀어내며 피하려는 시오 헤이브의 허리가 점점 뒤로 꺾여 넘어갔다. 청년의 입맞춤은 집요했다. 크게 벌어진 입술이 아래에 있는 사내의 입을 함빡 덮었다. 그 안에서 혀가 요동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 시오 헤이브는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에 멈칫하다가 그대로 청년의 힘에 밀려버렸다.
정신을 차린 것은 그의 손이 수사복의 단추를 풀어 내렸을 때였다. 허으윽. 시오 헤이브가 주먹으로 그의 옆구리를 두세 차례 후려친 후에야 흰 제복의 청년은 얕은 신음을 뱉으며 입술을 떼어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가면이 날아갔다. 그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하지만 손이 벌벌 떨려 옷은 끝까지 여며지지 않았다. 론은 그를 노려보며 악을 썼다.
“시오 헤이브! 사랑한다 했습니다. 당신이 좋다 했습니다. 이 감정이 죄입니까?”
“그만 하십시오. 될 말이 아닙니다. 론, 나가십시오!”
“백번이라도 말할 겁니다! 사랑합니다. 난 사내답게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시오 헤이브, 당신의 대답을 듣고 싶어요. 된다, 안 된다가 아니고 좋다, 싫다로 말해달란 말입니다.”
“전, 수사입니다. 그것도, 이곳의 몽크 마스터입니다! 그만하고 나가란 말입니다! 론!”
“제기랄! 그따위 말 씨부리지 말고, 당신의 감정을 말하란 말야! 난, 당신을 사랑한다고! 보고 싶어서 돌아버릴 정도로 좋아한다고! 시오 헤이브! 당신은 어떠냐고!”
론에게서 뿜어나오는 건 끓어오를 듯한 열기였다. 결국 단단하던 사내의 속에서 눌렀던 감정이 왈칵 터졌다. 그는 얼굴을 참담하게 구긴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힘들다, 론. 그러니 제발, 그만하고 나가! 제발!”
수사복을 입은 사내가 허물어지듯 주저앉아 머리를 벽에 박았다. 손대지 마! 갈라진 그의 음성은 위태했다.
충분해. 오늘은 이걸로 충분해. 시오 헤이브.
미, 미안합니다. 시오 헤이브, 제, 제가 좀 많이 마신 모양입니다. 론은 반쯤 취한 듯 웅얼웅얼 사과의 말을 흘리며 밖으로 나왔다. 시오 헤이브는 돌아보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충분히 확인된 셈이었다.
키스라. 마음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나쁘진 않았군. 반응을 보니, 여자들하고 뽀뽀 한 번 못 해본 게 맞나 보다.
하! 자그마치 첫 키스였나요? 오늘 잠 다 주무셨군요. 존경하는 스승님.
그는 문에 기대선 채 나직이 클클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