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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그대에게 바칩니다 (2화)
<내겐 그저 귀한 시간일 뿐> (2)
하쿤은 얼마 동안 잤는지 모를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못이 박혀 일어났을 때보단 고통이 덜했지만 그래도 천하의 하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는 되었다.
“여긴?”
하쿤은 두어 번 봤던 독방이 아닌 곳을 한동안 멍하니 훑어보았다.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 같은 집으로 자신이 왜 온 것일까?
하쿤은 거동하기 힘든 몸뚱이를 힘겹게 일으켜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채찍소리에 머리를 굴려 이곳이 어떤 곳일까 유추해 봤다.
“여기는……, 강제노역을 시키는 곳인가?”
힘겹게 흙과 돌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뼈밖에 남지 않은 노예들이 하쿤의 눈에 그림처럼 담겼다.
“나는 노예로 이곳에 버려진 것일까?”
하쿤은 절망했다.
자신의 나라가 망하는 순간도, 자신의 양물이 대못에 찔려 다신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때도 이렇게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그는……, 사아르는 자신에게 이처럼 흥미가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런 노역장으로 자신을 보내 버린 것일까?
사아르가 자신에게 일말의 흥미도 보이지 않았다는 절망스런 상황이 아무리 상처 내려 해도 끄떡없었던 하쿤의 심장에 예리한 칼날이 되어 박혀 버렸다.
참을 만하던 양물의 고통도 물밀듯 밀려오는 듯 하쿤의 굵직한 다리가 힘을 잃고 주르륵 내려앉아 버리고 만다.
“서둘러라!! 우리의 황제, 사아르 님이 머물 궁전이다!!”
“사아르가 머물 궁전……?”
노예들을 재촉하는 목소리에 절망으로 가득 찼던 하쿤의 눈이 순간 힘을 되찾았다.
“이, 이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의 상체보다 큰 대리석을 힘겹게 들고 가는 하쿤의 주위를 안타까운 듯 뱅뱅 도는 관리인이 결국 참지 못하고 어서 대리석을 내려놓으라 성화다.
하쿤의 양물에선 상처가 덧났는지 피가 흥건하게 타고 흐르는데도 하쿤은 대리석 옮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쿤을 강제 노동력으로 쓰라는 전갈도 없었을 뿐더러 치료해 놓으라던 상처까지 덧났으니 관리인의 얼굴에 땀이 흥건히 흘러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개의치 마십시오.”
힘겨운 하쿤의 말이 겨우 소리화되어 관리인에게 전달되었다.
그 순간 촤락! 소리가 하쿤과 관리인의 대화를 중단시켰다.
“악!! 누구냐?!”
누군가가 휘두른 채찍이 관리인의 등짝을 매섭게 후려쳤다. 그 사실에 화가 난 관리인이 채찍을 내리친 누군가를 매섭게 노려봤다.
“나다.”
“허억!! 황제 폐하!”
죄송하다는 말도 내뱉지 못한 관리인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사아르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사아르의 칠흑 같은 검은 눈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하쿤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쿤은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는 사아르의 눈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는 듯해 계속 눈에 담았으면 하는 사아르에게서 눈을 돌려 다시 발을 떼었다.
하쿤이 등을 돌리자마자 들리는 촤락!거리는 채찍질 소리에 하쿤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읏!!”
또다시 들려오는 관리인의 아픔을 삼키는 소리.
하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리석을 내려놓고 사아르와 마주 섰다.
하쿤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싫었는지 사아르가 하쿤의 다리를 매섭게 걷어차 무릎을 꿇렸다.
“누가 내 궁전에 손을 대라 했던가?”
하쿤은 사아르의 말에 심장이 지끈거리는 고통을 맛보았다.
하쿤은 사아르를 만나지 못하는 허전한 마음을 사아르가 지낼 궁전을 만들며 위로를 삼으려 했었다.
그런데 이젠 그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럼 저는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답답한 마음에 사아르에게 묻지만 사아르는 시큰둥하게 하쿤의 아랫도리를 바라볼 뿐이다.
“피가 아직도 나는군.”
하쿤은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서이기도 했지만 그 다음 사아르의 행동이 하쿤의 말문을 막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스륵하는 서늘한 소리가 하쿤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생각할 즘이었다.
푹!
“악!”
사아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엎드려 떨고 있던 관리인의 심장을 칼로 도려내 버렸다.
