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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3. 킹 메이커(KING MAKER)
긴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론은 지루함을 내색하지 않고 시오 헤이브를 바라보았다. 기밀 회의실에서 나온 시오는 지쳐 보였다. 하긴, 무슨 일인지 고위급 수사들은 2, 3일 전부터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 보였다.
그간의 일과는 한결같았다. 본래 힐링 마운틴의 기상 시간은 5시로 정해져 있고, 일과 시간은 5시 30분에 시작했다. 하지만 몽크 마스터는 5시가 조금 넘으면 집무실에 나와 업무를 시작했다. 밤새 들어온 긴급 보고를 받고, 급한 사안을 처리했다. 새벽부터 실무자 면담과 회의가 연줄연줄 잡혀 있곤 했다. 시오 헤이브를 수행해야 하는 론은 아무리 늦어도 5시 20분까지는 메인 센터에 있는 그의 집무실로 가야 했다. 오전 정규 수업시간이 끝나면 다시 메인 센터로 가야 했고 오후엔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그를 따라 차밭으로 나가야 했다. 정해진 저녁 일과 시간이 끝나도, 개인 훈련실까지 따라가 그가 운동하는 내내 문밖을 지켜야 했다. 고된 시간이 이어졌으나, 론은 투덜대지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는 대단한 집중력과 성실함을 가지고 마스터를 수행했다. 알파는 론의 변화를 믿을 수 없었으나, 시오 헤이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했다. 몽크 마스터가 신입 수련사의 멘토링 수사가 되었다는 말은 소문에 소문을 낳았지만, 그의 뒤에 서 있는 검은색 수련사복의 은발 청년을 보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몽크 마스터와 관련이 있는 좋은 집안에서 특별히 청을 넣은 모양이다, 그런 쪽으로 소문이 흐르는 듯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시오 헤이브?”
론은 마스터, 선생님 혹은 멘토라는 명칭으로 스승을 부른 적이 없었다. 항상 정중하지만 시오 헤이브, 라는 이름으로 그를 칭했다. 시오 역시 그것을 딱히 고까워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까마득하게 아랫길에 놓인 신참 수련사에게 꼬박꼬박 존칭어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조곤조곤 붙들고 가르치진 않았으나 묻는 것에 대해서는 성의 있게, 깊이 있는 대답을 해주었다. 건방지다, 묻지 말라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론은 그것이 시오가 자신을 가르치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묻지 않으면 얻어갈 수도 없다. 그러나 묻기 위해서라면 치밀하고 넓게 생각해야 했다. 이게 제로에서 무한까지라는 의미겠군그래.
“남방에 있는 14공화국의 정세가 불안정합니다. 쿠데타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14공화국 현 정권 역시 군부정권 아닙니까? 타 공화국과 교류도 별로 없는데, 특별히 신경 쓰시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현재 통령 역시 군부가 추대한 것입니다만, 외부 세력의 도움도 있었습니다. 고립국이라 해도 이해관계가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그 외부 세력이 어딘지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론은 그런 종류의 문제에 확실히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돌려서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오 헤이브, 당신이 아니, 힐링 마운틴 시티가 14공화국의 현재 통령에게 정권 창출에 대한 반대급부로 받았던 것은 무엇입니까?”
시오는 순간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기밀 사항을 아침 인사하듯 태연하게 묻다니. 론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시오는 가끔 그가 자신을 도발하거나 시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접 헤아려 보십시오, 론. 기밀 사항까지 그대에게 직접 말하긴 어렵습니다.”
“식민행성 자원…과 관련된 것입니까?”
시오는 빙긋 웃었다. 14공화국이 개척한 람다 소행성 지구의 광물, 트로늄이 걸린 문제였다. 트로늄은 비행체에 기본 장착되는 안티 G-포스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발현시키는 광물이었다. 무기로서의 효용도 만만찮다. 지구에선 생산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이 천정부지였다. 지금까지 14공화국은 안정적인 수급 루트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계약에 대해 아는 이들은 힐링 마운틴 시티 내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것 역시 추측해 보십시오. 공개된 자료 검색까지 막지 않습니다.”
