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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아주 미치고, 돌겠다.
오랜만에 오프인 태종과 술잔을 기울고 있는 선호의 표정이 어두운 그림자가 내리다 못해 더없이 깊은 어둠의 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제의 키스라고도 할 수 없는 좀 진한 뽀뽀 사건 이후로, 그녀가 당황할 거라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오늘 하루 종일 내내! 그녀는 선호를 피해 다녔다. 같은 병원에서 도망쳐 봤자지, 라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다. 컨퍼런스 끝나자마자 여자 레지던트한테 붙어 있고, 회진 끝나자마자 차트 맡겨 두고 콜 왔다고 쌩! 그 뒤로는 감감무소식. 하필이면 정리 자료도 어제 다 줘 버려서 부를 일이 없었고, 전공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아무 일 없이 인턴을 오라 가라 할 수도 없는 노릇. 끝으로 오늘 저녁, 잠시 나간 틈을 타 자료 정리 말끔하게 해 놓고 우렁각시처럼 사라져 버렸다. 굉장한 순발력이었다.
“하아!”
깊은 한숨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선호의 모습에 결국 짜증이 치민 태종이 그를 노려보았다.
“너 그렇게 나랑 술 마시기 싫었냐? 아주 한숨이란 한숨은 혼자 다 쉬는구만. 복 나간다, 새끼야!”
그럼에도 선호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가 않았다. 역시 너무 심했나? 하긴, 아직 애기인데 성급했는지도. 그럼 이걸 무엇으로 달래 줘야 하나. 정말 사탕이라도 하나 쥐여 줘? 정말, 천하의 최선호가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이진우 복귀하는 거 알지?”
선호는 이진우라는 말에 잠시 술잔을 멈칫하다, 이내 단숨에 삼켰다. 왠지 술맛이 굉장히 썼다. 오게 되면, 한 번은 만나야만 했다. 어쩌면 가족 모임이라는 끔찍한 둘레로 만나게 될지도 몰랐다.
“외삼촌? 쿡, 당연히 알지.”
“너희 족보 보면 내가 머리가 더 아파. 역시 천재들은 집안도 그렇게 버라이어티 한 거냐?”
“원래 천재가 참 피곤하게 살거든.”
선호와 태종은 애써 웃어넘겼지만 그렇게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직 병원에선 한애령의 손자가 선호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조용할 수 있었지만,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고, 더 나아가 대한병원장의 아들이라는 사실 역시 알려진다면 일부러 한국대를 선택했던 선호의 선택이 헛고생되는 셈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이진우가 돌아오면서, 뇌 신경센터장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고 있어.”
“그것 때문에 우리 어머니한테 불려 갔었지.”
이진우가 한애령의 양자라는 사실은 이미 병원 내 교수들 사이에선 알려진 사실이었다. 만약 이진우가 이번에 신경외과로 제대로 복귀를 한다면, 병원 전체로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것도 한애령이 먼저 손을 썼겠지만.
“최선호.”
“왜, 내가 그렇게 좋냐? 뭘 그렇게 진하게 불러. 그렇지만 난 이미 햇병아리 꺼다.”
말을 돌려 버리는 그의 모습에 태종도 더는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래, 됐다, 됐어. 너랑 무슨 진지한 얘기를 하냐. 그나저나 햇병아리는 또 누구야?”
그의 말에 선호의 신음이 다시금 깊어지면서 술을 또다시 삼켰다. 아까보다 술맛이 더욱더 썼다.
“있어. 지금 내 깊은 한숨의 가장 큰 원인. 그럼에도 보고 싶은 우리 햇병아리.”

늦은 저녁, 당직실 책상에 처박혀 전공의 시험, 그까짓 꺼 다 먹어 버리겠어! 라며 투지를 불태우던 하리는 몇 분을 가지 못한 채, 입술을 물어뜯으며 절망 모드를 달리고 있었다. 바로 최선호. 그 망할 인간 때문에!
