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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간만에 회식, 게다가 고기라는 말에 하리의 눈동자는 일억 개의 별이 쏟아지는 것처럼 반짝거렸다. 이게 얼마 만에 배때기에 기름칠해 주는 일이던가! 매번 시간에 쫓겨 빵을 먹거나, 우유 마시고. 좀 더 고급이라면 김밥을 먹는 거고 그것도 호강에 겨운 일이기에 고기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물론 약속 안 지키는 그 변태 자식을 친히 모시러 간 사실과 지금도 제 옆자리에 딱 붙어선 하하 호호하는 면상이 싫기는 했지만.
하리는 아주 미세한 거리를 두고서 레지던트 2년 차 선배들과 장단을 맞춰 주면서 아주 부지런히 삼겹살을 폭풍 흡입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환영회이긴 했지만, 자기들끼리 먹으려고 만든 자리인 것처럼 정말로 이 집 고기를 거덜 낼 작정으로 먹어 대는 모습에 선호는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게다가 제 옆에서 정말이지 숨도 안 쉬고 고기를 집어넣는 햇병아리 모습은 정말 경이로움에 극치였다. 역시, 인간의 몸은 신비하다고 했던가. 저 조그만 몸에 대체 저 많은 고기가 어디로 들어가는 걸까? 그런데도 키가 작은 걸 보면, 역시 우리의 몸은 무궁무진해.
“선생님, 제 잔도 한잔 받으세요.”
“제 잔도 받으세요!”
분위기가 무르익고, 이젠 고기보다 술이 더 들어가면서 선호의 옆으로 기회만 엿보고 있던 여자 레지던트들이 서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하리는 점점 그와 거리를 넓힐 수가 있었다. 진이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런 인간이 대체 어디가 좋다고 저렇게 아양일까?
“그런데 선생님, 원래 NS(신경외과) 전공이셨다면서요?”
하리는 순간 먹던 것을 멈추고서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정말? 정말 선생님 NS 전공이셨어요?”
한 여자 레지던트의 물음을 시작으로 다른 레지던트들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채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실 우신의대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신대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한 것도 아닌 사람이 외부에서 펠로우로 들어온 것은 그들 사이에서도 무척이나 궁금한 일이었다.
“그런 얘기 어디서 들었어? 꽤 꼭꼭 숨긴 나의 은밀한 과거인데.”
선호는 장난스럽게 답하자, 처음 질문을 했던 여자 레지던트도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외삼촌이 한국대병원 NS에 계시거든요. 선생님께서 한국대 나오셨다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알고 계시더라고요. 오히려 MED(내과) 펠로우라고 하니까 놀라시던 걸요.”
물론 놀라겠지. 갑자기 사라져서 한국대도 아닌 우신대병원에서, 그것도 외과도 아닌 내과. 역시 사람에겐 영원한 비밀은 없는 것 같았다.
“하핫, 전공이 안 맞더라고. 그래서 뒤늦게 죽으라 공부해서 바꾼 거지.”
“에이, 외삼촌 말씀이 선생님 수술 실력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하시던데요?”
“훗, 그거 과장이야. 외삼촌이 누구 신지는 모르겠지만 잘못 알고 계시네. 나 너무 비행기 띄우지 마. 괜히 가슴 설렌다.”
그러면서 살포시 눈웃음을 치는 모습에 여자 레지던트는 더는 물어보지 않고서 자기들끼리 꺅꺅거리며 다시금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부딪쳤다.
하리는 그 모습에 역시, 변태. 이젠 아주 대놓고 눈웃음을 치시는구만, 하며 마지막 남은 삼겹살까지 아낌없이 입으로 쏙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한국대라. 거기도 여기 못지않게 신경외과 장난 아닌데. 부원장님 말씀도 그렇고. 대체 저 남자는 정체가 뭐야?
“아이고, 우리 귀여운 인턴, 여기서 혼자 청승맞게 삼겹살만 먹고 있냐? 이 오빠 술을 받아라!”
