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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소년 수련사가 안내한 접객실은 아담하고 정갈했다. 론은 방을 슬쩍 휘둘러보았다. 별다른 장식도 없고, 창가에 놓인 식탁이나 의자도 간결한 모양새였다. 다만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운치가 있었다. 모르긴 해도, 안목이 높은 사람이 배치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정식 수사 복장을 한 시오가 들어오면서 가볍게 묵례했다. 알파가 급히 일어나 인사를 하는 동안, 그는 당연하다는 듯 식탁의 상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런 맙소사.
그를 알아본 넬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막 들어온 수사는 분명 아까 밭에서 만났던 자였다. 지금은 보라색 승복을 입고 있다. 틀림없다. 막일꾼인 줄 알았는데 이 섬의 통치자 몽크 마스터였던 게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론의 눈도 크게 벌어졌다.
지금 당당하게 식탁 머리에 앉은 저 인간이, 내가 아까 만났던 그 사내가 맞나?
‘재미있군…….’
그의 입 끝이 가만히 말려 올라갔다.
“3공화국 통합 사관학교 쪽으로 피해 보상 명세서를 보내겠습니다.”
알파의 목소리는 거의 땅바닥에 붙었다. 식탁에 마주 앉은 보라색 머리카락의 사내는 고개만 잠시 끄덕인 채 다른 반응이 없었다.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차밭에서 그들을 메인센터로 데려온 후부터, 시오는 일언반구 없었다.
론은 알파의 태도와 넬의 표정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었다. 다들 말하지는 않지만, 보아하니 아까 만났던 이 사내가 힐링 마운틴의 치자(治者)인 게 확실했다. 무슨 윗대가리가 체신도 없이 막노동자마냥 직접 밭에 나가서, 그것도 웃통까지 벗어젖히고 일을 하고 그러시나? 기자도 없던 걸 보니 언론 조작에 필요한 사진용 개폼도 아닌 듯하던데. 하여간 웃기는 인간이군. 그는 상석에 앉은 사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정식 수사복에 감싸인 그는 아까와는 이미지가 전혀 달랐다. 표정엔 빈틈이 없었고 태도에선 엄숙한 기품이 흘렀다. 얼핏 보기엔 얼굴선이 단정하여 전형적인 학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학자치고는 지나치게 차고 단단한 표정이었다. 보통 학자들이란 단단한 척하면서도 허술한 종자들이다. 그의 표정에선 허술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론은 마주 앉은 사내에게 급작스레 흥미가 일었다. 도무지 나이를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건 옆에 앉은 교장 영감의 사관학교 동문이라는 알파라는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주름 하나 없는 얼굴이지만 연륜의 무게가 강하게 느껴졌다. 이래서 나이를 묻지 말랬던가? 그는 교장 영감이 이곳에 오기 전에 누누이 당부하던 말을 떠올렸다.
* * *
“그곳에선 수사들에게 예를 깍듯이 갖추어야 한다. 신상이나 유전자 정보, 특히 나이에 대해서는 묻고 싶어도 절대 입을 열지 마라. 성과 관련된 대화나 저속한 농담도 금기다. 그곳엔 여자들이 없고, 금욕을 서원한 남자 사제들만 거주한다.”
“…하하! 선생님. 금욕 서원이요? 그런 개코같은 말을 믿으십니까? 뒷구멍으로 할 건 다 할 텐데요? 먹고 싸는 건 본능 아닙니까. 먹어서 싸는 것과 꼴려서 싸는 건 동급 본능인데. 안 싸고 사는 건 사람이라면 가능한 일이 아니죠. 고자들도 욕구는 남는다잖아요.”
교장이 으르렁대는 반응을 보는 것도 시들했다. 교장은 노회한 자인지라, 소리를 지르거나 뺨을 후려치기는 할망정 그가 원하는 퇴학 수속을 해주지는 않았다.
“맡은 직무에 대해 캐묻는 것도 대단히 무례한 일에 속한다.”
“비밀 프로젝트라도 진행 중이신가 보네요? 흐흥. 갑자기 관심이 생깁니다.”