딸꾹질을 키스로 멈추게 한 그 변태 자식을 피하고자 오늘 얼마나 똥줄 타게 뛰어다녔던가!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는 부지런한 인턴이라고 종일 칭찬도 받았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순 없었다. 오늘은 운이 좋아 피했다고 하지만, 내일은? 다음은? 모레는? 게다가 논문 연구는 어쩌고! 게다가 그쪽이 먼저 한 거잖아. 왜 내가 이렇게 꽁지 빠지게 피해 다녀야 하는 거지? 차라리 숨을 참고 물을 마시지. 어떻게 키스로 딸꾹질을! 역시 선수야. 변태 자식! 그런데 거기서 난 왜 눈을 감은 건데!
“아욱!”
진이는 침대에 앉아 뇌 신경계 책을 눈알 빠지게 보다, 또다시 혼자 생쇼 모드에 돌입한 하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저런 상태의 머릿속엔 항상 그 남자가 있었지. 바로 최선호.
“야, 너의 임에게 가까이 가려면 열공해야 하지 않겠니? 이러다 너의 임 바뀌겠다.”
“아니야, 나의 임은 하나야. 하나라고!”
“누가 뭐래?”
되레 펄쩍 뛰며 묻지도 않은 걸 답해 주는 하리의 모습에 진이는 묘한 눈빛을 띠었다. 어제 진우 선배가 돌아온다는 말에도 뭔가 보여 주는 리액션이 영 민숭민숭했었다. 게다가 지금도 어딘지 모르게 나사 하나가 풀린 것 같은 모습. 진이는 저러한 하리의 모습이 영 불안했다.
“저기, 진아.”
“왜?”
하리는 샤프심을 딸깍거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진이는 그녀가 말하기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애써 대수롭지 않게 다시금 입을 열었다.
“뭔데? 이 언니 뇌신경계 외우느라 내 신경이 뽑힐 것 같단다. 빨리 말하렴.”
하리는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여전히 책에만 신경을 쓰고 있는 진이에게 물었다.
“키스는, 어때? 어떤 거야?”
어렵사리 열린 그녀의 입에서 나온 키스라는 단어에 진이는 속으로 빙고를 외치며 여전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훗, 요즘 네가 나한테 성교육을 받고 싶은 모양이구나. 뭐, 키스는 모든 스킨십의 시작이지. 몸으로 속삭이기 전, 입으로 먼저 워밍업을 한다고 할까?”
“입이랑 입이 살짝 와 닿는?”
“미친, 그게 키스냐? 뽀뽀지. 키스는 혀와 혀의 속삭임이야.”
“그, 그렇지? 키스는 그런 거지? 딸꾹질한다고 입으로 막은 건 뽀뽀야. 그렇지?”
“뭐? 딸꾹질을 입으로 막아?”
“됐어!”
원하는 대답을 얻은 하리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그래, 그럼 그건 키스가 아닌 뽀뽀다. 혀와 혀가 막 그러진 않았어. 그저, 살짝. 아주 살짝.
하리는 저도 모르게 유리에 비친 제 입술을 살짝 만져 보았다. 아주 뜨겁고 부드러웠던 무언가가 살며시 포개지면서, 그보다 더한 열기와 달콤함이 흘러내렸었다. 그리고 그의 혀가 살짝, 아주 살짝 닿아서…….
그때의 기억이 다시금 생생히 떠오르자 귓불이 다시금 붉어지면서 심장이 다시금 제 박자를 놓치기 시작했다. 하리는 얼른 입술을 문지르며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에 애써 집중을 시켰다. 만약 그게 키스가 아니라 뽀뽀라면, 그것도 엄청 쿵쾅거리고 죽을 것 같았는데. 진짜 키스를 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것보다 훨씬 뜨거워질까? 막 녹아내릴 만큼? 그 남자는 어떤 맛이…….
‘헉! 미쳤어, 미쳤어, 조하리!’
이게 지금 무슨 변태 같은 생각이야! 그걸 왜 진우 선배가 아닌 그 남자에게서 궁금해하는 거냐고!
‘그래, 그 남자가 이상한 짓을 해서 그래. 이건 완전 성추행이야! 진우 선배가 오면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하리는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을 확인했다. 크리스마스가 정말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이것이 운명인지, 우연인지. 시기적절하게 진우 선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 3년 전 하지 못한 고백을 다시 할 절호의 기회!
