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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응급실에서 Code blue가 떨어졌다. 버스 추돌 TA(교통사고) 발생이었다. 응급실 비상 출구로 베드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었고, EM(응급의학과)와 더불어 다른 과 레지던트와 인턴들도 다 뛰어 내려왔지만, 상황은 한마디로 피바다였다.
역시나 다급히 내려온 하리는 순간 온몸이 얼어붙었다. 인턴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환자와 수도 없이 많은 피를 봤었지만, 지금처럼 이토록 많은 환자가 한꺼번에 밀려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고 사방으로 오직 피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난생처음으로 코끝이 따가웠다. 비릿한 향기가 후각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조하리.’
멀리서 진이가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리는 억지로 걸음을 떼려고 했지만, 자꾸만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때, 선호의 목소리가 그녀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정신 차려, 조하리!”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 그가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하리는 선호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뭔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분해지면서 오직 저를 바라보는 저 눈동자에 빨려들 것만 같았다.
“진정됐어? 진정 안 됐어도 억지로라도 진정시켜. 지금은 너보다 환자가 우선이야. 의사가 흔들리면 환자는 이대로 다 죽어! 환자 죽이는 의사가 될 셈이야?”
“진정, 됐습니다.”
정말로 거짓말처럼 이성이 되돌아왔다. 선호는 밀려드는 환자에 더는 지체하지 않고서 하리에게 짧게 말했다.
“따라와.”
하리는 선호의 뒤를 다급하게 쫓아갔다. 그는 이처럼 어수선한 응급 상황에서도 무척이나 침착하고 냉정하게 환자를 안심시키며 오더를 내렸다. 그 모습에 하리 역시 덩달아 마음이 차분해지고 있었다.
“선생님, 여기 좀 봐 주세요!”
막 베드에 실려 온 환자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이탈도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산소포화도도 낮았다. 순간, 모니터의 선이 일자를 그었다. 선호는 환자에게 CPR(심폐소생술)을 하며 하리에게 소리쳤다.
“DC기(제세동기) 가동하고, 당장 수술방 연락해!”
“네!”
“200줄, 에피(심근력 강화 및 혈관 수축 작용제), 아트로핀 원 앰플(항콜리성 약품. 심박 수 증진 효과가 있음).”
“에피, 아트로핀 원 앰플 완료, 200줄 차지 완료.”
“물러서. 샷!”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환자의 몸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바이탈은 그대로였다.
“다시 200줄!”
“200줄 차지 완료!”
다시 한 번 쿵! 쿵! 선호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대로 몇 분 안에 심장이 정상 작동을 하지 않는다면 뇌 손상과 더불어 목숨이 위험했다.
“한 번 더, 샷!”
하리는 있는 힘껏 심폐소생술을 하며 상태를 체크했다. 아까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아닌, 어엿한 한 의사로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바이탈 지수 다시 돌아왔습니다!”
“출혈도 잡혔습니다.”
“수술방은?”
“지금 바로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환자를 수술방으로 보낸 뒤, 이제야 하리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선호는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머리를 다친 환자였다. 혹시나 혈종이 보일지도 모르기에 CT 화면을 유심히 살폈지만, 다행히 혈종은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찢어진 상처이기에 드레싱하고 봉합하면 될 것 같았다. 만약 혈종이 보였다면 머리를 열어야 했을 텐데, 그렇게 되었다면 그로서는 이 환자를 고칠 수 없었을 것이다.
선호는 얼핏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하리를 불렀다.
“인턴 선생, 여기 봉합 좀 도와줘.”
“네. 글러브는?”
“칠 반(7-5).”
이제야 응급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물론 대부분 수술방으로 올라간 탓에, 비어 있는 수술방이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하지만 그래도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아 하리는 선호의 옆에서 엷은 숨을 내쉬었다.
“봉합사 4-0 더 줘.”
“네.”
그녀는 이제야 그가 봉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무척이나 빠르면서도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봉합을 해내고 있었다. 제법 큰 손으로도 움직임이 굉장히 섬세하고 정확했다.
