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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제국 1권
1화
1. 론, 시오 헤이브, 그리고 치유의 산
위도 제로. 먼발치로 보이던 섬의 해안선과 우뚝 솟은 해발 6,500미터 급 산봉우리들의 윤곽이 점차 뚜렷해졌다. 중턱부터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산은 장관이라 할 만큼 위압적이었다. 만년설. 한 번도 녹아 강으로 바다로 흘러보지 못한 흰 빛은 폭염을 상쇄시킬 정도로 싸늘했다. 론은 느른하게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혀를 찼다. 쯧. 마음에 안 들어. 짧고 날카로운 소리가 잠시 론의 입천장을 울리다 사라졌다.
“정떨어지는 꼬라지하곤. 섬이나 거기 사는 종자들이나 어지간히 살벌하시네.”
영구 중립 지대, 힐링 마운틴 시티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론은 자신을 가르치는 사관학교 교수 중에서도 이곳 출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과의 교류에 조심스러웠고 학생이든 동료 교수들이든 언론이든 애써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항상 이방인이었고. 고립된 섬처럼 멀찍이 떠돌았다.
그들은 사제(Monk) 출신이었다. 물론 외부 지역에 정주하며 활동하고 있다는 것은 파계 후 섬에서 추방당했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힐링 마운틴에 대해 철저하게 함구하는 것은 그런 이유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힐링 마운틴을 벗어난 후로도 여전히 섬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본질적으로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 힐링 마운틴은 오래전 1공화국에서 독립한 이래 정복된 역사가 없는 오만한 지역이었고, 그곳에 속한 이들의 성정 역시 그러한 듯했다.
론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불쾌했다. 슬럼가 출신인 그는 고고한 척하는 종자들을 보면 구역질이 올라왔다. 매섭게 솟아오른 산의 능선을 훑으며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눈꼬리가 길고 가늘어졌다. 붉은빛이 도는 홍채가 눈꺼풀 그늘로 반쯤 모습을 숨겼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명심해라, 론.”
3공화국 통합 사관학교의 교장은 뒷좌석에 앉은 제자에게 툭, 말을 내뱉었다. 론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선이 가는 입술 끝이 사르르 말려들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속에서 이글대는 대로 ‘속 편하게 자르면 되지, 뭘 기회씩이나.’ 하는 비틀린 말을 하는 것은 조금 참기로 했다. 예의라기보다 말을 섞다가 번잡하게 감정이 격해지는 게 귀찮아서였다.
이미 문제 학생으로 찍힐 만큼 찍혔는데 뭘 그리 애를 쓰시나. 제발 내키는 대로 얼른 잘라주시면 안 될까요? 경애하는 교장 선생님?
조종간 앞에 앉은 교장은 백미러를 통해 뒤에 있는 제자를 바라보며 울럭울럭하는 속을 다스렸다. 일단 무사히 끌고만 가자.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남은 희망이라곤 여기밖에 없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낯짝만 멀끔하고 유들대는 말종 제자를 개과천선시켜야 하는 것이다.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울 속에서는 열아홉 치기 어린 제자가 입술을 가늘게 하며 제법 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속이 내려앉는 것 같다. 저렇게 사람을 호리는 웃음으로 대체 올해 한 학기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이제는 생각조차 하기 싫다. 왜 그랬는지 변명 한 자락 없어 교장은 시시때때로 이를 갈았다.
생각 같아서야 진작 퇴학시킬 일이었지만.
‘교장 선생님! 론 선배는 잘못이 없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다니까요! 제가, 제가 먼저 해 보자고 했어요!’
‘교장 선생님!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발 선배를 퇴학시키지 마세요! 제가 실수한 거예요! 제가 아직 피임 시술 안 받은 거 이야기를 안 한 거예요! 제가 먼저 자자고 했어요. 제가 먼저 꼬였어요! 정말이에요!’
그 말이 사실일 리가 없었다. 노(老)교장은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는 없앨게요! 당장 없앨게요! 제, 제가 학교를 그만둘게요! 교장 선생님!’