“하핫, 감사합니다.”
갑자기 하리의 옆으로 다가온 4년 차 치프 황만식은 아예 작정을 했는지 그녀의 옆에서 잔이 비워지기가 무섭게 술을 들이붓기 시작했다. 4년 차이긴 했지만, 미역국에 미역국을 거듭 마신 탓에 나이가 벌써 30대 중반을 달려가는 만식은 평소엔 성격이 참 좋은데, 술자리만 가지면 저렇게 한 사람을 붙잡고 거의 골로 갈 때까지 술을 먹이는 요상한 주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타자로 하리가 걸려든 듯싶었다.
“자자, 술잔에 술이 비면 예의가 아니지. 쭉쭉쭉!”
“감, 감사합니다!”
대학 때부터 썩 술을 잘하지 못했던 하리는 그나마 인턴 생활을 하면서 술이 좀 늘어난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소주 반병. 게다가 이렇게 쉴 틈 없이 마셔 대다간 순식간에 골로 가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하늘 같은 치프께서 내리는 술인데. 빌어먹을, 운도 지지리도 없지! 진이라도 옆에 있으면 슬쩍슬쩍 넘겨줄 텐데. 우욱, 벌써부터 속이 쓰리면서 먹었던 삼겹살이 알코올과 짬뽕으로 섞이며 토할 것만 같았다. 악!
하지만 그러한 그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식은 제 잔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하리의 잔만 죽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그의 술주정이었다. 이미 그는 취한 상태였던 것이다. 기어이 한 병을 다 마신 하리는 정말 세상이 돌고 있었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멀리서 2년 차 선배들의 안타까운 눈빛이 느껴졌지만 차마 나서서 도와줄 수가 없었다.
“어라? 벌써 한 병을 다 마셨네.”
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다. 드디어 해방인가? 해방인가!
“그럼 한 병을 더 줘야지. 우리 귀여운 인턴에게 이까짓 술! 하나도 안 아까워!”
젠장! 저게 왜 저기 있냐고! 귀여운 인턴? 얼어 죽을. 안 귀여워 나, 하나도 안 귀엽다고!
그때, 빙빙 돌고 있는 그녀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구세주처럼 들려왔다.
“야, 이거 내 환영회 아니냐? 그럼 날 줘야지. 왜 햇병아리만 먹여. 서운해진다, 황만식.”
“아이고! 제가 이렇게 큰 실수를! 술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지요! 정말 죄송합니다. 얼른 제 술 한잔 받으십시오!”
어느새 그녀의 앞자리를 차지한 선호가 만식에게 술잔을 내밀었고, 만식의 표적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하리는 그가 선호라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온몸이 알코올로 꽉 차 있었다. 그의 등 뒤에서 반쯤 잠긴 눈으로 헤드뱅뱅이라도 할 생각인지, 이미 주인의 의지에서 벗어난 고개가 애처롭게 허공에서 격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살며시 콩 소리가 나면서 하리의 헤드뱅뱅도 멈춰 들었다. 선호가 술잔을 기울이며 자연스럽게 자신의 넓은 등을 그녀에게 빌려 주었다. 물론 그 역시 여자 레지던트의 술잔을 다 받아 주느라고 머리가 울리고 있었지만, 거의 약 먹은 닭처럼 축 늘어지면서 불덩이처럼 벌겋게 익어 가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점점 주변의 사람들이 전멸하기 시작했고, 만식도 그에게 마지막 술잔을 털어 주고서야 벌러덩 쓰러지고야 말았다. 선호는 이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이었다. 술고래인 태종 때문에 웬만하면 거뜬하다 생각했건만, 저런 괴물이 있었을 줄이야.