터져 버린 심장 사이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와 사아르의 금발 머리를 붉게 만들었다.
“……오늘은 갑옷을 입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말을 듣지 않은 탓에 죽은 관리인이 안타깝기는 하나 지금 하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피를 뒤집어쓴 사아르의 금발 머리와 금색 수를 놓은 사아르의 사복이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사아르의 옷 위에 묻은 피들을 닦아 내는 하쿤의 손길이 무척이나 부드럽기만 하다.
“가지, 하쿤.”
하쿤은 사아르의 말에 한 줄기 빛을 얻은 사람처럼 얼굴에 환한 빛이 서렸다.
+
무슨 생각일까?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슬쩍 미소를 보인다.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사아르는 하쿤에 대한 생각을 하며 창가를 서성였다.
여인네들의 입방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하쿤이 예전부터 맘에 들지 않았던 사아르지만 하쿤을 만나고 난 사아르는 더더욱 하쿤이 싫어졌다.
녹빛 눈에 녹빛 머리, 자신은 자상하다!를 온몸으로 외치고 다닐 법한 외모에 곧은 정신과 몸가짐은 자신을 더 분노케 했다.
“나보다 완벽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반드시 그를 처참하게 밟아 버리고 말테다.”
하쿤을 향한 분노로 사아르의 칠흑 같은 눈이 더욱 짙어진다.
“저……, 황제 폐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사아르가 무심한 눈길로 소리를 낸 자를 바라봤다.
“히익!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슬쩍 봤을 뿐인데 죽을죄를 지었다며 자신의 앞에서 벌벌 기는 수발드는 계집을 보니 울컥 부아가 치밀어 오른 사아르가 곁에 있던 칼을 빼내어 들었다.
“악!! 제발! 폐하, 목숨만은 살려 주시어요!”
무릎을 꿇고 작은 손을 마주 대며 때가 나올 정도로 싹싹 비는 계집의 행동에 사아르의 금빛 눈썹이 꼼틀거린다.
“난……, 시끄러운 것은 질색이다.”
사아르의 검은 눈이 일렁인다고 생각한 순간! 바람을 가르며 내려쳐지는 검날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 하고 빛이 났다.
이제 계집의 목에 닿아야 할 칼인데 누군가에게 팔이 잡혀 계집에게 미처 당도하지 못했다.
“누구냐!”
누군가가 사아르의 팔을 턱 하고 잡아채어서는 놓아 주지 않자 분노에 휩싸인 사아르가 힘을 주어 그 손길을 뿌리치려 했다.
‘움직여지지 않아…….’
힘에서 밀려 당황한 사아르는 최대한 몸에 힘을 주어 확!하고 비틀었다.
‘!’
분명……, 자신의 힘으로 풀려난 것이 아니었다.
온 힘을 주어 몸을 비틀어도 풀려나지 않던 손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몸이 반동했을 찰라, 그 누군가가 사아르의 몸을 놓았던 것이다.
‘나를 힘으로 누를 자가 누구지?’
사아르는 당황한 나머지 뒤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가 튑니다. 갑옷을 입지 않았을 때는 다른 이의 손을 쓰십시오.”
낮게 깔린 누군가의 은은한 목소리가 사아르의 등골을 오싹하게 떨리게 한다.
‘하……쿤인가?’
사아르가 휙 몸을 돌려 자신이 예상했던 인물 하쿤을 찾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스르륵 올라가는 눈높이에 사아르의 인상이 살짝 찡그려졌다.
사내답고 매너 있고 거기다 힘 또한 좋다.
“감히! 누구 몸에 손을 대는 것인가!”
촤악!!
하쿤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아르가 한 걸음 물러나 하쿤의 상체에 깊고 가는 상처를 냈다.
계집을 죽여 버리려 했던 칼날이 하쿤에게로 향한 것이다.
촤악!
칼에 살이 베어지는 소리와 같은, 피가 내뿜어지는 소리가 자극적이었다.
시중을 드는 계집은 더 이상 울지도, 소리치지도 못할 정도로 놀라 눈만 크게 뜰 뿐이다.
하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며 사아르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무서움을 알았을 것이다.
피로 인해 하쿤의 상체를 가려 주던 천이 촉촉이 젖어 들어가는 것을 본 사아르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죽지도, 그렇다고 그냥 놔두어선 치료가 되지 않을 정도의 깊이로 꽤 적당하게 베었다고 생각할 즘이었다.