론은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슬슬 쓸며 교장실을 나섰으나 웃음기는 여전했다. 금욕 서원이라. 눈에 뻔히 보이는 야료를 신성한 척 들이대고 있어? 그런 밥맛없는 놈들이 드글대는 섬에 가야 한다니. 섬 이름이 왜 힐링 마운틴인지는 모르겠지만 재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내 대가리 속을 치료라도 해보자는 심산일까? 의도가 오만하다. 물론 론은 그따위 고립된 섬에 틀어박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루. 아니, 이틀이면 그 섬에서도 나오게 되겠지. 영감 얼굴이 볼 만하겠군.”
내 머릿속은 더 말할 것 없이 명료해. 너희 주류 사회가 나를 받아주지 않겠다니, 나 역시 다른 방법으로 해나갈 것이다. 다만 너희가 멋대로 만들어서 써먹던 내 이미지만큼은 제대로 깨놓고 시작하겠어. 그는 기분 좋게 킬킬대고 웃었다.
론은 사관학교를 제대로 마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제 손으로 자퇴서를 낼 생각은 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학교 측에서 행하는 퇴학이었다. 입학 전부터 그는 언론과 정부에서 자신을 정책적인 아이콘으로 만들어 사용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따위 것들, 사실 감수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모르는 척, 구역질을 누를 수 있었다. 각 지역 공화국이나 왕국들은 외부 식민행성 개척과 그곳에서 채굴되는 자원 경쟁 때문에 군부에 엄청난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우주 항공 산업을 장악하고 있던 각국의 군부는 쉽게 정계와 연결이 되었다. 야심만만한 론이 3공화국 통합 사관학교라는 어려운 길을 택한 것도 분명 이유가 있었다.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사관학교를 졸업한다 해도, 그것까지가 한계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유전자가 제대로 박혔다는 녀석들과는 첫 임관부터 길이 어긋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전자 맵과 신분 확인 절차를 통과하지 못하면, 식민행성의 죄수를 호송하거나 감시하는 관리직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최근 10여 년간 소위 임관지를 분석한 데이터를 밤새워 찾아보았다. 식민행성 관리직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사고를 친 장교들이 좌천되는 자리였다. 그들은 지구 본성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공기나 물, 음식 공급도 불안정한 외부 행성 지역에서 평생을 말아먹어야 했다. 식민행성 관리들이 중앙 내직에서 출세할 가능성은 전무했다. 게다가 그들은 임기를 다 채워 지구로 돌아오기도 전에 식민행성에서 죄수들 혹은 원주민과의 충돌로 많이 죽어나가기도 했다.
운이 좋아 모행성 지구에 남는다 쳐도?
그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은 채, 역대 장성급 이상의 리스트를 뽑아보고, 그들의 맵을 해킹했다.
일주일 후, 그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는 단말기를 때려 부순 후, 무단 외출을 나가서 패싸움을 벌였다. 더러운 일이다. 앞길은 막아놓고 내 이미지는 꼴리는 대로 만들어 이용하시겠다? 그는 정부를 좋아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 경우는 제대로 입맛이 떨어졌다. 정부와 언론에서 떠드는 메시지에 속이 다 뒤집혔다.
“너희도 노력하면, 이 사람처럼 제대로 된 학교에 들어가서, 출세를 꿈꿀 수 있다.”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일은, 팔자대로 포기하고 살라며 진실을 알려주는 일보다 더 질이 나빴다. 말할 수 없이 불쾌했다.
어차피 글러 먹었으면, 너희도 엿이나 먹어. 내가 퇴학을 당하면, 네놈들이 멋대로 만든 허상은 제대로 깨질 터이지. 좋은 집안 계집들을 건드린 건 치졸한 복수심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고삐를 풀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방약무인해지는지 사실 처음 알았다.
그러나 교장은 자신을 쉽게 퇴학시키지 않았다. 그러시겠지.
하지만 그 유명한 힐링 마운틴의 수도승 사이에 처박아놓고 정신 개조를 시킬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 * *
론은 몽크 마스터에게 제대로 된 예의를 갖추어야 할까, 애초의 계획대로 수사들의 화를 돋우어 쫓겨나는 쪽으로 밀어붙일까 잠시 생각했다.
“여기에선 윗대가리, 아니 대장을 뭐라 합니까? 대통령 각하? 성하? 주상 전하? 저하? 예하? 합하? 공화국도 아니고 공국도 아니고, 왕국도 아니고.”
