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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알파가 시오 헤이브의 방에 들어간 것은 아침 10시가 넘어서였다. 몽크 마스터께서 식사 시간에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하는 수련사의 근심 어린 목소리에 그는 은근히 걱정되었다. 정말 취할 정도로 많이 마신 건가? 그는 아침 식사를 2인분 청해 직접 시오 헤이브의 개인실로 향했다.
…꼴 좀 봐라.
와인 한 병은 바닥이 나 있고, 한 병은 그대로 남았다. 두 사람은 곯아떨어져 있었다. 한 명은 제법 단정한 꼴로 소파에서 꼬부리고 쌕쌕대고 있었지만, 한 명은 침대에서 속옷만 한 장 걸친 채 산발한 꼴로 늘어져 있었다. 알파는 한 번도 시오 헤이브의 이런 꼴을 본 적이 없었다.
“시오? 정말 취할 정도로 마신 건가? 이게 무슨 꼴이야!”
침대에 늘어져 있던 사내가 꿈틀대더니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급히 이불을 끌어당겼다. 알파는 친구가 눈썹을 지그시 찡그리며 이불을 잠시 들춰보았다가 다시 이불로 몸을 휘감는 것을 보았다. 완고한 입술이 더 단단하게 굳었다.
“괜찮아? 무슨 일이 있었어? 정말 취하도록 마셨단 말이야?”
시오 헤이브는 대답이 없었다. 얼굴이 벌그레한 채,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어젯밤에 분명 취했다. 론이 눕혀주던 것까지는 생각이 가물가물 난다. 그리고 밤에 다시 몽정했다. 그건 확실했다. 은빛 물결은 여전했지만 세이렌은 아니었다. 낮고 서늘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이번엔 대천사가 꿈에 나왔나? 대천사가 할 일이 없어서 남의 꿈속에서 방사까지 도와준다고? 가지가지 한다, 시오 헤이브.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사정의 느낌은 분명한데 아무 흔적이 없었다. 뿌옇게 말라붙은 자국조차 없었다. 아래가 평소 몽정을 했을 때와 달리 더 아리고 뻐근한 것도 이상하지만 분명 속옷은 어제 입고 잤던 것이었다. 그는 간신히 허리를 구부려 바닥에 놓인 수사복을 주워 입었다. 무슨 일인지 울렁대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친구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고개를 수그렸다. 민망했다.
“시오, 왜 그래?”
“…아니다. 속이 좀 거북해서. 머리도 아프고.”
“뭐? 대체 얼마나 마셨길래?”
“두세 모금…쯤 마신 것 같다. 계를 어길 정도로 마신 건 아니다, 알파.”
낄낄낄낄. 장난기 많은 친구는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서너 모금에 숙취야? 이거 물건이네. 어제 그냥 구경 와 볼걸. 시오가 주정하는 걸 꼭 한 번은 보고 싶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힐링 마운틴에 있던 시오 헤이브와 달리 알파는 일반 사회에 있다 들어왔다. 대가리가 말랑하던 때부터 여자도 낚아보았고, 말술도 마다하지 않고 마셔보았던 경험이 있다. 알파는 눈에 웃음을 담고 쟁반을 내밀었다.
“해장이나 하지? 정말 술 몇 모금에 해장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그것도 보드카나 럼도 아닌 고급 와인에.”
“대체 넌 무슨 속셈으로 론에게 와인을 안겨 보냈나?”
“흐흥. 굳이 말하자면 네 이런 꼴을 보고 싶어서랄까. 자알 했다, 론. 저놈도 같이 취해서 뻗은 게 문제지만.”
그는 소파에서 꼬부리고 있는 훤칠한 청년을 보고 카랑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이상하군. 분명 론은 자기 입으로 술이 세다고 말했다. 와인은 둘이서 한 병밖에 마시지 않았다. 놈이 저 정도로 취해서 뻗을 것 같진 않은데. 뭐, 하긴. 분위기로 취하기도 하니까.
“그래 유일한 애제자와 무슨 회포라도 푸셨나?”
“…그게, 내가 너무 일찍 취해 의식을 잃은 모양이다.”
알파는 의자에 앉아 수프를 마시고 있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와인 옆에 놓인 하얀 막사발은 여전히 우스웠다. 저걸로 두 잔이라니. 그는 물컵의 물을 사발에 붓고는 와인을 유리잔에 천천히 부었다.