그는 알딸딸하면서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다가 뒤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콩콩 박던 머리가 편안해졌는지 쌕쌕 숨소리를 내며 태평스럽게 잘도 자고 있었다. 술도 못 마시는 것 같던데, 적당히 요령껏 빠져나와야지 이렇게 사회생활의 지혜가 없어서야, 험한 의사밥 끝까지 챙겨 먹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마치 어린 애기를 물가에 내놓은 어미의 심정이라고 해야 할까? 정말이지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었다.
“하긴, 아직 애기니까.”
선호는 하리가 깨어날까 봐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틀어서 제 무릎을 벨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움찔움찔하면서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정말로 죽은 것처럼 고요히 숨을 내쉬며 그렇게 자고 있었다. 선호는 그러한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주변을 살짝 둘러보고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내렸다. 역시나 화장기 없이 말간 얼굴에 술기운이 올라 볼 위로 붉은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타고 베이비 로션 냄새가 배어 나왔다.
“쿡, 로션도 베이비 로션? 역시 애기야.”
하지만 코끝으로 파고드는 그 로션 향기가 자꾸만 미묘한 열기를 타고서 야릇한 기분을 몰고 왔다. 게다가 점점 안쪽으로 파고드는 하리의 움직임에 자꾸만 아래쪽이 민감하게 굳어졌다.
‘하, 나 너무 취했나?’
“흐으응.”
꼬물거리는 그녀의 붉은 입술 너머로 묘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선호는 자꾸만 탁해지는 정신과 묘하게 섹시하게 보이는 그녀의 입술을 만져 보고 싶다는 충동에 고개를 거세게 가로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덕분에 하리의 머리가 바닥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했다. 선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묵직한 숨을 내쉬었다. 애기한테 반응하다니. 최선호, 너 그렇게 여자가 궁하디? 궁해? 베이비 로션이 뭐가 자극적이라는 거야. 저 햇병아리 입술이 섹시하다고? 하아, 술에 취해도 단단히 취했구먼, 취했어. 시각이 마비된 게 분명해!
그때,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던 몇몇 무리들이 방으로 돌아와서 쓰러진 사람들을 챙겨 들기 시작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치프 쌤 때문에 엄청 많이 드신 것 같던데.”
남자 레지던트의 걱정스런 말에 선호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 엄청 취했나 보다. 막 헛것이 보인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넌 여자애들 잘 데리고 들어가. 내일 회진 늦으면 죽는다고 전하고.”
“하핫, 네.”
남자 레지던트는 널브러져 있는 하리를 보고선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깨웠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중간에 기사도 정신까지 발휘해 줬더니만. 대체 얼마나 골로 간 거야?
“하리야, 하리야? 일어나야지.”
남자 레지던트는 자연스럽게 하리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를 몇 번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자 하는 수 없이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허벅지를 안아 올리려는 찰나.
“인턴 선생은 내가 데려갈게.”
“네? 괜찮으시겠어요? 병원으로 바로 가실 거 아니면 제가 그냥 데려가면 되는데…….”
“아니야, 생각해 보니까 병원에 들러야겠어. 논문 수정할 것도 좀 있고.”
“아,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그렇게 남자 레지던트가 사라지고, 선호는 이 상황에서도 팔자 좋게 잠만 퍼자는 하리의 모습에 절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러니 인턴 선생한테서 눈을 못 떼지. 여자가 이렇게 무방비하게 픽픽 쓰러져서는…….”
하지만 선호는 주변에 더 심하게 널브러진 다른 여자 레지던트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는 어렵사리 하리를 제 등에 짊어지고서 밖으로 나왔다. 제법 쌀쌀하다고 느끼기는 했는데,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잡으려면 조금은 걸어야 하는데, 하필이면 왜 지금 눈이 오고 난리인지. 아니, 처음부터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 굳이 병원으로 갈 필요 없이 오피스텔로 곧장 가면 되는 것을.
선호는 오늘따라 뭔가가 영 이상하다고 느끼면서 혹여나 그녀가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었다. 눈이 와서 그런지 주변으로 인적이 드물었다.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선호는 등 뒤로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조금 천천히 걸음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 올겨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려나. 왠지 그때의 그 트리가 그리워졌다. 그 여자도 잘 지내고 있는지.