“트로늄입니까?”
시오는 발걸음을 멈추고 론을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생각보다 훌륭하다. 머리도 좋고 감도 확실한 녀석이다.
“그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타부타 대답 없이 묻기부터 한다. 론은 싱긋 웃었다.
“알 수 없죠. 상황을 전혀 모르고, 당신과 통령 사이에 무엇이 어떻게 거래되었는지도 모르는걸요.”
시오는 웃음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집무실을 향해 성큼성큼 앞장섰다.
“시원한 물 한 잔만 부탁합니다.”
론은 공손한 태도로 손을 모으고 물러섰다.
쿠데타에 성공하면, 그들은 전 정권이 맺은 계약 따위 무시할 가능성이 높다. 시오 헤이브가 얻은 것은 트로늄 광산의 35년간 채굴권이었다. 기간이 20년 이상 남아 있으나 별로 유효할 듯싶지 않다. 남은 기간을 고집한다면 새 군부에서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다. 당장 새로운 루트를 찾는 건 쉽지 않은데. 생각이 뒤엉켰다. 알파는 어젯밤에 한 무리의 호위 부대와 함께 14공화국으로 떠났다. 유능한 외교관이자 정치 감각이 뛰어난 친구. 그에게선 아직 아무 연락이 없었다. 7인 위원회와 백인회가 오후에 연달아 소집될 것이다.
아아, 피곤하다.
그는 어제 새벽 3시까지 보고를 받고 집무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아침에 시오를 깨운 것은 론이었다. 어깨에 툭툭 와 닿는 감촉에 화들짝 잠이 깨고 말았다. 키가 큰 은발의 제자가 무심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 시선에 확 빨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벌떡 튀듯이 일어나자 론은 차분하게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곤하게 주무셔서, 간이 침상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아닙니다. 일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손대지 말고 말로 깨우시면 됩니다.”
어깨의 감촉이 여전하다. 그는 누군가와 직접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다. 론은 그가 과민 반응하는 이유를 눈치채고 고개를 숙였다.
“…주의하겠습니다, 시오 헤이브.”
아침 햇살에 폭포수처럼 맑게 빛나던 은빛 머리칼. 기억이 까무룩 멀어졌다. 보라색 머리카락이 의자 옆으로 툭 떨어져 흘렀다.
론이 찬물을 들고 들어왔을 때, 시오 헤이브는 의자에 기댄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런 이런. 또야? 영감 어지간히 피곤했나보군. 요 며칠 거의 밤을 새웠다 하더니.”
론은 탁자에 얼음물이 담긴 컵을 내려놓고 찬찬히 그를 살폈다. 피곤에 절은 눈가에 거무스레 그늘이 내려앉았다. 묶여 있던 머리카락이 잠시 엉켜서 뺨에 들러붙었다.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의자에 앉은 사내의 뺨에 들러붙은 보라색 머리카락 뭉치를 떼어냈다. 으음. 웅얼대는 듯한 짧은 신음에 론은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결에 거슬렸는지 그의 미간에 후르륵 주름이 잡혔다 사라졌다.
손대지 말랬던가? 희한한 데서 과민하군. 정말 수도승은 수도승인가 본데. 서 있던 청년은 비죽이 웃었다. 잠시 후, 의자에 파묻힌 사내는 아예 나직하게 코까지 그릉댔다. 곤히 잠든 그의 표정은 나른하고 편안해 무방비한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들여다보고 있던 론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잠든 얼굴인데 표정이 더 풍부하다니.”
이런 모습이 오히려 더 보기 좋군. 그는 굳이 손을 대지도 않고 깨우지도 않았다.