“그래, 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음. 힐링 마운틴을 나갈 생각이 없냐고 비슷한 걸 물어본 거 같은데, 모르겠다. 어제 물은 건지, 며칠 전에 물은 건지. 물론 말도 안 된다 일축하긴 했다. 으으, 머리 아파.”
시오 헤이브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거 괘씸한 놈일세. 감히 몽크 마스터에게. 말이 되는 얘길 해야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 사실 난 힐링 스톤 프로젝트가 완결되면 나가고 싶기도 하지만…….”
“흥. 내 장담하는데, 한 세기 내로는 완결되지 않을걸.”
그건 그래. 시오 헤이브는 기운 없이 웃었다. 알파는 속이 꼬였다.
“왜 나가고 싶은 거지, 시오? 나가서 하고 싶은 일이 있나?”
“음.”
“…뭔데? 여기선 못 하는 건가? 넌 몽크 마스터 아닌가.”
시오 헤이브는 난처한 듯이 웃었다. 알파는 와인 잔을 친구에게 내밀고 자신의 잔도 채우기 시작했다.
“나도 너한테 대작을 청하지, 시오 헤이브. 대신 취할 때까지 두진 않을게. 한 잔만 해.”
론은 눈을 감은 채 두런두런 들리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잠에서 깬 지는 꽤 되었으나 일단 너구리 알파 영감이 와 있어서 바로 일어나기가 마땅찮았다. 이젠 두 사람이 대작인가. 두 사내는 어제 먹다 남긴 술을 병아리 눈물만큼 따라놓고,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래. 나가서 하고 싶은 게 뭔데, 시오?”
대답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답답할 정도로 기다리게 한 끝에야 스승의 느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파. 난 나가서, 가정이란 걸 만들어보고 싶어.”
누워 있는 론의 눈이 둥그레졌다. 뭐? 알파의 목소리도 툭 튀어 오르는 게 비슷하게 놀란 듯했다.
“가정? 겨우 가정을 갖는 거라고? 마누라하고 애새끼들이 득실대는?”
“음, 내 가정. 난 많은 영지도, 휘하의 수많은 사람도 원하지 않아. 내가 아끼는 반려자와 아이가 있으면 좋겠어. 딱 한 명이라도 괜찮아.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일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가끔 차도 같이 하고. 밤에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품속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으면 좋겠어.”
시오 헤이브의 눈이 조금 쓸쓸해졌다. 취한 것은 아니다. 알파는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속을 털어놓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마 이게 진짜 시오 헤이브의 마음일 것이다. 오래전, 조심성 많고 수줍음을 잘 타던 시오 헤이브 수련사는 자신이 무용담 삼아 들려준 여자 친구와의 풋사랑 이야기와, 그녀와 작별하고 들어왔을 때의 뻔한 스토리에 그렇게도 안타까워했다.
“난, 다른 선택을 할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쯤은 모든 걸 내던지는 사랑을 해보고 싶었다, 알파. 평생, 한 번도 이성을 마비시킬 만한 감정을 겪어보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해야 한다는 게 유감이야.”
“이곳엔 네가 일생을 바쳐 일으켜 세운 이상과, 네 평생을 지켜온 친구들… 친구가 있지 않나. 시오?”
알파의 음성이 쥐어짜인 듯 갈라졌다.
“아아……. 그래, 그래. 감사한 일이지.”
슬그머니 취기가 오르는지 두 사내의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다.
“넌, 누군가를 목숨을 걸 정도로 열렬하게 사랑해본 적이 있나, 알파?”
“…내가 너인 줄 알아? 당연히 있지. 뭐가 안 맞아서 포기했지만.”
알파는 억지로 싱글싱글 웃었다. 시오 헤이브는 고개를 수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그럼, 네가 그런 선택을 했을 때 어땠어?”
“죽을 만큼 아팠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게 아픈 걸 덮을 만큼 행복했었어. 쳇, 그걸 말한다고 네가 알겠어?”
시오 헤이브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행복하기도 했었나…? 그랬군. 그렇다면 다행이다, 친구.”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시오? 알파의 목울대가 꿀럭꿀럭 움직였다.
“알파, 혹시 그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나?”
시오 헤이브의 시선이 천장으로 향했다. 덤덤한 목소리. 론은 두 사람의 대화가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엔 알파가 오래 침묵했다.
“시오. 그 감정이 사라진 적은 없었어. 덮고 살 뿐이다. 제기랄, 더 이상 구질구질 묻지 마.”
“미안하다.”
“대체 네가 왜 사과를 해? 뭐가 미안한데?”
