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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가운 속 사정


1화

프롤로그


지금껏 수도 없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였으나 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기념일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 주변을 스치는 많은 커플들에게도 이날은 찬바람에 언 서로의 몸을 녹여 주며 농밀한 사랑을 속삭이는 기념일일 터였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다르게 보내고 싶었다. 입대를 코앞에 두고서도 시커먼 남자 동기들과 술만 푸는 자신의 신세가 서글펐다. 선호는 잘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기다리는 것도 짜증 나지만, 그 대상이 여자가 아닌 것이 더 못마땅했다.
‘이 자식들은 왜 안 오는 거야. 여기저기 다 쌍쌍이라 어색해 죽겠는데.’
분명 추운 날씨인데도, 아니, 추운 날씨라 더욱 폴폴 풍기는 연인들의 애정 행각에 선호는 슬슬 낯빛이 뜨거워졌다. 그는 민망함에 애써 고개를 돌렸다. 난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다행스럽게도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선물 상자를 든 채 시린 손을 호 불어 가며 발을 동동 굴리는 한 여자. 잠그지 않은 코트 안으로 무릎을 겨우 덮는 빨간 원피스가 제법 추워 보였다. 멋을 내 굽실거리는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길게 내려와 그나마 목은 허전하지 않았다.
선호는 다 피운 담배를 문지르며 연신 그 여자를 주시했다. 상당히 오래 기다린 듯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굉장히 반짝거리는 눈동자. 그래도 춥긴 추운지 연신 제자리에서 콩콩 뛰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남자 기다리나? 아님 데이트? 그것도 아니면, 첫 고백?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기대하는 일인 건 분명한 것 같았다. 표정에 정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으니까. 아주 행복해 죽겠다는 웃음. 제법 예쁜…….
‘하, 최선호. 미쳤냐?’
그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여전히 연락조차 안 되는 이 자식들을 어떻게 족쳐 줘야 하나, 생각하며 휴대폰을 들어 올린 순간, 액정 위로 하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와, 눈이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주변의 커플들이 꺄아거리는 소리와 함께 정말 하늘에서 조금씩 눈이 내려오고 있었다. 선호는 손바닥 위로 스르르 녹아내리는 이 차가운 눈송이를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그 빨간 원피스의 여자를 떠올렸다. 만약 정말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면, 이 정도 무대가 만들어졌으니 엄청 기뻐하겠네. 여자들은 이상하게 그런 거에 특별한 의미를 붙이니까.
그는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아주 조심스럽게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선호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면서 그 안으로 그 여자만이 걸어 들어왔다.
점점 새하얗게 쏟아지는 세상 속에서 그보다 더 환하게 짓는 여자의 미소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를 제외한 다른 곳의 시간은 점점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선호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왠지 같이 웃고 싶어졌다.
저 여자가 품고 있는 저 행복함을 같이 느끼고 싶었다. 손끝으로 아릿하게 번지는 열기가 점점 얼굴 위로 스치며 눈가에 설렘이 배어들었다. 그는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저도 모르게 사진을 찍었다. 찰칵이는 소리와 함께 선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그의 휴대폰엔 그 이름 모를 여자가 새하얀 눈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미치겠네.”
입대를 앞두고 허해진 마음에 모든 여자가 예뻐 보이는 건가? 아니면 정말 첫눈에 반했다거나, 뭐 그런 거야? 돌겠군. 그래, 그럼 뭐. 이름이라도…….
그때 타이밍 좋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까는 죽어도 연락이 없더만 참 더럽게 눈치 없이 연락하고 있는 원수 같은 동기들.
“죽을래?”
<받자마자 뭔 시비냐? 어디야?>
“광장에서 기다리라며! 얼어 죽겠다.”
<캬아, 쏘리하다. 거의 다 왔어. 갑자기 눈이 내려서 차가 좀 막히잖아. 조금만 기다려.>
“술 한번 얻어 마시려다가 이대로 얼어 죽…….”
선호의 시선이 다시 한 번 멈춰 들었다. 하지만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와 안타까운 눈빛이 그 여자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왜냐면, 그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던 그 여자가. 울고 있었으니까.