잠깐 잠들었다고 생각한 시오 헤이브는 두 시간을 꼬박 채운 후에야 일어났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14공화국 신군부의 쿠데타 성공 뉴스였다. 통령 일가의 몰살 소식과 알파의 억류, 그리고 호위 부대의 참사 속보가 따라붙었다. 트로늄 광산에서 외국인들이 추방될 것이라는 소식도 함께 전해졌다. 온 세계가 들썩한 가운데 힐링 마운틴에선 백인회가 전원 출석 상태로 소집되었다. 회의장은 발칵 뒤집혔다.
“힐링 마운틴 시티에서 선제공격은 없습니다. 그러나, 14공화국에서 선전포고를 하도록 도발할 것입니다.”
시오 헤이브는 음성은 단호했다.
“억류 중인 사절, 알파 리온 대수사를 구출할 특수 부대와 용병단을 파견했으며, 1, 3공화국과 5공화국 쪽으로 특사를 급파할 것입니다. 현재 시각, 데프콘(Defense Readiness Condition, 전투 준비 태세)2가 발령됨과 동시에 힐링 마운틴은 전시체제로 돌입합니다. 대공방어 시스템 역시 현 시각을 기준으로 발효될 것입니다.”
시오 헤이브가 회의실에서 빠져나온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입매를 꽉 굳힌 채 성큼성큼 비상 통제실로 향하던 그를 검은 수련사복을 입은 키 큰 청년이 따라잡았다.
“어쩌실 생각입니까?”
“바쁩니다.”
“혹시 시오 헤이브, 14공화국을…….”
“맞습니다. 해체할 생각입니다.”
“이게 당신이 왕들을 만들어낸 방식입니까? 당신은 그래도 승려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나를 비난이라도 할 참입니까? 도덕군자는 통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돼서도 안 됩니다. 앞길 막지 말고 비키십시오!”
눈에서 불이 쏟아져나오는 듯해서 론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가 비상 통제실에 들어서자 안에서 문이 닫히더니 이내 잠겨버렸다. 잠시 후 전시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길게 울렸다. 속에서 열기가 솟아올랐다.
내가 원하던 것, 내가 원하던 길, 내가 원하던 방식.
멋지군, 시오 헤이브!
론은 주먹을 움켜잡은 후 벽에 기대 클클대고 웃었다.
* * *
힐링 마운틴 시티는 14공화국에 정식 비난 성명을 냈고, 억류된 사절 해방, 참살된 군인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정권의 정당성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군부 정권이었지만 이익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했다. 힐링 마운틴 시티에 넘겨 준 식민행성의 광산 채굴권이 일시에 뇌관으로 부상했다. 채굴권의 일방적인 회수를 요구하는 신군부 정권의 요구는 시오 헤이브가 이미 예상했던 것이었다. 다음날 식민행성의 광산에 있는 힐링 마운틴의 수사들, 일꾼들은 계약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그들이 희생을 대비해 방어적 차원에서 군을 동원하겠다는 답신이 14공화국에 도착했다. 14공화국의 베리타스 중장은 답신을 가져온 사절을 참수하고, 힐링 마운틴에 선전포고를 했다.
부상당한 알파가 14공화국에서 구출된 것은 3일이 지나서였다. 시오 헤이브는 그를 만나보지도 못한 채, 론을 대동하고 바로 3공화국으로 출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각국에서 동원 가능한 군의 규모, 무기의 사용 가능 수위, 국제 여론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절할 수 있는지의 가능성, 14공화국을 분할했을 때 각국에서 챙길 수 있는 이익 등에 대한 계획이 수십 가지 들어차 있었다. 그가 각 공화국과 왕국을 비밀리에 돌며 한 일은, 연합군 결성에 대한 논의, 종전 후 14공화국의 분할 통치 방법과 기간, 식민행성 채굴권 등에 대한 협의였다.