“두 분께선 이 섬 분들이 아니시니, 이름을 부르십시오. 저는 시오 헤이브입니다.”
까마득하게 어린 소년이 함부로 주절대는 앞에서 정중한 존칭어를 사용한다는 것, 그것은 단단한 벽 혹은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를 의미했다. 론은 쉽게 알아차렸다. 게다가, ‘이 섬 분들이 아니니까’라. 노는 물이 다르다 이 말씀이시렷다?
‘당신이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나는 7지구만 벗어나면 어딜 가나 이방인이었어.’
론의 웃음이 더욱 진해지며 깨끗한 이가 곱게 드러났다. 망나니짓을 해서 오늘내일 내로 쫓겨나는 게 목표인데, 이 고상한 척하는 종자가 제일 윗대가리라면 이보다 더 맞춤할 순 없다.
시오 헤이브라고?
너 역시 엿이나 먹어.
시오는 론이라는 청년이 지독한 독기를 품은 채 환하게 웃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신과 동일한 붉은 계열 홍채도 신경이 쓰였지만, 저 웃음만큼은 몹시 거슬렸다. 짐작대로, 사람을 휘어잡을 만한 재능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생각 밖으로 맑고 눈부신 모습에 잠시 놀라기도 했다. 부서진 플라잉 소서의 뒷문을 열고 가볍게 땅으로 뛰어내리던 소년의 호기심 어린 표정이 머리에 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불쾌한 것은 아니지만 유쾌하지도 않았다. 알 수 없게 속이 거북했다.
“시오 헤이브, 식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는 처음이라 궁금한 게 많은데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교장 선생님은 이것도 묻지 마라, 저것도 묻지 마라, 오기 전부터 잔뜩 경고만 하시더랍니다.”
교장의 이마가 와르르 찌그러들었다. 시오 헤이브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기밀 사항이 아니라면, 아는 선에선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시오는 순간적으로 이마를 움찔했으나 금세 덤덤해졌다.
“유감이지만, 개인 정보에 관한 것은 밝힐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솔직하게 말해줄 거라 생각했던 건 아니니까요. 그냥, 교장 선생님 동문이라는 알파 수사님이 저런 탱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이상해서요. 여기 수사님들은 주름 제거 수술을 해마다 받게 되어 있나 보죠, 뭐.”
“이곳이 치유의 산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산에서 노화 방지 초음파라도 나온다는 말인가요? 혹은 회춘 펄스?”
피싯, 론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감이 좋은 녀석일까? 힐링 마운틴 내에서 나오는 특이 파장은, 이곳 과학 담당 수사들이 전력을 다해 연구하고 있는 최고 기밀 프로젝트였다. 시오는 그쯤 해서 말을 접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 지역이 치유의 산이라 불리는 것엔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까마득하게 오래전에는 몇몇 사람들에게 불치병이 가끔 완쾌되는 요양지 정도로 알려졌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척박한 산악 지역에 정주하며 살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다른 지역 사람들의 두 배가 넘는다는 비공식 연구결과가 암암리에 돌기 시작했다.
처음 그곳에 뿌리내리며 살던 이들은 살생 금지의 계율에 따라 입대를 거부해 나라에서 추방된 오래된 종교의 수도승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정보를 외부에 누설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과 연결된 사람들이 가끔 그 지역에서 머무르며 몸을 회복해 나갔다. 공기가 좋아서, 채식으로만 이루어진 식단 때문에, 균형 잡힌 소박한 생활양식 덕에, 혹은 본의 아닌 금욕 생활 때문에. 증세가 호전된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였지만, 정확한 원인은 아무도 몰랐다. 오랜 세월 동안 이 지역은 출입이 엄히 통제된 지역이었다.
