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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 같은 그대에게 바칩니다 (1화)
프롤로그 - 사신, 사아르
방 안에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처절한 비명소리에 하쿤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드디어 칠흑 같은 그가 지휘하는 자비야 군대가 성을 함락시키고 이젠 왕인 자신의 코앞까지 왔다.
가장 강했던 소를리에를 몰락시킨 자비야의 군대가 별 볼 일 없는 소국인 자신의 나라까지 짓밟고 가려 했다.
하쿤은 자신의 나라의 마지막 운명을 애도하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 감은 눈 안으로 아릿하게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긴 금발을 질끈 묶은 검은 눈의 사내, 사아르의 환영에 그를 만났을 때의 일이 절로 떠올랐다.
금발을 질끈 묶고 검붉은 피를 뒤집어써도 보이지 않을 까만색의 갑옷을 입은 그를 그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고개를 돌리는 사내의 눈이 그 갑옷보다 더욱 짙은 검은색이 아니었다면…….
하쿤은 그날 그에게 자신도 모르게 매료되어 버렸다.
눈을 떼지도 못할 만큼 고혹한 그의 자태를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또렷이 기억할 정도로…….
하쿤은 점점 가까워지는 비명소리에 스르륵 눈을 떴다.
마음뿐이지만 자신이 정한 반려를 맞이할 시간이었다.
설령 그가 자신을 죽이러 온 사신일지라도…….
<내겐 그저 귀한 시간일 뿐> (1)
하쿤은 그와 같은 검은색 갑옷을 만지작거리다 그냥 놔 버렸다.
칠흑 같은 검은색 갑옷을 입은 그의 앞에선 무슨 갑옷이든 빛이 바랠 것이다.
그와 대조되어 보이는 하얀색 갑옷을 고른 하쿤은 아릿하게 웃어 보였다.
이 갑옷 위에 자신의 붉디붉은 피가 잔인하게 수놓일 것이다.
하쿤은 예장용으로나 입을 만한 하얀 갑옷을 시중드는 이 없이 걸쳐 입으며 자신을 죽이러 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쿡, 왜 이렇게 두근거리는 것이냐. 이래도 네까짓 게 왕이랍시고 그동안 다른 이들 위에 군림했구나……. 사내에게 연정이나 품은 놈이 무슨 왕을 한다고……. 갑옷이 참으로 아깝구나.”
하쿤은 자신의 하얀 갑옷을 쓸어 보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침입자들의 소리가 가까워졌다.
하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심정으로 이 문을 박차고 연 것이 그였으면 하고 바란다.
문을 부수는 요란한 소리에 하쿤은 천천히 몸을 돌려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부서진 문이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자 침입자의 얼굴이 정확하게 보였다.
심장이 멎는 것만 같다.
그렇게나 바라고 바랐던 그가 눈앞에 있다.
칠흑같이 아주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그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모조리 짓밟은 그인데도 그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오셨습니까? 사아르 황제여.”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노력하며 그를 맞이한다.
그가 자신을 죽음이 두려워 덜덜 떠는 겁쟁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이 순간 간절히 바라는 하쿤이다.
챙! 하는 맑은 소리가 들리고 사아르가 하쿤을 향해 칼을 빼들었다.
오늘도 역시나 얼마나 많은 양의 피를 뒤집어쓴 것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칠흑 같은 검은 갑옷을 입곤 자신만만한 웃음을 짓는 사아르 황제에게 하쿤은 점잖게 마주 웃어 주었다.
“그대는 오늘도 나를 향해 마주 웃어 오는군.”
하쿤은 오랜만에 듣는 사아르의 음성에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지만 자신의 미소를 싫어하는 그를 위해 미소를 거두어들였다.
이런 일로 사아르의 심정을 상하게 하여 마지막을 껄끄럽게 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웃음을 멈춘 하쿤은 사아르의 앞에서 서서히 칼을 들었다.
“호오~ 여기서 자네 혼자 이 나를 대적을 하겠단 말인가?”
