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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압니다. F급 유전자. 조작해서 C급 정도로 세탁할 수 없진 않습니다. C급 정도면 국민이 굳이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닌……. 론? 무어라 했습니까?”
빠르게 걸음을 옮기던 시오 헤이브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레암이 F급 유전자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론이 뒤에 덧붙인 말은 미처 몰랐다.
“헤르마 무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만.”
눈썹을 찡그리며 생각을 더듬던 시오 헤이브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혹시, 헤르마프로다이트라고 했습니까?”
“아, 그랬습니다. 시오 헤이브, 어떻게 아셨습니까?”
발걸음이 그대로 멈추었다. 헤르마프로다이트가 무엇입니까? 하는 말에 시오는 입을 완강하게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예상 밖의 문제. 그는 한참 만에야 씹어뱉듯 내뱉었다.
“앤드로자인(androgyne), 양성구유자라고 합니다.”
“네?”
“남자와 여자의 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마 두 개의 생식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제…….”
제기랄, 그는 튀어나오려던 말을 잠시 말아 넣었다. 통령이 왜 이곳에 아들을 비밀리에, 그것도 견학이나 진학도 아니고, 쫓아내듯 보내나 했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레암 세케르스를 히든카드로 보이지 말 것을. 맵 따위야 세탁할 수 있지만 헤르마프로다이트 문제는 이야기가 다르다. 어지간하면 놀라지 않던 론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이 섬에 온 것을 보면 정체성이 남성 쪽으로 판가름난 것 같군요. 그렇다면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론, 메딕 팀에 연락을 넣어주시고, 알파와 7인 위원회 중 의학 담당 대수사인 페르 케프터를 불러주십시오. 혹시 모르니 긴급 수술팀을 대기시켜두라고 하십시오.”
이 조용한 사내는 필요하면 망설이는 법이 없다. 결단력과 추진력이 새삼 무시무시했다.
“시오 헤이브, 지금 무슨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몰라서 묻는 겁니까? 그의 몸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처치를 해야 합니다.”
“밑구멍을 꿰매기라도 하시게요? 젖이 튀어나왔다면 잘라내기라도 하실 겁니까? 시오 헤이브, 아까 그에게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몹시 다르십니다?”
갑자기 쏟아져나온 막말에 시오 헤이브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렇게까지 가진 않을 겁니다만, 필요하다면 피하지 않습니다.”
론의 얼굴이 신중해졌다. 비난하는 표정도 두려워하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놀란 표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확인하고 싶었다.
“아까 레암에게 보였던 태도는, 악어의 눈물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까? 연기가 훌륭하십니다, 시오 헤이브.”
“연기가 필요한 걸 알았으면 비아냥대는 대신 제대로 배우시는 게 어떻습니까.”
착 가라앉은 목소리. 보라색 속눈썹 아래로 짙게 그늘이 내려앉았다. 아마 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시오 헤이브,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 * *
페르 케프터는 자그마하고 바짝 마른 의사였다. 그가 울다 지쳐 잠든 레암에게 마취제를 주사하는 것을 보고 시오 헤이브는 큰 보폭으로 다가갔다. 의사는 누워 있는 작은 체구의 사내에게서 신중하게 옷을 벗겨 냈다. 가슴에 압박붕대가 엉성하게 감긴 꼴을 보고 보라색 수사복의 사내는 눈썹을 찡그렸다.
“무엇, 입니까?”
나신이 된 그의 몸을 잠시 들여다보던 시오 헤이브는 주저하며 물었다. 론의 입에서 들리지 않게 핏 웃음이 터졌다. 저 가슴을 보고도 모르겠나. 크기가 작긴 하지만 봉그레하게 살집이 잡혀 있었다. 딱 사춘기 소녀의 가슴을 보는 것 같군. 고환과 음경은 있었으나 크기가 몹시 작았다. 의사가 그의 몸을 면밀히 조사하고, 촬영 필름과 메디컬 페이퍼를 확인하는 동안 시오는 한참 동안 고개를 돌리고 서 있었다. 한참 만에야 페르 케프터는 허리를 세우더니 눈썹을 찡그렸다.
“드문 일이긴 한데……. 아래에서 현재 미량의 출혈…이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상처가 있다는 뜻입니까?”
무슨 뜻이긴. 빨갱이가 쳐들어왔다는 거지. 론은 다시 쓰게 웃었다. 시오 헤이브란 인간은 정말 그쪽으론 경험이든, 정보든 바닥인 모양이다.