그때, 뒤에서 꼼지락거리던 움직임이 점점 격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하리가 고개를 번쩍 올렸다. 순간 선호는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당황한 낯빛을 띠고서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저, 저기 인턴 선생, 내가 이렇게 업으려고 업은 건 아니고, 그래도 인턴 선생 엉덩이 쪽은 안 만졌어. 그 정도는 봐줘야 해, 그치? 그리고…….”
“와, 눈이다.”
하지만 하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대답이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환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시금 그의 머릿속을 예민하게 파고들었다.
그때 하리가 두 손으로 선호의 목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반쯤 풀린 눈동자가 애교스럽게 속삭였다.
“헤에, 쌔앰. 저 내려 주면 안 돼요오? 내려 주세요!”
갑작스런 공격에 선호의 미간이 불에 덴 듯 움찔거렸다. 하지만 하리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눈 만지고 싶어요오! 눈밭에서 사뿐사뿐 걸을 거예요!”
“아, 알았어. 그러니까 일단 목 좀…….”
“에에? 왜 안 내려 줘요? 아! 그러엄!”
순간 선호는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볼 위로 뜨겁게 와 닿았다 사라지는 그녀의 입술. 몰캉거리면서도 너무나도 자극적인 감각에 애써 누르고 있던 이성 위로 거센 풍랑이 몰아쳤다. 하지만 하리는 전혀 개의치 않고선 여전히 발그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쪼옥, 해 줬으니까. 내려 줘요오, 넹? 쌔앰!”
“어? 어.”
머릿속의 세포가 모두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선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천천히 하리를 아래로 내려 주었고, 그녀는 아이처럼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면서 내려오는 눈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선호는 그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순간 그녀밖에 보이지 않았다. 주변으로 보이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온 세상의 별이 그녀에게 내려온 것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눈이 새하얗게 쏟아지는 텅 빈 거리에서 동동 뛰는 모습과 정말이지 환하게, 아주 환하게 웃는 모습. 선호는 저도 모르게 입가로 엷은 미소를 그렸다. 그러곤 천천히 휴대폰을 들어서 그 모습을 담았다. 그의 휴대폰엔 3년 전 트리 앞에서 웃고 있던 여자의 사진이 나란히 담겨 있었다.
“……너구나.”
3년 전 사진에도, 그리고 지금 사진에도. 햇병아리 그녀가 있었다. 물론 3년 전 얼굴은 좀 더 사람의 형태긴 했다. 화장도 하고, 옷도 예쁘게 차려입고. 역시, 인턴은 여자도 아니란 말인가. 그래도.
“그 웃음은 여전하네.”
선호는 고개를 들어 신기한 눈빛으로 여전히 눈 속에 서 있는 하리를 바라보았다. 급속도로 퍼지는 설렘은 어느새 심장 위로 방망이질을 치며 저릿한 전류에 녹아내려 갔다. 순간 볼에 닿았던 그녀의 입술 자국이 새삼 뜨겁게 느껴지며, 온몸이 다시금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그래, 내가 저 여자에게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자꾸 보고 싶고, 건들고 싶고, 눈에 밟혔던 건.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3년 전, 성큼하고 다가온 이 짜릿하고 아릿한 느낌. 그렇게 가슴에 깊이깊이 새겨 버린 이 감정.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하리는 다시금 취기가 올라오는 듯 비틀거리며 멍한 시선으로 선호를 올려다보았다.
“쌔앰?”
“널 어떡하면 좋냐?”
“저, 졸려요…….”
그러곤 이내 그의 품속으로 폭 하고 쓰러진 하리를 선호는 천천히 보듬어 주었다. 서서히 퍼지는 이 따스한 온기. 그때 차마 안아 주지 못했던 걸, 이제야 안아 주게 되었다. 드디어 이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번 크리스마스 땐 울지 마라, 햇병아리.”