‘역시 신경외과에서 잘나갔다는 사실은 거짓이 아니었구나. 그런데 왜 내과로 온 걸까? 거기 계속 있었으면 못해도 이름은 날렸을 텐데.’
하리는 새삼 그가 조금 달라 보였다. 아까 그녀를 고쳐 세울 때도 그랬고,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던 모습도 그렇고. 흰 가운을 입었을 때, 그 흰 가운에 부끄럽지 않도록, 그는 그 누구보다 완벽한 의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환자까지 진료를 마친 뒤, 하리는 주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넋을 놓았다. 정말 아침부터 지금까지,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차라리 이런 경험을 인턴 때 겪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만약, 정식으로 환자를 돌봐야 하는데 아까처럼 공황에 빠지기라도 했다면 정말로 그의 말처럼 환자를 죽이는 의사가 됐을지도 몰랐다.
그때, 잠시 응급실을 빠져나갔던 선호가 다시 돌아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하리를 발견하고선 일부러 레지던트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인턴 선생, 연구실로 따라와.”
하아, 정말 오늘 저 소리를 지긋지긋하게 듣는구나. 어째 오늘은 쉴 틈 없이 부려 먹히는 느낌이냐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라고 하면 가야지.
하리는 천근만근과도 같은 몸을 이끌고서 선호의 연구실로 걸음을 옮겼다.
“실례합니다.”
조심스럽게 연구실로 들어가자, 어느새 옷을 갈아입은 그가 하리를 향해 가볍게 손짓을 했다.
“들어와.”
하리는 그의 손짓에 얌전히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뭐, 시키실 일이라도…….”
“일단 거기 좀 앉아 있어.”
선호가 가리킨 곳은 무척이나 푹신해 보이는 소파였다. 어째 당직실에 있는 침대보다 더 푹신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불안한 시선으로 소파에 살짝 엉덩이를 붙였다. 왠지, 이러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잘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 백 프로 잘 거야. 지금 엄청나게 피곤해 미칠 것 같으니까. 특히, 이 소파! 이 적당히 편안하면서도, 숙면을 하라고 유혹하는 이 분위기!
하리는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선호는 자리에 앉아서 노트북을 켰다. 그러곤 어설프게 앉아 마치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하리의 모습에 웃음을 꾹 누르며 살짝 입을 열었다.
“편히 앉아 있어. 좀 걸릴 것 같거든.”
“아니요, 전 이게 편해요.”
“그냥 등 기대고 쉬어.”
“아니요, 정말 괜찮습니다.”
젠장, 그럼 왜 지금 불렀냐고, 나중에 부르면 되지! 지금 등 기대면 난 정말 바로 정신 이탈이란 말이야!
제법 버티고 앉아 있는 하리의 모습에 선호는 더 이상 강요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래 버티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정말 그의 말대로, 째깍째깍 시계 소리와 타닥타닥 타자 소리를 들으면서 하리는 점점 머나먼 시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자면 안 돼, 안 돼, 안 돼, 돼. 돼. 돼……. 안 돼!’
꾸벅꾸벅 졸면서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며 허벅지를 꼬집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지만, 그것도 영 오래가지를 못했다. 일단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시계 초침 소리가 거대하게 들려올 정도로 주위가 고요했다. 이럴 거면 왜 불렀니? 왜 불렀어?
“저기, 선생님.”
결국, 하리는 어떻게든 졸음을 쫓기 위해 선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응?”
“선생님은 왜 MED(내과)에 오신 거예요? NS(신경외과)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선호는 타자를 두드리던 손을 멈췄다. 그녀에게서 저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그래? 어디가?”
“음, 그냥 익숙해 보여서요. 아까 봉합하실 때도 그렇고.”
“훗, 내가 봉합하는 모습이 꽤 섹시하기는 하지. 거기다 메스까지 들면 완전 죽여줄걸?”
“섹시까진 모르겠지만.”
“…….”
