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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설명을 듣고 있던 몽크 마스터는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7지구에서 자연 출산으로 태어난 사관생도라 하셨습니까?”
알파는 집무실의 커다란 책상 뒤에 단정하게 앉은 보라색 머리카락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 흥미가 간 것일까? 혹은 그 학생이 지니고 있는 상징성에 관심을 가진 것일까? 붉은 머리 대수사는 선 채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습니다. 그 사실이 언짢으십니까?”
서글서글한 적갈색 눈이 살짝 벌어지다 다시 가늘어졌다. 그렇다는 뜻인지 아니라는 뜻인지. 알파는 그와 오랜 세월 친우라는 이름으로 가까이 지내왔지만, 사석에서 만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의 속내를 읽는 것은 여전히 어려웠다. 다만 그가 자신의 청을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잠자코 고개를 수그리고 서류에 무언가를 적어 넣었다. 햇빛에 조금 퇴색한 보라색 머리카락이 푸스스 앞으로 쏟아졌다. 단추를 하나 풀어놓은 깃 사이로 목덜미가 시커멓게 타서 허물이 벗겨지는 게 보였다.
“의무 노역 시간을 변경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가만히 고개를 들어 올린 사내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나타났다.
“일전에 열사 증세를 겪으셨다 들었습니다. 오후 시간은 밖에서 일하기에 맞춤한 시간이 아닙니다. 지금은 여름입니다, 몽크 마스터.”
수사들이라면 하루 세 시간 이상 의무적으로 육체노동을 하게 되어 있다. 마스터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는 답답하다 싶을 만큼 규칙을 칼같이 지켰다. 그는 오후 1시에서 4시까지, 이글대는 폭염 아래서 차를 수확했다. 누구라도 나가떨어지는 시간에, 그는 고집스럽게 모자를 눌러쓰고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 해서 들어오는 그와 가끔 마주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이 흩어지는 꼴은 여간해선 보여주지 않았다. 열사 증세를 제대로 겪으신 다음부턴 찬물만큼은 제대로 챙기십디다. 키가 자그마한 담당 의사가 투덜대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가 일하다가 쓰러진 적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된 노동은 수양과 일맥상통합니다.”
약간 쉰 듯한 목소리. 그는 길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알파는 마스터가 말을 끊어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입을 다문 채 맞은편에 앉은 사내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고집스레 다물린 입술은 언제 봐도 한결같았다. 무언가 거슬리는 느낌에 알파는 잠깐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알파는 몽크 마스터가 특별히 빼어난 미형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선이 시원하게 빠진 턱선과 서글서글한 눈, 길고 수려하게 올라선 눈썹과 반듯한 이마, 곧게 뻗어내린 콧날이 잘 어울려 전체적으로 깔끔하면서도 사내다운 인상이었다. 다만 적갈색의 홍채는 종종 이질적으로 보였고, 냉기가 노상 흘러다니는 입매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가차 없이 엄하고 정확한 자였고, 그것은 표정에 고스란히 나타났다. 시선을 잡아끄는 요소가 어쩌면 저 완고하고 서늘한 기운일지도 모르겠군. 알파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마 시간 조정 따위는 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마스터가 오랜 세월 이 지역의 통치자로 인정받는 것은 그의 행정 능력이나 그가 제시한 비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사급 이하 일반 수련사들은 그가 제시한 비전 따위는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존경받는 학자이자 지도자였으며 많은 이에게 경외의 대상이었다. 알파는 앞에 앉은 사내가 옷깃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워 올려 허물이 벗겨진 목덜미를 가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오면 한 번 보시겠습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 곁의 의자에 앉아 있던 사내는 몸을 곧게 일으키더니 서류를 내밀었다.

3공화국 통합 사관학교 교장 넬 켄티.
사관생도 론.
두 사람의 힐링 마운틴 단기체류를 허가합니다.
그랜드 몽크 마스터(Grand Monk Master), 시오 헤이브.


알파는 굳이 단기체류, 라고 못 박은 서류를 손에 들고 떨떨하게 웃었다.
“혹시 론이라는 학생이 식민행성 원주민 유전자를 갖고 있을까 신경 쓰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만나지 않겠습니다.”
몽크 마스터는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였으나, 알파는 그가 유쾌하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잠자코 고개를 수그렸다. 일단 와서 단기체류를 하게 한 다음, 다시 요청해 봐야겠군. 그 학생이 잠시 머무르는 동안 부디 마스터의 마음에 들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겠다.