하쿤은 사아르의 앞에서 다정하게 웃어 주고 싶었으나 그가 자신의 웃는 얼굴을 싫어하는 터라 안타깝지만 입을 꾹 다물고 칼을 자신의 목에 겨누었다.
칠흑 같은 눈이 조금 커진다.
“당신의 다른 표정을 보고 갈 수 있게 해 주다니 영광입니다.”
하쿤은 그가 싫어하겠지만 또 한 번 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늘씬한 키에 어울리는 다부진 체격.
하쿤은 근육으로 똘똘 뭉친 자신의 거대한 몸과는 달리 아름다운 사아르의 몸을 감탄하듯 훑어보곤 칼날을 목 앞으로 고쳐 들었다.
날카롭게 잘 벼려진 칼날이 하쿤의 목덜미에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붉디붉은 피를 토해 내게 한다.
“흥미롭군. 자결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하쿤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아르의 칠흑 같은 눈을 빤히 바라봤다.
자신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을 줬던 사아르 황제.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주기를……. 부디 나라는 사내가 있었다는 것만이라도 알아주기를…….’
하쿤은 사아르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칼을 높게 쳐들었다.
부디……, 잊지 말아 주기를…….
힘을 잔뜩 준 손을 높게 쳐들어 그대로 자신의 목으로 칼끝을 내렸다.
“쿡, 자비로운 하쿤 왕은 그 성품처럼 올곧다더니 그 말이 사실인 듯싶군. 그런데 어쩌나? 나는 올곧은 성품은 망가뜨리고 싶어지거든.”
잔인한 칠흑의 검은 눈이 하쿤을 향해 웃어 온다.
너는 내게 잡혔다고 말하는 듯이…….
하쿤이 칼을 쥐고 있던 손 위로 그 칼을 저지하는 사아르의 손이 겹쳐 있었다.
사아르의 손이 닿은 자신의 손등이 불에 덴 듯 뜨거워진다.
분명 사아르의 손은 차갑고 시린데 자신의 손등은 왜 이리 뜨겁게 달아올라 버리는 것인지 하쿤은 슬쩍 또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하쿤의 얼굴 위로 찢어질 듯한 고통이 지나갔다.
슬쩍 자신의 볼을 만져 방금 전 그 고통의 주인이 자신임을 재차 확인해 본다.
확! 하고 머리채를 잡아 뒤로 꺾어 버리는 사아르의 거친 손길 덕에 하쿤의 다리가 조금 구부러졌다.
자신보다 약간 키가 작은 사아르가 하쿤의 큰 키가 못마땅해서 구부리게 한 것이리라.
“내 앞에서 그딴 웃음은 접어 두는 게 어떤가? 하쿤, 나는 네 웃음이 너무나 싫거든.”
“그럼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사아르 황제여.”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죽인다면 그나마 깨끗한 모습으로 사아르의 머릿속에 남을 텐데……. 사아르는 그조차 용납해 주지 않아 하쿤의 마음을 시리게 한다.
또 아릿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하쿤.
쫙!!
웃음을 지어 보일 하쿤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인지 어김없이 내려치는 사아르의 손길이 너무나도 매섭다.
하쿤의 눈 위로 한 줄기 눈물이 또륵 흘러내렸다.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사아르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속삭였다.
“사모하는 상대가 저를 바라보지 않는 것은 역시 슬픈 일입니다……. 하나만 여쭤 보겠습니다. 황제께선 슬퍼 보신 적 있으십니까?”
하쿤의 연한 녹빛의 눈이 사아르를 바라보며 슬픔에 젖어 들었다.
그런 애틋한 하쿤을 보며 사아르는 때에 맞지 않는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슬픔이라……. 네놈의 슬픔과 고통은 사모하는 마음이라는 거군.”
하쿤은 처음으로 사아르의 사악함에 주춤하고 몸을 뒤로 빼내었다.
그는 자신의 고백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듣지도 않았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고통을 줘야 할지밖에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앞으로의 시간이 고되고 힘이 들 거란 예감에 하쿤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저분이 하쿤님이셔?”
감옥으로 이송되는 하쿤을 보는 자비야 여인네들의 눈길이 낯 뜨거울 정도로 달아올라 있었다.
