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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정말이지 오랜만에 하리와 식당에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진이는 아까부터 영 맥을 못 추고 넋을 놓으며 그러다 가끔 미친년 발광하듯 머리를 쥐 뜯고서 실실 웃고 있는 하리의 엄청난 생쇼를 아주 잘, 감상하고 있었다.
“아니야, 못 봤을 거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 으! 아니야, 봤으면 어쩌지? 눈이 움찔했는데? 헤헤, 아니야 봤을 리가 없지. 하지만 봤으면? 봤으면? 하지만 컨퍼런스 때도 무사히 넘어갔고, 회진 때도 별말 없던데!”
하지만 정말 별말이 없었다. 거기다 날밤 새워서 만든 자료 분석에 대한 것도 일언반구도 없었다. 역시 본 건가? 봐서 그런 건가? 내가 변태라고 소리쳤는데, 오히려 내가 변태라서 아예 무시하기로 했나? 그나저나 내가 변태라니, 변태라니!
“조하리.”
“응?”
진이는 한심스러운 눈빛으로 숟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딱 하니 때렸다. 아주 정확히 들어갔는지 청아한 딱밤 소리가 야무지게도 울렸다.
“악! 왜 때려!”
“신성한 밥상머리 앞에서 뭐하는 짓이냐? 아주 쇼를 해라, 쇼를. 혼자 보기 참말로 아깝다, 아까워.”
하리는 눈물이 핑 도는 눈동자로 이마를 문질렀다. 이마도 아프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머리도 아팠다. 진이는 여전히 상태가 이상한 그녀의 모습에 뭔가 여자의 무서운 감을 잡고선 아무렇지 않게, 아주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너 어디 아프냐? 아침부터 영, 약 먹은 병아리 같다.”
“진아. 나 의사 그만둘까? 그만둬야 하나?”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 그만두려면 진작 그만뒀어야지. 이미 피부는 개피부 만들어 놓고.”
정말이지 그 남자를 만나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보다, 생각을 하고 움직여야지, 저질러 놓고 생각을 하면 대체 어쩌자는 거냐? 응?
“나 너한테 옮았나 봐.”
“뭐가 옮아? 나 눈병도 감기도 없는데?”
“그런 거 말고, 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19금.”
순간 그녀는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서 하리의 코앞으로 아주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뭔가 무서운 촉이 감지되었다, 생각은 했지만 세상에, 우리 얼라 햇병아리에게 남자 문제라니! 그것도 19금 문제라니! 분명 어제 뭔 일이 있었다!
“뭔데? 말해 봐, 이 언니야가 들어 줄게. 응?”
“하아.”
“키스했어? 설마 뽀뽀를 키스라고 착각해서 고민하는 건 아니지?”
“아니야!”
즉각적으로 오는 반응. 게다가 어느새 치밀하게 맥박을 잡고 있는 진이는 정상 작동하는 맥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키스 정도는 아니다 이거지? 하지만 그다음 진도는 너무 빠른데.
“설마, 바로 불타는 애욕의 밤을?”
정말이지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진이의 눈동자에 하리는 어쩌다 이 망할 년 앞에서 한탄을 했는지, 저 자신을 탓하며 맥박을 잡고 있던 진이의 손을 뿌리쳤다.
“됐다, 됐어.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어찌 내가 너의 그 깊고 진한 19금의 세계를 따라갈 수 있겠니.”
“19금이라도 넌 지금 27살이야. 너한테 전혀, 네버 문제 될 게 없다고.”
진이는 연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다시 제자리로 스르르 돌아갔다. 뭐, 바로 성인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처음부터 농으로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분명 뭔가 있기는 했다. 그것도 남자. 하지만 절대로 진우 선배는 아니었다. 느낌이 달랐으니까. 뭔가 좀 더 야릇하고, 에로틱한 냄새가 난다고 해야 할까? 대체 누굴까? 지금껏 일편단심 진우 바라기만 해 왔던 저 조그만 머릿속을 폭풍처럼 휩쓸어 버린 힘 좋은 남정네는.