“조금, 멋있어 보이긴 했어요.”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순간 선호도, 하리도 동시에 숨을 삼키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리는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당황했고, 선호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멋있다는 말에 순식간에 달아오른 몸 때문에 당황했다. 단숨에 전신으로 뜨거운 열기가 진득하게 퍼져 나갔다.
“아, 아니 그게. 그냥 그렇다고요. 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하리는 점점 더 깊은 미궁으로 빠지는 느낌에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선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무어라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멀리서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저 남자의 눈빛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묶여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쿵, 쿵. 대체 이건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쿵, 쿵. 대체 어디서…….
그때,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살며시 반달로 휘어지면서 굉장히 깊고 부드럽게 목소리가 가볍게 울려왔다.
“알아, 특별한 의미 없는 거.”
“…….”
“그리고 전공을 바꾼 건, 나중에. 좀 나중에 가르쳐 줄게.”
“아, 네.”
그녀는 고개를 얼른 다시 돌려 버렸다. 순간, 심장이 엇박자로 뛰고 솜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래, 오늘 너무 피곤해서. 피곤해서 막 헛것이 보이나 봐. 헛말도 막 튀어나오고. 그래, 조하리. 지금 너의 몸뚱이는 너의 몸뚱이가 아니야. 아니야, 아닌 거야!
한참 뒤, 선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결국은 잠이 들었는지 그녀의 고개가 애처롭게 꺾여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챙겨 두었던 담요를 꺼내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좀 더 편하게 쉴 수 있도록 몸을 소파에 천천히 눕히고서 그 위로 담요를 덮어 주었다.
역시 오래 버티지 못했다. 뭐 어차피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데려온 거였으니까. 인턴으로서 오늘 무척이나 큰일을 겪었으니 말은 안 해도 몸은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아까 레지던트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하면서 데려왔으니까, 그렇게 급한 일이 아니면 앞으로 몇 시간은 호출이 없을 것이다.
선호는 정말이지 새근새근 잘도 자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금 은근히 피어오르는 욕망을 꾹 누르며 잔뜩 힘을 준 잇새 사이로 낮게 속삭였다.
“아무튼, 어디서든 참 잘 잔단 말이지. 제발 딴 놈 앞에서는 그렇게 편하게 자지 마라. 나니까 이렇게 보고만 있을 수 있는 거야, 이 둔탱이 햇병아리야.”
그렇지만 역시, 정신 건강에는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어느새 그의 눈동자는 오직 붉고 탐스러운 그녀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젯밤, 볼에 살짝 와 닿았던 그 느낌 탓에 잠을 자지 못했었다. 무척이나 부드럽고 몰캉거렸으며 불에 덴 듯 무척이나 뜨거웠었다. 그 뜨거운 입술을 이 두 볼이 아닌 입술로 삼키면 얼마나 좋을까? 혀끝으로 쓸어내리며 저 여린 입술을 마구 짓누른다면, 참을 수 없이 귀여운 목소리로 흐느끼겠지? 하지만 아마 그마저도 참지 못하고 전부 삼켜 버릴 거야, 전부.
‘안 돼, 지금 하는 건 범죄야. 범죄!’
선호는 다시금 거침없이 솟아오르는 수컷의 본능을 엄청난 자제력으로 무너뜨리며 더할 나이 없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오늘은 스스로가 자처한 일이었다. 저 조그만 몸을 좀 쉬게 하고 싶었으니까. 하아, 오늘 밤도 잠자기는 글렀다.
그렇게, 한 마리의 뜨거운 늑대가 뜬눈으로 괴로운 달밤을 지새우고 있을 때, 당사자인 햇병아리 양은 이미 풀려 버린 잠의 고삐를 늦추지 못한 채 연신 더 깊은 수렁으로 편안히, 아주 편안히 빠져들고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올리니, 희미한 불빛을 제외하곤 사방이 어두웠다. 당직실? 아닌데, 아까 분명 연구실에 와서……. 순간, 하리는 눈을 번쩍 뜨고서 다급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역시나 그 인간의 연구실. 그렇게 허벅지를 꼬집고, 눈을 비벼 가며 막았는데도 잠이 들고 말았구나. 젠장!