하쿤이 사아르의 손아귀에서만 벗어난다면 어찌해서든 하쿤을 자신들의 종으로 맞아들이리라 눈독을 들이는 암컷들은 몰래 하쿤의 몸 여기저기를 염탐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잘 단련된 두툼한 근육이 옷을 입었다 하나 여실히 그대로 드러나 하쿤의 몸매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었다.
봉긋이 솟아올라 있는 가슴은 어느 여인네의 가슴 못지않게 컸고 품은 여인네들을 숨 막히게 할 정도로 탄탄하고 널찍해 보인다.
그리고 고개를 꺾어야 할 정도로 큰 키와 훈련으로 잘 단련된 근육질의 몸을 보며 그의 아랫도리 또한 큼직하고 튼실할 거라 여기며 아녀자답지 않은 음흉한 눈길을 보냈다.
몸으로만 보면 색기 철철 넘치는 종마와 같은 하쿤이지만 그의 얼굴은 그의 몸과는 너무 대조적으로 정갈하고 단아했다.
연한 녹빛 눈동자가 그의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었다면 그와 비슷한 그의 머리카락 색은 그를 선량하고 자비롭게 보이게 했다.
잠자리에서도 부드러우리라!
여인네가 해 달라는 것이라면 마음과 몸을 다 바쳐 해 줄 성싶게 생긴 것이 바로 하쿤이었다.
자비야의 여인들은 자신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하쿤을 상상 속에서 헤집으며 사아르의 손아귀에서 그가 어서 빨리 풀려나기만을 고대하고 기대했다.
하쿤은 어찌하여 자신이 사아르의 성으로 이송되는 처지가 된 것인지, 앞으로 어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려 하다 그냥 허공을 응시했다.
어떤 처지가 되건, 자신의 앞날이 어찌 되건 이젠 모두가 사아르의 뜻인 것이다.
하쿤은 꽤나 시끌벅적한 자비야의 성 안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를 만난 파티를 떠올렸다.
지금은 사아르의 손에 멸망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각국 중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소를리에 왕자의 혼례식이었다.
각기 다른 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그들을 축하하며 포도주 한 잔을 기분 좋게 나눠 마시고 담소를 나누며 겉으론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여인네들은 호호하하거리며 무리를 만들어 이야기를 나누기에 바빴고 시종들은 연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하쿤은 얼굴을 비췄으니 이만하면 돌아가도 뒷말이 나오지 않겠다 싶어 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검은 갑옷을 입고 있던 금발 사내에게 시선이 잠시 멈추었다.
“저건 사아르 왕인가?”
절친한 친우에게 금발의 검은 갑옷의 잔혹한 사내를 조심하라 흘려 가는 이야기로 들은 적이 있던 참이었다.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어도 그다지 위험스런 사내 같지는 않아 보여 그의 어디가 위험하다는 걸까 하고 좀 오랫동안 봤었던 것 같다.
그땐 그의 얼굴이 보고 싶어 멈췄던 건 아니었다. 그의 분위기를 염탐하듯 보곤 다시 성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려 했었다.
그러나 다리를 움직여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가 다시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서서히 돌려지는 사아르의 얼굴을 보고 하쿤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겁을 먹었었다.
칠흑 같은 검은 눈에 정신이 빠져들어 멍하니 한참을 바라보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넋을 잃고 바라봤더랬다.
여인네 같은 곱상한 얼굴과는 달리 감았다 뜬 검은 눈 안에는 따분하다는 듯한 지루한 기색과 함께 잔혹하고 잔인한 욕망이 일렁이는 것을 하쿤은 보았다.
사내라면 품을 야욕과 욕망이지만 사아르의 눈에 비친 건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야망이라 하쿤은 실례인 줄 알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것은 수컷이다.
진정한 사내란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라는 듯한 그의 당당한 눈빛.
금발과는 어울리지 않은 칠흑 같은 눈동자를 가진 그의 모습에 속수무책으로 반해 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사내이고, 그도 사내라는 것 따윈 생각도 못 할 정도로 아주 속수무책으로…….