그 순간, 진이의 머릿속으로 뭔가가 번뜩이며 지나갔다. 그녀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여전히 땅이 꺼져라, 푹푹 한숨을 내쉬는 하리는 살폈고, 이내 중얼중얼하는 목소리에서 나온 ‘컨퍼런스, 연구실, 회진’ 등등이란 단어를 듣고서 음흉한 미소를 그렸다.
요즘 엄청 붙어 다니더니, 그럼 정말 그 변태 자식인가? 하긴 꿈에도 나올 정도니까. 우후후후! 이건 정말 특종이다. 저 작은 머리빡이 얼마나 큰 혼란에 휩쓸리고 있을지 짐작을 하니, 보는 재미가 쏠쏠해 미치겠다. 역시, 다 큰 남녀가 낮이고, 야밤이고 그렇게 붙어 있으면 결국엔 없던 감정도 생기기 마련이지. 한창 피가 끓는 그 넘치는 젊음을 어떻게 주체할 수 있겠어?
‘그나저나 최선호라…….’
일명 꼬픈남 최선호. 사실, 저번에 하리의 말을 듣고 살짝 호기심이 생겨서 한국대에 놓인 인맥이란 인맥을 다 뒤져서 한 가지 엄청난 사실을 알아낸 게 있었다. 어디, 잠깐 미끼 한번 던져 볼까?
“하리야.”
“또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저리로 가.”
“최선호 선생님 말이야.”
“뭐, 뭐?”
최선호라는 이름만 들어도 펄떡이는 하리의 표정에 진이는 거의 확실하다 도장을 찍으며 여전히 태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번에 네가 궁금하다고 했잖아.”
“내, 내가 언제! 내가 그 변태 자식이 왜 궁금해! 나 하나도 안 궁금해. 하나도!”
“그 선생님, 인간이 아니더라.”
하리는 안 궁금하다고 소리치면서도 진이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정말, 왜 이러지? 진짜로!
“17살에 한국대 의대를 수석으로 입학했단다.”
“……뭐?”
“인생 자체가 수석이야. 차석 따윈 없어. 단 한 번도 미끄러지지 않고 올 스트레이트. 마지막까지 수석 졸업. 난 그런 인간은 부원장밖에 없는 줄 알았다. 게다가 레지던트였음에도 수술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하더라. 특히, 뇌수술은. 정말 기대를 많이 했었나 봐.”
역시 뜬소문이 아니었다. 혹시나, 혹시나 하고 있기는 했지만. 저런 괴물이었다니! 그렇다면 왜? 도대체 왜?
“그런데 왜?”
“그런데 정확히 레지던트 3년 차 중간쯤에 갑자기 전공을 바꾸더니 레지던트 4년 꽉 채우고, 펠로우까지 턱 하니 된 뒤에, 돌연 입대. 그 뒤로 스르르 묻히면서 지금 여기 펠로우로 온 거야.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더라.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서로 친한 동기도 별로 없었고. 지금 우신대병원에 있다는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많던데, 뭘. 그냥 소리 없이 사라진 천재가 된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올 스트레이트의 길을 달렸으면서, 지금도 신경외과를 놓지 못하고 있으면서. 갑자기 그만뒀다고? 적성이 아니라서? 말도 안 된다. 절대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신경외과 레지던트 3년 차에 갑자기 그만뒀다라. 그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이는 너무나도 심각하게 생각에 빠져 버린 하리의 모습에서 최선호라는 인간이 하리의 인생에 더 이상 단순히 펠로우가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물론, 지금 하리는 절대 그걸 알지 못할 테지. 아직도 진우 선배를 사랑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을 테니까. 그 마음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하고서.
