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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4. 제왕의 스승, 제왕의 학문


론은 도서관에서 들고 온 책들을 팽개치듯 책상에 집어던졌다. 이제 혼자 쓰게 된 방은 조용해서 퉁탕대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 영감이 아주 사람을 잡으려고 하는군.’
시오 헤이브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정치학 개론이나 각 지역의 군사, 경제 문제 등을 다룰 줄 알았던 론은 산더미 같이 쌓인 역사서와 1차, 2차 사료들을 보고 기가 막혔다. 시오 헤이브는 시적인 말로 첫 수업을 열었다.
“존재했던 사실을 햇빛에 말리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말리면 신화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자는 있었던 사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서술한 기록이며, 후자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통찰을 이야기라는 구조 안에 담은 반복성을 지닌 상징체계입니다만, 인간의 삶에 대한 위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왕의 학문을 가르치신다더니, 옛날 왕에 대한 걸 가르친다는 뜻이었습니까? 왜 하필 이런 고리타분한 학문입니까?”
“그 이유를 알 때쯤 되면 하산하셔도 될 겁니다, 론.”
개인실의 작은 책상에 마주 앉은 사내는 빙긋 웃었다. 론은 속 편하게 질린 표정을 드러냈다. 어차피 3년이란 긴 시간이다. 시오도 론도, 팽팽하게 신경전을 벌이는 대신 솔직하고 격의 없이 지내는 게 나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된 데는 시오 헤이브가 론의 앞에서 허물어진 모습을 보인 탓도 컸다. 시오 헤이브는 며칠간 다소 어색해했지만, 론은 한결같이 깍듯하면서도 태연했다.
“그냥 알려주시면 안 됩니까, 스승님? 그리고 이, 태곳적 사어(死語)들까지 죄다 배워야 합니까?”
“다 배울 시간이나 되겠습니까, 론? 다만 사료를 읽을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 그 시대의 정신을 읽게 될 안목도 갖추게 될 것입니다. 기본 개론 정도는 사관학교 교양 수업 시간에 들으셨겠지요, 론?”
“저는 현재를 살고 있지, 고대 신화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역사라니……. 시오 헤이브! 스승님!”
“히스토리아이(ΙΣΤΟΡΙΑΙ, 역사), 헤로도토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깨끗하게 무시당했다. 히스토리아이 사본은 몹시 두터웠다. 처음 보는 꼬부라진 그림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태곳적 언어 알파벳부터 배워야 한다니 돌겠군. 알파에서 오메가? 그는 부글대는 속을 누르면서 순서대로 구불구불한 그림을 그렸다.
“초반부에 나오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는 엄청난 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솔론이라 알려진 현자는…….”