하리는 얼른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심야의 정각. 호출기를 확인하니 이상하게 단 한 번도 호출이 된 적이 없었다. 그사이에 환자가 단 한 명도 오지 않은 것도 아닐 테고, 그런데 어째서 부르지 않은 거지? 문득, 주변이 너무 고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살며시 고개를 돌리자, 책상 위에 스탠드 불만 켜진 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리가 천천히 소파에서 내려서려고 할 때, 탁자 위에 놓인 우유 하나와 샌드위치, 그리고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내가 직접 공수한 신선한 우유니 안심하고 마셔도 됨. 샌드위치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기 바람. 내가 방금 먹었는데 괜찮았음.’

“풉!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니까.”
하리는 친히 공수해 온 우유와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 설마,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에게 호출이 오지 않은 건 아마도 그가 대신 땜빵을 해 줬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구실로 부른 것도, 불러 놓고 일을 시키지 않은 것도.
뭔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다. 하리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샌드위치와 우유를 단숨에 먹어 치운 뒤 조심스럽게 연구실을 빠져나와 곧장 당직실로 향했다. 아까 조금 잤으니 이제부터 밤을 새워서라도 그가 맡긴 자료 정리를 끝내고 싶었다. 그러면 그도 조금은 쉴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느새 그녀의 걸음이 무척이나 빨라지면서도 꽤나 경쾌하게 느껴졌다.

* * *

응급실에서 한바탕 또 난리를 치르고 돌아온 선호는 온몸이 뻐근함과 동시에 눈이 너무나도 퍽퍽했다. 어제오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된 듯싶었다. 어느새 연구실 앞으로 다가간 그는 아직도 자는 건가, 싶어 유리 너머로 조심스럽게 안을 살폈지만, 소파에는 담요가 고이 접힌 채, 햇병아리는 이미 제 둥지로 돌아간 듯싶었다.
그는 연구실 안으로 들어와 책상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기대었다. 하지만 오늘까지 맞춰 둔 분량의 논문을 끝내야만 했다. 그는 진하게 내린 커피를 받아 놓고서 노트북을 켰다. 일단 어머니께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시작한 연구 논문. 사실, 하나만 한다면 그 혼자 충분히 끝낼 수 있었지만 선호는 현재 두 개의 논문을 진행하고 있었다. 하나는 카르시노이드 종양에 관한 겉으로 내보이기 위한 논문, 그리고 다른 하나는 뇌종양에 관한 자기 자신을 위한 논문. 선호는 노트북에 숨겨 둔 뇌종양에 관한 초본 논문을 켜고선 천천히 읽어 내려가며 공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뇌가 좋았다. 사람의 모든 감정과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를 간직한 뇌가 너무 좋아서, 젊은 시절 자신의 열정과 청춘을 모두 뇌 의학에 채워 넣으며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렇게 알아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살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아, 진짜 지치네.”
자꾸만 쓸데없는 과거의 잔재에 사로잡히는 것 같아, 커피를 한 모금 삼키고서 노트북을 닫았다. 새벽 3시를 향해 달려가는 시간. 1시간이라도 눈을 좀 붙여야 할 것 같았다. 괜한 생각에 머리만 복잡해진 것 같았으니까.

아직 해조차 제대로 뜨지 않은 새벽 5시. 마지막 도표까지 깔끔하게 정리를 끝낸 하리의 표정은 거의 밤을 꼬박 새었음에도 그야말로 날아갈 듯 너무나도 가벼웠다.
“완벽해, 이렇게 완벽할 수는 없어! 조하리, 너 정말 인턴 맞니? 응? 후후.”