* * *

백발의 사내는 조종간을 잠시 아래로 틀어 내리며 눈앞에서 미친 듯 돌아가는 계기판들을 응시했다. 이 지역에 오면 자동 제어되는 숫자들이 무의미해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모든 기기를 수동으로 조작해야 한다는 것은 경험이 많은 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시계가 좋았다. 창 아래로 너르게 초록빛이 넘실거렸다. 알파 덕분에 이곳을 방문할 수 있었던 넬 켄티 교장은 눈에 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플라잉 소서의 고도를 낮추었다.
차밭이로군. 어쩐지 이곳에 어울리는 식물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론은 입술을 다시 틀어 올렸다.
“웬 차밭이 이리 넓을까? 이걸 내다 팔기라도 하나?”
“이곳의 몽크 마스터가 차를 좋아한다 들었다. 이곳의 차는 극상품이야. 알고 있나?”
“7지구 출신한테 그런 취미가 있을 듯싶습니까? 게다가 극상품이라니. 이곳의 위대하신? 고매하신? 몽크 마스터 정도나 되어야 누릴 만한 호사 아닙니까, 교장 선생님?”
킬킬대는 제자에게 화를 낼 기력도 없었다. 교장은 플라잉 소서를 댈 만한 곳을 찾았으나 지난번에 어디에 착륙시켰는지 쉬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밭은 아마득하게 넓었다.
“어어. 선생님. 여기 여자 출입금지 지역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헤! 저기 웬 미친년이 산발하고 손을 흔들고 있는데요? 이야… 웃통까지 벗고. 그림 좋다! 그럼 그렇지. 금욕 서원은 무슨 개뿔… 여자가 있다니까요. 좀 더 가까이 가 봐요!”
론은 얼굴을 창에 붙이고 노골적으로 끼들거렸다.
“론! 남자들밖에 없는 섬이라 분명 말했다. 그리고 그 경망한 주둥이를 붙잡아두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호되게 경을 치게 될 게다.”
교장은 잠시 시선을 아래로 돌리다가 정말 누군가 아래서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산발한 미친년이라고? 이곳은 분명 남자 승려들만 있는 섬으로 알고 있다. 그럴 리가. 교장은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왜 저러고 있는 거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순간, 교장은 차밭이 갑작스레 눈앞으로 확 다가드는 느낌에 온몸을 우그렸다.
“맙소사! 론! 론! 이런 제기랄!”
수동 조작 상태에서 조종간을 내리밀던 상태였다.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속도 조절이 안 된 플라잉 소서가 그대로 차밭을 향해 내달렸다. 순간적으로 핸들을 위로 꺾었으나 랜딩을 인식한 작은 원형 비행체는 안티 G-포스 모드를 해제한 상태였다.
와자작 콰직. 쿠르릉.
플라잉 소서는 차밭 한 이랑을 그대로 뭉그러뜨리며 땅에 들이박혔다.
“워……. 멋진 착륙법이네요. 교본 몇 장입니까, 교장 선생님?”
조종석에 머리를 박아 정신이 빠진 스승에게 론은 휘적휘적 고개를 흔들며 이죽거렸다. 손을 흔들던 사람의 팔에서 커다란 바구니가 툭 떨어졌다.