그녀는 다시금 뭉클뭉클 떠오르는 선호의 기억을 애써 지우며 책상 위로 연신 고백, 고백을 새겨 넣었다.
‘진우 선배가 오고 있어. 조하리. 진우 선배가 오고 있다고! 헉, 왜 그 자식 이름을 쓴 거야!’
진이는 그녀의 바로 머리 위에서 고백, 고백을 쓰다, 갑자기 최선호를 쓰곤 화들짝 놀라 지우는 하리의 행동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최선호, 그 남자가 우리 햇병아리 머릿속에 뭔가 폭탄 하나를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건 아마, 햇병아리의 마음속 시간을 단축시킬 무언가가 분명했다.

* * *

인천 공항 입국장을 나선 한 남자가 문득 멈춰 서선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우울해 보였다. 짧게 정돈된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굉장히 부드러운 눈매가 묘한 서늘함을 품고서 휘어져 있었다. 꽉 다물어진 입매와 표정. 굉장히 서글한 인상임에도 풍기는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매서웠다.
“결국, 돌아왔네.”
그의 입술이 비틀리며 내뱉은 한마디는 지나치게 담담했다. 그때, 그의 앞으로 차 한 대가 부드럽게 멈춰 섰고, 그는 조금 전의 표정을 전부 지우고서 엷은 미소를 띠며 커다란 짐 가방을 차에서 막 내린 남자에게 맡겼다.
“곧장 갈 테니까, 짐은 바로 집으로 부쳐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주인을 만난 차는 빠른 속도를 내며 한적한 도로를 빠져나갔다.

* * *

다음 날 아침 컨퍼런스 시간. 선호는 저도 모르게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애꿎은 볼펜을 만지작거렸다. 만약 오늘도 피해 다니면 어쩌나? 어떻게 달래 줘야 하나. 왠지 메스를 잡는 것보다 훨씬 까다로운 일인 것 같았다.
어느새 컨퍼런스 실 앞까지 도달한 선호는 심호흡을 하고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나 지각 하나 없이 정확히 앉아 있는 레지던트들 사이로 하리의 모습이 단번에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어제처럼 눈을 피하거나 하진 않았다. 물론 여전히 시선이 살짝 틀어져 있긴 해도,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것 같아서 선호는 저도 모르게 환희에 뒤섞인 목소리로 기분 좋게 입을 열었다.
“자아, 오늘도 시작해 볼까.”
하리의 시선이 다시금 그에게 향하면서 선호는 저 작은 눈빛에도 기뻐하며 설레는 맘을 느끼며, 저 자신이 얼마나 햇병아리에게 빠져 있는지 새삼 느끼고 말았다. 그러니까, 먼저 다가갈 것이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물론 정말로 예뻐서, 키스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저지른 일이지만, 그래도 제대로 사과를 할 것이다. 그만큼 그에겐 너무나도 소중한 여자였으니까.
컨퍼런스와 회진을 마친 선호는 먼저 재빨리 등을 돌린 채 사라졌다. 하리는 무슨 일 때문에 저렇게 쏜살같이 사라지나, 하다가 이내 고개를 붕붕 돌렸다. 아까 진이가 잠깐 3층 스테이션으로 오라고 했었는데, 얼른 그쪽으로 가야 하는데, 자꾸만 시선이 선호가 사라진 쪽으로 돌아갔다. 무진장 신경이 쓰였다. 혹시 또 그때처럼 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또다시.
“뭐, 별일 있으려고. 신경 쓰지 말자, 조하리.”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서운함, 서운함이라고 해야 할까.
선호는 곧장 매점으로 달려가 초코 우유를 샀다. 저번에 사 주겠다고 약속했었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자료 도표는 깔끔하고 완벽했다. 그걸 핑계 삼아 주면서 사과를 하면 될 것 같았다. 아까 슬쩍 들어 보니, 3층 스테이션으로 갈 것 같던데. 다른 데로 가기 전에 얼른 가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하려는 찰나,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어머니. 선호는 전화를 받지 않고서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끊긴 채 몇 초 안 되어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이진우가 오늘 귀국했다.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으라는 충고 아닌 충고. 한바탕 또 파란이 몰아칠 것 같았다. 뭐, 어차피 각오를 한 일이긴 했지만.