책의 의의, 작가 소개, 시대 배경, 인물 설명. 텍스트, 번역, 텍스트, 번역. 시오 헤이브는 요령 좋은 교사라기보다 깊이 있는 교사였다. 다만, 졸음을 깨우는 재주는 모자랐다. 함께 식사한 끝이고, 더운 여름날 오후였다. 세상에서 가장 부자였다가 쫓겨난 멍청한 왕, 쫓겨난 후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사려 깊은 조언자로 더 이름을 날렸던 희한한 사람의 이야기 따위, 론은 관심도 없었다. 왱왱왱. 멀리서 매미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가 아련해졌다. 눈을 부릅뜨고 애써 졸음을 참던 론은 결국 머리를 책에 콱 들이박았다. 하하하. 쉰 듯한 웃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텍스트 위에 침방울이 고여 있었고, 시오 헤이브는 입을 벌리고 웃고 있었다. 적갈색의 눈이 보기 좋게 구부러졌다.
“알파벳 외워오는 것은 내일까지 숙제입니다. 히스토리아이 번역본은 3일 후 수업 시간까지 완독해 오시기 바랍니다.”
“이 두꺼운 책을 3일 후요? 제가 숙제를 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세 시간밖에 없습니다! 이 수업 말고도 다른 수업도…….”
“시간이 없으면 만드십시오. 그건 기본입니다.”
아주 대놓고 밤샘을 하라고 해. 그는 이를 부득대며 책을 싸들고 기숙사로 걸음을 옮겼다. 수사 후보생들 학습량이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건 다른 놈들보다 더 심한 것 같다. 시오의 개인실로 오던 알파가 눈이 둥그레지더니 이내 파하, 하며 웃음을 지었다. 론의 잔뜩 성난 얼굴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였다.
“숙제를 잔뜩 내줬군그래? 너 정도 되는 전문가가 애송이를 가르치다니, 재미있어?”
“음. 그럭저럭 괜찮다.”
“역사로 시작하는 건가?”
“그런 셈이지. 제왕의 학문이라면 별수 있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로 시작했다. 머리가 된다면 얻어가는 게 많을 터이지.”
“크로이소스라. 그럴듯하군. 그거 말곤 뭘 가르치는데?”
“이것저것. 같이 식사도 하고, 다례법도 가르친다. 운동도 같이 하고. 힐링 스톤 탄광에 갈 때 말고는 대체로 따라다니게 허락하고 있다. 수업 시간이 겹쳐서 제대로 일을 못 시켰는데, 이제는 의무 노역 시간에도 정기적으로 데려갈 생각이다. 요새 꽤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
알파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예 애를 하나 키우는군그래. 널 이렇게 귀찮게 할 줄 알았나. 괜히 오라고 했나봐. 하루에 열 번도 넘게 후회하는 중이야.”
“괜찮다. 오랜만에 전공 수업을 하는 것도 재미있다.”
“왜! 아예 문학 수업도 하지그래. 네가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시 쓰는 거 아니었나? 수련사 시절 네 습작을 기억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걸. 론이 알면 정말 놀랄 거야.”
점잖은 친구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됐다. 알파, 그런 말은 저 녀석 앞에선 결코 하지 마라.”
“하고 싶으면? 문학 소년이라니 멋지잖나.”
알파의 얼굴에 짓궂은 장난기가 슬금대고 올라왔다.
“전혀. 그리한다면, 나 역시 네가 수련사 시절에 소네트 형식의 연가(戀歌)를 썼던 걸 사방에 소문을 내주겠다. 수사가 될 사람이 연가라니. 내가 그걸 잊었을 거라 생각하나?”
시오 헤이브의 얼굴도 나른하니 장난스러워졌다. 어차피 대상도 없이 겉멋으로 쓴 사랑시 따위를 뭘! 낄낄대는 알파를 보며 시오 헤이브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그 절절함에 어찌 대상이 없었을까. 영영 밝힐 수 없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도 뻔히 아는데. 두 사내는 서로의 속을 훤히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며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차나 같이 하겠나, 알파?”