입학한 지 한 학기도 되지 않은 앳된 여생도는 열일곱 살이었다. 3공화국 내에서 명망 있는 집안의 영애였다. 론은 흐느끼는 그녀 옆에서 지금처럼 웃었다. 동의하에 즐긴 건데 왜 나는 가해자고 너는 피해자가 되는 거야? 집안의 힘인가? 나야말로 억울해.
론! 네 이놈! 넬 켄티가 맑게 웃는 제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던 순간 때리지 마세요! 하는 울부짖음이 엎드린 여생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론은 반성의 기미도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여생도는 멍하니 초점이 풀린 눈으로 론을 응시하다가 그대로 실신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후로도, 그녀는 선처의 호소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론에 대한 정식 징계 소문이 나돌면서 몇 명의 피해자들이 더 나타났으나, 그녀들 역시 한결같이 론의 잘못이 아니라고 읍소했다.
도무지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 저 반들한 낯짝에 홀려서 이 사단이지. 하지만 한심하다고 마냥 혀만 차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선처를 호소한다 해서 그냥 학교에 내버려두기에는 상황이 심각했다.
그러나 교칙대로 냉큼 퇴교시키기에 론의 경우 여러 문제가 얽혀 있어 곤란했다. 그는 7지구 출신이었던 것이다.
“출신 성분이 그 모양이니 결국…….”
한때 기대했던 바가 컸건만. 교장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론은 3공화국 7지구, 범죄조직과 폭력배가 장악하고 있는 무법 지역이자 대표적인 슬럼가에서, 최초로 통합 사관학교에 입학한 학생이었다. 그것도 차석 입학생이었다. 유전자 맵 서류만 제대로 충족되었다면―유전자 정보가 특별히 우성 계열이 아니라도―수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슬럼가에서, 아버지도 몰라 패밀리 네임조차 얻지 못한 그에게, 게다가 자연 출산이라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태어난 녀석에게 8대 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전자 맵 따위를 기대할 순 없었다. 7지구에서 유전자 증명 없이 떠도는 종자들의 대부분은 식민행성 출신의 불법이주자거나 그 후손들이었다. 식민행성 출신들은 잠재적 범죄자,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되었다. 처음에는 그곳이 사형수 혹은 종신범들의 유배지였다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현재 그곳 출신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근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행성 원주민들에 대한 지구 본성 사람들의 거부감이었다. 각 식민행성에는 노역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형 생물체 ‘원주민’들이 있었고, 그들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지구에 들어오면 홍채 인식 같은 신원 조회 시스템이 미흡한 불법 지구나 슬럼가에 둥지를 틀었고, 그곳에서 아이들을 낳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아갔다.
혼혈은 부모 중 한 명이 인간이라는 의미였다. 따라서 원주민과는 달리 형편없는 급수이긴 해도 유전자 맵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슬럼가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혼혈들은 유전자 맵 따위를 남기는 것보다 몰래 자연 출산을 해서 후손을 남기는 것을 선호했다. 유전자 맵의 혜택을 보지 못할 거라면, 백지상태로 시작하게 하는 편이 나았으니까. 하지만 7지구와 인근 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백지로 시작하건 범죄자 맵으로 시작하건 한결같이 비슷한 취급을 받고,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각 공화국에서도 치외 법권의 범죄 지대가 되어가는 지역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으나 딱히 해결 방안은 없었다.
7지구에서 론이라는 학생의 존재는 그래서 특별했다.
‘아, 론! 그 맨들맨들하고 반반하던 녀석? 물건이여!’
‘알지, 여기서 그놈 모르면 간첩이게? 뉜지는 모르것지만, 애비에미가 고거 남겨놓고 뒈지려면 꽤나 아까웠을 겨. 어딜 가든, 뭘 하든 월매나 사람을 잘 끌어모았는지!’