선호는 제 손에 들린 초코 우유를 바라보며 얼른 햇병아리와 다시 마주 보며 웃고 싶다는 생각에 다시 걸음을 달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아까워서 비상계단을 이용해 달렸다. 너무 급하게 달린 나머지 숨이 턱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얼굴 위로 드리워진 웃음만큼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3층까지 달려온 선호는 저 멀리 보이는 하리의 모습에 더 진한 미소를 머금고서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날카롭게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 이번 크리스마스에 다시 진우 선배한테 고백할 거야.”
그리고 그의 얼굴 위에 떠올랐던 미소도 어느새 서늘하게 메말라 버리고 말았다.

3층 스테이션 쪽으로 걸음을 하니, 진이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까 NS(신경외과)에 진우 선배 왔었대. 정말 오긴 왔나 보더라. 잠깐 인사하러 온 거라 바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내일이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아, 정말? 잘됐다.”
잘됐다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영 힘이 없어 보이는 하리의 모습에 진이는 수상한 눈빛을 띠다, 이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최선호 선생님 어떻게 생각해?”
순간, 하리는 눈을 깜빡이며 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이는 전혀 물러서지 않고서 더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밀려든 하리는 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괜히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
“가, 갑자기 그 인간 얘기가 왜 나오는 건데? 어떻게 생각하긴.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거려? 아릿하고 찌릿하면서 자꾸만 만져 보고 싶은 생각 들고. 나도 모르게 그 사람만 멍하니 생각하다가, 안 보이면 걱정되고, 내가 안 보면 괜찮지만 그 사람이 안 보면 서운하고, 그런 이기적인 생각에 지치고. 그러지 않아?”
“진아.”
너무나도 정확하게 짚어 낸 진이의 말에 하리는 뭐라 변명할 거리를 찾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내가 그 남자에게,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그리고 진이는 그걸 왜 이렇게 다 끄집어내는 걸까.
“나, 나는. 그러니까, 나는. 진우 선배가…….”
“이번 크리스마스 때, 3년 전 네가 못했던 거 확실하게 해 봐.”
하리는 진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매번 장난치던 진이와 달리 무척이나 진지하게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진우 선배 만나서, 3년 전에 네가 남겼던 그 미련 같은 덩어리를 다시 한 번 마주 보라고. 그리고 결정해. 지금 네가 누굴 생각하고 있는지. 정말로 진우 선배인 건지. 그래야, 우리 햇병아리 머릿속이 편안해질 거야.”
어느새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고개를 숙였다. 미련, 미련일까. 어느새 진우 선배의 마음이 미련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자신이 진우 선배를 좋아했던 그 감정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거야? 누구에게? 설마…….
“……나, 이번 크리스마스에 다시 진우 선배한테 고백할 거야.”
진우 선배에게 고백하겠다고 말한 그 순간, 어렴풋이 느꼈다. 아무런 느낌도 일지 않는다는 사실을. 3년 전, 고백하겠다며 한껏 들뜨면서도 떨리고, 떨리면서도 행복했던 느낌 대신. 차분하게 정리를 하는 느낌. 그리고 깨달았다. 더 이상, 진우 선배를 예전처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그때의 마음은 지금, 지금…….
그때, 성큼성큼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익숙한 손길이 그녀를 거칠게 붙잡았다. 하리는 저를 붙잡은 손길에 눈을 크게 떴다.
“선생님?”
선호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본 하리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뭔가 거센 분노로 일렁거리는 눈동자. 그리고 입가에 싸늘함을 머금고서 단단히 다물어져 있었다. 이렇게 차가운 모습은, 처음이었다.
“따라와.”
하리는 그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끌려갔다. 진이는 저도 모르게 등골에 서린 섬뜩함을 느끼고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마, 하리의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한 걸 보니 최선호, 이 남자가 하리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것도 그가 넘어야 할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리가 꼬마에서 어른이 되어, 사랑을 알게 될 그 순간을. 열병처럼 달아오를 마음을.