자화자찬 속에 그녀는 완성된 도표를 저장한 뒤, 프린터로 금세 따끈따끈하게 뽑아서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와 같이 일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 완벽성이 조금 옮은 듯 저도 모르게 여러 차례 반복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첫인상 때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의아하다가도, 가끔 보여 주는 그 특유의 가벼움을 볼 때면 또 그 변태 같기도 하고. 참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저 자료 분석일 뿐이었지만, 췌장암에 관한 공부가 된 것 같아서 확실히 실력은 대단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그렇다면 이 인간은 신경외과와 더불어 내과 실력도 뺨을 치는 건데. 미친 거 아니야? 하나만 해도 지끈거리는걸. 몇 년 동안이나 또 공부했단 얘기잖아? 하, 나 같으면 절대 못하지, 절대 못해.
“지금 나이가 35살. 그런데도 지금 MED(내과) 펠로우면, 결국 NS(신경외과) 레지던트는 다 못 마쳤겠구나.”
그래도 미친 거지, 미친 거야. 분명 그 속은 굉장히 새까말 것이 분명해. 그래야 신이 공평하다는 소리를 듣지!
하리는 다시금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5시 30분. 아침 컨퍼런스 시간은 7시부터고, 지금 잔다고 한들, 언제 또 불려 갈지 몰랐고 괜히 감칠맛만 더 나서 피곤해질 게 분명했기에 자료를 챙겨 들고 슬그머니 당직실을 빠져나왔다. 바빠지기 전에 얼른 전해 주고 싶었다. 사실은 빨리 전해 주고 싶은 묘한 설렘 때문이었다.
혹시나 호출이 있을까 봐 종종걸음으로 연구실을 향해 걸어온 하리는 좀 어두운 내부의 모습에 혹시 없는 건가, 하는 불안스런 눈동자로 빠끔히 유리 너머를 확인해 보았다. 연구실은 아까 그녀가 빠져나간 그대로, 책상 위에만 스탠드 불빛이 켜져 있었는데, 아까는 비어 있던 책상이 제 주인을 만나 베개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자고 있네.’
왠지, 살짝 실망스러웠다. 혹시 방해되려나, 그냥 살짝 두면 괜찮겠지.
혹시나 잠겨 있을까 해서 문고리를 조금 꽉 움켜쥐자 문이 너무나도 쉽게 스르르 열렸다.
“실례합니다.”
그래도 펠로우의 연구실을 막 들어갈 수는 없기에, 당사자는 자고 있지만, 예를 갖춰서 노크까지 확실히 한 뒤 안으로 들어가 발끝에 아주 힘을 꽉 주고서 책상 쪽으로 아주 살금살금 걸어갔다. 괜히 깨우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책상에 기대어 자는 걸 보니 엄청 피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이제 막 펠로우로 들어와 논문 연구에, 이 교수님의 환자까지 회진 돌고, 일도 설렁설렁 넘어간 적 없이 꼼꼼히도 하니 성격상 엄청 힘들어 보이긴 했다. 혹시 강박증 같은 게 있는 걸까? 아니면 왜 저렇게 극도로 자신을 몰아세우며 일을 하는 건지.
하리는 노트북 바로 옆에 아주 잘 보이도록 자료와 가지고 온 쪽지 붙은 우유를 내려놓고선 이대로 슬쩍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아래로 살짝 삐져나온 책 제목이 순간 눈에 걸렸다.

‘뇌종양이 가진 비밀’

설마, 논문을 두 개 하는 거야? 만약 그렇다면, 이 남자. 정말 제대로 미쳤다. 아니면 정말로 뇌 의학에 지독히도 빠져 있는 거고. 그렇다면 아직 신경외과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건데. 도대체 왜 도중에 그만둔 거야?
‘나중에, 좀 나중에 가르쳐 줄게.’
그때 당시엔 제가 한 말에 제가 놀라 당황스러워 겨를이 없었지만, 다시금 떠올리고 보니 그 표정이 조금 씁쓸해 보였었다.
‘왜, 그만둔 거예요? 아직도 이렇게 하고 싶으면서.’