자신보다 조금 큰 손을 쑥~ 뻗쳐 오는 하쿤의 손길에 ‘허, 이놈 봐라? 이제야 반항할 맘이 생긴 건가?’하고 생각하며 하쿤이 칼에 손을 댈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였다. 칼에 손을 댄다면 그때 손목을 잘라 버려야지 하고 생각하던 사아르였다.
“피가 튀었습니다. 갑옷을 입지 않으셨을 때는 부디 다른 사람을 시키십시오.”
생각지도 못한 하쿤의 반응에 사아르의 입이 바싹하고 마르는 듯했다.
눈앞에 서 있는 하쿤이라는 사내가 꽤나 자신의 골머리를 썩게 할지도 모르겠다는 좋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
하쿤은 아까부터 자신과 거리를 두고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아르를 대놓고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지 하쿤은 지금 당장 출혈로 인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핏방울 소리는 어느새 사아르의 집무실 바닥에 작은 핏빛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많은 시간이 흘러 하쿤의 상처 중 일부는 이미 검게 변해 핏덩어리들이 굳어 있었지만 속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막아 내지는 못하는 듯 똑! 똑! 똑! 하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끄럽다.”
그 핏방울 소리가 귀에 거슬리는지 사아르의 시선이 하쿤에게 당도한다.
짜증스럽고 꼴도 보기 싫다는 눈빛이지만 하쿤은 사아르가 자신을 바라봐 준다는 사실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하쿤은 드디어 자신이 미친 거라 생각하며 서 있던 몸을 스르륵 하고 주저앉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느 정도 아물어 가던 상체의 상처가 무릎을 꿇을 때의 구부정한 자세 때문에 투툭 하고 다시 찢어져 피가 줄줄 새어 나와 좀 위험할 정도로 핏물이 하쿤의 옷을 검게 물들였다.
사아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더러운 것을 본 듯. 비릿한 피의 향이 역겨운 듯.
하지만 그럼에도 자리를 떠날 수 없는 하쿤이었다.
사아르의 명도 없었고, 사아르의 앞에서 자신이 먼저 눈을 떼기 싫기도 해서였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똑똑거리는 시끄러운 소리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하쿤의 시야가 어지러이 흔들렸다.
과다 출혈로 인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토악질이 나올 듯한 속의 울렁거림에 못 이겨 하쿤이 풀썩하고 쓰러져 버렸다.
어지러이 일그러지는 시야 속에서조차 사아르의 모습을 놓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하쿤은 사아르를 찾았다.
하쿤은 놀란 듯 자신에게 달려오는 사아르의 모습에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꿈을 꿀 수 있다면 그대를 언제까지라도 바라볼 것이야.”
꿈속의 사아르를 향해 손을 뻗어 차가울 듯한 얼굴을 만진 하쿤은 의외로 따뜻한 그의 온기에 또 슬쩍 웃어 보였다.
‘그대도……, 따뜻한 구석이 있구려.’
사아르는 피비린내로 인해 속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에 인상을 팍! 썼다.
자신의 얼굴을 쓸어 보는 하쿤의 얼굴은 너무나 평온해 그의 상체를 칼로 긁어 놓은 것이 맞는지 사아르의 눈이 슬쩍 아래로 내려가 확인을 했다.
“속이 울렁거리는군.”
사아르는 빨라진 심장의 고동이 기분이 나빠 쓰러져 버린 하쿤의 옆구리를 퍽!!! 하고 차 내어 굴려 버렸다.
마치 다신 보기 싫다는 듯이.
+
“여기에다 두면 되겠습니까?”
“아! 네, 네!! 여, 여기 두시면 돼요!”
하쿤의 질문에 군더더기는 없다.
표정 또한 누굴 현혹하려 하거나 잘 보이기 위해 포장하지도 않았다.
여인네들을 향한 음흉함이라든지 흑심 같은 것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 런. 데.
왜 계집들은 하쿤의 앞에만 서면 볼을 붉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아르는 자신과는 다른 대우를 받는 하쿤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에 손가락이 으스러질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앞에선 바들바들 떨기만 하는 주제에 하쿤을 보며 웃어?”
