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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회진이 많다는 건 알았지만 어쩜 이렇게 길고 느리게만 느껴지는지. 하긴, 저 변태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니 그렇게 느낄 수밖에.
하리는 여전히 저 남자가 펠로우라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아까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이 교수님도 굉장히 신뢰하는 사람 같던데. 그리고 실력도 괜찮은지, 이번에 처음 만나는 환자임에도 정확히 상태를 파악하고서 주치의에게 오더를 내리고 있었다.
하리는 그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연신 귀를 쫑긋거리며 그의 모습을 아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신보다 배는 큰 키와 전체적으로 날렵하게 빠진 얼굴, 염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지 단정하게 내려온 머리카락이 지나치게 까만색으로 반짝거렸다. 그래, 어제 그 요상한 만남만 아니었더라면, 저 새하얀 가운이 제법 잘 어울리는 의사라고 믿어 줬을 텐데. 첫 만남이 너무 엉망이었다. 이미 뇌리에 박힌 그 기억이 지워지질 않는다, 이 말이지.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드디어 회진이 끝이 나고, 하리는 얼른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어쩌면 아침밥이라는 걸 먹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어, 그녀는 다른 선생님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뒤로 당기려는 찰나.
“인턴 선생.”
빌어먹을. 아무리 생각해도 저 남자와는 상극인 것 같다. 아주, 아주 상극!
“예, 선생님.”
하지만 일개 인턴이 무슨 불만을 표하리오. 살짝 굳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겉으론 전혀 문제가 없는 단정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선호는 불만이 가득한 눈동자로 저를 쳐다보는 이 햇병아리 모습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는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얼굴에 고대로 나와 있는 걸 뭐. 처음부터 느낀 거지만, 이 여자는 감정을 숨기는 것에 너무나도 어설펐다. 고로, 절대 거짓말을 못하는 스타일이라는 거지.
“이 교수님이 하신 말씀 잘 들었죠? 사실 내가 좀 빠듯하게 연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괜찮으면 지금이라도 갈까요?”
“급하시면 그래야죠.”
네, 네. 인턴이 무슨 거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러더군요. 인턴 시절의 입 모양은 무조건 네, 선생님으로 굳어진 거라고. 그래, 조하리. 감히 네가 아침밥을 먹으려고 했다니, 그런 엄청난 욕심에 천벌을 받고 있는 거야, 지금.
“그럼 지금 갑시다.”
기분 좋게 걸어가는 선호의 뒷모습을 하리는 있는 힘껏 째려봐 주면서 마치 병든 닭처럼 축 늘어져 걸음을 옮겼다. 하아, 왠지 세상이 노랗게만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 * *

우신대학병원의 부원장실. 그곳에 신경외과, 그것도 뇌 의학의 일인자로 칭하는 우신대병원의 자랑이자 중심인 한애령. 그녀가 있었다. 현재는 부원장이지만 거의 병원의 모든 것을 관리하고 있기에 병원장이라고 봐도 무방했고, 진짜 병원장도 그녀의 남편인 이영철이었다.
그녀의 나이 50대. 하지만 이영철은 70대를 바라보는 노령으로, 공식적으론 한애령이 두 번째 부인이었다. 뒷얘기에 따르면 이영철이 유망했던 한애령을 꼬인 거라고 했지만, 사실 진실은 달랐다. 이영철에게 먼저 접근한 건 한애령이었다. 인턴부터 조교수까지, 거의 수석으로 스트레이트를 달렸던 한애령의 야망은 다른 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우신대학병원뿐만 아니라, 자매병원인 대한병원까지 그 손을 뻗으려고 일부러 양자를 세워 그 위치를 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발판이 지금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한국 최고의 뇌 신경센터 건립이었다. 그때, 팩스가 움직이면서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날아왔다. 애령은 팩스를 천천히 읽어 보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내과 전임의로 부임했다라. 외과도 아닌 내과. 훗, 아직 여전한가 보군.”