* * *

어쩌면 알파의 말을 귀담아듣는 게 좋았을지 모르겠다. 차의 두 번째 수확기는 6월에 시작한다. 산 중턱이긴 하지만 6월 한낮의 열기는 가히 살인적이다. 나온 지 30분도 되지 않아 땀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파계승에 대한 수사 대표 회의가 길어지는 통에 서두르다 모자를 깜박한 것은 실수, 작업복이 도착하지 않은 것은 세탁을 담당한 수련사의 실수, 더위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윗옷을 벗어 샘 곁의 나뭇가지에 걸어둔 것도 아마 실수겠다. 소매가 긴 승려복이 멀리 나뭇가지에서 펄렁대며 춤추는 꼴을 보고 그는 입술 양 끝을 꾹 눌렀다. 피부가 오그라드는 것처럼 따갑다. 차라리 입고 있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가벼운 화상을 입을지도 모르겠다. 시오는 짜증이 묻은 손길로 어깨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잡아 넘겼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뒤로 가서 흩어지나 싶더니 이젠 등짝에 들러붙는다. 대체 머리끈을 왜 탁자 위에 얹어놓고 안 챙긴 거지. 수건이라도 챙겨왔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투덜대는 대신 가만히 입술을 사려물고, 다시 얼굴에 들러붙어 근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대체 왜 수사들의 머리를 깎지 못하게 하는 걸까?
서원을 마친 정식 수사들은 머리를 삭발해야 하며, 그 이후론 평생 머리카락에 손을 댈 수 없다. 왜 그런 규율이 생겼는지는 몽크 마스터인 자신도 모른다. 다만 규칙이란, 시간이 지나면 전통이란 이름이 되어 깨뜨리기 어려워지며, 시간이 더 흐르면 신성화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런 유래를 알 수 없는 규율 따위, 사실은 장난스러운 누군가의 변덕으로 시작되었을 거라고 그는 종종 생각했다.
길고 큼직한 손가락이 빠르게 차나무의 잎새를 훑었다. 바구니는 쉽게 차지 않았다. 목이 졸아붙자 여린 찻잎 몇 장을 입에 넣고 가만가만 씹었다. 오늘따라 노역 시간이 유난히 길다. 그는 결국 잠시 쭈그려 앉아 차나무 그늘에 고개를 박았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물까지 뜨끈뜨끈한 오후였다. 먼발치로 보이는 힐링 마운틴 시티의 메인 센터 건물이 열기로 인해 물결치듯 일렁였다.
이상하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외부 지역에서 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플라잉 소서가 차밭으로 휘청대며 날아오고 있었다. 이곳은 착륙 금지 지역인데다, 작업을 맡은 자들이 아니면 출입조차 제한되는 곳이다. 시오는 바구니를 든 채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소서는 금세 코앞으로 들이닥쳤다.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착륙을 불허합니다. 고도를 높이십시오.”
콰자작, 쿠르릉… 콰작.
…쿵.
플라잉 소서가 차밭 한 이랑을 그대로 뭉개며 눈앞에 불시착했을 때, 시오는 바구니를 툭 떨어뜨렸다. 푸스스 흩어진 머리카락이 착륙할 때 몰려든 바람에 볼썽사납게 뒤엉켰다.
뒷좌석 문이 덜컹대며 열리더니 은빛 머리카락을 지닌 키가 큰 청년이 껑충 뛰어내렸다. 역광으로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선명하고 수려한 윤곽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훤칠하군. 어찌보면 간신히 어린 물을 벗은 녀석 같기도 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시오를 바라볼 때, 그 얼굴로 빛이 쏟아졌다. 햇빛을 받아 말갛게 된 은색의 폭포가 눈부셨다. 보라색 머리카락의 사내는 잠시 손을 펴 눈썹에 대고 이마를 찡그렸다. 뛰어내린 제복 차림의 청년은 앞문을 열어줄 생각도 않고 시오를 건너다보며 입을 틀어 올리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어. 교장 선생님. 산발한 미친년이 아니었네요? 교장 선생님 말마따나 남자네요.”
고개를 돌린 론은 시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아, 일꾼인가? 미안미안. 그나저나 김샜는걸. 위에서 보니 젖이 커 보여서 딱 여자인 줄 알았거든.”
시오는 머리가 하얗게 되는 느낌에 멀거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말인지 퍼뜩 들어오지 않았다.
…뭐…가 커 보인다고?
화닥,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앞좌석에서 내린 범 같은 사내가 주먹으로 앳된 제자의 뺨을 후려치는 장면이 이어졌다. 힐링 마운틴의 지역 보안센터에서 외부 플라잉 소서의 불시착을 알아차렸는지 요란하게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저주저 실토하는 넬을 보며 알파는 입을 딱 벌렸다. 차밭을 뭉그러뜨린 외부 비행체가 넬의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망했군. 시오는 차를 워낙 좋아했고, 차밭도 꽤나 아끼는 눈치였다. 잠시 후 회색 수련사 복장을 한 소년이 달려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알파에게 소곤거렸다.
“몽크 마스터께서 알파 리온 대수사님과 두 분 손님께, 같이 식사라도 하시면 어떻겠냐고 하셨습니다.”
알파는 지근대는 머리를 흔들었다. 만나보지 않겠다던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시오의 의중이 무얼까? 그는 이렇게 쉽게 변덕을 부리는 자가 아니다. 하지만 거절할 이유도 없다. 소년은 그들을 안내하겠다며 조르르 앞장섰다.
넬의 곁에 선 론이라는 녀석은 나이보다는 다소 어려 보였지만, 훤칠하고 눈에 확 띌 만큼 눈부셨다. 선명한 붉은 홍채는 이질적이고 강렬했다. 나직한 그의 목소리는 얼음을 긁는 소리처럼 차가웠다. 알파는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주색 수사복은, 특별한 직급을 나타내는 건가요?”
론의 눈은 여전히 가느스름한 채였으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묻어 있었다. 알파 대신 넬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손가락을 입에 갖다 붙였다.

* * *

“왜 넌 만날 때마다 한결같이 자주색 옷이지, 알파? 무슨 감각이 그래? 아니면 힐링 마운틴에 돈이 없나?”
오래전 알파에게 물었을 때 그는 홍소를 터뜨렸다. 알파는 친구에게 가끔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여기 사제들은 복식의 색깔도 정해져 있어. 자주색은 고위 행정 사제 모임인 7인 위원회라는 뜻이야. 붉은색은 각 지역 수사 대표모임인 백인회 멤버라는 뜻이고. 수사 후보생, 그러니까 수련사들은 검은색부터 시작하지. 그다음은 회색, 갈색. 서원한 정식 수사들은 흰색부터 시작하지. 그다음 청색, 올리브색. 베이지색, 붉은색, 자주색. 그렇게 올라가.”
“뭐가 그렇게 복잡해? 네 위로도 다른 색이 있어?”
“딱 한 명만 입을 수 있는 보라색이 있지.”
“그건 뭐야? 누군데?”
“그랜드 몽크 마스터.”
알파는 그것까지만 말한 후 실긋 웃으며 말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