“…….”
“그리고 앞으로 각오하고.”
하지만 그녀는 답이 없었다. 물론, 내일도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남자의 순정을 건드린 죄, 그리고도 기억하지 못한 죄. 앞으로 아주 확실히 갚아 줄 테니까, 각오해라, 햇병아리!



3장


눈이 내렸다. 주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거리마다 쏟아지는 함박눈에 사람들은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거대한 트리 아래 빨간 원피스를 입고서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꽉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사랑했고, 처음으로 가슴앓이도 했었다. 그가 웃었기에 나도 웃었고. 그가 기쁘기에 나도 기뻤다. 하지만 이젠 혼자 바라만 보고 웃지 않고 같이, 그리고 먼저 웃고 싶은 마음에 오늘 그에게 고백할 것이다.
새하얗게 쏟아지는 눈송이가 마치 앞날을 축복하는 것 같아서 설레었다. 그때, 멀리서 드디어 그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금 쿵쿵거리며 울리는 심장. 하지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 있게, 당신을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할 것이다.
드디어 그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좀 더, 좀 더 가까이. 가까이. 너무나도 떨려서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무척이나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선물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내게 서서히 다가와선 제 볼에 부드럽게 아주 부드럽게 뽀뽀를 해 주었다. 순간,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의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렇게 용기를 내서 질끈 감은 눈을 뜬 순간!
“고마워, 인턴 선생.”
하?
“악!”
“뭔 일이야!”
온몸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너무 놀란 가슴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3년 전 그날의 크리스마스가 꿈에 나온 걸로도 모자라서, 나의 사랑하는 진우 선배가 아닌 그 개싸이코, 변태 자식이 나오다니! 게다가, 뽀, 뽀뽀! 흉몽이다. 이건 엄청난 흉몽이야!
“미쳤냐?”
“꿈에, 그 변태 자식이 나왔어.”
“하? 그새 정 들었나 보네, 꿈에서도 나올 정도면.”
“아니야, 아니야! 이건 꿈이야!”
“이미 깼어, 이년아.”
어느새 하리의 옆으로 다가온 진이는 아니라고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에 혀를 차며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잠 좀 자나, 싶었더니 저 가시나가 아무튼 도움을 안 준다.
“진아.”
“왜?”
“나, 아무래도 몸이 허해졌나 봐. 보약이라도 먹을까?”
“우리에겐 잠이 보약이다. 대체 어제 술을 얼마나 처마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만식 쌤에게 걸려서 한 병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 필름이 끊겨서……. 끊겨서…….
“헉, 어쩌지? 진아, 진아. 나 기억이 안 나. 어제 일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고!”
이제야 현실로 돌아온 하리는 머리를 쥐어뜯고서 절규를 했지만 아무리 떠오르려고 해도 머릿속에 화이트를 들이부었는지 온통 새하얀 풍경이었다.
진이는 다시 자기는 글렀다고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곤 미친년 발광하듯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하리에게 찬물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러게 작작 좀 마시지. 알코올 분해도 안 되는 년이 아예 온몸을 푹 쩔게 하고 와서는.”
“누군 마시고 싶어서 마셨겠냐? 어디 고기만 먹는 회식은 없는 거야?”
“지랄하네. 술이 들어가야 몸이 후끈 달아오르지.”
“근데 나 어떻게 여기 온 거지? 그것도 기억이 안 나.”
“쌤들이 데려다 줬겠지. 설마 네 혼자 왔겠냐? 누군지는 모르지만 참 욕봤다. 네 필름 끊긴 모습 장난 아닌데. 아무나 붙잡고 미친년처럼 헤실헤실 웃어 대잖아. 완전 엽기 중의 엽기지.”
하리는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텁텁했던 입안이 그나마 좀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머리는 울렸다. 숙취는 잠으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고약한 것이었다.
“나, 무슨 실수 했을까?”