그나저나, 그 최선호라는 남자도 같은 마음이려나? 괜히 하리 혼자 삽질하는 거라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하리를 말리고 싶었다. 설사 같은 마음이라 할지라도 마음에 걸렸다. 괜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햇병아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감정에 있어선 너무나도 순진무구했다. 농담 삼아 하는 말이지만 정말로 붙잡고 성교육을 시켜야 할 정도로 그런 쪽에 무지한. 로맨틱과 낭만을 꿈꾸고, 운명적인 사랑이 있다고 믿고 있는 그런 소녀. 그렇기에 진이는 최선호가 불안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났다고 하지만, 알려진 사실이 처음부터 거의 없고, 그 정도의 인재가 아무 이유 없이 내과 펠로우로 앉아 있을 리가 없었다.
과거를 숨기는 남자. 남자고, 여자고, 과거를 숨기는 것치고 뒤끝이 깔끔한 경우는 없었다.
“하리야.”
“응?”
“너 NS(신경외과) 시험 칠 거지?”
너무나도 당연한 말에 하리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갑자기 그 인간의 모습이 스치면서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만약, NS에 붙으면 역시나 헤어지겠지? 아마 거의 볼 일이 없을 거야. 아무리 그 사람이 신경외과에 미련이 남아 있다고 해도, 쉽게 가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하리야?”
“응? 아, 당연하지! 진우 선배가 NS에 있잖아! 아주 예전부터 정했어. 게다가 그 인간이 MED(내과)에 있는데, 에이. 넌 왜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하지만 진이는 하리의 그 미묘한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신경외과라고 했을 텐데. 역시, 최선호가 걸리는 건가? 하지만 지금은 굳이 나서고 싶지 않았다. 왠지 진우보다 훨씬, 훨씬 더 깊이 빠질 것 같았으니까. 그 시간을 단축할지, 아니면 연장할지, 그것도 아니면 영영 멈추게 할지. 아직은 그저 말없이 지켜볼 단계인 것 같았다.
진이는 마지막 밥까지 입안에 털어 넣고 식판을 집어 올렸다.
“아무튼! 네가 누구 때문에 고민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가 여자에게 본능적으로 끌리듯, 여자도 남자에게 끌리는 건 본능이야. 그래야 몸이 하나가 되고, 하나가 되면 타오르는 거고, 그 속에서 씨앗을 퍼트리는 거고…….”
“됐다고, 이년아!”
“쿡, 나 먼저 간다. 어쩐지 뜸하다 싶더니.”
그녀는 호출기를 흔들면서 그렇게 식당을 빠져나갔다. 사라지는 진이를 보면서 하리는 오늘은 아직 한 것도 없는데 기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이지 진이와는 절대 이 문제를 논할 수 없다. 입만 뻥끗했다간, 이미 그녀와 선호는 침대 위에 있을 것이다. 그와 침대라니? 침대라니? 말도 안 돼! 하지만 아까 거기서 왜 그 남자 얼굴을 떠올리며 망설인 걸까. 왜 흔들린 걸까. 정말 그새 정이라도 들어서? 그 정이 소리도 없이, 은근슬쩍 이렇게 깊이도 들었던 거야?
“아니야, 조하리. 아니야. 정신 차려! 너에겐 진우 선배가 있어 진우 선배가 있다고! 그래, 이건 그냥 단순히 궁금해서. 정말 인간 같지도 않은 그 남자가 너무 신기해서!”
“뭘 그렇게 혼자 구시렁거려?”
갑자기 등 뒤에서 성큼 나타난 선호의 등장에 그녀의 심장이 다시금 서서히 오케스트라를 울리고 있었다. 게다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제 어깨를 감싼 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고, 그렇게 진하지 않은 로션 향기가 자꾸만 그의 거리를 의식하게 하였다.
“서, 선생님. 너무 가까이에…….”
“응?”
고개를 돌린 선호와 눈이 마주친 하리는 순간, 시간이 멈춰 들었다. 사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그냥 어깨에 손만 걸치고 있었을 뿐, 남들이 봐도 그렇게 의식할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에겐 그 거리가 너무나도 가깝게 느껴졌다.