한애령은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창가로 비치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 할머니가 우리 손자를 직접 환영해 줘야겠지?”



2장


선호의 연구실로 들어온 하리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된 내부를 보고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겉으론 정말 멀쩡한 남자인데. 역시 진이의 말대로 사람의 성욕은 절대 참을 수 없는 뭐 그런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당직실에서 그러는 건, 이해를 하려야 할 수가 없었다.
선호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하리를 보면서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일단 인턴 선생이 해 줄 일은 간단해요. 자료 정리 도와주고, 데이터 분석해 주고, 할 수 있으면 도표로 깔끔하게 해 주면 더더욱 좋고.”
그러면서 건네는 분량은 아주 어마어마했다. 조하리. 오늘부터 밤샘이구나. 아무리 인턴이 일로 먹고살 정도로 일만 한다지만, 유독 자신은 일이 흐르다 못해 넘쳐 터질 것 같았다.
“급하니까, 내일모레까지. 할 수 있죠?”
“네, 선생님.”
내일모레? 그래, 날 죽여라. 잡아 죽여!
하지만 힘없는 인턴은 그저 눈물을 머금고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 어마어마한 분량을 움켜쥘 뿐이었다.
눈빛에서 절로 흐르는 한숨. 선호는 이 조그만 병아리가 덜덜덜 떠는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엽고 재미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나, 사디스트였던 건가?
“그럼 이만 나가 봐도 될까요?”
한시라도 빨리 이 인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미친 듯이 달린다면, 아주 조금의 아침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어서 고개를 끄덕여, 이 못된 변태 자식아. 나도 내 위장에 음식이라는 걸 좀 넣어 보자고!
하지만 그러한 하리의 간절한 바람에도, 선호는 그녀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서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씨익 그리며 여유를 떨었다.
“흠, 인턴 선생 지금 엄청 배고프구나?”
“네?”
“나 배고파 죽겠어, 얼른 가라고 해. 이 변태 자식아.”
“…….”
“그렇게 얼굴에 쓰여 있네.”
헉, 설마 그렇게 얼굴에 티가 난 건가? 하여튼 귀신같은 놈!
“아닙니다. 변태라니, 그런 생각한 적 절대로 없습니다. 그리고 절대 배도 고프지 않…….”
하지만 주인의 의지를 배신한 채, 하리의 위장은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쏟아 내고 있었다. 결국, 쪽팔림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버렸고, 선호는 서류 뭉치를 끌어안고 발개진 얼굴을 감출 길 없어 동동거리는 모습에 다시금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정말 툭 건들면 온몸으로 반응을 보여 주니 건드리는 재미가 있었다. 어쩜 이렇게 귀여운 햇병아리가 다 있을까!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그녀를 향해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됐어, 인턴도 사람인데. 그리고 나랑 인턴 선생의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잖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줘야지. 그렇지만 절대 남들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얼굴에 다 티 나니까.”
“……네.”
“우유 먹을래? 원래 식욕이 성욕을 못 이긴다잖아.”
어디선가 우유를 하나 꺼내 주는 그의 말에 하리는 마지못해 우유를 받아 들고선 팩을 열었다. 아무튼, 비유를 해도 그런 거랑 비유를 하냐? 역시 변태는 변태였다. 하긴, 그것도 인간의 삶의 욕구 중 하나인데. 내 주변 가장 친한 친구조차도 그런 것을. 그런데 정말, 그 섹스. 라는 게 그렇게 좋은 걸까? 매일 날밤을 새우는 순간에도 잊지 못할 만큼?
하리는 항상 진이에게 간접적으로 듣기만 했기에 아직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맛이 괜찮은가?”
우유 먹는 모습 처음 보는지, 아주 턱까지 괴고서 구경을 하는 통에 먹다가 사레가 걸릴 것 같았지만, 확실히 그녀의 몸은 본능에 너무나도 충실한 탓에 넘어가는 우유가 정말이지 꿀맛 같았다.
“네, 맛있어요.”
