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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론.”
길게 읽던 목소리가 멎었다. 시오 헤이브는 론을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론, 역사가 순환한다 생각합니까?”
론의 얼굴에 가벼운 웃음이 걸렸다.
“역사는 직선의 시간 위에 존재하며 실제 일어난 사건을 다룹니다. 순환하는 것은, 반복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신화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역사에서도 역시, 순환 패턴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현재 배우고 있는 체제 전복형 혁명 패턴을 예로 들겠습니다. 그것은 기존 주류 세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튕기듯 반발이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군중 심리에 감정적 호소가 곁들여질 때에는 아주 폭발적인 힘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기존 체제에서 소외된 일부 지식인들이 군중 심리를 조장하고 군중을 주도하려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체제 전복에 성공한 후 무질서한 혼돈 사태가 지나고 나면, 혁명 세력들은 통치에 필요한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요. 그러나 혁명 세력 중엔 그 시스템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탁월한 리더십이 없을 경우 내부 분열이 시작됩니다. 혁명을 시작한 동인(動因)인 대중들은 대체로 그 분쟁에 끼어들지 못하고 소외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대립은 첨예해지며,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혁명의 순수 이념’을 부르짖는 과격한 목소리가 커지게 됩니다.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소위 온건 세력들은 혁명의 적으로 간주되어 몰살되는 시기가 오게 됩니다. 혁명은, 처음 일으킨 대중의 손을 떠납니다. 그렇게 공포 정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시오 헤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이어지려는 말을 끊었다.
“좋은 견해입니다. 론, 왜 그런 패턴이 생긴다고 생각하십니까?”
론은 가만히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표정이었으나 이 수업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삶과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본다면?”
“지금 읽은 라 마르세예즈에서 그들은 자신의 아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떨쳐 일어납니다. 공화정? 왕정? 아뇨. 그들은 이념이나 체제를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나와 가족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싸운 것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위한 따뜻한 화롯가, 한기를 막아주는 집, 먹을 것, 오늘 밤 누군가 우리를 공격해 죽이지 않으리란 안전에 대한 보장, 그런 것들일 테지요. 그 부분을 건드리기 전까지 눈과 귀가 없는 것처럼 살던 사람들은, 뇌관을 건드렸을 때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게 수만 년을 내려오며 되풀이된 인간의 본능, 삶의 본질이며,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위대한 힘일 것입니다. 통치자가 가장 신경 써서 책임져야 할 요소이기도 하고요.”
시오 헤이브는 허리를 펴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올라왔다.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 역사를 가르치신 것 아닙니까, 스승님?”
“…훌륭합니다. 론.”
진심이 담긴 칭찬에 론은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다. 눈이 부셨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론. 시오 헤이브는 정돈된 목소리로 다시 파고들었다.
“자신의 제국을 갖고 싶습니까? 위대한 통치자가 되고 싶습니까?”
“그렇습니다, 스승님. 저는, 광대한 제국을 개척한 위대한 통치자가 될 것입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으나, 붉은 눈은 열기로 번쩍거렸다.
“왜 통치자가 되고 싶습니까? 무엇을 위해 광대한 제국을 개척합니까? 이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저는, 다시 수련사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길로 결코 들어서지 않을 것입니다.”
“힘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본능 아닙니까, 스승님? 힘은, 권력은, 나의 뜻을 추구하는 도구입니다.”
“그 힘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름다운 여인입니까? 좋은 음식입니까? 혹은 크로이소스가 자랑했던 것과 같은 부요함입니까? 혹은 경외와 질투에 사로잡혀 당신 밑에 굴복해 있는 자들을 보는, 그런 쾌감입니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스승님, 저는 여자를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도 즐깁니다. 돈도 좋고, 도열한 백성을 굽어보는 쾌감도 좋겠지요. 아무리 광대한 영지를 다스리는 지배자라 해도 스승님처럼 섹스를 즐길 수도 없고, 술이나 고기 한 점 맘대로 먹을 수도 없는 통치자라면, 그리고 자기 소유로 무엇 하나 챙길 수 없는 수도승으로 살아야 한다면 절대 사양입니다.”
하하핫, 말의 끄트머리에 론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스승의 미소는 여전했으나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숨어 있었다.