론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어린 시절을 그렇게 회상했다. 얼굴만 아는 정도던 사람들은 그저 눈에 확 뜨일 만큼 선이 곱고 잘 빠진 놈이라며 호감을 보였다. 눈썰미가 조금 있다 하는 이들은 먼발치에서 그를 눈여겨보며, 머리도 비상하고 친구들을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아는 놈이라고 웃어 보였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 의식도 없이 그가 원하는 일을 해주고 종종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릴 때부터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용해 주변 사람들을 동원했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내곤 했다. 7지구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대체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주 가까이서 그를 관찰할 수 있었던 이들은 약간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론을 한 가지 일을 시작하면 결과를 내기 위해 잔혹할 정도로 밀어붙이는,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가진 소년으로 기억했다. 어린 게 살벌하다, 끈덕지다, 무자비하다, 저거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겠다, 그네들은 가끔 소년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재빠른 상황 판단력과 교활에 가까운 임기응변을 유용하게 써먹고자, 그에게 뒷거래를 맡기려 한 장물아비나 마약 상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아직 어렸음에도 그런 제의를 영악하게, 때로는 순진하고 딱한 얼굴로 맺거나 끊었다.
지역의 중간 보스들은 그를 어깨에 힘이나 조금 주며 굴러다니는 쓰레기처럼 취급할 수 없었다. 생각이 깊은 자들은 어느덧 소년을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폐 몇 장이나 골목을 휘젓고 다니는 시시한 무리의 대장 짓거리 따위를 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지역을 암묵적으로 다스리던 나이 많은 보스는 소년을 눈여겨본 후, 짧게 평했다.
“속에 든 얼음을 숨길 줄 아니 멋진 놈이군. 뱀처럼 교활하지만 저 나이에 그걸 감출 줄 안단 말이지. 좋아, 좋아.”
무슈 벵상 드부아라 불리는 사내는 시가를 입에 물고 눈을 가늘게 떴다. 몹시 탐이 나기는 했으나, 소년이 누군가의 아래에 깃들 사람이 아니란 것을 이내 파악한 그는 잠시 웃어 보였다. 대신 그는 소년이 자신의 길을 향해 걸음을 내디딜 때, 작은 도움이 되어주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속에 든 얼음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는 소년 본인도 알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의 부족, 혹은 타인의 감정에 애써 동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오만함에서 나온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고 계산하는 능력은 발군이었다. 소년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필요하다면 영원히 본성을 숨기고, 성실하고 인정 많은 모습으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걷기로 결정한 길은, 인간적 덕성이라 불리는 것들이 덧없이 사라지는 길이었다.
* * *
은발에 붉은 홍채라는 다소 눈에 띄는 외양을 지닌 소년은 일찍부터 7지구의 또래들과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제대로 된 교육 과정을 스스로 찾아 밟기 시작한 것이다. 7지구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보호자가 없어 입학이 한 해 늦기는 했지만 그는 5지구에 있는 제대로 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이내 모든 교사의 이목을 끌어당겼다. 그가 정식으로 중등 과정을 마치고 통합 사관학교로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굳혔을 때, 7지구의 다른 이들은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는 론이었다. 7지구에서 가능할 것 같지 않던 모든 일을 해낸 소년이었다. 그의 이름이 붙어 있으면 무엇이든 불가능한 게 없어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건 기대는 대단했다. 적어도 론이라면, 이곳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을 대단한 인물이 될 거라 믿었다. 그를 가르쳤던 교사들은 물론이고, 정부에서 파견 나온 관리들까지 아낌없이 추천서를 써주었다.
사관학교 입학 당시 제출한 그의 중등학교 과정에 대한 평가서는 놀라웠다. 넬 켄티 교장은 그에 대한 평가에서 한 낱의 허점도 찾을 수 없었다. 전체 수석이라는 성적에, 대인 관계도 원만했으며 리더로서의 자질은 최고 레벨이라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성적이 좋다 하여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를 눈여겨본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교장을 놀라게 한 것은 벵상 드부아라는 사내의 추천서였다. 벵상 드부아는 교장도 교사도 고급 공무원도 아니었지만, 넬 켄티는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암흑계를 주름잡고 있는 7지구의 노회한 보스. 그런 사람의 추천서라고? 세상 두려운 것 없던 사내의 등짝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이 소년은 대체 누구지?