까만 눈동자에 새겨진 제 모습이 보일 만큼, 그때 느꼈던 뜨거운 숨결이 다시 느껴질 만큼, 그리고 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혹시나 들리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강하게!
“이거 후식으로 먹어. 이번에도 손수 공수한 신선한 우유, 이건 자료 정리 잘했다고 주는 상이야.”
선호는 하리의 손에 우유를 쥐여 주고선 살짝 망설이다 이내 과감하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이건 단순히 칭찬이다. 시간에 딱 맞추기도 했고, 무엇보다 무척이나 잘했으니까. 이상하게 보일 일이 아닌 거야.
머리카락에 감각 세포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한데, 그의 긴 손가락이 살짝살짝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자꾸만 간질간질하면서도 짜릿짜릿한 느낌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하게 번져 갔다.
“보셨어요?”
최대한 이상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지?
“응, 자료 잘 봤어. 덕분에 좀 수월하게 끝낼지도 모르겠다. 다음 것도 부탁해도 되지? 다음엔 초코 우유로 사 줄까? 이렇게 마시다 보면 기적적으로 좀 클지도 모르잖아.”
그때, ER(응급실)에서 호출이 들어왔다. 하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선호는 그녀의 식판을 대신 들어 주며 입을 열었다.
“자아, 그럼 인턴 선생. 오늘도 인턴답게 죽으라고 일을 해야지? 만약 쓰러지면 내 앞에서 쓰러져. 아주 멀쩡하게 고쳐 줄 테니까.”
“네.”
그렇게 싱긋 웃으며 멀어지는 선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하리는 제 머리카락을 천천히 아래로 쓸어내렸다. 정말로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 변태 자식이 변태 자식이 아닌, 그냥 한 의사로 보였고, 의사에서 펠로우 선생님으로, 선생님에서, 한 남자로. 보였다. 게다가 칭찬받고 싶다고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막상 그에게서 직접 들으니. 생각보다 조금, 아주 조금 더 기뻤다.
“정말 나, 미쳤나 봐.”



4장


한창 응급실에서 바쁘게 오더 내리랴, 햇병아리 지켜보면서 감시하랴 정신이 없던 찰나, 휴대폰이 요란하게 그의 허벅지를 찔러 댔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액정을 확인한 선호는 살짝 굳어진 시선으로 여전히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았고, 멀리서 총총거리며 뛰어다니는 하리를 잠시 바라본 뒤, 이내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의 절반은 햇병아리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어째 뜸하다 싶었던 어머니가 드디어 오늘 그를 부르고 있었으니까.
흰 가운을 벗어 던진 그의 모습은 뭔가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구김 하나 없는 까만 셔츠에 남자의 섹시함을 자극하는 붉은 넥타이가 살짝 느슨하게 매어져 있었고, 위아래로 매끄럽게 뻗은 올 블랙 슈트가 그의 균형 잡힌 몸을 단단하게 잡아 주었다.
선호는 조심스럽게 병원을 빠져나와 대한병원으로 향했다. 우신대병원의 부속 병원이자, 아버지와 이혼하는 그 순간에도 어머니가 놓지 않았던 병원. 그렇기에 선호는 이 건물로 들어갈 때마다 껄끄러움과 동시에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을 느꼈다. 마치, 어머니 그 자체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병원장실 앞에 도착한 선호는 점점 답답하게 조여 오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노크를 한 뒤, 살짝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의 두 달 만에 보는 어머니, 이희진의 모습을 보았다.
“저 왔습니다, 어머니.”
선호의 목소리를 타고 희진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두 달 만에 보는 아들을 대하면서도 날카롭고 차갑기 그지없었다.
“문 닫고, 들어와.”
짤막한 한마디. 어차피 처음부터 따뜻하게 반기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기에 선호는 아무 말 없이 문을 닫고서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바깥과 단절이 되고서야 희진은 책상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선호의 앞으로 다가와 정면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대한병원의 병원장이자, 이영철의 본부인에게서 태어난 그의 유일한 핏줄, 이희진. 한애령이 겉으론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한 이미지라면, 그녀는 겉과 속, 그 모든 것이 냉혹하면서도 불같기 그지없는 여자였다.