“그런 통치자를 위대한 통치자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역사는 그런 것을 추구한 자들을 탐욕과 향락에 빠진 자라 평가합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사가의 기록 따위에 신경 쓰는 건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통치자를 위대하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이겠습니까, 론? 넓은 영토입니까? 많은 군대이겠습니까?”
“영토와 군대는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본질은 아닙니다. 위대한 통치의 본질은, 자신이 책임지고 맡은 자들을 하나의 이상 아래 결집시키는 자, 그것을 현실로 이끌어내 끌고 가는 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내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시오 헤이브는 눈을 뜨고 몸을 의자에서 일으켰다. 훌륭하다, 론. 나의 제자. 내가 유일하게 낙점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어 키워낸 제자. 벅찬 감정이 솟았다. 그는 기꺼이 웃음을 지어 보인 후, 손을 들어 천천히 손뼉을 쳤다.
“훌륭하십니다. 론, 저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론은 쓸데없는 겸양도 사양도 하지 않았다. 은발의 제자는 스승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속에 감추어둔 말을 끄집어냈다. 이 순간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듯싶었다.
“저는 스승님께서 작은 영토의 치자이지만, 위대한 통치자라 생각합니다.”
“론!”
시오 헤이브의 눈이 황망히 벌어졌다.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 종교가 구심점 역할을 못하게 된 지도 오래되었다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수사도 경전을 하나의 상징체계로만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도그마가 된 계율만 남은 힐링 마운틴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버려지듯 남은 수도승들에게 인류를 위해 크게 공헌할 수 있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주어 결집시키고 강하게 끌고 나가는 사람이 바로 스승님 아니십니까. 스승님이 위대한 치자가 아니라면 누가 위대한 치자이겠습니까?”
스승의 눈에 물기가 스몄다. 하지만 구태여 감추거나 깜박거릴 생각도 않고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채근했다.
“론, 그대가 꿈꾸는 제국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대가 사람들에게 제시할 이상은, 그리고 그대가 끌고 나갈 현실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그게 듣고 싶습니다.”
스승님. 저는…….
론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이것을 입 밖으로 내서 말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것은 머릿속에서 오가는 허황한 공상에 불과했다. 이제 그 이상이 현실의 무게를 조금씩 담기 시작했다.
“저는 오래전부터 하나의 열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가 통치하는 땅에서는, 유전자 맵 따위로 차별받고 좌절하는 이들이 더는 없을 것입니다. F급이라 하여 인생을 포기하고 사는 레암 같은 녀석도 없고, 능력이 있는데도 좌천당해 낙오자로 살아야 하는 저 같은 인간도 없을 것입니다. 내 제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A급이든 F급이든 상관없이, 낮에는 땀 흘리며 열심히 일하고, 저녁이면 가족들과 안락한 저녁 식사를 하고, 연인들과 내일을 걱정하지 않고 침실에서 사랑을 나눌 것입니다. 나는 거리에서 구걸하는 자들에게 옷을 벗어줄 만한 감정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나의 백성이라면, 나는 그를 책임질 것입니다. 구걸하는 자가 좌절에서 벗어나 자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겠습니다. 낙오된 자들이 다시 일어서는 것을 부끄러워 않는 곳, 뛰어난 유전자 조합 기술로 급수를 나누어서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로 열성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고통을 없앨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것입니다.”
“…….”
“스승님도 아시다시피, 제게 동정심이나 자비심 따위는 없습니다. 게다가 도덕군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도덕군자가 통치자가 되어선 안 된다는 당신의 말도, 도덕과 순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공포 정치의 역사도 기억합니다. 나는 다만 내가 맡은 나의 사람들을 지킬 것입니다. 힘든 자를 보고 울어주는 대신, 보호가 필요하면 군대를 강하게 하고, 시장이 필요하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행성을 개척할 것입니다. 유전자 맵 시스템을 철폐할 것이고, 유색의 피부를 가진 식민행성 원주민과 혼혈인을 차별하는 자를 먼저 처단할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꿈꾸는 나의 제국입니다. 스승님.”
스승의 손이 입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목이 막혔다. 한참 만에야 쉰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그대, 그대의 제국이 현실화되기를. 반드시 그리될 것입니다. 론.”