각 지역의 공화국들도 적도에 있는 작은 섬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처음엔 탐을 낼 만한 이유가 없어서였고, 진가가 제대로 알려졌을 땐 점령하기에 너무 늦어져서였다. 그곳은 오래전 1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한 이래 내내 영세 중립 지역이었으며, 인문학과 의학, 이론물리학의 성지로 여겨졌다. 그곳의 수사들은 뛰어난 학자들이었다. 파계 후 섬을 추방당한 수사들조차 관련 학계를 지배할 정도로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인구수는 적지만 최첨단 대공무기가 들어차 있어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현 몽크 마스터는 일부 공화국의 수뇌부와 긴밀한 관계였다. 혼돈기에 있던 몇몇 공화국에게, 그는 지속 가능한 정권 창출에 많은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그들은 베일에 가려진 힐링 마운틴의 마스터를 ‘킹 메이커’라 부르기도 했다. 사람들은 긴 세월 동안 동일한 인물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공화국의 통령들조차 시오 헤이브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고, 힐링 마운틴의 몽크 마스터 혹은 킹 메이커라고만 칭했다. 수사들은 누구든 자신들의 긴 수명에 대해 함구했고, 넬 켄티 교장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섬에 드나든 이들 역시 그것에 대해 묻거나 발설하지 않았다. 불문율이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그렇게 높으신 분이 왜 밭에 나가 막일을 하신 거죠? 이유가 있습니까?”
“규칙입니다. 수사든 수련사든 누구나 하루 세 시간 이상의 육체노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전히 악의에 차 있는 소년의 미소가 따라붙었다. 시오는 론의 악의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짐작해보려 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는 바가 없었다. 적어도 자신이 실수한 것은 없었다. 무례했던 것은 두 사람이었으며, 모욕을 당한 것은 자신이었다.
“재미있는 규칙이군요. 사실은 깜짝 놀랐어요. 그 더위에 웃통을 훌렁 벗고 일하고 계시길래 막일꾼인 줄 알았거든요. 마스터까지도 꼼짝 못 하는 계율이라니. 금욕, 채식, 복종, 생명 존중, 이것저것 뭔가 복잡한 계율이 많던데, 정말로 수사님들은 그 모든 서원을 다 지키고 사시나요? 설마요.”
넬은 거의 자포자기한 듯이 보였다. 알파는 방약무인한 친구의 제자에 대해 점점 적의가 치솟았다. 시오 헤이브는 드러내진 않았지만 분명 노여워하고 있었다.
“아하하! 그나저나 아깝긴 했습니다. 위에서 보곤 정말 산발한 여자가 스트립쇼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아까도 말했지만, 젖이 커서 정말 여자처럼 보였다니까요.”
넬의 움직임이 멈췄다. 알파는 넋이 빠진 얼굴로 입을 벌렸다. 시오 헤이브는 가만히 눈을 치떴다. 저 새파란 녀석은 무슨 이유에선지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다시 얼굴로 열이 올랐다. 이쯤 해두어야 할 것 같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알파도 이젠 내가 왜 이들과 함께 식사하겠다고 했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알파는 입을 벌린 채 마스터와 건방진 소년을 곁눈질했다. 젖이 커서 여자인 줄 알았다고? 그걸 또 당사자 앞에서 입 밖으로 내셨다고? 맙소사. 지금 내 앞에서도 그 말을 되풀이하는 꼴을 보니 저 맹랑한 애송이가 마스터를 망신 주려고 작정한 거로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알파는 이 냉랭하고 무감해 보이는 시오 헤이브의 친구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수련사 시절의 시오는 몹시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소심하고 순진한 사내였다. 성에 대한 농담이 워낙 금기이기도 했지만, 시오 헤이브는 가벼운 농담에도 귀뿌리까지 벌게지곤 했다. 지금은 표정이라는 게 없어졌지만, 사람의 기질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물론 그는 예나 지금이나, 점잖지 못한 말을 들었다 해서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거나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현재로선 저 멀끔한 소년이 이곳에서 수련사들과 같이 공부할 가능성은 물 건너간 듯싶었다. 시오가 무슨 생각으로 그들을 식사에 초대했는지 드디어 짐작이 되었다. 그것도 자신까지 동석시켰다는 것은, 쫓아낼 구실을 잡겠다는 뜻이었다. 알파는 쓰게 웃었다.
저 애송이가 하는 짓을 직접 보고 이곳으로 불러들인 당사자가 알아서 내보내라는 의미렷다?
그나저나 고명하신 마스터께서 노역 시간에 웃통을 벗어젖히고 일을 하셨나?