하쿤은 그때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우뚝 설 것이라는 것을.
“멈추어라!”
“히잉!”
하쿤을 태운 말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얌전하게 주인의 뜻에 따라 우뚝 멈춰 선다.
하쿤은 감았던 눈을 뜨고는 상체를 포박당한 자신을 내리려고 하는 병사들을 물리고 훌쩍 뛰어 땅에 착지했다.
“그대들에게 맡기고 싶지만 내 몸이 보시다시피 무게라 좀 나가는 편이라 혼자 내려왔소.”
조용조용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하쿤에게 한눈에 반한 듯한 병사는 멀뚱히 서서 하쿤의 자비로운 얼굴을 눈에 담았다.
“물러서라.”
억양 없는 목소리인데도 그의 음성은 서릿발같이 시리고 차갑다.
하쿤은 조심스레 병사에게서 물러서며 사아르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었다.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인가?”
비릿한 웃음이 담긴 사아르의 목소리가 하쿤의 마음에 또 상처를 하나 늘리어 간다.
“제 얼굴을 보기 싫어하시는 황제 폐하를 위해서입니다.”
“쿡, 나를 위해서라…….”
자신을 향한 그의 목소리가 불쾌하게 들렸다. 곧 주변을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 정도의 세기로 사아르가 자신의 몸을 발로 걷어차 버렸다.
“…….”
하쿤의 몸을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 버린 사아르가 엎어진 하쿤의 배를 뒤꿈치로 찍어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크윽, 쿨럭쿨럭!”
쿨럭이는 기침을 애써 멈추려 이를 악무는 하쿤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포로 주제에 말이 웃기는군. 너는 아직도 자신이 한 나라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쿤과 시선을 마주한 사아르가 하쿤을 향해 비릿하게 웃는다.
섬뜩한 검은 눈.
하쿤은 그 섬뜩한 눈을 한참 바라봤다.
이 눈길조차도 사랑스럽다.
너무나 사랑스러워 평생을 이 눈길 속에서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
하쿤의 굵직한 팔목을 잡아 미처 일어서지 못한 그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가는 사아르의 표정은 그의 손에 사람이 잡혀 있다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평온하고 지루하게 보였다.
+
사아르의 거친 행동에 하쿤이 제대로 걷지 못하고 결국 넘어지고 말았지만 사아르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하쿤을 질질 끌고 갔다. 질질 끌리는 몸뚱이로 인해 일어난 뽀얀 흙먼지가 사아르의 몸을 에워쌌다.
하쿤은 자신의 등이 흙바닥에 긁히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도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묵묵히 사아르가 하는 대로 맞춰 줄 뿐이다.
자신보다 거구의 몸뚱이를 끌고 가는 데도 사아르는 전혀 지치거나 멈추는 일이 없었다.
계단을 올라서는 사아르의 거침없는 행동에 그제야 하쿤의 입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깨가 계단 끝에 걸려 빠질 듯 아파옴에도 사아르는 관심조차 없는 건지 전혀 뒤돌아 볼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돌계단의 단단함이 어깨와 날개 뼈를 스칠 때마다 전해져 오는 극심한 고통에 이를 악물며 소리를 죽여 보는 하쿤이지만 너덜너덜해진 하쿤의 살은 더는 참지 못하겠던 모양이었는지 찢겨져 떨어져 나가고 만다.
돌계단 하나하나에 살이 섞인 핏덩이들이 그득했다.
극심한 고통에 일어날까도 생각했지만 사아르의 품성으로 볼 때 힘을 주는 순간 더 가혹한 짓을 당할 것임이 분명했다.
팔이 그대로 잘려 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쿤은 이제 무감각해져 가는 고통을 원래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통인 것마냥 생각하기로 하고 팔을 우악스레 잡고 있는 사아르의 손의 시림만을 기억하려 애를 썼다.
시리고 얼음 같은 사아르의 차디찬 손이 하쿤은 그저 좋기만 했다.
30평생 산 세월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던 고통의 시간이 끝이 나는 것을 알리는 듯 사아르의 발걸음이 우뚝하고 멈췄다.