론은 고개를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시오 헤이브는 무표정했으나 목울대가 무겁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론. 저 역시 F급 유전자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온 마음으로 기원하겠습니다.”
“예? 스승님은 B급…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습니까?”
몰랐다. 만에 하나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만 했는데. 론의 눈꺼풀이 크게 벌어졌다.
“제 아버지는 오미크론 행성의 원주민이었습니다. 저를 보기 위해 밀입국했다가 눈앞에서 사살당했습니다. 저는 그때 수용소로 끌려갈 뻔하다가 힐링 마운틴행 상선에 몸을 숨길 수 있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힐링 마운틴 시티가 종교라는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만년 수사 후보생으로 노역을 하던 저는 이곳의 특이 파장과 이곳에서만 채굴되는 특정 암석에 대한 논문을 썼고, 그것을 읽은 알파와, 그가 이끌던 7인 위원회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할 지도자로 저를 추대한 것입니다. 유전자 세탁도 어느결에 이루어졌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당신이나 레암과 마찬가지로 F급, 그것도 식민행성 원주민과의 혼혈입니다.”
론은 놀라움을 감추고 고해하듯 비밀을 털어놓는 스승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시오 헤이브는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그렇다면……. 제게 오십시오, 스승님.”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론은 팽팽하게 긴장했다. 시오 헤이브는 눈치채지 못하고 가벼이 웃으며 그의 손을 툭툭 두드렸다.
“될 말이 아닙니다. 힐링 마운틴은 제가 뼈를 묻을 곳입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꿈과 이상을 이루어가는 곳입니다.”
론의 이맛살이 미미하게 찌그러들었다.
“훗날 제가 몽크 마스터 직위에서 쫓겨나기라도 한다면……. 물론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때는 당신 나라에 가서 살아도 좋겠군요.”
“기꺼이 환영하겠습니다.”
“그대는, 위대한 치자가 될 것입니다.”
론은 고개를 들었다. 마음에서 나오는 웃음. 그는 이를 드러내고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위대한 통치자가 될 것이다.
시오 헤이브.
그러기 위해선 당신이 반드시 필요해.
쫓겨나면 오겠다고? 웃기지 마라.
내 제국의 씨앗을 심을 때, 그때부터 당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떻게?
그는 이곳의 핵이다.
쫓겨날 리도 없고 자기 발로 걸어 나올 이유도 없다.
하. 론의 눈이 잠시 광기로 번득였다.
필요하면 가진다. 방법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이제 사관학교 졸업 시험에 맞춘 공부를 해야겠군요. 얼마 후면 그곳도 졸업 시험 아닙니까. 교환 학생 자격으로 왔으니 졸업은 그곳에서 하셔야겠지요.”
“섭섭합니다, 스승님. 좀 더 배울 게 많은데…….”
그의 아쉬움은 진심이었다.
“그럼……. 문학 수업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시(詩)를 배우시는 건?”
론은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스승의 입에서 장난스러운 미소가 살짝 지나갔다. 시오 헤이브가 농담도 할 줄 아는군. 시라니, 역사 수업보다 더 당황스러운데.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론. 저와의 수업은 이제 끝났습니다.”
“잠시만요, 스승님.”
론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훤칠하고 균형 잡힌 몸이 위로 주욱 뻗었다. 시오 헤이브는 잠잠히 눈부신 제자를 바라보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아래로 내려오더니 무릎 옆으로 기울여졌다. 시오는 당황한 마음을 누른 채 그를 내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시오 헤이브.”
다시 호칭이 바뀌었군. 생각하는 사이 론의 두 손이 시오 헤이브의 오른손을 감쌌다. 고개가 좀 더 깊이 수그러들었다. 시오 헤이브는 자신의 손등에 그의 젖은 입술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무릎 옆에서 은색의 파도가 일렁거렸다. 나의 눈부신 제자. 눈을 가만히 감았다. 무엇인가 심장을 후려치는 느낌에 그는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다. 괜찮다. 그와의 인연은 이번 겨울로 끝날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시오 헤이브는 제자의 눈부신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그가 느끼지 못하도록 살그머니 고개를 수그렸다.