론은 흥분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저것이 시오 헤이브라는 인간의 진짜 얼굴일까. 힘과 권력이란, 저렇게 만들어지며, 저렇게 사라지는 것인가. 그것을 의도적으로, 자신의 손안에서 만들어내는 인간들이 정말 존재하는구나.
도덕군자는 통치자가 될 수 없다, 돼서도 안 된다, 라.
수사들의 마스터라는 그의 입에서 나오기엔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시오 헤이브는 엄연히 힐링 마운틴 시티의 통치자였다. 인구 10만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국가. 그러나 그의 손에서 거대 공화국의 판도가 다시 짜이고 있었다.
* * *
시오 헤이브가 일주일 만에 힐링 마운틴에 도착했을 때, 14공화국은 전폭기를 보내 힐링 마운틴을 폭격했다. 공식 사상자가 집계되자마자, 시오 헤이브는 연합군에게 대공 방어와 14공화국 본토 진공을 명령했다. 그의 계획에는 수도 메갈로 시티의 초토화, 14공화국의 식민행성인 람다 소행성 지구에 있는 관리 및 군부대 멸절이 포함되었다.
워프 게이트가 람다 소행성 지구로 열렸고, 연합군이 밀려들어 갔다. 어차피 람다 소행성 지구에는 치안 유지를 위해서 주둔시킨 소규모의 부대밖에 없었다. 원주민들은 누가 자신을 지배하든 무신경했다. 람다 소행성 지구는 순식간에 연합군의 손으로 떨어졌다. 14공화국에서 파견 나온 이들은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베리타스 중장은 선제공격을 택했다. 연합군이 14공화국의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그는 힐링 마운틴 시티에 신예 전투기를 대거 출격시켰다. 그러나 전형적인 군인이었던 그는 힐링 마운틴 시티를 학자들만 거주하는, 유리성 같은 지역으로 알고 있었다. 정계에 오래 몸담은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힐링 마운틴 시티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다. 시오 헤이브가 그곳을 통치한 이래, 그곳의 위상은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학문의 성지로 알려진 작은 섬의 주력 수익 산업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항공 우주 산업과 최첨단 무기 산업이었다.
힐링 마운틴 시티의 대공 방어 시스템은 14공화국 제공(制空) 능력을 순식간에 백지화시켰다. 14공화국의 전투기의 80%가 힐링 마운틴의 상공에서 불덩어리로 변했다.
“14공화국 메갈로 시티에서, 2주일가량 폭도들의 약탈과 불법 폭행들을 묵인할 것입니다. 행정 및 치안 마비 상태도 같은 기간 지속할 것입니다. 자생 정권이 등장하기 전, 그들끼리 서로 싸워대고 민간의 혼란이 극에 달했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연합군이 치안 유지 명목으로 공식 진입하게 될 것입니다.”
힐링 마운틴에 긴급 회담으로 모인 각국의 수뇌부들은 감탄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민간의 혼란을 방치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정치와 권력과 힘의 생태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시오 헤이브는 국민의 반발 없이 괴뢰정권을 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했던 것이다.
“14공화국의 분할 통치 영역과 기간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알파는 검은 수련사복을 입은 론이 몽크 마스터의 뒤에 시립해 있는 것을 보고 가만히 눈썹을 우그렸다. 어째서 이런 비밀 회담 자리까지 데리고 들어왔을까? 그러나 시오 헤이브는 그런 일에서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알파는 의아함을 눌렀다.
론은 애써 표정을 숨겼지만 그의 온몸은 팽팽하도록 긴장했다. 흥분, 희열, 놀라움, 기대. 아직 어린 청년의 눈은 매 순간 무시무시할 정도로 빛났다.
“5개 공화국 연합군이 14공화국의 수도 메갈로 시티를 현 시각 22시 40분을 기해 접수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사망자는 연합군 3만, 14공화국 방위군 5만, 부상자는 아직 집계되지 않았습니다. 민간인 사망자는 14공화국 3만 5천, 힐링 마운틴 시티 1,250명으로 보고되었습니다. 민간인 사상자는 앞으로 2주일 동안 급속히 증가할 것입니다.”