* * *

뒤에서 직직 끌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시오 헤이브는 구태여 뒤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오후 3시의 폭염 속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의무 노역을 하러 가겠다는 스승이 못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결심한 일에 대해서는 놀랄 만한 인내와 절제를 보이는 제자는 드러내고 투덜대지 않았다. 조용히 바구니를 집어 들고 물병을 챙겨 따라왔다. 모자도 착실하게 쓰고 소매도 걷어 올렸지만 명색이 스승 앞이라 시커먼 수련사복을 차마 벗어 던지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자신도 그렇지만 녀석도 벌써 땀으로 뒤발했을 것이다.
“더우시겠습니다, 스승님.”
“그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론?”
시오 헤이브는 잠시 멈추어 고개를 돌렸다. 론은 입을 비죽하더니 히죽 웃었다. 모자를 들고 앞머리를 손가락을 푹푹 헤집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흩어졌다. 시오 헤이브는 잠시 이맛살을 접었다. 제자의 눈부심이 가끔 이유를 알 수 없게 거슬렸다. 제자의 짤막한 은발에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다행히 사관생도는 머리를 기르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말이죠.”
“아아, 그렇군요.”
“부러우신가요, 스승님?”
은근하면서 점잖게 눙치는 어조가 더 능글맞다. 시오 헤이브는 보일 듯 말 듯 웃었다.
“아니라 하면 거짓이겠죠. 폭염이 일 때는 정말 부럽습니다.”
“확 자르시죠? 제가 실수로 머리카락에 불똥이라도 떨어뜨렸다고 해 드릴까요? 홀랑 타버린 머리카락이 영 보기 흉해서 잘랐다고 그러면 되잖습니까?”
“론…….”
시오 헤이브의 웃음이 선명해졌다. 제자는 살벌하고 냉막함을 바탕으로 두었으나 때로 유쾌했고 시원했다. 가끔은 깍듯했지만 어느 순간은 허물없었다.
“거짓말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말과 진실의 차이는 사실 애매하잖습니까. 아실 만한 분이 그러십니다! 제가 라이터로 끄트머리만 살짝 태워 먹은 후에 흉해서 몽땅 잘라냈다고 하면, 그건 진실이 되는 거죠! 타버린 머리카락이 흉해서 자른 거 맞지요. 거짓과 진실은 애초에 같은 곳에서 출발했을 겁니다. 어쩐지 사이좋은 형제 같지 않습니까? 네?”
하하하! 이 제자는 속에 품은 위험한 것들을 가끔 이렇게 흘리곤 한다. 시오 헤이브는 오히려 그것이 기꺼웠다. 아마 나이를 먹어 가면 이런 식으로 속을 흘릴 일도 드물어질 게다.
“남을 속이고자 하는 의도만큼은 선명하게 거짓의 영역입니다. 통치자란 남에게 무엇을 보여야 하는 것보다 자신에게 정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승님! 머리 자르고 싶다면서요! 스승님이야말로 자신에게 정직해지십시오!”
“하하, 하하하!”
내가 궤변론자를 하나 키우고 있군. 그대로 놔두면 주장에 제대로 살까지 붙여서 괴이한 논리로 고집을 부릴지도 모른다. 론은 한 가지 일에 빠지면 상당히 집요한 편이었다.
궤변을 고치는 약으로는 땀을 흘리는 육체노동만 한 것이 없다. 어느 종류의 찻잎을 어떻게 따야 하는지는 이미 가르쳤다. 시오 헤이브는 오늘 의무 노역을 두어 시간쯤 더 시켜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묵묵히 뒤를 따르며 찻잎을 따는 론의 긴 손가락이 점점 느려졌다. 입이 점점 벌어졌다. 하지만 자존심이 있는지 스승보다 먼저 죽는소리를 하진 않았다. 기를 쓰고 땀을 닦으며 익숙지 않은 중노동을 버텨냈다. 시간이 넘었지만 독촉할 수 없다는 걸 아는지 다시 발을 질질 끌며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해가 질 때쯤 되어서야 시오 헤이브는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몸을 돌이켰다. 론은 잔뜩 오기가 올라온 눈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모자도 진작 벗어버렸다. 맑게 빛나던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었다. 시오 헤이브는 바구니를 건네며 머리끈을 다시 묶었다. 체력만큼은 녀석보다 꾸준히 단련해 온 내가 윗길인가 싶어 잠시 웃음이 나왔다. 벌써 늘어진 겁니까? 나이가 아깝지 않습니까? 스스럼없이 놀리는 말에 제자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눈에 바짝 독기가 올랐다. 저럴 때 보면 꼭 사냥하기 직전, 몸을 한껏 낮춘 어린 사자 같다.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스승의 바구니를 받아 들고 비척비척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나무 곁의 샘에 다다른 그들은 잠시 바위 위에 앉았다. 이곳에 잠시 들러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가는 것은 시오 헤이브의 습관이었다. 시오 헤이브가 먼저 물을 마시고 작은 바가지를 넘겼다. 론은 바구니를 든 채 허리를 구부렸다. 자세가 묘하게 불안정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바구니 두 개가 론의 팔 안에서 미끄러졌다.
“론! 이게 무슨!”
“스승님, 미끄러졌습니다.”
찻잎이 물 위로 한꺼번에 후르르 흩어졌다. 바구니 두 개가 떠올랐고 샘은 순식간에 오후 내내 땀 흘리며 딴 찻잎으로 빼곡해졌다. 미끄러졌습니다. 제자는 천천히 되풀이했다. 시오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자의 눈에 서려 있던 독기가 느슨해졌다. 그는 어느덧 싱긋 웃으며 우는소리를 시작했다.
“스승님, 아까워서 어쩌죠. 다시 할까요? 이미 늦었으니 어찌합니까? 그냥 내버려두고 이 샘물을 두고두고 마시면 어떨까요? 시원한 녹차 아닙니까?”
뻔하다. 심통났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시오 헤이브는 그런 제자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사소한 요령 따위로 잡힐 녀석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웃음이 자꾸 터져 나오려 했다. 하지만 넘길 수는 없었다. 론은 자신에게서 치자로서의 조건을 배워가야 했고, 무책임한 방종은 치자로서 치명적인 실격사항이었다. 그는 입을 억지로 틀어막은 채 한마디만 했다.
“결자해지라는 말 아십니까?”
“예?”
“한 잎도 남기지 말고 건져 오십시오.”
해사한 얼굴이 순간적으로 구겨졌다. 시오 헤이브의 긴 수사복 자락이 바람에 풀럭대며 멀어졌다.