“그건 네가 오늘 컨퍼런스 가 보면 알게 되겠지. 분위기 잘 살피고 쥐 죽은 듯 들어가.”
“아욱!”
그녀는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수를 하고 양치를 시작했다. 덥수룩한 머리카락이 걸리긴 했지만 감을 시간이 없었다. 어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지각까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말이지 아침부터 그 변태 자식이 나온 흉몽을 꾸질 않나, 숙취에, 어제 일도 기억이 나질 않고. 완전 최악이다. 오늘 뭔가 안 좋은 불길한 일이 터질 것만 같은, 아주 무시무시한 예감이 촉을 쎄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 * *

예전엔 잠만 자면 숙취 따윈 훨훨 날아가 버렸는데, 이젠 몸이 예전 같지 않은지 머리가 울렸다. 게다가 그 햇병아리를 당직실까지 안 들키고 데려간다고 어찌나 뻘뻘거렸는지, 삭신이 다 쑤셔 왔다. 아마 이러한 고생을 그 햇병아리는 죽어도 모르고 있겠지? 선호는 그것이 안타깝고도 비통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레지던트들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어제 협박 아닌 협박이 그래도 먹혀들기는 했는지, 단 한 명도 지각없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다. 물론 몰골이 말이 아니긴 했지만, 겉모습이야 어찌 됐든 정신만 똑바로 챙기고 있으면 상관없었다.
선호는 맨 끝에 서 있는 하리를 발견하고서 거의 자동으로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어제 일을 기억 못 하는 듯 말똥말똥한 눈동자로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기억한다면, 저렇게 태연하게 서 있을 수 없겠지. 그래, 감히 이 순결한 볼에 쪽 소리 나게 뽀뽀를 했으니 말이야.
“컨퍼런스 시작하자.”
아침 컨퍼런스가 시작되고, 어제 그녀에게 그렇게 죽어라 술을 퍼먹였던 만식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하리는 내용을 열심히 받아 적으며 아침부터 그런 꿈을 꾼 탓인지, 간간이 선호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어제 회식 때 잠깐 옆자리에 앉았던 것 빼고는 딱히 마주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왜 저 얼굴을 보면 볼수록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걸까? 아침에 그런 꿈을 꿔서? 단순히 그렇기 때문일까? 혹시 어제 저 남자와 뭔가 엮여 있는 건.
‘아니야, 아니야. 그런 끔찍한 일은 상상도 해선 안 돼. 설마, 도 아니야. 혹시나, 도 안 돼!’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 돼!
컨퍼런스가 끝이 나고 회진을 돌기 전, 하리는 조금 안면을 익혀 두었던 남자 레지던트 찬우에게 살짝 다가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쌤.”
“응? 무슨 일이야? 그나저나 너 괜찮은 거야?”
헉, 역시 어제 뭔 일이 있었어, 있었다고!
“제가 어제 무슨 실수라도 했나요? 전혀 기억이 안 나요.”
최대한 불쌍하게, 뭔 짓을 했더라도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도록 최대한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속삭이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자던데.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긴 했지.”
“정말요? 정말 자기만 했어요? 그럼 쌤이 저 데려다 주신 거예요?”
다행이다. 그래, 조하리. 잠만 잤구나! 잠만 퍼잔 거였구나!
“아니, 너 데려다 준 건 선호 선생님이야.”
순간 기쁘게 달아올랐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지면서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 누구라고요?”
“회진 가자!”
타이밍도 좋게 멀리서 선호의 목소리가 울렸고, 찬우는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최선호 선생님께서 너 데려다 주셨어.”
최선호 선생님께서, 데려다 주셨어.
데려다 주셨어.
널, 데려다 주셨어.
최. 선. 호. 선. 생. 님. 께. 서. 데. 려. 다. 주. 셨. 어.
아니야, 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꿈은 꿈으로 끝나야지. 이런 법이 어디 있어!