“어차피 우리 애기가 어장관리라는 고차원적인 놀이를 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아마 결론이 빨리 나겠지.”
어쩌면 이미 났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비상계단으로 들어선 선호는 달칵 이는 서늘한 금속 소리와 함께 문을 잠갔다. 하리는 살짝 몸을 떨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두렵지는 않았다. 그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고만 싶을 뿐이었다.
선호는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이성을 애써 붙잡았다. 뭔가 엄청난 소리를 그녀의 입에서 들었고, 그때부터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서 생각이란 놈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들어야 했다. 반드시!
“조하리.”
“……네.”
인턴 선생도 아닌, 조하리. 이 세 글자가 그의 입에서 떨어져 나왔고, 그 뒤로 이어진 말에 이번엔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너 정말, 3년 전 크리스마스 때. 그 자식 때문에 울었어?”
“선생님?”
“정말 그런 거야? 그런 거냐고!”
3년 전 크리스마스 때, 자신이 울었던 걸 이 남자가 어떻게 알지? 그리고 그 자식이라니, 설마.
“진우, 선배요?”
그녀의 입에서 정말로 이진우. 그 자식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왠지 모를 허탈함에 끓어올랐던 분노가 사라지며 점점 머릿속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이진우. 정말, 이진우야?”
“선생님이 대체 진우 선배를 어떻게 알아요? 아니, 그것보다 대체 3년 전 크리스마스를 도대체 어떻게…….”
선호의 공허한 눈동자가 하리를 그대로 비추었다. 빌어먹을 이 상황에도, 가늘게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를 안아 주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아직도 사랑하니? 좋아해?”
거의 속삭이듯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까보다는 차갑지 않았지만, 그것이 더 마음이 아파서 하리는 자꾸만 눈가가 시큰거렸다.
“선, 생님…….”
“하긴, 그래서 고백하려는 거겠지. 아직도 잊지 못해서. 3년 전에도 지금도.”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선호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초코 우유를 꺼내서 그녀의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다. 하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살짝 와 닿은 그의 떨리는 손길을 느끼며 그가 하는 마지막 한마디를 들을 때까지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울지 않게 빌어 줄게.”
다시금 차가운 금속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고 그 뒤로 저벅저벅 그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하리는 부들거리는 손길로 제 손에 쥐어진 초코 우유에 붙은 노란 쪽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했으니까, 괜히 나 피하지 마. 인턴 선생이 나 피하면, 조금 마음이 아파서 그래.

“흐, 으흐흑. 피하지, 말라면서. 흐흡. 선생님은 왜, 피한 건데요!”
차오른 눈물이 결국은 방울방울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리는 그가 준 초코 우유를 꽉 쥐고서 자꾸만 머릿속으로 번지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떠올리며 싸하게 번지는 통증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통증 사이로 예전의 감정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 진우 선배에게 고백하지 못해 미치도록 아려 왔던 마음. 설레었고, 떨렸으며, 굉장히 아릿했던 그 마음이, 지금 누구에게 닿아 있는지도.
비상구를 빠져나온 그는 멍한 시선으로 연구실로 들어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론, 하리의 마음속에 누군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었다. 3년 전 크리스마스 때 이미 느낀 사실이니까. 하지만 아무리 알고 있던 것이라고 해도 화가 나는 건 참을 수가 없었고, 그보다 더 화가 나는 건 그게 이진우라는 사실과 그 이진우가 어쩌면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선호는 부들거리는 손끝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점점 더 가슴 위로 아릿한 고통이 스몄다. 제가 아니라는 아픔보다 하리가 다시금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조그만 햇병아리가 또다시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럼에도 이진우를 좋아하는 햇병아리의 마음이 원망스럽고, 아플 뿐이었다.



5장


어제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계속해서 드는 공허함과 틈을 찾아 파고드는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하리의 머릿속을 연신 바늘로 쑤셔 넣었다. 하루 사이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과 핏기가 사라진 입술, 항상 생기 넘치던 눈동자는 마치 다 타 버린 잿더미를 보는 것처럼 삭막하기만 했다.