“일어서라.”
텅 빈 복도를 울리는 사아르의 비꼬는 듯한 음습한 목소리를 들으며 하쿤은 찢어질 듯한 어깨를 부여잡고 일어서려 손을 땅에 짚었다.
이제부터 어떤 모욕을 당할지 상상조차 안 되지만 하쿤은 지금 이 순간 사아르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설레었다.
‘이런 순간조차 뛰는 가슴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구나…….’
“큭!”
일어서려는 하쿤의 탄탄하고 굵직한 배를 사정없이 걷어차 버렸다.
배의 고통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하쿤에게 시간도 주지 않고 또다시 그가 가차 없이 배를 밟아 버렸다.
“일어서는 것이 왜 이렇게 느린 건가. 이 내가 친히 일으켜 줘야 할 귀중한 몸이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아~ 이번만은 이 사아르가 일으켜 주지!”
“읏!”
하쿤의 부드러운 녹빛 머리를 우악스레 잡아당기는 사아르의 거친 손길에 맥없는 하쿤의 묵직한 몸이 스르륵 위로 올라선다.
“아주 좋은 몸이야. 한 손으로 품을 수 없는 허리의 두께라든가 보기만 해도 여인네들이 아랫도릴 적실 것 같은 두툼한 허벅다리의 굵기라든가.”
하쿤의 몸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 내리며 재밌다는 듯 말하는 사아르의 얼굴이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같이 위험스레 반짝인다.
하쿤은 사아르의 위험스러운 표정에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이 자비야 성의 여인네들은 이 사아르의 것인데?”
입은 웃고 있으나 사아르의 칠흑 같은 눈은 하쿤을 섬뜩하게 노려보는 듯 더 깊고 진해져 갔다.
“크윽!!”
사아르와의 만남 이래 가장 고통스런 비명을 지른 하쿤은 잡힌 아랫도리의 찢어질 듯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사아르의 어깨를 꽉 그러쥐고 말았다.
“이런, 이런. 천하의 매력남 하쿤께서 남정네의 손놀림 하나에 이렇게 답삭 안겨도 되는 건가?”
비릿한 음성 속에 조롱이 섞여 들어 하쿤의 얼굴이 순간 벌게졌다.
사람들의 손길을 많이 타지 않은 하쿤의 아랫도리는 사아르의 우악스런 손길 속에서도 꼿꼿이 솟아 그 두께와 굵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팽팽하고 단단한 그것을 재미있다는 듯 툭툭 치던 사아르가 순식간에 돌변해 그것을 뽑아 버릴 듯 매섭게 잡더니 다락방처럼 보이는 독방으로 하쿤을 던져 버리듯 밀어 넣었다.
“흣!”
난생 처음 겪는 극심한 고통이 하쿤의 몸을 지배했다.
하쿤은 정신조차 차릴 수 없는 고통에 허리를 말아 최대한 웅크렸다.
고통이 수그러들진 않았지만 허리를 펴고 있을 때보단 옷깃에 스치는 정도가 약해져 그나마 숨을 쉴 만했다.
“잘라 버리기에 너무나 좋은 물건이군. 남자다운 하쿤이 아랫도릴 못 쓰는 여인네로 전락한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쿡, 생각만 해도 즐거워지는군.”
사아르의 칠흑색 눈동자가 점점 짙어져 갔다.
하쿤은 자신의 아랫도릴 잘라 버리려는 사아르의 행동에 왜 자꾸 그가 싫어하는 웃음이 그려지는 것인지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 위로 미소를 그려냈다.
그가 자신의 몸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잘라낸다 해도 하쿤으로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사아르를 사모하게 된 순간부터 그의 아랫도린 다른 누구에게도 반응을 하지 않았으니까…….
사아르는 이 순간조차 잔잔한 미소를 띠는 하쿤에 조롱하며 비아냥거리던 입을 딱 닫아 버렸다.
그를 보고 있으면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만 한다.
자신의 나라를 짓밟았을 때도, 남성의 상징을 잘라 버린다고 해도 이 녀석은 웃고만 있을 뿐이다.