“못난 것.”
표정 변화 없이 비틀린 입에서 튀어나온 한마디에 선호는 저도 모르게 서늘한 냉소를 지었다. 그러곤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여전하시네요.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희진은 차갑게 등을 돌리고서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선호는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녀 역시 신경 쓰지 않고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이진우가 곧, 귀국할 거다.”
“…….”
“한애령, 그 미친 여자가 불러들였다고!”
한애령이라는 말을 내뱉는 희진의 목소리가 찌를 듯한 분노로 흔들렸다. 선호는 정말이지 변함없이 반복되는 상황에 무감각한 눈빛을 띠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진우가 돌아온다라. 이건 조금 신경이 쓰였다.
“아마도 신성과의 MOU와 관련되어 있을 거야.”
“…….”
“뇌 신경센터가 결국엔 현실화가 된다는 소리야. 그것도 한애령, 그 여자의 손아래에서! 게다가 신성 그룹에서 이번 일을 외동딸에게 맡긴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어. 그런 차에 이진우가 귀국하는 이유가 뭐겠니? 한애령의 그 천박한 놀음에 절대로 질 수는 없지.”
희진의 시선이 다시금 선호의 숨통을 조여 왔다. 그의 눈빛에서 말하는 건 오직 하나였다.
“네가, 이 엄마를 지켜 줘야 해. 이 엄마한테는 너밖에 없어. 그 말도 안 되는 모자에게 이 엄마가 비참하게 추락하는 모습을 보고 싶니?”
어느새 그녀는 선호에게로 다가와 날카로운 손끝으로 그를 붙잡았다. 선호는 욕망에 꿈틀대는 어머니의 눈동자를 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지었다.
“과거는 다 잊고, 다시 메스를 잡아. 네가 그들을 이기지 못할 리 없어. 넌 천재야. 다시 메스를 잡을 수 있다고! 뇌 신경센터의 센터장도, 우신대병원도, 모두 다 네 것이 될 수 있다고! 그 가짜들이 아닌!”
“어머니.”
“너마저 나를, 실망시키지 마라.”
붙잡힌 손이 떨어져 나가고, 희진은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아무 말 없이 원장실을 빠져나갔다. 선호는 이제야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잊고 있었던 싸한 통증이 온몸을 무겁게 짓눌렀다. 욕망과 탐욕으로 뒤섞인 이 미친 놀음에서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선호는 어머니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정말은 너무나도 가여운 분이었으니까. 할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외할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어머니는 불안정한 가정 속에 결국 자신의 가정도 잃고 말았다. 그러한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오직 병원. 병원뿐이었다.
대한병원을 빠져나온 선호는 지친 기색으로 핸들을 꺾었다. 한애령의 양자, 이진우가 돌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신성 그룹과 그렇고 그런 관계까지 맺으려고 하고 있다. 정말이지 자신에게 주어진 말을 정확히, 그리고 치밀하게 사용하는 한애령이 무섭기까지 했다.
어머니가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불꽃이라면, 한애령은 소리 없이 그 불꽃을 삼켜 버리는 물이었다. 고요하고 조용하게, 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침식해 버리는 아주 무서운 독.

* * *

연구실로 향했던 하리는 채 가 보지도 못하고서 현재 응급실에 끌려와 피를 뽑고, 드레싱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연구실에도 그는 없을 것 같았다. 정말로 제대로 외출을 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그럼 오늘은 하루 종일 못 보는 건가?
그녀는 저도 모르게 엷은 한숨을 쉬다 이내 번쩍 눈을 떴다.
‘잠깐, 설마 내가 실망한 거야? 아니지? 아니야. 그래, 오히려 안심하는 거야. 이건 안도의 한숨이라고.’