론의 예상대로 사관학교 입학은 무난하게 통과되었다. 3공화국 통합 사관학교라면 정·군계로 진입하는 첫걸음이 될 터였다. 중립국인 힐링 마운틴의 수련사 아카데미 학사 과정을 제외한다면, 명실공히 전 공화국을 통틀어 최고의 엘리트 양성기관이기도 했다. 다만, 예상에서 어긋난 게 있다면 유전자 맵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수석 입학의 자리를 놓친 것이었다. 아무도 그의 수석 입학을 의심하지 않았다. 론은 밀려난 이유를 알고도 주변인들에게 발설하지 않았다. 사실 수석이든 차석이든 대단한 일이었다. 그게 어디야! 7지구는 한동안 들뜬 분위기였다.
정부는 신문 가십난이나 장식할 만한 작은 뉴스에서 호재를 발견했다. 출구가 막혀 있다고 사회 불만 세력이 되어가는 슬럼가의 바닥 출신 종자들에게 입지전적인 인물이라 들이댈 놈이 생긴 것이다. 인간쓰레기들만 득실댄다 여겨지는 곳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할 만한 인재가 나온 것 아닌가.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이 사회에서 신분 상승의 꿈을 꿀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기에, 론이라는 사관학교 입학생은 좋은 소재였다. 언론에선 한참 동안 그 일을 떠들어댔다. 적어도 7지구, 혹은 각 지역 공화국의 슬럼가, 범죄 지역에서 그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진 조작된 아이콘이었다.
넬 켄티의 입에서 속이 뒤집히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얌전하게 1학년 때처럼만 지내 주다가 졸업하면 오죽 좋으냐 말이다. 왜 갑자기 그렇게 곁길로 흐르기 시작했는지 이유라도 알면 원이 없겠다. 그런 학생을 퇴학시킨다는 것이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여생도들의 읍소도 그렇지만 교장 역시 그를 퇴학시키는 일만큼은 필사적으로 피하고 싶었다.
이 골치 아픈 제자에 대해, 공무로 오랜만에 방문한 친구에게 푸념을 했던 게 그래도 다행이었다. 단호하긴 하지만 속정이 깊은 친우와는 사관학교를 잠시 같이 다닌 인연이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오랜 친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빙긋 웃으며 제의했다. 그 말썽쟁이 녀석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데려와 당분간 수사 후보생들과 함께 훈련을 받게 하면 어떻겠냐고.
“알까 모르겠지만, 수도승들의 기본 규율 훈련은 꽤 엄하거든. 사관생도들보다 떨어질 것 같지 않은데. 수사 후보생들 학습량이야, 사관생도의 몇 곱은 될 거고. 적어도 말썽 피울 짬 같은 건 없을 터인데, 어떨까?”
알파 리온이라 불리는 그는 눈치가 빠르고 오지랖도 넓은 정보통이었다. 그는 넬 켄티가 학교에 파란을 불러일으킨 제자를 함부로 퇴학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 했더니. 작년에 한동안 신문 지상을 장식했던 녀석 아닌가. 알파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론’이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무단 외박에 사창가 출입, 동료 생도들에 대한 폭행, 교내에서 폭력조직 결성. 게다가 그 녀석들을 몰고 슬럼가에서 패싸움을 벌이다 헌병에게 붙잡혀 오기도 했어. 1학년 때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2학년 때… 올봄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거든.”
“으흠?”
알파 대수사는 여전히 입매를 올린 채 웃어 보였다.