그녀는 결코 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을 속으로 되뇌며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가만히 쭈그리고 앉아 자고 있는 선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매끄러운 눈매가 아주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아래로 서늘하게 쭉 뻗은 콧날과 보기 좋게 잡힌 턱선을 타고 푸르스름하게 솟아난 수염. 가끔 너무 얄밉지만, 또 가끔은 저도 모르게 떨릴 정도로 낮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입술.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한번 만져 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꿈에선 볼에 닿았던 그 느낌이 굉장히 실감 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는데, 실제는 어떠할까? 역시 부드러울까? 굉장히 빨간데, 그럼 엄청 뜨거울까? 진이는 굉장히 황홀하다고 하던데.
하리는 마치 뭐에 홀린 것처럼 천천히 손을 뻗어 살짝 내려온 까만 머리칼을 위로 쓸어 올린 뒤, 코끝을 훑으며, 인중을 지나, 입술. 입술. 그때, 살짝 벌어진 틈으로 그의 더운 입김이 손끝에 와 닿으며 하리는 순간 몸을 움찔하며 당황함에 굳어진 채, 동공이 커지기 시작했다.
헉! 도대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하리는 자신이 한 짓을 자신이 믿지 못하고서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선 마치 벌이라도 받듯 손을 위로 추어올리며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심장이 아주 오케스트라 북 치듯, 쿵쾅거렸다. 왠지 너무 낯 뜨거운 짓을 한 것 같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 못해 톡 하며 터질 것만 같았다.
“흐으음.”
그때, 하리의 다소 격한 움직임에 선호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내뱉자,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선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아,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번에도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정말 제가 미쳤나 봐요!”
그렇게 하리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한 채 빛과 같은 속도로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그러곤 여기가 병원이라는 사실도 망각한 채 미친 듯이 달리며 그의 입술에 와 닿은 제 손을 붙잡으며 정말이지 속으로 처참하게 비명을 내질렀다.
‘오 마이 갓! 정녕 제정신이 아닌 이 소녀와 이 미친 손을 벌하소서!’
하리가 나가자마자 어렵사리 눈을 뜬 선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리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저 잠결에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라는 소리가 울리긴 했지만, 아직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잘되지 않았다.
그는 조금 가벼워진 몸을 살짝 일으켜 세우며 허리를 한껏 움직였다. 잠결에 굉장히 기분이 좋았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잠이라는 걸 자서 그런 건가? 하지만 얼핏 햇병아리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고……. 하, 설마 하다 하다못해 꿈에까지 나온 건 아니겠지? 만약 꿈에 나왔다면 꿈에서만큼은 키스 정도는 해 줄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목소리만 들은 것 같았다. 그것도 살짝 기분 나빴던,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요 한마디.
“참나. 아주 도를 닦는 심정이군.”
그는 진심으로 툴툴거리며 시계를 확인했다. 6시 20분. 7시에 아침 컨퍼런스 시작이니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다. 하던 논문이나 조금 고쳐 볼까.
그때, 그의 시야로 노트북 옆에 자료물과 낯선 우유 위로 노란 쪽지가 앙증맞게 붙어 있었다.

‘선생님께서 친히 공수한 우유 아주 맛있게 마셨습니다. 샌드위치는 저장해 두세요. 나중에 꼭 사 드리겠습니다. 제가 빚지고는 못 삽니다.’

“풉! 빚지고는 못 산다고? 이거 말고도 엄청 많은데, 잘만 뽈뽈거리더구만.”
그럼 그 빚은 나중에 다 받으면 되겠네? 그나저나 역시 왔었던 모양이다. 그럼 그게 완전히 꿈은 아니라는 건가? 대체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호는 하리가 남긴 우유를 말끔히 마시고서, 그녀가 정리해 둔 자료 도표를 확인했다. 이틀이란 많지 않은 시간 내에 이 정도로 깔끔하게 분석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 애기에서 꼬마로 승격시켜 주지. 훗.
그는 다시금 타자를 타닥거리며 연신 피어오르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어쩐지 아까보다 훨씬 머리도 가벼웠고, 기분도 상쾌한 것 같았다. 썩 괜찮은 하루가 시작되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