<야, 최선호? 뭐야, 최선호?>
그는 휴대폰을 들고 굳어진 채 정말로 펑펑 울기 시작하는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소중하게 들고 있던 선물 상자도 떨어뜨리고서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울음을 멈추지 못하는 여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싸해지면서 당장에라도 다가가 안아 주고 싶었다.
<최선호!>
“거기 어디야?”
<아? 거의 다 왔다니까, 대체 무슨…….>
“그냥 내가 갈게.”
선호는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앞뒤 생각 안 하고 그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북적이는 사람들 틈으로 이미 그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선호는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멍한 시선으로 그 여자가 서 있던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그 여자의 조그만 발자국이 움푹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서서히 눈이 덮이고 있었다. 마치 그 여자의 슬픔을 고스란히 묻어 버리는 것처럼.
그해 겨울의 크리스마스. 항상 평범하디 평범했고, 별다른 의미도 없었던 크리스마스가 한순간에 잊지 못할 기억이 되어 버렸다. 누가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놀려 댈지도 몰랐지만, 정말로 한순간에 그 여자의 웃음도, 눈물도, 모두 가슴에 새겨 버리고 말았다.







1장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한 병원 옥상. 하리는 말라 버린 땀방울에 서늘함을 느끼고서 정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바짝 마른 입술 사이로 제법 서늘한 입김이 엷게 흩어졌다. 어느새 겨울이 깊어지고 있었다. 무심히, 그리고 빠르게도 흘러가는 세월에 하리는 급 우울해진 마음으로 회색 시멘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하루가 가고 있었다. 아니, 병원에 하루가 간다는 말은 없다. 전쟁이 계속 이어질 뿐이고, 시계 따윈 그저 흘러가는 바늘에 불과했다. 게다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죽음의 인턴. 그녀는 1분 1초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만큼 정말 알찬 걸로는 누구도 부럽지 않을 만큼 보내고 있었다. 정말 잠자는 시간도 없을 정도니까.
삐삐―
“어쩐지 좀 쉬는가 싶더라.”
그래, 인턴이 일을 해야지. 괜히 상념에 젖어 푸념할 시간조차 사치다!
하리는 응급실 쪽에서 온 호출에 바닥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어 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린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마시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또다시, 지독한 소독약 냄새와 눈 아프게 따가운 붉은 피를 마주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선생님, 이쪽입니다!”
막 응급실로 한 여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간호사가 급하게 하리를 불렀고, 그녀는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며 의식을 점검했다. 다행스럽게도 의식은 남아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낙상 사고입니다. 머리 쪽은 괜찮은 것 같지만, 심한 복통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리는 간호사의 말에 배 쪽을 조심스럽게 눌러 보았다. 하지만 환자에겐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 가슴 쪽으로 올라가자 짙은 신음을 나타냈다. 흉부 쪽이다.
“당장 X-ray 촬영 들어가고, CS(흉부외과)에 콜 넣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EM(응급의학과) 인턴을 하면서 밤에 잠이라는 걸 자 봤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물론, 어디를 가든 종이 한 장 차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독 더 바쁘게 느껴졌다.
“선생님, X-ray 결과 나왔습니다.”
“CS는요?”
“지금 곧 오시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X-ray 결과, 흉부 골절이었다. 일단 압박을 해서 골절 부위가 움직이지 않게 막은 뒤엔, 외과에서 알아서 할 것이다.
“최대한 환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해 주시고, 선생님 오시면 설명 잘 부탁합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 뒤로는 계속 치프 선생님들이나 다른 레지던트 선생님들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차팅 보고, CT방 왔다 갔다 하고, 가끔 패악을 부리는 환자들도 상대해 주면서 가까스로 응급실을 빠져나온 하리는 판다 눈탱이를 하고서 곧장 당직실로 향했다. 아주 잠시라도, 정말 1분이라도 눈을 감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제 오늘만 지나면 EM 인턴은 종료되었다. 물론, 다음에 갈 GI(소화기내과)도 눈코 뜰 새는 없겠지만. 응급실이 바쁜 만큼 다른 곳도 손이 딸리는지 당직실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만약, 자고 있던 걸 들킨다면 아마 꽤나 깨질 것이 분명했지만 아까 계속 응급실에서 눈도장 찍으며 왔다, 갔다 했으니 쉽게 의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리는 그렇게 처음으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 당직실의 불을 켠 순간, 이불 너머로 꿈틀대는 그림자에 순간 걸음을 멈추고서 입을 열었다. 누가 있는 건가?