“어, 선생님 오셨어요.”
그때, 한 여자 레지던트의 목소리에 하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응급실 입구에 서 있는 선호의 모습에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반가움과 동시에 밀려든 낯선 설렘. 그는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아마 외출 후 바로 이곳으로 온 듯싶었다. 첫 만남 때 그의 평상복 입은 모습을 보긴 했지만, 그때는 제대로 변태로 봤기 때문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고, 지금은 왠지 느낌이 색달랐다. 특히 살짝 흐트러진 넥타이가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인턴 선생.”
선호는 하리를 발견하고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하리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서 얼른 고개를 돌려 환자를 찾았지만, 아까는 그렇게도 바글거리던 환자들이 지금은 보이지가 않았다.
“인턴 선생?”
“네, 네.”
하는 수 없이 하리는 선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체취에 다시금 감각이 찌릿한 반응을 보였다.
“연구실에 두 번째 자료 뒀었는데, 안 가져갔지?”
역시 두고 갔구나.
“아, 가려고 했는데, 보시다시피 응급실 좀 도와준다고요.”
“그럼 지금 가자.”
선호가 웃으면서 먼저 등을 돌렸고, 하리는 침착이라는 단어를 수백 번 반복하며 그 뒤를 따라나서려고 할 때, 멀리서 외과 레지던트가 급하게 주변을 살피더니 이내 하리를 보고선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거기, 인턴!”
“네?”
갑자기 하리를 부르는 목소리에 선호 역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뭔지는 몰라도 표정이 꽤나 다급해 보였다.
“오늘 인턴 듀티(Duty)지?”
“아, 네.”
“지금 당장 3번 수술방 어시 좀 부탁할게. 오늘따라 수술방에 사람이 몰려서 손이 모자라. 급하니까, 빨리!”
“알겠습니다.”
간만에 수술방 어시였다. 하리가 곧장 그 외과 레지던트의 뒤를 따르려는 찰나, 선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챘다.
“선생님?”
하리는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려다 이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선호의 표정이 너무나도 새하얗게 질린 채 굳어 있었다. 게다가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님.”
“아.”
선호는 저도 모르게 낚아채 버린 행동에 놀라며 서둘러 손목을 풀어 주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손목이 조금 시큰거렸지만, 그것보다 선호의 표정이 더 심각해 보여서 하리는 걱정스럽게 그를 다시 한 번 불렀다.
“괜찮으세요?”
“괜찮아, 미안해. 얼른 가 봐.”
하리는 선호가 마음에 걸렸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재빨리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하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선호는 급하게 비상구 계단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참았던 숨을 격하게 몰아쉬며 앞으로 몸을 숙였다.
“하아, 하아!”
마치 숨이 끊어질 듯, 불안정한 호흡이 연신 이어졌다. 선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손. 아무리 붙잡아도, 억눌러도 그날의 기억이 악몽처럼 제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3번, 수술방.”
낮게 억눌린 목소리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하필이면 왜, 거기일까. 또 하필이면 그녀의 앞에서……. 3번 수술방, 3번 수술방. 아무리 엷어졌다고 해도 아직 그곳은 과거가 뒤엉켜 그를 집어삼키는 곳이었다.
‘이래도 어머닌 제게 메스를 주실 테지요. 그때처럼, 똑같이.’

수술의 어시로 오는 내내, 그리고 수술방에 들어와서도 하리는 선호가 걱정되었다. 뭔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마치 그때 수술방 모니터 실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했던 느낌.
“등산하던 도중 추락사로 GCS(환자 의식 상태를 표시하기 위한 일종의 지표) 6상태 B.P(혈압) 80에 60. 외상도 심하지만, 머리를 가장 크게 다쳤으며 혈종이 의심되는…….”
“그럼, 바로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하리는 메스 끝으로 서서히 배여 가는 피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그가 내과로 오게 된 일과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을 되찾은 선호는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다시금 타자를 두드렸다. 지금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뭐라도 닥치는 대로 해야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지막이 노크 소리와 더불어 빠끔히 문이 열리며 하리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수술이 끝난 모양이었다.