“월경이 있다는 뜻입니다. 앤드로자인 중에서도 뮬러관이 잘 발달한 경우 드물게 월경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만 치료를 받으면 인공자궁을 통해 아이를 갖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경우는 운이 좋은 편이죠.”
“그 말은…….”
“레암 세케르스는 다른 앤드로자인보다 다소 늦게 2차 성징을 보인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엔 정기적으로 남성 호르몬을 맞기도 한 모양입니다만 중단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여성 쪽으로 가닥이 잡혔던 것 같습니다.”
시오 헤이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전히 표정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론은 그가 주먹을 가만히 사려 잡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안 됩니다. 남성 호르몬을 투여하시고, 출혈이 멈추게 하십시오.”
“시오 헤이브. 이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는 압니다만, 이 사람의 평생이 달린 문제입니다. 아마 성 정체성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남성 호르몬을 몇 년 전부터 중단했다는 말은, 여성 정체성을 찾아서 살고 싶다는 뜻일 겁니다. 게다가 앤드로자인으로서는 드물게 월경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남성 호르몬을 투여하라는 말은, 여자한테 억지로 남자로 살라는 말과 같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당장 출혈을 멈추게 하십시오.”
“난소라도 제거하란 말씀입니까? 여기 촬영된 필름을 보십시오. 미숙하게 발달하긴 했지만, 난소도 있습니다. 어쩌면 난자 채취가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예요. 그러면 2세를 남기는 것도 가능…….”
“어차피 F급 유전자는 후손을 남기는 것이 금지돼 있잖습니까. 페르 케프터, 잊으셨습니까? 하여간, 난소를 제거하든, 자궁을 제거하든, 봉합을 하든, 여자라는 흔적을 모조리 지우란 말입니다. 남성 호르몬을 사발로 부어서라도, 튀어나온 가슴을 집어넣으란 말입니다.”
갈라진 목소리가 강경해졌다. 뒤에 서 있던 알파가 가만히 고개를 수그리고 눈을 감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그는 시오 헤이브가 이러한 결정을 할 것이라고 당연히 예상했다.
그리고 그 친구의 속이 얼마나 누더기가 되어 가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알파 리온, 유전자 팀을 데리고 레암의 유전자 지도를 C급 이상으로 바꿔주십시오. 그리고 그의 오리지널 유전자 맵에 특급 보안장치를 걸어주십시오.”
“명에 따르겠습니다, 몽크 마스터.”
* * *
레암 세케르스는 5일 후, 연합군의 호위를 받으며 14공화국의 수도 메갈로 시티에 입성했다. 베리타스 중장을 잃은 군부 세력은 연합군에게 쉽게 항복했다. 전직 통령의 차남이라는 자그마한 사내는 혼란을 종식한 자로서 열화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는 예상대로 새로운 통령으로 무난히 추대되었다. 그는 연합군의 일시 군정 통치에 동의했으며, 람다 소행성지구에 있는 트로늄 광산에 대한 채굴권을 다섯 개 공화국과 힐링 마운틴 시티에 99년간 넘겨주기로 비밀리에 협정을 맺었다.
종전 선언은 선전포고로부터 15일 후였다. 다들 그것을 15일 전쟁이라 불렀다.
“내일 드디어 종전 선언인가?”
목소리가 가물가물했다. 책상이 빙글빙글 돌다 확 솟아오르는 느낌에 시오 헤이브는 머리를 휘둘러 정신을 수습했다. 무슨 정신으로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결국 최종 합의문 초안을 받아들자마자 책상 아래로 푹 고꾸라졌다. 무슨 일인가 의아히 여긴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순간 와장창, 의자가 밀려났다. 보라색 수사복의 사내가 책상 옆으로 나무토막처럼 나동그라졌다.
“시오!”
“마스터!”
기겁을 하며 모여든 사람들을 헤치고 론이 성큼성큼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얼굴은 허옇게 떴고 입술은 파삭하게 말라 터졌다. 힐링 마운틴이라더니 치유는 개뿔. 그는 시체처럼 늘어진 사내의 맥을 살피고 호흡을 확인했다. 숨은 제대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황천행은 아닌 모양이군. 하긴 그동안 제대로 자는 꼴을 못 보았지. 그는 급하게 뛰어와 곁에 쭈그리고 앉는 알파 대수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무시고 나면 회복하실 듯합니다. 제가 모시고 들어가겠습니다.”
“내가 가겠다, 론.”