5. 대작(對酌)


시오 헤이브는 침대에 누운 채 눈을 번쩍 떴다. 미명. 아직 일어날 때는 아니었다. 부득,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불유쾌한 꿈을 꾸었다. 눈앞에 은빛의 물결이 일렁였고 그 속에서 세이렌들이 노래를 불렀다. 아름다운 나신의 요정들. 그들의 노래는 나중에 고막을 터뜨릴 듯 날카로워졌다. 그녀들의 팔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들이 몰고 온 눈부신 파도가 발목을, 다리를, 허벅지를, 허리를 휘감았다. 축축하고 끈적한 바다의 요정들이 순식간에 그의 다리 사이에 달라붙었다. 흐아, 아아악. 그가 허리를 뒤틀며 아랫배에 힘을 주는 순간, 세이렌들이 순식간에 뽀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깔깔대는 소리가 아련하게 멀어졌다.
제기랄. 시오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일어났다. 허벅지에 힘을 주었던지 약간 아릿하게 거북했다. 이불을 걷어치우고 짜증스런 얼굴로 침의를 살폈다. 앞섶에 얼룩이 배어 올라오고 있었다. 샅의 젖은 감촉이 몹시 못마땅했다.
일체의 성행위가 금지된 이곳에서, 다른 수사들이 어떻게 성욕을 해소하는지 시오 헤이브는 알지 못했다. 자위도 금지되어 있었고, 허락된 다른 방법도 없었다. 아무리 친하다 해도, 가령 알파 정도의 친구라 해도 이런 문제를 슬그머니 물어볼 순 없었다. 자신은 몽크 마스터였다.
몽정까지는 무의식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그렇다 치자. 매 순간 넘치는 이 열기를 대체 어쩌란 말인가. 그는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빳빳하게 일어서는 자신의 몸 끝이 말할 수 없이 고역스러웠다. 서류상 연령과 달리 이곳 수사들, 특히 기밀 사항인 힐링 스톤을 다루는 수사들의 생체 연령은 대부분 20대 정도의 최전성기 양상을 띠고 있다. 시오 헤이브 역시 최근 받은 검사에서 생체 연령이 24세라 나왔다. 힐링 마운틴의 이름이 허명은 아니지. 나만 이런 것은 아닐 테지만.
그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욕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브리프와 잠옷 바지를 집어던졌다. 이런 건 아랫사람들에게 세탁물이라고 맡기기도 창피했다. 직접 빨아서 널어두어야 할 게다. 그는 샤워기 아래에 서서, 미끈대는 다리 사이의 감촉을 서둘러 지웠다.
오늘따라 은빛 바다란 말이지.
순간적으로 론의 눈부신 머리카락, 그 매끈한 감촉이 입가에 되살아났다. 속에서 무엇이 다시 꿈틀 올라왔다. 몸이 다시 뻣뻣해졌다. 사정이 미진했던가? 차라리 모르는 결에 완전히 뽑아냈으면 좋았을걸, 이게 무슨. 그는 욕실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이마를 잔뜩 접으며 경전에 실린 108경구를 웅얼웅얼 암송했다.
…내, 나중에 기필코 계율을 뜯어고치고 만다. 금욕 계율은 헌신의 표현이라는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됐어. 다 필요 없어. 다들 욕구 불만으로 정신병이 되고 말 거다.
시오 헤이브는 이를 다시 부득 갈다가 결국 천천히 한숨을 쉬었다. 간신히, 샅에서의 아우성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제기랄, 섹스하고 싶으니 별 이유를 다 갖다 붙이는군. 한심하다, 시오 헤이브.’
그는 세면대에 다가가 빨랫감 위에 처덕처덕 비누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론과 7인 위원회 대수사들과 같이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다른 대수사들도 론에게 관심과 호의를 보였다. 내가 특별히 총애하는 유일한 제자라서 그렇겠지. 물론 자랑스럽긴 하지만, 다른 사람이 론에게 유별스레 구는 걸 보면 기분이 좋진 않았다. 14공화국의 레암 세케르스 통령이 꼬박꼬박 론의 안부를 물어오는 것도 유쾌하지 않았다.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손가락 사이로 뿌연 비눗물이 주르르 밀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