“흠, 그래? 역시 하루 정도는 상관없나 보네.”
하루 정도는 상관없다니. 뭐지? 이 불길한 느낌은?
“그거 유통기한이 하루 정도 지났어. 하지만 맛은 있지? 그럼 상관없지 뭐.”
물론 유통기한이 하루 정도 지난 거야 상관없겠지. 냉장고 안에 들어 있으면 2∼3일도 괜찮으니까. 하지만 그건, 자신이 마실 때 그런 거고! 남한테 주는 거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거기다 옵션으로 방긋방긋 웃어 주며 말하는 저 자식의 면상에 이 우유를 쏟아 붓고 싶은 충동을 얼마나 이를 악물고 억눌렀는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정말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됐을까?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한 달! 성격이 정말 삐뚤어지다 못해 까맣게, 아주 까맣게 타 버린 게 분명해! 개 사이코 자식!
하지만 하리는 오히려 우유를 단번에 다 마시고 보란 듯이 그의 앞에 턱 하니 내려놓았다.
“뭐, 하루 정도는 유통기한이 지났다고도 할 수 없죠.”
“역시 그렇지? 그래도 혹시라도 재수가 없어서 잘못되면 사방에 의사들이니까, 호출 정도는 해 줄게.”
“선생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누가 보면 아주 사이가 좋아 하하 호호하는 것처럼 여길 아슬아슬한 상황을 이어 가던 찰나, 갑자기 복도가 쿵쿵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도 낯이 좀 익은 남자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들어왔다. 바로 신경외과 4년 차 치프 남태종 선생님이었다.
“왜 이렇게 뛰어오냐? 내가 그렇게 보고 싶디?”
무척이나 친근하게 말을 섞는 선호의 모습에 하리는 서로 아는 사이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태종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리고 선호는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선 아까와는 달리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가 부르냐?”
“1번 수술방에서 콜 왔습니다.”
“거기서 뭐 하는데?”
하지만 태종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선호는 굳어진 입가로 얼핏 미소가 스치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머리 열고 있구나?”
“부원장님이 직접 부르셨습니다.”
“우리 부원장님은 어쩜 이렇게 쇼를 좋아하시는지.”
잔뜩 일그러진 태종과는 달리 그는 가볍게 웃음을 띠었다. 하지만 그 웃음을 본 하리는 처음으로 그가 지쳐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아까까지만 해도 개 사이코처럼 방방 대던 사람이 저렇게 달라지고 있는 걸까.
“최선호.”
결국, 참다못한 태종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선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 모습에 더 화가 난 태종은 옆에 하리가 있다는 것도 무시한 채 역정을 냈다.
“그래, 됐다, 됐어. 내가 네 속을 어떻게 알겠냐? 하지만 괜히 너희 집안싸움에 내 등 터지게 하지 마라.”
집안싸움이라는 말에 선호는 엷은 미소를 띤 입가와는 달리 눈동자가 꽤나 살벌한 빛을 띠며 번들거렸다.
“인턴 선생.”
“네, 네?”
찍소리도 안 하고 서 있던 하리는 갑자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녀의 표정과는 달리, 다시금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진 선호는 순식간에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내 덕분에 좋은 구경 하게 될 줄 알아. 이런 수술, 인턴이 보는 건 힘드니까.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라고.”
설마, 나도 간다는 거야? 하지만 그 설마가 농은 아니었는지, 선호는 하리의 손을 잡고서 성큼성큼 신경외과 쪽 수술방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점점 수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 손을 빼고 싶었지만, 그의 단단하게 다물어진 표정을 보니 쉽게 입이 열리지가 않았다. 뭔가 굉장히 긴장한 표정이라고 해야 할까? 도대체 내과 전임의가 신경외과 수술에 불려 가는 이유가 뭘까? 게다가 부원장님이라니, 그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결국 그의 손에 이끌려 1번 수술방의 모니터 실로 들어간 하리는 정말 숨소리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교수님과 과장님을 비롯한 명망 높은 선생님들과 게다가 진짜로 부원장님까지! 이 인간은 대체 날 어디로 끌고 온 거야!