둥글고 커다란 화병을 거뜬하게 들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저벅저벅 걸어오는 하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거운 화병을 아무렇지 않게 드는 것도, 힘겨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것도, 더욱이 자신을 보며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는 여인네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것도!
“다 마음에 안 들어!”
사아르는 검을 쑥! 하고 빼어 들었다.
당장 죽이면 그만인 거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베고 거슬리면 죽이면 되는 거다.
사아르의 검은 눈이 더욱더 짙어져 하쿤이 사랑하는 칠흑 같은 매력적인 눈이 되었다.
하쿤은 자신의 앞길을 막고 칼을 스륵 빼어 드는 사아르를 아무렇지 않게 바라봤다.
아마도 자신의 존재가 또 사아르를 화나게 했음이리라.
그가 자비를 베풀어 죽기 직전인 상태에서 자신을 살려 놨으니 이 자리에서 자신을 죽여 버려도 하쿤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자신이 그토록 사모하는 사아르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 오히려 사아르가 싫어하는 미소를 마지막으로 지어 보이는 것은 아닐까 별걸 다 걱정하는 하쿤이다.
휙!
쭉 빠진 시린 칼날이 허공을 베며 하쿤에게로 떨어졌다.
한순간이라도 놓치기 싫은 사아르의 얼굴.
칼이 자신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도 사아르의 얼굴을 놓치기 싫어 눈을 감지 못하는 하쿤이다.
사아르의 시린 칼날이 엉뚱하게도 하쿤, 자신이 아닌 것에 부딪히며 큰 소리를 냈다.
“왜…….”
“그 화병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치워라.”
하쿤은 칼에 베여 깨져 버린 화병을 슬쩍 바라봤다.
‘이 화병을 들고 있는 것이 자신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하쿤은 조금 쓸쓸해지는 마음에 물끄러미 화병을 바라봤다.
어쩐지 자신의 처지와 비슷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
화병을 치우지 않는 하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인지 사아르가 하쿤의 다리를 가차 없이 쳐 내어 하쿤의 무릎을 꿇려 버렸다.
그 덕에 깨져 흩어져 버린 화병 위로 꿇어앉은 하쿤의 무릎에서 피가 흥건하게 번져 나왔다.
“치울 것이 더 많아졌군.”
비릿한 웃음과 귀찮은 듯한 시선이 하쿤을 내려다봤다.
사아르에게 더이상 미움을 받기 싫은 하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무릎에 박힌 파편들을 빼어 내곤 상체의 옷을 찢어 지혈시켰다.
그 모습을 사아르는 또 탐탁지 않게 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군.”
어떤 상처에도 굴하지 않던 하쿤의 심장이 사아르가 흘리는 말에 상처를 받았다.
하쿤을 스쳐 아무렇지 않게 자릴 뜨는 사아르를 눈으로 좇지도 못하고 하쿤은 스륵 주저앉아 파편들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다.
아무렇지도 않는 일인데 왜 이리 서러운 것인지…….
하쿤의 녹빛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려 할 때였다.
“따라와.”
사아르의 낮고 작은 목소리에 하쿤은 또다시 구원을 받은 사람처럼 눈물을 거두어들였다.
오늘도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금발을 하고선 당당하고 자신감 가득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아르를 물끄러미 담았다.
사모하고 사모해서 유일하게 자신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사람.
하쿤은 사아르 몰래 미소를 지으며 그의 뒤를 쫓았다.
+
끝도 없을 것 같은 넓은 방을 시끄럽게 만드는 질척이는 소리가 하쿤의 귀를 어지럽혔다.
하쿤은 사아르와 여인들의 실루엣을 보며 뻥 뚫린 가슴을 느꼈다.
따라오라고 하고선 하루 종일 그의 침실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있게 했던 사아르였다.
그래도 좋았다.
사아르가 있는 곳이니깐, 그가 자고 생활하는 곳이니깐.
다리에 피가 돌지 않아 썩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그저 행복했던 하쿤이었다.
그런 하쿤에게 보란 듯이 계집을 데리고 오라던 사아르는 몇 시간째 비릿한 정액 내음을 풍기며 질척거리고 있다.
“하읏! 폐하!”
여인들의 교성에 하쿤의 입술이 질끈 깨물렸다.
그저 좋았는데…….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인지……, 자신의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다.
“하쿤, 천을 걷어라.”
목이 잠긴 듯한 사아르의 목소리에 색기가 깃들어 있다.