“괜찮아?”
선호에게 불려 간 이후, 그가 나온 이후로도 한참을 보이지 않아 결국 진이가 비상구 쪽으로 갔을 때, 이미 너무 많이 울어서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하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진이는 그토록 아파하는 하리의 모습도, 또 그렇게 아파할 거라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 남자를 많이 담아 버린 듯했다.
“괜찮아, 나 얼른 가 볼게. 이러다 컨퍼런스 늦으면 안 되잖아.”
힘없이 웃어 보이는 하리의 표정이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어쩌면 하루 종일 그 남자 얼굴을 봐야 할 텐데.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더 가혹하게 느껴지면서도, 어쩌면 이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당직실을 빠져나온 하리는 애써 태연하게 제 얼굴을 다독이며 걸음을 옮겼다. 애써 피하지 말자, 똑바로 보는 거야. 그때, 멀리서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하리는 순간 걸음을 멈추고서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가운을 입고서 아무 말 없이 다가오는 그의 걸음 소리가 다시금 쿵쿵, 그녀의 가슴으로 진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하리는 또다시 시큰거리며 아려 오는 심장을 겉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바짝 마른 입술을 꽉 깨물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선호는 그러한 하리의 표정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컨퍼런스 시간 내내, 선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리를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저도 모르게 시선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하루 사이에 너무나도 야윈 얼굴, 새하얗게 질린 얼굴과 그토록 밝았던 표정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 위로 자리 잡은 까만 그림자가 햇병아리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시선이 아리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손을 뻗고 싶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그저 괜찮다고 말하며 안아 주고 싶어서. 그는 애꿎은 손끝을 더욱 꽉 움켜쥐며 손바닥에 손톱 끝이 깊이 파고들 때까지, 그렇게 저 자신을 억눌러야만 했다.
회진 시간,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레지던트들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조그만 실수 정도는 꾸짖음보단 격려로서 대해 주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오늘 그는 단 한 번도 입꼬리를 올려 웃지 않고 있었다.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듯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까부터 계속 선생님께서 오시길 기다리고 계셨어요.”
간호사도 선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호는 환자에게만은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가 그렇게 불편하셨어요?”
“그게, 이상하게 어제부터 배가 영 아파. 먹은 것도 없는데 토하기도 했고, 지금도 영 다리를 뻗지도 못하겠는 게…….”
선호는 환자의 차트를 꼼꼼히 읽다가 잠시 실례를 하고선 환자의 우측 하복부를 가볍게 눌러 보았다. 하지만 환자는 별 반응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손을 떼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차가워지면서 이 환자를 담당하고 있는 2년 차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아?”
갑작스런 질문에 2년 차 레지던트가 살짝 당황하다 이내 환자가 보여 주었던 상태를 떠올리며 차근히 입을 열었다.
“아뻬(Appe) 아닐까요?”
“아닐까요? 넌 지레짐작으로 환자 상태 파악하나? 눈으로 CT 찍어?”
“아, 아닙니다!”
순간 서늘한 목소리가 2년 차 레지던트의 머리 위로 곧장 떨어졌다. 그렇게 싸늘한 표정의 선호는 본 적이 없었기에, 다른 레지던트들과 하리도 가슴을 조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 환자 CBC(혈액 검사) 줘 봐.”
떨리는 손으로 넘겨받은 차트를 선호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살폈다. WBC(백혈구) 치수가 어제보다 높았다. 하지만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 걸 보니, 만약 아뻬일 경우 충수돌기에 구멍이 난(천공)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정확히 알아야 하니, CT를 찍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저기, 선생님. 저 큰 병인가요?”
환자가 살짝 굳어진 목소리로 슬그머니 묻자, 선호는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그렇게 큰 병은 아닙니다. 그래도 간단한 수술은 하셔야 할 듯합니다.”
선호는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담당 레지던트에게 짤막하게 오더를 내렸다.