론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흠뻑 젖은 꼴로 시오 헤이브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한 잎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스승님.”
목소리는 조용했고 눈에 서린 결기도 사라졌다. 두 시간 동안 그는 흘려버린 찻잎 말고도 무엇을 건져 올린 것일까. 시오 헤이브가 그를 담담하게 마주 보자 그는 눈을 내리깔고 나직한 음성으로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무엇에 대한 사과와 감사인지 피차 묻지 않고 설명도 않았다.
이 제자는 참으로 빠르게 자라고 있었다. 시오의 마음에 복잡한 것들이 뒤엉켰다.

* * *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 이마를 찌푸렸다. 양손을 모아 앞으로 내민 채 이를 꾹 문다. 정말 체벌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얼굴에 붉은 기운이 살짝 깔렸다. 꼴에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숙제가 너무 많았습니다. 가능한 양이 아닙니다.”
“변명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린 시절뿐입니다, 론.”
“가능하지 않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가능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 되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스승님.”
시오 헤이브는 가는 자를 든 채 그의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가장 그다운 말. 어쩌면 그 말이 옳을 것이다. 되지 않는 일이라면 애초에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결단이다. 하지만 시오는 고집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결정에 대한 대가를 치르십시오.”
“정말 때리실 겁니까? 저는 벌써 성인식도 마쳤습니다. 애들이 맞는 것처럼 이런 체벌을 성인에게 준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자계 채찍을 사용하길 원하신다면 제 것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깜박 잊었다. 이곳은 수도승들이 우글대는 곳이다. 자계 채찍이라니. 선이 단정한 입술이 꽉 악물렸다. 긴 손가락이 좀 더 앞으로 다가들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제자는 결국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꽉 감았다. 눈가에 맺힌 주름이 선명해졌다.
따악, 딱, 딱, 따악, 따악 가는 자가 호선을 그리며 손바닥과 손가락 위로 매운 소리를 내며 얹혔다. 약속된 횟수인 다섯 대가 끝났을 때 제자는 잠시 손을 감쌌지만 입을 꾹 다문 채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시오 헤이브였다. 그는 이마를 완강하게 구긴 채 론에게 물러가라고 말없이 손짓했다. 조용히 방문이 닫혔다. 가는 자를 쥔 손이 잠시 흔들렸다. 그는 결국 손에 쥔 것을 내팽개쳤다. 그는 자리에 앉아 책상에 팔을 대고 이마를 짚었다.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좋지 않다…….
시오 헤이브는 속을 꽉 죄는 답답함에 주먹을 지그시 쥐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 *