“리온 대수사님까지 통제실을 비우시면 어쩌시게요. 저도 개인실에 홍채 인식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나동그라진 사내를 번쩍 안아 올렸다. 시오 헤이브는 키가 작은 편이 아니지만 의외로 가뿐하게 팔에 얹혔다.
“이거 뭐 며칠 고생했다고 껍데기만 남았나…….”
개인실에 들어선 론은 방으로 들어가 그를 침대에 눕히고 무거운 수사복을 벗겼다. 지금 보니 열도 절절 끓었다. 이불 속에 묻힌 그가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론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뒤로 정돈해 넘겨주었다.
특이한 보라색 머리카락.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이 사람의 혈통에도 나처럼 외부행성 원주민의 유전자가 섞여 있는 건 아닐까?
그나저나 어지간히 푸석하고 거칠거칠하네. 깎지 못하면 걸리적대지 않게 관리라도 좀 하지. 얼굴 꼴 좀 보라지. 시허옇게 떠서는 저게 사람 꼴이냐?
긴 수사복이 벗겨진 그의 몸을 보고 론은 끌끌 혀를 찼다. 의무 노역시간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햇볕에 타서 검게 벗겨진 부분과 작업복에 가려져 하얗게 남은 부분의 경계가 선명했다. 차밭에서 처음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숨겨진 피부는 생각보다 희고 물러 보였다.
고지식하긴. 거 요령 좀 피우면서 하지. 알 수 없게 속이 쿡쿡 쑤셨다.
순간, 론은 자신이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퍼뜩 깨닫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웃기는 일이군. 안쓰럽다니. 철혈의 통치자, 킹 메이커라는 이 강철 같은 사내에게 대체 가당키나 한 감정이냐.
그때 누워 있는 자의 손이 귓가에 머무르던 청년의 손을 꽉 붙잡았다. 론은 눈을 둥그렇게 하고 시오 헤이브를 바라보았다. 시오는 여전히 의식이 없었다. 억지로 손을 빼려 하자 웅얼대는 소리가 간절했다.
“…가, 가지 마. 잠깐이면 돼. 알프, 알파. 시아, 론, 음…….”
혼수상태에서 지껄이는 말에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론의 눈이 조금 더 벌어졌다.
그는 침대 곁에 주저앉아서 시오 헤이브의 손에서 기운이 빠지길 기다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오늘은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할 모양이었다.
당신은 이런 약한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데. 론의 웃음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잠결에 불러줘서 영광입니다, 스승님.
그는 옆의 소파에 쭈그리고 누워 클클 웃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괜찮으십니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시오 헤이브는 간신히 의식을 되찾았다. 천장이 다시 빙글 돌았다. 벌써 날이 훤했다.
“어제 오후에 의식을 잃으셨습니다. 열도 꽤 높았고요. 종전 선언이 조금 전에 있었습니다. 다들 걱정했습니다.”
눈가에 다시 일렁이는 은빛이 다가들었다. 론이 허리를 굽히고 그의 머리에 얹힌 물수건을 갈았다. 그는 가만히 이마를 찡그렸다. 의식을 잃었다고? 하긴 그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지. 스트레스도 꼭지까지 쌓였고. 아직도 어지러웠다. 입속은 모래를 씹는 듯 꺼끌꺼끌했다.
“레암은 잘 있다고 했습니다. 합의서 조인도 무사히 끝났고요. 전속 메딕이 붙어갔으니, 호르몬제 같은 건 알아서 챙길 겁니다. 멋진 사나이로 인생 끝까지 가는 거죠. 메딕, 라셰라 했나요? 그 사람이 안테나 노릇은 착실히 할 테고요. 사망자는 민간인 포함 총 17만으로 끝났습니다. 연합군의 치안 유지 작업이 시작되었으니 폭력 사태도 금방 진정이 될 듯합니다.”
시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레암 세케르스. 아직 청년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자그마한 사내였다. 아니, 여자였던가. 이제 내 덕분에 평생 남자로, 아니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살게 되겠지. 17만. 힐링 마운틴의 전 인구수의 두 배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 채 죽었다. 내가 포기하고 물러났으면 지금쯤 각자의 집에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하고, 아이들에게 굿나잇 키스를 하고 편안한 밤을 보냈을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족도 잃고, 집도 잃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절망의 눈물을 뿌리고 있을까. 남쪽은 지금 겨울일 텐데. 생생한 영상이 머릿속으로 들러붙었다.