물론 마스터도 사람이니 이 더위에 옷을 꽉 껴입고 있으란 법은 없지. 시오 헤이브가 차분한 학자의 이미지와 달리 근육 훈련을 즐긴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저녁마다 개인 훈련실에 틀어박힌 채 공들여 만들어낸 근육이 몸에 날카롭게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더욱 드물었다. 하긴. 대흉근이 우람하긴 하지. 아무리 그래도, 저놈이 주절댄 건 용서하기 어려운 심한 망발이다. 잠시 생각이 튀는 동안 론의 도발이 이어졌다. 원래 저리 이죽거리는 말투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저건 분명 도발이었다.
“어차피, 규율이 다 지켜질 것이라 기대하고 서원을 받는 게 아니잖습니까. 금욕 하나만 해도 사실 가능한 일은 아닐 테지요. 안 그렇습니까?”
“론, 됐다. 제발 그만 해라. 내가 네놈을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데려왔는지 모르겠다.”
“안 그렇습니까? 위대한 몽크 마스터, 시오 헤이브.”
스승의 간절한 부탁에도 은빛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은 마주 앉은 사내를 쏘듯이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시오 헤이브의 눈매가 천천히 가늘어졌다.
저러는 이유가 무얼까? 이제는 불쾌함보다 의아함이 커졌다. 시오 헤이브는 머릿속에서 서서히 생각의 가닥을 잡기 시작했다.
어쩌면. 어쩌면.
혹시?
상석에 앉은 조용한 사내의 눈이 청년의 얼굴을 찬찬히 훑었다. 미소를 머금고 있는 청년은 냉랭한 눈으로 시선을 맞받아쳤다. 오만과 독선, 광기, 치기, 탐욕, 그리고 깊은 좌절감이 뒤엉킨 눈이었다. 시오 헤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유라면, 자신도 징그럽게 겪어본 일이었다. 이해하려면 못 할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저따위 오만불손한 태도를 받아주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도발에 응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앞에 놓인 샐러드 접시를 옆으로 밀어냈다.
“안됐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계를 지키지 못한 자들은 파계자로 이 섬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설마하니, 마스터께서도 정말 곧이곧대로 금욕을 지켜왔다고 허풍을 치시려는 겁니까?”
“계율을 어긴 자는 이곳에 남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말씀은 이곳에 있는 모든 수사에 대한 모독입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건 가능한 게 아닙니다. 사내들이란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 아닌걸요. 거세라도 하기 전엔. 아아, 그렇죠. 자위, 혼자 손으로 해결하는 정도는 허락해주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많은 수사님이 어찌 버티고 살겠습니까?”
알파가 얼굴이 벌게진 채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친구를 위해 시작한 일이라곤 해도 이건 아니다. 넬은 씨근대며 그 자리에서 제자를 끌어내릴 듯 잡아챘다. 왜 이럴 것을 짐작하지 못했지? 적어도 눈앞의 사내는 이런 망발을 듣고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이곳의 몽크 마스터는 각국의 수뇌부도 쉽게 접견할 수 없는 사람이다. 시오는 이마를 가볍게 찡그리더니 무미건조하게 내뱉었다.
“그것 역시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게 정말로 지켜지고 있다고 믿는 건 아니시겠죠. 안 그렇습니까?”
론이 고소했다. 웃기고 있네.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 역시 할 짓 안 할 짓 뒤로는 다 하고 다니는데.
“믿는지 안 믿는지 상관없습니다.”
“당신도 그 규칙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아, 구라치면 안 된다는 규칙도 있는 거 같던데? 나이가 몇이신지는 몰라도, 평생 한 번도 안 해보셨다고?”
론의 얼굴에 다시 환한 웃음이 걸렸다. 시오는 그의 시선을 그대로 맞받았다. 이젠 사뭇 기 싸움이 되어버렸다. 얼굴로 다시 열기가 치밀었다. 입에 담기 싫어하는 내용만 골라서 잡고 늘어지는 게 제법 집요했다. 얼마든지 받아쳐줄 것이다.
“수련사 시절, 정식 수사로서 서원하기 전, 아마 그대 정도의 나이였을 것입니다. 정말 견딜 수 없을 지경일 때, 손으로 두세 번 욕구를 해결하기도 했습니다.”
담담한 목소리는 변함이 없지만 론은 그의 눈꺼풀이 두세 번 가볍게 떨리는 것을 알아챘다. 자신을 후려칠 듯하던 알파의 손이 그대로 멎었다. 이런, 맙소사. 존경하는 친우의 입에서 저런 말까지 나오게 하다니. 알파는 론을 향해 격렬하게 치미는 분노를 기를 쓰고 눌렀다. 하지만 대답하는 자의 목소리는 끝까지 차분했다.