시오 헤이브는 피곤한 듯이 머리를 짚고는 잠시 말을 끊었다.
“14공화국 통령의 아들을 이곳에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 정권을 맡고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14공화국 내에서 분할 통치 비난 여론을 무마하기에 가장 효과적인 카드가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떠십니까?”
웅성대는 소리가 일었다. 통령의 가족은 몰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살아남은 일가가 있다면 그 이상 적절할 수 없다. 재주도 좋지, 무슨 수로 건져냈을까?
그가 손을 들어 사람을 불러오라 지시했다. 대기하고 있던 듯, 선이 고운 자그마한 청년이 머뭇대며 들어왔다. 검은 수련사복 대신 14공화국의 문양이 새겨진 정장 차림을 한 갈색 머리카락의 야리야리한 사내였다. 론은 숨을 몰아쉬었다.
“레암 세케르스. 이곳의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가 참변을 면했습니다. 14공화국의 세케르스 통령의 차남입니다.”
레암은 새파랗게 질려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론은 그가 지금에야 14공화국 사태와 가족의 몰살 소식을 들었음을 눈치챘다. 하긴. 일반 수련사급 이하부터는 외부 정보가 제한되어 있고, 더욱이 14공화국 내부 소식은 최고 기밀사항이었으니까. 그의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눈치챈 시오는 론에게 짧게 명했다.
“세케르스 통령의 영식을 옆방으로 모셔주십시오. 많이 놀라신 것 같습니다.”
넋이 빠진 레암은 옆방으로 질질 끌려왔다. 그는 각국 수뇌부의 회의가 힐링 마운틴 시티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고, 자신을 부른 사람이 몽크 마스터인 것도 몰랐다.
“무슨 말이야. 아버지 어머니가 어떻게 되셨다고? 쿠데타가 났다고?”
…제기랄.
“내가 왜 거길 돌아가야 해? 말 좀 해줘, 론. 저 사람들은 누구야? 넌 왜 저기에서 나왔어?”
레암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눈이 허옇게 뒤집혀 있었다.
“귓구멍 씻고 잘 들어. 너희 나라에 쿠데타가 나서, 지금 공화국이 뒤집혔어. 네 가족은 싸그리 죽었다구. 너만 살아남은 거야. 씨발, 정신 차려, 레암.”
조그마한 녀석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신이 빠졌다. 지금 저 새대가리 같은 뇌 속에 식민행성 채굴권이니 연합군 분할 통치 따위의 말은 들어갈 것 같지도 않다.
“너희 나라 신군부하고, 아, 정말 이름도 좆 같네. 그러니까 베리타스 중장하고 여기 연합군하고 전쟁이 붙었고, 메갈로 시티는 연합군한테 오지게 깨지고 있어. 당분간 그곳은 패닉 상태일 거야. 베리타스 중장은 뒈진 거 같아. 지금 어느 놈이 정권을 잡을지 몰라. 나라가 개판이라고. 연합군이 너를 차기 통령으로 밀어붙일 것 같아. 넌 가서 상황 정돈해야 한다니까! 아, 씨발아, 네가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냐. 정신 차려.”
괴뢰정권의 꼭두각시. 차려진 밥상이라고 좋아해야 하나, 허수아비라고 비웃어줘야 하나. 나 같으면, 이런 기회가 있으면 기꺼이 들어갈 용의가 있다. 처음엔 허수아비로 시작한다 해도 입맛대로 춤추는 대신 놈들을 길들일 수 있다. 방법은 많아.
하지만 레암은 전혀 그럴 만한 놈이 아니었다.