“치명적인 건 이번 학기 초에 저지른 짓이야. 교내 여생도들에게 성폭행을 가해서 그중 한 명에게 임신까지 시켰어. 아직 정식 성인식을 치르기 전……. 그러니까, 의무적으로 받게 되어 있는 반영구피임시술을 앞두고 있던 신입 여생도들이었어. 좋은 집 아가씨들이 자연출산을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일부러 그랬다니 죄질이 몹시 좋지 않지. 대체 짐승도 아니고, 유전자를 세탁해야 하는 F급도 아닌, 좋은 집안 영애들에게 자연출산이 뭐야. 다만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선처를 호소했기에 구금과 퇴학 사태는 막을 수 있었던 거고.”
마주 앉은 수사의 눈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선처를 호소해? 슬쩍 웃음기가 걷혔다. 넬 켄티는 백발 사이로 손가락을 푹 파묻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철없는 여생도들이 얼굴에 홀려서 몸 주고 마음 주고 인생들을 말아먹고도 여전히 헤어 나오질 못해. 아직도 질질대고 쫓아다니고 있더라니까. 놈이 키도 크고 잘 생겼거든. 여자들 정신 홀랑 빼놓게 생겼다고.”
웃으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알파는 파핫,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작년에 메인 언론에서는 론의 이미지를 정부의 입맛에 맞는 방향으로 밀었지만, 황색 언론에서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를 다루었다. 싸구려 언론이 주로 다룬 것은 그의 눈부신 외양이었다. 주간지에 찍혀 나온 많은 사진에서 론은 키가 몹시 크고 훤칠한 배우의 모습이었다. 균형이 잘 잡힌 몸에 적당히 근육이 짜인 제복 차림의 신입 생도는 3공화국 최고의 인텔리인 통합 사관학교 차석 입학생이었다. 짤막한 인터뷰를 위해 클로즈업되어 찍힌 사진에서, 그는 뚜렷한 이목과 수려한 선을 가졌다. 얼굴은 약간 긴 편이었지만 갸름하고 단아했다. 얄팍하니 냉소적으로 다물린 입술도 꼬리를 말아 올리고 싱긋 웃을 때면 고운 선이 나타나 냉기를 가려 주었다.
사진에서 잡아낼 수 없었던 것은 가늘고 길게 올라간 눈꼬리에 깃든 매서운 총기와, 눈동자에 서린 남을 위압할 만한 강한 빛이었다. 한동안 나어린 계집들은 싸구려 잡지나 정보 검색에서 그의 사진과 정보를 오려내고 여기저기 담아 날랐다.
교장은 작년과 올해, 얼마나 많은 여생도가 론의 눈에 띄기 위해 강의실 주변을 오가고, 주말 외출 시간에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기억했다. 축제 때 론이 맡았던 작은 행사는 자리를 먼저 잡고 앉으려는 학생들로 북새통이 되었다. 남자 생도들, 그의 동기들은 그들대로 론의 눈에 들기 위해 가끔 무모하다 싶은 짓거리도 종종 했다. 그들은 가끔 교관이나 교수의 말보다 론의 말을 더 우선시했다. 하지만 그때는 론의 품행이 나무랄 데 없었고, 그 영향력을 가지고도 아무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교장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었다.
“왜 그렇게 변했는지는 알아?”
“아니. 이유라도 알면 소원이 없겠어.”
목구멍에서 부레 끓는 소리가 기어 나왔다. 알파는 마주 앉은 딱한 친구를 보며 웃는 표정을 지웠다. 얼마나 골치가 아팠으면 저렇게 죽는소리를 할까. 넬이라는 친구는 이렇게 함부로 앓는 소리를 하는 놈이 아니다. 생각이 정리된 후에, 붉은 머리의 수사는 편안하게 웃어 보였다.
“그곳엔 남자 수도승들밖에 없으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만약 몽크 마스터께서 허락하신다면 징계 대신 힐링 마운틴에서 학사 공통과목을 이수하게 하는 조건으로 머무르게 하면 어떨까, 넬?”
교장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생각 같아선 눈앞에 있는 친구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