“오, 드디어 왔군.”
한애령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선호의 모습에 입술 끝으로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50대이면서도 절대 녹슬지 않은 미모와 카리스마를 겸비한 그녀는 여전히 신경외과, 특히 뇌수술의 권위자였다.
“오랜만이야, 최선호 선생.”
“이런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부원장님.”
마주 잡은 손끝에서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스파크를 일으켰지만 하리는 자꾸만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냥 천천히 보도록 해. 그렇게 대단한 수술은 아니야. 이번에 우리 신경외과에서 힘쓰고 있는 뇌 신경센터 건립을 위해 작게 마련한 자리이니까. 그리고 한때, 신경외과에서 자네를 차기 유망주로 보지 않았겠어? 언제라도 다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에서 마련한 자리야.”
이 남자가, 신경외과의 유망주였다고? 그런데 왜 지금은 내과에서…….
“부족한 저를 기억해 주시고 이런 대단한 자리에 초대를 해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 인턴 선생에게도 유익한 공부가 될 것 같네요.”
선호는 자꾸만 제 뒤로 숨어들려는 하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한애령의 표정이 그녀에게 박혔고, 하리는 순간 숨을 콱 참고서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이번 달 GI(소화기내과) 인턴으로 들어온 조하리입니다.”
“아하, 인턴 기간이 곧 끝나는군요. 어쩌면 우리 신경외과에서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좋은 공부가 되었으면 해요.”
“가, 감사합니다!”
그렇게 한애령이 자리를 떠나자 다른 몇몇 의사들도 자리를 움직였다. 하리는 이제야 막힌 숨을 토해 내며 선호를 노려보았다.
“선생님, 대체 저를 뭐 하러 데려오신 거예요? 방패막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지르셨기에!”
“글쎄, 뭔 짓을 저지른 건 아니지만, 영 눈에 거슬리긴 하시겠지.”
선호는 한창 수술이 진행하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온통 차갑게만 느껴지는 수술방. 생명을 살리는 곳이지만, 저곳은 항상 죽음의 문턱과 가까이 와 닿은 곳이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녹색 선을 애처롭게 붙잡으며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비정한 곳.
그는 살짝 떨리는 손끝을 애써 붙잡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아까와는 달리 신기한 눈동자로 수술을 지켜보는 하리에게 입을 열었다.
“인턴 선생.”
“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하, 하지만 다 안 끝났는데요?”
“됐어, 저런 것보다는 식욕이 먼저지. 지금 안 먹으면 인턴 선생 언제 밥 먹을지 모르잖아. 그러다 안 그래도 작은 키 더 쪼그라든다.”
하? 그래 네 키 크다. 대빵 크다. 더럽게 크다! 근데? 그래서? 내 키 작은 거에 보태 준 거 있냐! 괜히 데려와 놓고선, 이제 쓸모가 없어졌다 이거지? 역시나 아주 얄미워 죽겠다. 얄밉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지, 사람이 아니야!

* * *

수술방을 빠져나온 애령은 교수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미소를 지었다. 모두 한국 신경외과, 특히 뇌 의학에서 명망이 높은 교수들로 이번 뇌 신경센터 건립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해 줄 열쇠기 때문에 한 치의 빈틈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최선호라면 대한병원 이희진 원장의 아들 아닙니까?”
“그렇지요, 부원장님의 손자.”
“훌륭한 손자이지요.”
“허허, 그나저나 신경외과가 아닌 내과에 있다니. 좀 놀랍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희진 원장도 신경외과 쪽이 아니던가요? 아들은 좀 다른 모양이군요.”
교수들의 말에 애령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서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내과에 머물러 있는 거랍니다. 곧 다시 신경외과로 와야지요. 전공의 때부터 뛰어난 수술 실력을 지녔던 아이입니다. 그 실력을 썩히게 할 수는 없지요.”