“자료 가지러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그녀는 뒤로 숨겨 왔던 샌드위치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곤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주 신선하게 공수한 샌드위치입니다. 제가 꼭 갚아 드린다고 했죠?”
하리의 등장에 선호는 절로 입꼬리를 내리며 손짓했다.
“얼마나 신선한지 먹어 볼까?”
소파에 마주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그를 보면서 하리를 아까보다는 괜찮아 보이는 모습에 안도했다. 아니면 그냥 괜찮은 척하는지도 모르고.
“이건 좀 급해서, 내일 저녁까지 해 줘야 해.”
선호는 역시나 두툼한 자료를 건네주었고, 하리는 그 방대한 자료에 절로 썩소를 지었다. 하!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 이걸 내일까지 다 하라고? 장난해, 지금!
아까까지만 해도 살짝 걱정스런 기색을 띠며 웃어 보이던 하리의 표정이 삽시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자, 선호는 절로 꿀꿀했던 기분이 상쾌해지고 있었다. 아무튼, 절대로 숨기는 법이 없지. 그래서 좋았다. 자신의 주변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뭔가를 숨기기 바빴으니까. 그럼 그 역시도 그 거짓된 놀음에 놀아나며 저 자신을 꼭꼭 숨겨야만 했다.
“인턴 선생.”
“네.”
절로 퉁명스런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하지만 선호는 신경 쓰지 않고서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를 삼키며 말했다.
“인턴 선생은 왜 의사가 된 거야?”
두툼한 자료에 한숨만 푹푹 쉬던 하리는 뜬금없는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왜 의사가 되긴요. 당연히 살리려고 의사가 됐죠.”
“…….”
“사람들 살리고, 병을 고치고. 그러려고 다들 의사 된 거 아니에요? 선생님은 뭐 특별하세요?”
“풉!”
순간, 선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뱉어냈다. 그러곤 숨이 막힐 정도로 크게 웃음을 쏟아 냈고, 하리는 갑자기 미친놈처럼 웃어 대는 그 모습에 살짝 기분이 나빠져서 토라진 목소리로 눈을 흘겼다.
“왜 웃으세요? 제 대답이 너무 유치해서?”
“아, 아니. 하하하하. 정답이라서.”
“네?”
“그래, 의사가 사람 살리고, 병 고치려고 의사 하는 거지. 의사가 뭐 다른 게 있냐? 그러려고 하는 거지. 그래서 메스를 잡은 거지.”
가장 기본이 되는 걸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단순한 것을. 그게 옳은 것인데. 어느 순간 자신이 왜 의사가 되었고, 메스를 잡았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을 만큼, 그의 주변으론 그 기본의 마음조차 잊어버린 채, 오직 제 욕심을 위해 메스를 잡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선호는 웃음기를 머금고서 턱을 괴고서 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리는 갑작스런 그의 행동에 당황과 동시에 어제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며 콩콩콩, 다시금 기분 좋은 울림이 시작되었다.
“왜, 왜 그렇게 보세요?”
“예뻐서.”
“네? 딸꾹!”
하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미 놀란 가슴에 시작된 딸꾹질은 멈추지 않고서 연신 귀엽게 몸을 들썩였다.
“딸꾹! 딸꾹!”
“푸하하하하하!”
“우, 웃지 마세요! 딸꾹!”
좀 진지한 분위기가 되나, 싶었더니 딸꾹질을 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역시 햇병아리, 도대체 언제 어른이 될까? 꼬마로 승격된 거 다시 애기로 떨어지게 생겼네.
“딸꾹! 딸꾹! 그, 그러니까. 왜 그런, 딸꾹! 말을. 딸꾹! 하셔서!”
정말 쪽팔려 미치겠다! 대체 이건 왜 이렇게 안 멈추는 거야!
“멈추게 해 줄까?”