회진을 돌면서 하리는 가장 끝에 자리를 잡고선 그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젠장, 그 많은 레지던트 선생님들 다 놔두고 왜 펠로우인 그가 이 불쌍한 인턴을 데려다 주었냐, 이 말이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엉? 할 일이 없냐고!
하리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이곤 선호를 씹으며 머릿속으로 아무리 어제 일을 떠올리려고 해도 쥐뿔도 생각이 나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 그냥 잠만 잤다고 했잖아. 그럼 아무 일도 없었을 거야. 땅에 머리만 박아도 누가 업어 가는지 모르게 잔다는 죽음의 인턴이잖아. 잠만 잤어. 그래, 잠만 잔 거야. 설마 무슨 일이 있었겠어? 괜히 쫄지 마, 조하리!
그렇게 거의 최면과도 같은 자기 합리화를 하며 하리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멀리서 들리는 선호의 목소리에 금방 얼굴이 벌게지면서 스르르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왠지, 오늘 꿈자리도 그렇고 뭔 일이 있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 교수님을 대신해서 회진을 앞장서게 된 선호는 환자들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고, 주치의인 레지던트에게 질문하는 식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이 환자 CBC(혈액 검사) 수치는?”
“RBC(적혈구) 320만, Hgb(혈색소) 6.7. 수치가 좀 떨어져서 Anemia(빈혈) 증상이 보이고 있습니다.”
“Hct(빈혈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 수치는?”
“역시나 36%로 낮습니다.”
“용혈(Hemolysis:혈액 세포가 정상 수명보다 빨리 파괴되는 것)은 보이진 않고?”
“네, 수치로 보아선 철 결핍성으로 보입니다.”
선호는 환자의 차트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선 오더를 내렸다.
“그럼 지금 사용하는 약물을 조금 줄이고, 환자 식단 바꾸고, 수시로 CBC 검사해서 더 떨어지면 수혈 준비해. 스테이션에 연락해서 Cardex 다시 체크하라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한바탕 회진을 마친 뒤, 하리는 발을 동동 굴리며 먼저 다가갈까? 아니면 그냥 은근슬쩍 발을 뺄까? 갈등했다. 하지만 어차피 도망쳐 봐야 병원 안이고, 의사 가운 벗지 않는 이상은 한 달 내내 볼 사이였다. 그렇다면 과감히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이렇게 쫄고 있을 수는 없어!
“인턴 선생!”
하지만 그녀가 선호를 부르기도 전에 그가 먼저 하리를 불러 세웠다. 하리는 어쩌면 이게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서 평소보다 더 조신한 표정으로 그의 앞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까 회진 돈 환자들 차트 좀 볼 수 있을까?”
“아, 네.”
정신은 혼란스러웠지만 그래도 환자들에게 내린 오더는 꼼꼼하게 체크했기에 그녀는 자랑스럽게 차트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녀가 이렇게 차트를 열심히 정리하게 된 것은 선호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나사 풀린 것처럼 저를 골려 먹고,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꼬픈남인지 뭔지로 불리지만 의사로서의 그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다. 환자의 상태를 무척이나 철저하고 꼼꼼하게 관리하며, 심지어 자신이 내린 오더도 몇 번이고 다시 보고 다시 확인하고서야 만족하곤 했다.
선호는 차트를 살피면서 은근슬쩍 하리의 모습을 살폈다. 아까보다 표정이 훨씬 가벼워 보였다. 아마도 어제 당직실로 옮긴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 때문에 도망을 칠지, 아님 부딪혀 볼지 엄청 고민했을 게 뻔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아마.
“환자 수가 많아서 힘들었을 텐데, 꼼꼼하게 잘 체크했네. 수고했어.”
“저기, 선생님.”
“응?”
“어제 저 당직실까지 데려다 주신 사람이 선생님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응, 맞아. 아무렴, 술 취해서 뻗은 인턴을 모른 척할 수는 없잖아?”