“하긴, 누구의 피가 흐르는데 당연하겠지. 그 실력이 궁금해지는군.”
“언제 한번 제대로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준비된 식당으로 가던 애령은 수술방에서 멀어지고 있는 선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역시나 녀석은 아직, 수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리하게 내세우다니. 이희진, 그만큼 이번 뇌 신경센터가 꽤 신경에 거슬리는 모양이군.

* * *

됐다는 그녀에게 기어이 먹으라고 쥐여 준 도시락을 우물거리며 하리는 진이와 조금 한가한 병동 스테이션에서 휴식이라는 걸 취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도시락을 사 준 놈이 그 당직실에서 아앙! 한 그놈이라고?”
“아앙이란 소리까지는 안 냈어.”
“했으면 냈겠지.”
“넌 머릿속에 그거밖에 없냐?”
“그나저나 어때?”
“뭐가 어때?”
갑자기 눈동자가 급 초롱초롱해지면서 자꾸만 달라붙기 시작하는 진이의 행동에 하리는 영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얼굴 말이야. 어때? 끝내줘? 목소리는. 바로 젖을 것 같아? 듣자 하니 간호사들 사이에선 이미 초 킹카로 소문났다던데. 넌 지금 아주 부러움의 대상이야, 이년아.”
“초킹, 뭐?”
“초 킹카! 아까 최 간호사가 길을 가르쳐 줬다는데 미소가 아주 예술이라던데? 그 단단한 눈매에서 흘러나오는 햇살 같은 미소 하며, 반듯한 이목구비에 살짝 올라간 입술이 아주 그냥, 금방이라도 잡아먹어 버리고 싶은 꼬픈남이라더라.”
“꼬픈남?”
“얘는, 꼬이고 싶은 남자 말이야.”
하? 지랄도 아주 생지랄이다. 꼬픈남? 그 호색한 변태가? 웃기고 앉아 있다.
“웃기지 말라고 해. 그 변태 자식이 무슨 꼬픈남.”
“그건 변태가 아니라 인간의 불타는 욕구 중 하나라니까? 아무튼, 얼라를 데리고 무슨 얘기를 할꼬. 이 나이에 붙잡고 성교육을 시킬 수도 없고.”
“아무튼, 너마저 내 앞에서 그 자식 얘기 꺼내지 마. 안 그래도 하루 종일 붙어 다닐 생각을 하니까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저녁까지 있어야 하잖아!”
“왜에? 같이 뼈와 살이 녹는 밤을 보내려고?”
“회식 있다. 회식, 이년아!”
아무튼, 저 머릿속을 해부하면 온통 19금 빨간 딱지가 둥둥 떠다닐 것 같았다.
진이는 쿡쿡 웃으면서 장난을 접었다. 하리는 모르겠지만, 이런 얘기에 순진하게 화르르 얼굴 달아오르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지지배는 저거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도 나이 27살이면 알 거 다 아는 나이가 아니던가? 아무튼, 표정이 다채로워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아! 근데 나 방금 NS(신경외과) 수술방 구경하고 왔다.”
“왜? 너 지금 그쪽 인턴 아니잖아.”
“근데 거기서 부원장님도 봤다, 이 말이지.”
부원장을 봤다는 말에 진이는 더없이 흥미로운 눈동자로 하리를 맹렬히 바라보았다.
“너 NS 남태종 선생님 알지?”
“잘 알지. 내가 그 선생님의 수술 모습을 보고 녹아내렸잖아. 어쩜 그리도 섹시하게 수술을 하시던지. 그 손가락으로 더듬으면 완전 바로 뻑이 갈 거야.”
“좀 닥치고. 그 선생님이랑 그 변태랑 아는 사이인 것 같더라고.”
“뭐, 알 수도 있지.”
“그 선생님이 그 변태를 수술방으로 불렀어. 근데 내가 보기엔, 부원장님이 부르신 것 같아.”
“부원장님이 직접?”
“그게, 아주 잠깐 들은 거라 정확하진 않은데. 그 남자, 원래 NS에 있었나 봐. 그것도 되게 유명한 것 같던데.”