“하지만 서원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계를 어긴 적이 없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대가 믿지 않는 것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의 수사들을 모욕하는 언사는 이쯤 하시면 좋겠습니다. 게다가 그대의 목적이 이곳에서 속히 나가려는 거라면, 굳이 이런 방법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던 청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학교를 정히 그만두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조용히 그만두거나 쫓겨나거나 나오는 결과는 어차피 비슷할 것입니다. 불필요한 적을 만들면서까지 일을 벌일 필요가 있습니까?”
한참 동안 눈을 크게 뜨고 있던 론은 히득히득 웃기 시작했다.
재미있군. 시오 헤이브란 사내는, 확실히 보통은 넘는 인물인 듯하다.
“누가 속히 나가는 게 목표라 했습니까? 허락만 해주시면 여기 질기게 붙어서 고명하신 가르침을 다 받아가고 싶은데 말입니다. 기왕이면 그리 현명하시다는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 싶군요.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아는 척하고 싶으셨습니까? 그런데 잘못 짚으셨습니다. 시오 헤이브, 위대하신 몽크 마스터.”
“시장하실 텐데 드십시오. 식사가 늦었습니다.”
론 역시 미소를 지운 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서로에게 한 방씩 먹이고, 먹었다. 론은 몽크 마스터라는 사내를 지켜보고 싶어졌다. 지금껏 자신이 겪었던 사람 중 시오 헤이브 같은 존재감을 가진 사람은 아직 없었다.
시오 헤이브는 표정을 정돈하고 다시 접시를 끌어당겼다.
* * *
알파는 뒤집힐 것 같은 속을 달래며 마스터의 개인 훈련실로 향했다. 최악이었다. 론이든 넬이든 내일 아침 당장 쫓아낼 참이었다. 넬도 죄다 포기한 채 일찌감치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래도 시오를 한번 만나보긴 해야겠다. 말은 안 하지만 그 인간도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시오 헤이브는 저녁 늦은 시간에 땀을 흠뻑 흘리며 운동을 하곤 했다. 그 자리에서만큼은, 그는 알파와 사심없는 친구였다. 펑펑, 퍽퍽, 펑, 무언가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살그머니 문을 열자 친구가 수사복이니 운동복이니 모조리 벗어치우고, 얼굴이 벌게진 채 샌드백에 맨손으로 주먹질을 하는 게 보였다.
“시오 헤이브? 시오. 이런 맙소사. 손, 손이! 글러브는 어쨌어!”
“알파, 리온? 알프인가?”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퍽! 샌드백이 다시 요란하게 흔들렸다. 주먹이 시뻘겋게 벗겨져 있었다.
“…괜찮나?”
주먹이 괜찮으냐고 묻는 것은 아니다. 시오는 샌드백을 움켜잡고 고개를 잠깐 틀어박은 채 숨을 골랐다.
“괜찮지 않을게, 무언가, 알파?”
“사과하러 왔어. 미안. 괜한 짓을 했어. 내일 당장 내보내도록 하겠다.”
시오 헤이브는 헐떡대면서도 무언가 중얼거렸다.
“…니.”
“시오? 뭐라고?”
“아니, 아니 아니. 론 그 녀석.”
“론 그 녀석을 뭐…….”
“장기 체류 허가서를 준비해. 내가 직접 놈을 관찰하고 맞는 교안을 짜겠다.”
알파는 멍청한 눈으로 친구의 땀에 젖은 등을 바라보았다. 시오는 주저하다가 씹어뱉었다.
“알파, 내가 정말 그리 여인같이 보이나? 혹여 그렇게 보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그럴 리가 없잖아. 이봐! 시오! 그따위 말을 아직껏 담아놓고 있었나?”
“제기랄! 그따위 말이 듣기 싫어서 이 짓을 평생 하고 있는데.”
시오는 이를 으득, 하며 샌드백을 다시 후려쳤다. 그랬다. 아주 오래전 수련사 시절의 시오 헤이브는 선이 여려 종종 질 나쁜 농담에 시달렸다. 산발이 된 보라색 머리카락이 땀으로 번질대는 등 위에서 푸르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