꽉 다물린 이가 꽉 물렸다.
저 여인들이 사아르에게서 저런 목소리를 내게 했으리라.
하쿤은 저린 다리에 힘을 주어 바르게 걸으려 애쓰며 사아르와 여인들을 그나마 가려 주던 천을 걷어 내었다.
봉긋한 여인의 가슴을 탐스럽다는 듯 만져대는 사아르의 손길에 눈이 가고 교태를 부리는 여인의 한 줌도 되지 않는 허리를 꽉 끌어안은 단단한 팔에도 눈이 간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사아르의 거근을 입에 문 여인이 앙탈을 부리며 그의 것을 훑어 올렸을 땐 그녀를 떼어 내어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만 하쿤이다.
“읏!”
사아르의 목에서 기분 좋은 신음이 몇 시간 만에 터져 나오지만 않았어도 그리 했을 것이다.
사아르가 쾌락의 여운으로 인해 달뜬 눈으로 하쿤에게 비릿한 승리의 눈빛을 보냈을 때 하쿤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자신은 사내인 데다 저런 여인이 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사아르가 남색의 취향을 가졌다 해도 자신보다 키 크고 허리 굵은 사내를 안고 싶지는 않으리라…….
하쿤은 점점 비참해지는 감정을 숨기고 숨겨서 더 이상 질투라는 더러운 감정이 나오지 않게 꾹꾹 눌러 담았다.
사아르를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는 이는 저런 여인네들이니깐.
다시 규칙적인 질척이는 소리가 하쿤의 귀를 파고들었다.
감정을 숨겼다곤 하나 심장이 받는 슬픔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쿡, 왜 그러고 있지? 계집을 안고 싶은 건가?”
어느새 하쿤의 앞으로 다가온 사아르가 하쿤의 가랑이 사이로 발을 대어 꾹! 꾹! 눌러 댔다.
사아르의 행동에 하쿤이 할 수 없이 고개를 들고 말았다.
사실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사아르의 비릿한 정액 내음이 풍기고 있어서 눈을 들어 그를 보면 시선을 뗄 수가 없을 것 같으니까…….
이를 악물고 사아르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뭐가 또 틀어진 것인지 인상을 팍 쓰고 있는 사아르의 표정에 하쿤의 심장이 턱! 하고 내려앉았다.
혹시나 자신의 불손한 시선을 느낀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숨조차 쉴 수가 없다.
요동치는 심장을 애써 달래며 사아르가 불쾌하지 않길 빌어 보는 하쿤이다.
스륵 하고 앉는 사아르의 표정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
“뭐야? 잘만 발기되는군.”
사아르의 크고 남자다운 손이 하쿤의 아랫도리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아마도 여인들과의 정사를 보며 잔뜩 발기해 안절부절못하는 하쿤을 보고 싶었던 것인가 보다.
하쿤의 이가 악 다물렸다.
대못이 박히고 난 이후로는 발기가 되면 뼈가 부러졌을 때보다도 더한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었다.
하쿤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주름 같은 건 없을 줄만 알았던 하쿤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힌다.
“흐음~”
사아르의 목소리에 저조한 기분이 나타나는 듯 음울하다.
하쿤의 아랫도릴 몇 번 지분거리던 사아르가 자리에 일어서 저벅저벅 자신이 정사를 치르던 장소로 돌아갔다.
“꺅!”
“살려!”
하쿤이 시선을 돌렸을 때는 이미 하얗고 보드라운 여인들의 몸 위로 붉은 피가 흥건하게 흘러넘치고 있었다.
“따라오너라.”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다리가 저릿했지만 하쿤은 아까처럼 단정하게 걸어 사아르의 뒤를 따라나섰다.
졸졸졸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그득한 사아르만의 욕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욕탕에 몸을 담근 사아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쿤은 사아르가 싫어할지 모르지만 시중드는 이 하나 없는 상황이라 천을 들고 사아르의 몸을 닦아 나가기 시작했다.
잔잔한 근육 사이로 수많은 상처가 수를 놓은 듯 그림처럼 그려져 있다.
단단하고 사내다운 등을 천으로 닦아 나가는 하쿤의 손길이 조금 긴장되는지 미세하게 떨렸다.
졸졸졸,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조차 색스럽게 하쿤의 귀를 자극해 왔다.
하쿤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