게다가 분위기도 굉장히 묘했다. 게다가 조금 창백해진 것 같은 그의 모습도 이상하게 뇌리에서 잊히지가 않았다.
진이는 하리의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ER(응급실)에서 호출이 오고 있었다.
“뭔가 촉이 쎄하게 오는군. 정 궁금하면 이 언니야가 좀 알아봐 줄 수도 있지. 내가 제법 마당발이잖아?”
“됐어, 안 궁금해.”
“웃기시네. 얼굴에 궁금해 미치겠다, 다 쓰여 있거든?”
젠장, 내 주변 사람들은 전부 작두를 타나? 아니면 정말 얼굴에 그렇게 티가 많이 나는 건가?
“일단 먼저 간다. 아주 오라고 난리야. 난 CS(흉부외과)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EM(응급의학과)도 얄짤없다.”
“나도 가야겠어. 첫 회식인데 인턴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다시 그 인간을 볼 생각을 하면 머리가 아팠지만, 한 달 동안은 죽는시늉도 해야만 했다. 그래, 그게 인턴이 살아남는 방법이니까!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코피 터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외과 전공의 시험에 합격해서 반드시 그 인간과 영원한 굿바이를 외칠 것이다!

* * *

차가운 불빛 아래, 텅 빈 복도 너머로 타박타박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왔다. 불빛보다 더 창백하게 굳어진 낯빛. 그리고 핏기가 사라진 입술을 꽉 깨물고서 연구실로 향하는 그의 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고작 보기만 했을 뿐인데, 선명하게 파고드는 그날의 기억이 잔상의 칼날이 되어 그의 머릿속으로 처참히 부서져 내렸다. 그러곤 여지없이 손끝이 떨려 왔다. 마치,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울부짖는 것처럼……. 연구실 문을 돌리니 소파 위로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무게를 잡고 있는 태종의 모습이 보였다. 선호는 애써 피곤한 기색을 지우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넌 일 없냐? 치프가 그렇게 막 놀아도 되는 거냐고. 언제부터 NS가 그렇게 한가해졌냐?”
하지만 태종은 그의 분위기에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선호도 키가 큰 편이지만, 태종은 그보다 조금 더 키가 컸다. 집안이 운동을 하는 집안이라 그런지 골격도 상당했기에 이렇게 마주 보고 서 있으면 선호는 마치 자신이 심하게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곤 했다.
“야, 무섭게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내 남자의 자존심이 쪼그라드는 느낌이야.”
하지만 태종은 무서운 눈빛으로 단번에 그를 몰아세웠다.
“너 정말 여기 왜 돌아왔냐?”
상당히 낮게 흐르는 보이스가 서늘한 공간을 울려왔다. 4년 차 치프인 그가 신경외과에서 아수라라고 불리는 이유는 상당히 낮은 저음으로 군기를 잡으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그건 평상시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 너무 붙어 있다는 생각 안 드냐? 이번에 또 걸리면 이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거야. 게이라고 소문난다고. 난 우리 인턴 선생에게 더 이상 오해받고 싶지 않단다.”
“장난 그만하고 제대로 말해. 네가 여기서 굳이 전임의를 할 필요가 뭐가 있냐? 왜 네 발로 구정물로 뛰어드냐고!”
“태종아.”
순간 그는 선호가 애써 숨기고 있던 손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숨기려 해도 여전히 미약하게 떨리는 손끝을 보며 태종은 결국 잔뜩 일그러진 목소리로 외쳤다.
“너 아직도 무서워 죽겠잖아!”
미세하게 흔들리는 태종의 목소리에서 그가 얼마나 저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태종에겐 미안했다. 그날도, 지금도, 못난 모습만 보여 줘서.
선호는 잡힌 손목을 천천히 풀어 내고서 역시나 또, 웃었다.
“괜찮아, 내가 직접 수술만 안 하면 견딜 만해. 그래서 일부러 내과로 돌아온 거야.”