벽난로에 불이 이글이글했다. 위에 얹힌 주전자에선 볼볼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창틀엔 눈이 소복했다. 적도 지역이지만 고산 지대이기도 한 이곳은 겨울에 가끔 쌓일 정도로 눈이 내렸다.
론이 이곳에 온 지 3년이 되어간다. 시오는 맞은편에 앉은 아름다운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볼 때부터 몹시 크다 여겼던 키는 더 자랐고, 눈매는 더 신중하고 깊어졌다. 치기가 사라진 제자는 숨 막히게 시선을 끌어당겼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이건만, 그는 이미 중후하고 품격 있는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가끔 제자를 볼 때마다 속이 눌리듯 불편했다. 처음에는 허물없이 이야기할 때나 눈부시게 웃을 때, 목구멍이 턱 막히는 느낌으로 시작했던 것 같다. 자신이 유일하게 거둔 이 제자는 남자인 자신이 보아도 매혹적이었다. 피해자인 사관학교 여생도들이 선처를 호소했다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물론 그의 기질이 변하지 않았음은 알고 있었다. 저 아름답고 사람을 휘어잡는 미소 뒤로는 여전히 차고 단호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대신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얼굴이 숨어 있을 것이다. 치자가 될 것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무른 통치자보다는 단호한 자가 낫겠지. 적어도 나같이 물렁한 인간보단 덜 힘들지 않겠나.
하지만 불편함이 속에서 자라면서 시오 헤이브는 극도로 조심하기 시작했다. 이 관계의 시작과 끝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은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서로에게 가장 좋은 길이 되리라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자신을 통제하는 일이라면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생각하면 서글픈 일이지만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처럼 유용한 덕성이었다. 시오 헤이브는 자신이 내면을 감출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마주 앉은 눈부신 제자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론은 보일락 말락 미소 짓는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모델로 삼았던 스승은 이곳의 통치자인 시오 헤이브였다. 자신이 스승으로 인정한 유일한 사내. 그의 지식, 지혜, 행동 양식과 태도, 품위, 말하는 법, 그리고 생각하는 법까지 배우려 했다. 그의 속에 어떤 물렁한 것이 들어 있다는 것도 알고는 있지만, 그는 그것 때문에 판단을 흐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견고하고 멋진 스승이었다.
혁명의 역사. 론은 시오 헤이브가 이 지루한 시간에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는지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3공화국의 옛 방언 중 하나인 프랑스어의 발음은 기묘했지만 그는 천천히 텍스트에 실린 혁명가를 읽었다.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

Allons enfants de la patrie,
Le jour de gloire est arriv
Contre nous de la tyrannie
L’ tendard sanglant est lev
Entendez vous dans les campagnes,
Mugir ces f roces soldats?
Ils viennent jusque dans nos bras
Egorger nos fils, nos compagnes.

나가자, 조국의 형제들이여
영광의 날이 왔도다
폭군에 결연히 맞서
피묻은 깃발을 들어라
우리의 대지를 울리는
포악한 적군의 고함이 들리는가?
그들이 여기까지 닥쳐와
당신의 아내와 아이를 죽이려 한다.

Aux armes, citoyens!
Formez vos bataillons!
Marchons! Marchons!
Qu’un sang impur
Abreuve nos sillons!

무기를 들어라, 시민이여!
대오를 이루어라!
나가자, 나가자!
목마른 조국의 밭이랑에서
적의 피가 넘쳐흐를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