“베리타스 중장? 막심 아저씨가? 그럴 리 없어! 아저씨는, 그 아저씨는 우리 가족하고 20년간 친하게 지낸 분인데! 내가 여기 올 때만 해도 몹시 섭섭해하시면서……. 어어, 그럴, 그럴 리가, 으어어…….”
자그마한 머리통이 무릎 사이로 처박혔다. 어어, 흐어어어어. 기괴한 비명이 그의 울음소리라는 걸 알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정신 차려, 레암. 지금 이러는 동안도 메갈로 시티에선 사람이 떼로 죽어나가고 있어. 연합국에선 한동안 약탈을 내버려둘 생각이다. 네가 가서 그 기간이라도 줄여. 레암! 너 통령 아들이라며!”
“아아, 어머니, 엄마! 엄마아아아! 엄마아아아아!”
이어지는 울부짖음에 론은 말을 멈추었다. 머리를 쥐어뜯던 녀석이 머리를 탁자에 박으며 발작했다.
“나! 난 어머니한테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왔어! 날 쫓아낸다고 생각해서, 방에서 울고 계신 걸 알면서도 가보지도 않았어. 어젯밤에도 연락할 수 있었는데! 매주 주말마다 꼬박꼬박 전화하셔서 내 안부를 물었는데 지난주엔 전화가 없었다고. 내가 먼저 전화할 수 있었는데! 그러면 마지막 말이라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 어머니. 미안해! 엄마, 엄마아아아! 아아아!”
둥글고 커다란 눈에서 폭포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자그마한 얼굴이 순식간에 눈물콧물로 범벅이 되었다. 론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앞에서 몸부림치는 녀석의 슬픔엔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를 설득해야 했다.
“…레암. 네가, 네가 이러고 있는 동안도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넌 통령의 아들이야. 책임감 좀 가져봐!”
“죽어! 죽어, 개자식아. 엄마가 죽었는데 내 앞에서 얼어 죽을 책임감 소리가 나오니?”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번쩍 들렸다.
“내가 가야 한다고? 가서 뭘 하라고? 난 못 가. 난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못 해. 나, 난 여기서 그냥, 얌전히 죽은 듯이 지낼 사람이었어. 좋아하는 기술이나 배워서, 플라잉 소서 파일럿이나 될 생각이었다고. 통령? 미쳤어? 난 이틀 만에 돌 맞고 쫓겨날 거야.”
“연합군이 널 뒷받침할 거다.”
“이 개쌍놈아. 아무리 그래도 F급 유전자를 가진 통령은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어. 난 거기 못 가! 아아아! 엄마, 아버지!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기 전에 그렇게 모질게 말하지 않는 건데. 나 같은 건 죽는 게 낫지 않겠냐고, 소원대로 해드리겠다고 그러고 왔는데! 으허어어! 엄마 울 거 뻔히 알면서!”
론은 망연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그마한 룸메이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발작하듯, 머리를 바닥에 들이박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지친 낯색을 한 시오 헤이브가 서 있었다. 레암은 고개를 번쩍 들고 들어온 사내를 노려보았다.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유감입니다.”
“당신은 뭐야? 제발 꺼져. 나, 나 좀 내버려둬……. 어어어, 어허어어!”
시오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론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보라색 수사복의 사내가 몸부림치며 울고 있는 자를 가만히 끌어안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시 레암의 울부짖음이 길게 찢어졌다.
“정보가 조금만 더 빨랐으면 부모님을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미안합니다, 레암 세케르스.”
갈색 머리카락이 보라색 수사복 안으로 푹 파묻혔다. 시오 헤이브는 그를 두른 양팔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맘이 풀릴 때까지 우십시오. 앞으로 힘든 일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많이 우십시오. 나중엔 그나마도 못 하시게 됩니다.”
레암의 울음 끝은 길었으나, 그를 안고 있는 사내는 내내 붙든 팔을 풀지 않았다. 눈꺼풀이 가만히 덮이며 적갈색의 깊은 눈동자로 그늘이 깔렸다. 론은 아연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