“RLQ(우하복부)에 리바운드 텐더니스(Rebound Tenderness) 반발통 보이는 걸 보니, 아뻬(Appe) 충수돌기염이다. 그래도 정확한 감별이 필요하니까 복부 CT 준비해서 천공 여부, 농양(고름) 형성 확인하고, 보고 나오는 대로 외과에 연락해서 수술방 잡아. 너무 늦으면 후유증 생기니까, 이머전시(Emergency)로 CT 돌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희, 짐작으로 환자 상태 파악하지 마. 아무리 눈에 보이는 증상이라도 제대로 할 거 다 하고 결론 내려. 너희는 배우는 처지이지, 숙련자가 아니잖아. 숙련자도 실수하는 판국에 너희 진단에 환자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거 잊지 말고. 특히 아뻬는 유사한 증상이 많고, 또 증상에 따라서 수술하는 방법이 달라지니까, 쉽게 보지 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치의는 자기 담당 환자 상태를 눈감고도 말할 수 있게 항상 주시해. 저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죄송합니다.”
이렇게 아슬아슬했던 회진이 끝이 나고, 선호는 낮은 한숨을 쉬며 먼저 등을 돌렸다. 레지던트들은 오늘 최선호 선생님이 좀 이상하다는 말을 하며 각자 흩어지기 시작했고, 하리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선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그의 미간이 살짝 움찔하며 오늘따라 유난히도 작아 보이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선생님, 오늘은 연구 자료 도표 정리할 거 없으신가요?”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애써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쓰러워 선호는 자꾸만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목소리는 더욱 차갑게 그녀를 더욱 뒤흔들었다.
“거의 다 끝났어. 더 이상 인턴 선생이 도와줄 필요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하, 하지만.”
“전공의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 다른 인턴들처럼 죽으라 공부만 해. 신경외과, 그렇게 쉬운 곳 아니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신경외과라는 말에 하리는 눈을 크게 뜨고서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호는 어렵사리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오늘 컨퍼런스도, 회진도 아주 엉망이었다. 제 감정 하나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 미숙하게 죄다 보인 꼴이라니. 우습고 한심했다.
그런데 햇병아리. 너만 보면 이상하게 나 자신을 감당할 수가 없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서, 널 볼 수가 없는데. 그런데도 내 시선이 자꾸만 너를 좇아서, 나도 정말 미쳐 버릴 것 같다.
하리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텅 빈 복도 위로 남겨진 하리는 거의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린 눈물을 소매로 닦아 내렸다. 이렇게 아플 수도 있을까, 마치 무슨 병에 걸린 것처럼. 사람이 이렇게 한 사람 때문에 고통받을 수도 있는 거구나. 그의 서늘한 눈빛과 목소리에 3년 전 크리스마스보다 더 힘들고, 더 괴로워 죽을 것만 같았다.
“하리야.”
순간, 그녀는 너무나도 낯익은 목소리에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른거리는 시선 너머로 한 남자가 보였다.
“진우, 선배.”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는데. 3년 전, 저 남자에게 고백하려고, 설레었고. 끝내 하지 못해 눈물 흘리며 기다렸던 사람인데.
“정말 오랜만이다. 여기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날 줄 몰랐어.”
다정하게 파고드는 그의 목소리에도 하리가 지금 떠올리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두근거리는 사람도 단 한 사람.
“네, 선배.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반갑게 인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진우. 자신의 첫사랑은 그렇게 엷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새롭게 두근거리며 지금 너무나도 보고 싶은 건, 선생님, 최선호. 최선호. 그 남자야.

1층 로비에 카페 테라스로 자리를 옮긴 하리는 옛 기억 속과 너무나도 똑같은 진우의 모습에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항상 다정하면서도 너무나도 부드러운 이미지의 그는 마치 우유를 듬뿍 넣은 모카커피 같은 사람이었다. 그에 비해 그 남자는 가끔 씁쓸하면서도 그 씁쓸함에 중독되어 한없이 깊어지는 에스프레소 같다고 해야 할까?
“많이 예뻐졌다.”
잠시 딴생각을 하던 그녀는 진우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피식 웃었다.
“고맙습니다. 선배는 예전과 너무나도 똑같으세요.”