난 죄가 많아. 이곳에서 아무리 인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해도 난 이 피 값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다. 속이 끓어올랐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몰아치는 환멸, 자괴감의 후폭풍이 징그러웠다. 그는 차분하게 목소리를 정리했다.
“혼자 있고 싶습니다. 아니, 알파 대수사를 불러주시겠습니까, 론?”
알파는 시오의 호출을 받고도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몇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알파는 가끔 친구의 눈물을 보았다. 이번은 얻은 것도 많지만 희생도 컸다. 17만이라는 희생은 예상 밖이었다.
아직은 그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시오가 몽크 마스터가 된 후 처음 전쟁을 치렀을 때였다. 그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두려워서 애처롭게 떨었다.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요, 알파. 내가 하는 일이 바른 선택입니까. 알프, 제발 그렇다고 해주십시오. 종전 후에는 자신의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밤새 끄륵대는 소리를 삼켰다. 머리가 하얗게 비던 그 기억이 너무 끔찍했다.
지금은 가기 어려웠다. 그가 진정이 된 후 가는 게 낫겠지.
“오후쯤 가 뵙겠다고 전해드리겠나, 론.”
론이 시오 헤이브의 개인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창가를 향해 의자를 놓고 앉아 있었다. 어깨를 구부린 채 아래를 향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알프……. 알프, 왔나?”
론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앉아 있는 사내의 고개가 아래로 더 깊이 들이박혔다.
“나를 욕하고 싶은가? 그럼 그렇게 해. 알프…….”
그의 목소리 끝에 흐읍, 하는 작은 숨소리가 터졌다. 론은 순간 당황했다. 마음이 무겁긴 하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봐온 시오 헤이브, 그 강철 같은 사내라면 승전의 기쁨을 조금은 보여줄 줄 알았다. 그는 승전국의 수장 중 하나였으며 이 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예상하고 만들어낸 자였다. 한 손이 얼굴을 감싸 흘러나오는 소리를 죽였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아래로 부석하게 흩어졌다.
“론입니다. 알파 대수사님은 오후에나 와 뵐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벼락을 맞은 듯, 시오 헤이브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황급히 소매로 얼굴을 문지르는 뒷모습을 보며 론은 심장에 무언가 관통하는 느낌을 받았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째서 기뻐하지 않으십니까. 시오 헤이브 스승님.”
시오 헤이브는 호칭이 바뀌었음을 알아차렸다. 스승님? 그는 얼룩덜룩해진 얼굴을 천천히 돌려 자신을 응시하는 눈부신 제자를 바라보았다. 치기와 광기가 사라진 붉은 눈에는 냉철한 이성만 남았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존경의 염을 담아 말을 맺었다.
“저를, 진짜 제자로 받아주시겠습니까?”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가면을 벗어치웠다. 이를 갈며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었다.
“어째서 내가 기뻐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내가, 내가 레암을 그리 보내놓고, 17만 명의 피바다 위에서 춤이라도 출 거라 여겼습니까? 제자? 뭔가를 제대로 배우긴 했습니까? 왜 하필 지금 그따위 소리를!”
론은 그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돌린 채 손으로 눈을 덮는 것을 지켜보았다.
“당신은 위대한 킹 메이커임을 다시 증명하셨습니다. 기뻐하시면 됩니다. 레암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이 눈물은 기자들 앞에서 흘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스승님.”
나직한 음성이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난, 레암에게 진심이었습니다.”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스승님.”
“알파를 불러와! 당장!”
고개를 돌린 채 서 있는 수사의 손가락 사이로 맺힌 물방울이 떨어졌다. 론의 눈썹이 잠시 아래로 내려갔다. 생각과는 달리, 철혈이라는 스승의 심장엔 자신과 다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짓누르고 원하는 결과를 낼 줄 아는 자였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론은 그가 알파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조금 짐작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스승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어깨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단단해 보이던 스승은 자신의 안에서 덩치가 작았다. 시오 헤이브는 놀라 후드득 몸을 움츠렸으나, 론은 팔에 굳게 힘을 주었다. 팔 안에 갇힌 자가 억지로 몸부림쳐 몸을 빼내지는 않는 것을 보고 론은 충동적으로 그의 머리를 꽉 감싸 안았다. 밑도 끝도 없는 맹렬한 소유욕이 솟구쳤다.
시오 헤이브, 킹 메이커. 나는 이 사람이 필요해.
흐르륵, 크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품속에서 울렸다. 얼굴에 와서 닿는 보라색의 긴 머리카락이 근질근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