“…미안. 미안해, 알파.”
시오 헤이브의 느린 사과를 듣는 알파의 숨소리가 씩씩 거칠어졌다.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듣는 것처럼, 그는 과격하게 반응했다.
“됐어! 그쯤 하자고. 시오 헤이브, 그만 하자고.”
무엇이?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알파 영감은 왜 저렇게 예민한 반응이지? 종잡을 수가 없다. 론은 두 사내의 무거운 대화를 계속 곱씹었다.
“그러는 시오 너는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있나? 그런 감정을 인정한 적이 있긴 해? 모든 걸 포기할 정도로 맹목적인 감정을, 네가 스스로에게 한 번이라도 허락한 적이 있었냐고. 넌 껍질을 둘러쓰고, 털끝만큼도 허락한 적이 없었잖아. 가정을 갖고 싶다고? 사랑하는 자의 품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고 싶다고? 넌 얼마든지 그리할 수 있었어! 그걸 선택하지 않은 건 너 자신이야. 알아?”
알파가 알기로 시오 헤이브 이 겁 많은 친구는, 그런 치명적인 감정을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허락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나는, 그래서 네 곁에 남는 방법으로 친구, 동료의 길을 택했어. 그 방법밖에 없었어. 그러니 그 감정에 대해 아는 척도 말고, 나에게 사과하지도 마. 네 곁에 남기 위해 모든 것을 팽개친 나를 생각한다면, 내 끝 간 데 없고, 닿을 곳 없는 그 질긴 감정을 생각한다면 시오 헤이브, 너는 누구든 사랑하지 마라. 누구에게도 그런 감정을 느끼지 마라.
넌 힐링 마운틴 시티의 위대한 몽크 마스터야.
“시오, 너는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해본 적이 있나?”
“…미안하다. 알파.”
“왜 사과하냐고! 하지 말란 말야!”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있냐는 말에 대한 대답이 미안하다, 라고? 속에 든 대답을 읽은 알파는 이글대는 눈을 치떴다. 친구의 시선은 무의식중에 소파에 쭈그리고 누워 있는 은발의 눈부신 청년에게 향해 있었다. 제기랄! 알파는 시선을 돌려 와인 병을 움켜쥐었다. 쓰고 진한 액체가 밀려들어 왔다. 피의 맛처럼 무겁고 비렸다.
론은 눈을 감은 채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두 개의 시선을 받아들였다. 그는 드디어 두 사내의 대화의 맥을 잡아냈다. 알파가 말하던 감정의 대상은 젊은 날의 시오 헤이브였을 것이다. 알파의 헌신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 시오 헤이브는 그러나 알파에게 그러한 감정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마 그런 틈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인간 성격에.
그런데 지금 그런 시오 헤이브가 흔들리고 있다. 물론 대상이 오래된 옛 친구는 아니다.
그럼 대체 누구지?
알파가 나가면서 콰당, 문을 후려갈기듯 닫는 소리를 듣고도 론은 눈을 뜨지 못했다. 누굴까. 그러다 론은 시오 헤이브가 곁에 서 있는 것을 깨달았다. 망연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보지 않고도 느껴졌다. 어떤 감정이 느껴지는 숨소리가 들렸다.
“아직… 자는 겁니까, 론?”
거칠고 투박한 손끝이 자신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와서 닿았다. 깰세라, 느끼게 할세라, 닿을락 말락. 하지만 분명 손가락은 어떠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은빛의 파도를 헤쳤다. 부드럽게 휘감기는 감촉. 시오가 잠시 허리를 구부렸다. 옅은 와인의 향이 그의 날숨을 따라 론의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론은 여전히 깨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다가가지 않았다. 그저 이를 지그시 누르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표현하지 않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드러내지 않으면, 넘어가게 될 것이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감정이란 존재하지만, 알파의 감정처럼 실체를 갖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 그래야만 하는 것이고. 참는 것이라면, 표현하지 않는 것이라면, 내가 가장 잘하는 일 아니던가.
나는, 이 아름다운 제자에게 품은 감정에, 제대로 된 이름을 결코 붙이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그는 천천히 몸을 돌이켰다.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다. 나는, 힐링 마운틴 시티의 몽크 마스터, 시오 헤이브다.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론의 가늘고 긴 입술 끝자락이 가만히 위로 밀려 올라갔다. 그는 스승의 손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일시에 이해했다.
시오 헤이브를 끌어낼 방법을 찾았다.
6. 사랑의 정의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이라.