한참 웃고 있던 선호가 넌지시 말을 던지자, 하리는 그러한 그를 노려보며 여전히 입을 막고 있었다.
“숨, 참으라고요? 딸꾹!”
“아니.”
“그럼 물? 딸꾹!”
“에이, 명색이 의사인데. 더 확실한 방법이지.”
그의 입가에 걸친 미소가 좀 더 진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순식간에 그녀의 손을 잡고서 코앞까지 바짝 잡아당겼다. 갑자기 너무나도 거대하게 다가선 그의 모습에 하리는 마치 겁에 질린 아이처럼 눈을 크게 뜨고서 여전히 딸꾹질을 하며 선호를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너무나도 예쁜 햇병아리.
달콤하고 은밀한 숨결이 서로의 살결 위로 스치고, 콩콩 뛰던 심장이 어느새 천둥 번개처럼 몰아치며 하리는 저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속은 폭풍이 몰아치는데, 주위는 숨이 막힐 것처럼 고요했다. 간간이 울리는 그녀의 딸꾹질 소리. 선호는 잡았던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풀어 주더니 이내 그토록 만지고 싶었던 그녀의 한쪽 뺨을 살며시 감싸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리를 좁혀 왔다.
하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딸꾹질은 계속 흐느꼈고, 머리는 새하얗게 타들어 갔다. 온몸이 뜨거운 감각에 들뜨면서 심장은 이미 아래로 쿵 하고 떨어져 버렸다.
어느새 거의 입술에 닿을 듯 말 듯 다가온 그의 낮고 깊은 목소리가 결국, 그녀의 모든 이성을 녹여 버렸다.
“역시, 예쁘다.”
그리고 곧장 부드럽고 물컹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머금었다. 하리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때 살짝 만져 본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더 부드러웠고, 훨씬 더 뜨거웠으며, 훨씬 더. 달콤했다.
선호는 여전히 움찔대는 그녀의 입술을 위아래로 훑으며 혀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매 순간 탐하고 싶었던 입술. 그녀에게서 흐르는 달콤한 숨결을 연신 느끼고 싶었던 그 입술. 하지만 선호는 미칠 듯이 몰려드는 본능을 억누르며 좀 더 부드럽게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어느새 콩콩 울리던 딸꾹질도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짜릿함과 쿵쾅거림이 전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삐삐―
거의 무아지경으로 빠져들던 하리는 아득히 들려오는 호출기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선호 역시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 한 진한 아쉬움에 탁해진 시선을 떼며 고개를 들었다.
“어때, 확실하지?”
하리는 잠시 멍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온 얼굴이 터질 듯이 벌게지면서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선호는 거의 익어 버린 그녀의 얼굴에 쿡쿡 웃음을 띠며 아직도 그녀를 달라고 아우성치는 저를 다독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바로 이성을 잃어버리다니…….
“뭐, 딸꾹질 멈추게 하려고 한 거니까.”
게다가 먼저 제 볼을 훔쳤던 건 그녀였다. 그러니, 이걸로 쌤쌤!
‘뭐지? 내가 방금 뭐 했지? 뭐 했더라? 뭐한 거지!’
호출당한 스테이션을 향해 달려가는 하리는 지금 제가 어디를 향하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온통 패닉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제 입술을 가리고 있었다. 여전히 뜨겁고 달콤한 여운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키스, 한 거야. 지금? 지금 딸꾹질을 키스로 멈추게 한 거냐고!
“조하리!”
문득, 저를 부르는 소리에 하리는 걸음을 멈췄다. 진이였다. 그녀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 이내 하리에게로 뛰어가서는 밝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드디어 너의 임이 오신다.”
“뭐?”
“진우 선배. 진우 선배가 곧 신경외과로 복귀한대.”
하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기쁜 일인데, 무척이나 설레고 떨리는 일인데. 그런데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떨림은 진우 선배를 향한 것이 아닌, 여전히 제 입술에 남아 있는 그 남자가 준 감각의 아릿한 설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