열이 뻗쳐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한 사아르는 근처 고문 기구를 넣어 둔 상자에서 긴 대못을 찾아 거칠게 하쿤의 바지를 찢어낸 다음 그것으로 하쿤의 탐스러운 방울을 찔러 꿰어 버렸다.
“으윽!”
이를 악다문 하쿤의 얼굴 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절정을 맞이했을 때의 하쿤의 얼굴이 이러할까?
사아르는 하쿤을 아는 여인이라면 한 번쯤 안겨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사아르의 눈앞에서 고통을 이겨내는 하쿤의 모습은 사내인 자신이 봐도 정말로 아름다우니까.
사아르는 잠시 고통을 참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일어서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쾅! 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잠기는 듯한 아련한 소리를 끝으로 하쿤은 기절하듯 눈을 감았다.
살이 터진 고통에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을 눈을 뜨는 순간부터 느껴야 했다.
“흐……읏.”
아직도 자신의 양물에 대못이 박힌 듯한 이물감에 하쿤은 서서히 눈을 떴다.
칼에 베였을 때의 그 참혹한 고통보다 더 뜨겁고 기괴한 느낌에 겨우 몸을 일으켜 아래를 내려다 봤다.
남자로서는 이제 끝이 났으리라.
자신의 양물을 그대로 관통한 대못은 살을 찢고도 그 날카로움을 당당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살이 찢긴 곳에서 진물이 흐르고 살이 썩어 들어가는 듯 거뭇거뭇한 것이 보였다.
“하읏.”
일단 대못을 뽑아야 할 것 같아 슬쩍 손을 댄 하쿤은 자지러질 듯한 극심한 고통에 고통스런 신음을 삼키었다.
땀이 주륵 흘러 하쿤의 연한 녹빛 눈동자 속으로 한 줄기 빨려 들어가 눈물처럼 방울방울 맺혀 흐른다.
이를 악문 하쿤의 손이 경련을 일으키듯 바들거리며 떨려 왔다.
“크으윽!! 윽!”
큰 소리 한 번 치지 않을 듯한 하쿤의 목에서 결국 아픔에 못 이긴 비명이 새어 나왔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하쿤의 숨소리만이 한참을 울리다 갑자기 싹! 하고 사라져 버렸다.
기어이 대못을 뽑아내고 기절해 버린 하쿤 앞에 사아르가 천천히 다가섰다.
“쯧, 리오시 성의 하쿤 왕은 들은 대로 고집스런 구석이 있군.”
사아르는 기절해 버린 하쿤의 육중한 몸뚱이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쿤의 땀에 젖은 머리칼과 녹빛 눈동자가 있을 하얀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그의 몸을 훑어 내려갔다. 상의가 몸에 찰싹 들러붙어 하쿤의 육덕진 봉오리가 옷 위로 봉긋하게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사아르는 스르륵 몸을 낮춰 하쿤의 여자 같은 가슴을 한 움큼 쥐어 주물러 봤다.
“웬만한 여자보다 클 정도로 가슴 근육을 키우다니. 킥, 여자와는 하지 않는다 들었거늘 하쿤 왕은 혼자서 자신의 가슴이라도 주무르나 보군.”
사아르가 비릿한 비웃음을 흘리며 하쿤의 가슴을 멋대로 주무르는데도 하쿤은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참 동안 하쿤의 가슴에서 머물러 있던 사아르의 눈이 복근을 훑고 자신이 벗겨 놓았던 아랫도리를 기분 나쁘다는 듯 노려봤다.
하쿤이 뽑은 대못으로 인해 바닥은 온통 피로 흥건하게 적셔져 있었다.
“그래도 살아있군.”
사아르는 하쿤의 남자의 상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것을 재미없다는 듯 쳐다보곤 스륵 일어서 방을 나가 버렸다.
“재밌기는 하군. 양물에 박힌 대못을 스스로 뽑아내다니. 쿡, 그러고도 살아 있다는 게 더욱 재밌지만! 하하하.”
사아르의 잔인스러운 웃음이 텅 빈 복도를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