그나마 웃고 있는 녀석의 모습에 태종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예전엔 저렇게 억지로 웃는 것조차 하지 못할 만큼, 녀석은 정말 완전히 망가졌었으니까.
“그러니까 왜 돌아왔냐고. 설마, 어머니 때문이야? 너희 어머니는 정말 네가 말라 죽기를 바라냐? 엉?”
“글쎄, 말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교수 자리 하나 꿰차길 바라시지. 근데, 이젠 교수로는 안 될 것 같네.”
선호는 천천히 책상으로 걸어가 가장 밑의 서랍을 열었다. 구겨진 담뱃갑. 원래 병원에선 금연이고, 또 피워선 안 되는 거지만 지금은 이 하얀 니코틴을 내뱉지 않으면 지친 마음을 달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종아, 나도 언제까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잖아.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지. 설령 다시는 병원 안조차 들어오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어정쩡하게 있을 수는 없어.”
서서히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입술 너머로 뿌연 연기가 흩어져 갔다.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 위로 텁텁한 씁쓸함을 자아냈다.
“정말 그것 때문이라면 이렇게 안 말려. 오히려 바라는 거니까. 그런데 그 더러운 싸움에 휘말릴 것 같으면 당장 때려치워. 부원장이 널 수술에 부른 것도 수상해. 네가 포비아 상태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고.”
포비아(Phobia), 일종의 정신 장애이며 단순하게 말하면 공포증. 선호는 수술에 있어서 지독한 포비아 상태를 겪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지. 오히려 확인하려고 부른 게 틀림없으니까.”
“이게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이냐? 그게 사실이면 부원장, 너 절대 가만히 안 둬. 어떻게든 그걸 이용하려고 들 거라고. 그렇게 되면 넌 끝이야. 아무것도 못 해 보고 끝이라고!”
“사실 옛날 옛적에 끝장났어야 했어.”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그건 분명, 내 잘못이야.”
선호는 물고 있던 담배를 짓밟았다. 마치 지금 여기서 서 있는 저 자신을 짓밟는 것처럼 아주 강하게 문지르며 서늘한 시선으로 뿌리 깊게 내뱉었다.
“내 잘못이야.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게 내버려 둔 것도 내 잘못이야.”
태종의 눈빛이 흐려졌다. 녀석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그저, 예전엔 온몸으로 미친 듯이 울었던 것을, 지금은 웃음으로 위장해 숨죽여 운다는 것뿐. 하지만 그게 더 위험했다. 어떤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 모르니까. 그리고 그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선호는 이제야 진정이 된 손끝을 바라보며 힘없이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오늘 만난 자신의 할머니이자, 세상에 어머니보다 더 무서운 여자가 있다는 걸 알려 준, 한애령. 그녀를 떠올렸다.
“뇌 신경센터가 생각보다 진전된 모양이지?”
그의 입에서 묵직하게 나오는 한마디에 태종은 엷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확정적이지. 부원장이 거기에 얼마나 매달렸는데. 이제 후원해 줄 기업만 찾으면 끝이야. 그런데 그것도 거의 확정된 것 같아.”
“어딘데?”
“신성 그룹.”
“훗, 신성이 예전부터 의료 쪽으로 눈독을 들이더니, 결국 이렇게 맺어지는군.”