그 말처럼 우스운 건 없다. 론은 사랑이란 감정을 호소하며 달려드는 인간들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했다. 물론 대놓고 무시하거나 면박을 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적당적당히 대거리해주면서 남자건 여자건 낚아서 재미를 보는 편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감정을 받아주는 눈치를 보이면 다들 한결같이 다리를 벌리며 들러붙었고 돈이든 시간이든 노력이든 아낌없이 퍼부었다.
하지만 그가 파악한 사랑이라는 감정은 성욕에 덧씌워진 허울에 불과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그는 열광적인 감정의 껍데기를 쉽게 벗겨 냈다. 남은 것은 섹스 자체였다. 그 뿌리는 물론 새끼를 까서 온 세계에 퍼뜨리고자 하는 본능일 거고. 그건 짐승이나 꽃이나 박테리아도 온 열성을 다해 하는 짓이니 특별할 게 없었다.
유전자에 질기게 공통적으로 찍혀 있는 짝짓기 정보. 공격과 정복. 씨 뿌리기와 열매 거두기. 다 똑같아. 다만 인간은 그것을 위해 감정을 포장하는 기술을 배우고 파트너를 호리는 말을 익혀야 하는 게 다를 뿐이지.
가정이란 시스템도, 일부일처든 일부다처든, 다 상황에 맞는 성욕 해소 체계이자 후손 생산과 보존의 시스템일 뿐이다. 본질이 그러하다면 굳이 시스템에 얽매일 필요도 없다. 더구나 현재는 출산과 양육까지 국가에서 대부분 챙겨주고 관리까지 해주지 않나. 국가에서 출산과 양육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섹스는 자손 번식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벗어던졌다. 남은 것은 저렴하고 중독성 없는 쾌락이었다. 이성이든 동성이든 크게 괘념치 않았고, 대부분의 공화국에서는 동성 혼인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그렇게 이성적이며 냉철한 스승이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따위 환상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랑 자본 적도 없고, 사귀어본 적도 없으니 그렇지. 한 번만 그 멍청한 종자들하고 사귀어봤다면 단박에 학을 뗄걸. 애들? 미쳤어? 그 앵앵대는 정신없는 것들을 원한다고?”
하지만 잘 됐다. 더구나, 시오 헤이브가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대상이 론 자신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게 되어 있다. 자신을 좋아하며 따랐던 계집 중 자신의 말을 거절했던 년은 아무도 없지 않았나.
시오 헤이브, 날 좋아해? 정말 사랑해?
고결하고 자존심 강하고 금욕적인 학자. 강인한 철혈의 통치자. 존경하는 스승. 시오 헤이브.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인간 속에 들어찬 건 똑같다. 그 역시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배설할 때가 되면 싸야 하고, 피곤하면 기절하듯이 쓰러져서 잠도 자야 한다. 성욕을 의지로 제거하지 못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예전에 들었던 그의 신음이 화드득 떠올랐다.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하니 아래가 뻣뻣해졌다.
내 손에서 정신 못 차리게 해줄 자신이 있다. 그쪽으론 아는 것도 없고 경험도 없을 테니, 일단 맛 들리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빠져들 것이다. 얼마나 짜릿하겠나. 그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시오 헤이브. 킹 메이커. 내게 꼭 필요한 인간.
그가 아무리 이곳에서 뼈를 묻는다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내가 원하는 일을 해주게 될 것이다. 훗날 사랑이란 감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해도, 그가 사랑이란 이름으로 추구했던 것이 사실은 쾌락 그 자체뿐이었다는 것을 환멸스레 깨닫게 된다 해도, 결국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는 빙긋 웃으며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가지고 들어온 게 거의 없어서인지 나갈 때의 짐도 단출했다.
그는 눈앞에 선 스승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시오 헤이브와 알파, 대수사들, 아르케 교육담당 수사, 그리고 그의 동기들이 몰려나와 그를 배웅했다. 시오 헤이브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알파의 표정은 복잡했으나 안도하는 듯이 보였다.
“이제 언제 뵐지 모르겠군요. 감사합니다, 시오 헤이브. 내내 평안하시길.”
“그대의 꿈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론.”
청년의 웃음이 눈부셨다. 뒤에 선 많은 동기가 기를 쓰고 손을 흔들었다. 그는 그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준비된 플라잉 소서에 올라탔다. 작고 둥근 비행체가 가벼이 날아올랐다.
차밭을 뭉개면서 이곳에 도착한 지 3년 만에, 론은 이곳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