“정말 하나도 안 달라졌어? 조금 서운하네.”
“네?”
“예전보다 더 잘생겨졌다는 말이 듣고 싶었는데.”
“하핫, 선배가 미남이었던 건 예전에도 유명하셨잖아요.”
이진우. 눈에 띄는 미남은 아니었지만, 정말 다정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많은 여자들이 그를 동경했었다. 정말 전형적인 착한 선배의 표본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너 오늘 어디 아프니? 안색이 별로 안 좋아.”
티가 많이 났나? 그래도 제법 웃은 건데.
하리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하긴, 전공의 시험이 얼마 안 남았지? 하리 넌 시험 어디 칠 거야?”
“그게…….”
쉽사리 신경외과라고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뭔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진우도 곤란해하는 것 같아 더는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런 눈빛으로 다시 한 번 그녀의 건강을 살폈다.
“정말 괜찮아?”
“정말 괜찮아요, 죄송해요. 오랜만에 보는 건데 괜히 걱정 끼쳐 드렸어요.”
“아니야, 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지. 나 다음 주부터 정식으로 복귀할 것 같아.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그럴게요. 그리고 선배.”
“응?”
하리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혹시 약속 없으세요?”
크리스마스라는 말에 진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도 3년 전의 크리스마스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모임이 있었고, 하리가 꼭 나와 달라고 부탁했던 기억. 하지만 그는 그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채 미국으로 가야만 했다.
“응, 이번엔 정말 약속 없어.”
“그럼 염치없지만, 그날 광장 앞으로 나와 주실 수 있으세요?”
뜬금없는 부탁인데도 진우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꼭 나갈게.”
“감사합니다, 선배.”
그렇게 진우와 헤어진 하리는 곧장 당직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침대 밑에 아주 깊숙이 박아 두었던 가방을 하나 꺼내 들었다.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는 가방. 하리는 무척이나 편안한 눈빛으로 그 가방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가방 안에 작은 상자가 들어 있었다. 3년 전 크리스마스 날, 그녀가 들고 있었던 그 선물 상자. 하리는 추억에 잠긴 아련한 시선으로 그 상자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며 천천히 뚜껑을 열어 보았다. 조금 빛이 바랜 상자에서 나온 것은 평범한 갈색 털장갑이었다. 그것은 진우가 하리에게 주었던 선물이자, 그녀가 진우를 좋아하게 된 첫 시작의 순간이었다.
처음 새내기 의대생 시절, 첫 동아리 모임으로 그를 만났었다. 그때는 아직 날씨가 좀 쌀쌀했었지만 그래도 대학 신입생이 되고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에 엷은 치마를 입은 것이 화근이었다. 마지막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고, 폼 내려다 얼어 죽는다는 엄마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 정말로 추워 죽을 것 같은 그 순간에, 그가 이 털장갑을 건네주었었다.
‘남자 친구가 잡아 주는 손보다는 덜 따뜻할 테지만, 그래도 쓸 만할 거야. 의사는 손을 아껴야 하니까.’
그날의 그 장갑은 그 어떤 털장갑보다도 따뜻했었다. 아마 마음까지 따스하게 배어든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수년간 그 따스함을 간직하면서 3년 전 크리스마스 날, 이 장갑을 다시 돌려주며 제 손을 이제 선배가 잡아 달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었는데.
하리는 그 장갑을 조심스럽게 잡아 보았다. 그러곤 결심이 선 눈동자로 그것을 다시금 상자에 넣으며 제 어릴 적 풋풋했던 마음에게 그렇게 안녕을 고하였다.
그 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선호의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무뎌지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드디어 크리스마스 날. 어렵사리 오프를 받은 하리는 진이에게 도움을 받아 무릎을 살짝 덮는 빨간 원피스에 매일 질끈 묶기만 했던 머리카락도 예쁘게 늘어뜨리고서 여자답게 화장도 하고, 마치 그때처럼 풋풋하면서도 이제는 성숙한 여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거울 앞에 섰다.
“잘해.”
진이의 짧은 한마디에 하리는 큰 용기를 받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