순간 하리의 표정이 다시금 애처롭게 내려앉으면서 거의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 결국 결론은 부딪혀 보자, 인 거군. 하긴, 내뺄 구석도 없으니까 말이다.
“저기, 저기. 제가 혹시나, 아주아주 혹시나, 실수 같은 거. 없었나요?”
정말이지 꼬리를 푹 내린 채 눈빛으로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라고 간절히 외치는 하리를 본 순간, 선호는 이상하게 또 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자신은 어제 단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넌 아주 다리 쭉 뻗고 잘도 잤을 테니. 이 정도의 벌은 애교로 받아야지.
“글쎄? 그냥 자기만 하던데.”
“정말요? 정말 자기만 했어요?”
삽시간에 환하게 피어오르는 하리의 표정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움의 극치였다. 선호는 저도 모르게 저 뽀얀 볼을 꼬집어 보고 싶어서 엄청난 자제력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눈을 보고 좀 이상해졌어.”
눈이라니, 어제 눈이 내렸어? 그러고 보니 꿈에서도 눈이 내렸지. 3년 전, 그 악몽의 크리스마스! 설마, 설마. 선배 이름을 불렀다던가. 그랬다던가!
“혹시, 누굴 부르진…….”
“꼭 울 것 같더라고.”
“아.”
말이 엇갈리긴 했지만 하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게 큰 실수를 하지도 않았고, 선배 이름을 부르지도, 울 것 같긴 했어도 울지도 않았고.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선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정말 감사했고, 또 죄송했습니다.”
선호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에서 얼떨결에 튀어나왔던 말이 거슬렸다. 그저, 3년 전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울 것 같았다고 거짓말을 한 거였는데. 누굴 부르다니, 누굴? 혹시 그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걸까? 그날 울었던 것과 관련된, 사람. 남자일까? 애인? 애인?
순간 그의 눈빛이 저도 모르게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딱딱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하리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다시 평소의 그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자료 정리가 내일까지인 건 알지?”
순간, 뭔가 조금 차가워진 것 같은 목소리에 하리는 의아한 마음으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늦으면 안 돼.”
“알겠습니다.”
그녀는 엉거주춤 뒤로 걸음을 당겼다. 선호는 하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본 뒤에야 미간을 찌푸리며 스스로 자책했다. 끝까지 감췄어야 했는데, 저도 모르게 감정이 새어 나가 버렸다. 뜨끔하던 그녀의 표정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빌어먹을. 자신이 이렇게도 자제를 못 하던 놈이었나? 하지만 3년 전 그녀가 울었던 이유가 그 어떤 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게 어쩌면 애인이라던가.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저 조그만 마음에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저도 모르게 피가 차갑게 식으면서 가슴이 저릿했다.
선호는 긴 숨을 내쉬며 어렵사리 걸음을 떼었다. 그러다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게 이런 유치한 소유욕이 있었을 줄이야. 정말 저 쬐끄만 햇병아리 때문에 미쳐 버리겠다, 정말.
선호에게서 빠져나온 하리는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저 잠깐 흘러나왔던 그 서늘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혹시, 다른 실수라도 한 건가? 하지만 만약 실수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정색할 필요는 없지 않나? 좀 귀엽게 봐 줄 수도 있지. 우리가 생판 모르는 남도 아니고. 왠지 모르게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잠깐, 서운하다니? 내가, 그 인간에게 서운함을 느꼈다고, 지금?’
순간, 하리는 허탈하게 웃었다. 내가 지금 왜 그 인간을 이토록 생각하고 있는 거지? 정말로 진이 말대로 그새 정이라도 든 거야? 꿈에 나올 정도로? 게다가 뽀뽀.
“미쳤어, 조하리. 미친 거야. 제정신이 아니라고. 이제 그만 잊어, 잊어, 머릿속에서 그 변태 자식을 몰아내!”
하리는 제 머리를 콩콩 쥐어박으면서 연신 잊어, 잊어! 를 되뇌었다. 그러면서도 연신 선호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그녀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