그래서 어머니가 안달하셨군. 어떻게든 한애령이 뇌 신경센터를 세우는 걸 막으려고.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면 그 지분과 센터장만큼은 어머니 쪽으로 돌려야 할 테니까. 만약 어느 것 하나도 건진 것 없이 그 모든 게 한애령 쪽으로 넘어간다면,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딸이라는 것만으로는 병원을 지킬 수가 없었다. 한애령도 그에 맞서 양자를 내세울 테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한애령이 내세울 카드는 또 있었다. 병원도 결국은 돈과 돈이 오가는 기업이고 영리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신성처럼 거대 기업과 MOU라도 체결한다면, 병원에 큰 이익이니 한애령에게 주주들의 신임은 쏠릴 것이고, 결국은 병원장과 더불어 우신재단 회장직도 넘어갈지 몰랐다. 그렇게 되면 분명 부속 병원인 대한병원을 재정적으로나, 인력적으로나 압박할 것이고, 한애령이 어머니의 지분까지도 가지게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는 어떻게든 자신을 센터장에 올리려고 애를 쓸 것이다. 우신대학병원에 어머니 쪽 사람을 제대로 심어야 할 테니까. 결국은 태종의 말대로 더러운 집안싸움에 등 터지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게다가 그렇게 되려면 결국은 다시 신경외과로 돌아가 메스를 잡아야만 했다.
‘그냥 한 인간으로 놓고 보면 한애령이라는 여자, 참 대단한 여자야.’
호출기가 울렸다. 태종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는 저 녀석을 저렇게 놔두고 가도 될지 걱정이었지만, 선호는 그러한 태종을 안심시키며 제법 가벼워진 입꼬리로 미소를 지었다.
“난 괜찮아. 도망쳤을 거면 진작 도망쳤지.”
“썩을, 나도 이젠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과로 어렵게 바꿨으면 그냥 개인병원이나 하나 차려서 잘 먹고 잘 살 것이지.”
“흠, 그것도 좋군. 시골에 병원 하나 차려서 아내랑 도란도란.”
순간 선호는 햇병아리가 떠올랐다. 한적한 시골에서 적적할 테니, 녀석 골려 먹는 재미로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텐데. 그러려면 몇 년을 더 키워야 하나…….
“아무튼, 될 수 있으면 부원장이랑 부딪히지 마. 네 어머니보다 네가 먼저 살고 봐야지.”
“알았다, 자식아. 네가 날 이렇게 사랑하는 줄 꿈에도 몰랐다.”
“닥쳐, 이 새끼야. 너 때문에 내 수명이 반으로 줄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태종이 연구실을 빠져나가고, 선호는 어렵사리 짓고 있던 미소를 거두어들였다. 목이 따끔거렸다. 괜히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를 빨아 당겨 그런 모양이었다. 하지만 목보다 따끔거리는 건 지금껏 그를 누르고 있는 과거의 기억이었다. 메스를 잡고 싶다. 어머니도, 한애령도 모두 벗어나 순수한 마음으로 메스를 다시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선, 자신의 모든 치부를 드러내고 녀석에게,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그걸 위해 이곳으로 돌아왔다. 더 단단해지고, 더 강해지기 위해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삐링삐링.
병원에서만 사용하는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을 확인하니 햇병아리였다. 아무래도 연구를 도와주려면 서로 연락처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번호를 주었다. 연구실로 오기 전, 기어이 안 받겠다는 도시락을 억지로 쥐여 줬을 때의 그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았다. 저 변태 자식이 준 걸 받기 싫다는 마음과 더불어 그녀의 너무나도 솔직한 식욕 본능에 군침 흐르던 표정까지.
역시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정말 나중에 개인병원 하나 차리면 주머니에 쏙 넣어서 데려가고 싶을 만큼, 왜 이렇게 마음이 가는지 모르겠다. 고작 두 번 봤을 뿐인데. 사실 이 병원으로 돌아왔을 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있을 수 있을 거란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아까처럼 수술방에 들어가는 것도. 그런데 이상하게 그 햇병아리가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웃는 일이 쉬워졌고, 수술방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조그만 손에서 주는 체온이 너무나도 든든해서. 정말로 그녀의 말처럼 방패막이가 되어 준 것이다.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저 순수하게 시선을 사로잡히는 느낌.
그의 인생에서 그런 느낌이 든 여자는 딱 두 명이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때 보았던 그 여자와 지금의 햇병아리.
어느새 그의 표정은 억지 미소가 아닌 진짜 환한 미소를 그리고서 휴대폰을 받았다.
“무슨 일이야, 인턴 선생? 설마 정말 재수 없이 탈이라도 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