“거기, 누구세요? 진이야?”
같은 동기인 진이거나, 아니면 다른 여자 동기라고 생각했지만, 이불 속의 사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리는 뭔가가 점점 수상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뭐야. 왜 대답이 없는 거야.
“진이 너 맞지? 괜히 장난 그만하고 얼른 나…….”
그때, 펄럭하고 이불이 그녀의 얼굴 쪽을 향해 날아왔고, 하리는 미처 피하기도 전에 깍 소리를 지르며 그만 그 자리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무언가가 아주 빠른 속도로 타다닥 소리를 내며 짐승처럼 뛰쳐나갔다. 하리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아주 천천히, 천천히 이불을 걷어 내리자 한 남자가 막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를 보고선 씨익 미소를 띠었다. 남자, 남자?
“아이쿠, 얼른 나가려고 했는데…….”
“뭐, 뭐!”
“괜찮습니까? 아프겠네. 미안합니다. 이 시각에 당직실엔 사람이 별로 안 와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리는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남자의 모습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흐트러진 셔츠와 머리칼, 그리고 지퍼가 내려가 있는 바지……. 분명 저 모습은, 저 모습은……. 감히 신성한 병원 당직실에서 그런 파렴치한!
“다, 당신 뭐야.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지는 하리의 목소리에 남자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서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소리 한번 완전 섹시하게 지르네.”
“감히, 병원. 그것도 여자 당직실에서……. 하아! 경찰을 부르겠어. 이 변태 자식아!”
“저기, 당신이 어떤 야릇한 상상을 할지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 이해는 가는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아무튼, 사과는 하죠. 미안하게 됐습니다.”
남자는 이제야 흐트러진 셔츠 단추를 채우고서 바지도 제대로 고쳐 입었다. 흐트러진 머리를 제멋대로 빗어 내리니 그래도 조금은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어느새 하리의 앞으로 다가온 남자는 여전히 넘어져 있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쳤습니까? 제가 치료해 줄까요?”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가!”
“이런.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네.”
하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말이지 얼굴에 철판 깔고 파렴치하게 서 있는 이 남자를 노려보았다. 여자 당직실에 이렇게 마음대로 올라왔다는 건, 이 병원 관계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뭘 그렇게 봅니까. 혹시, 반했습니까?”
“당장 꺼져 주시죠? 정말 경찰을 불러 버리기 전에.”
“생각보다 입이 거치시네요.”
“병원 관계자입니까?”
하지만 남자는 하리의 말을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넘어지면서 살짝 긁힌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그 손을 덥석 잡아챘다.
“지금 무슨!”
“의사인 것 같은데, 손 다쳤잖아요. 이거 더 미안해지네.”
남자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발갛게 달아오른 부분을 조심스럽게 살피려는 순간,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리더니 하리의 손이 남자의 뺨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내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아오, 의사가 이렇게 사람 막 때려도 됩니까?”
“사람도 사람 나름이지요. 이 호색한!”
“그러니까 아무 일 없었다니까. 그래도 뭐, 제가 잘못한 거니까, 얼른 나가긴 하겠습니다. 근데 그 손은 꼭 치료하도록 해요. 그냥 두면 덧납니다. 의사 손은 혼자만의 손이 아니잖아요?”
남자는 살짝 부어오른 볼을 문지르며 당직실을 빠져나갔다. 하리는 마치 한바탕 폭풍우라도 쓸고 간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체 뭐 하는 작자일까? 그냥 순순히 보내 주는 게 아니었나? 근데 남자랑 응응을 하려면 상대방도 있어야 하잖아. 대체 어떤 지지배가 당직실로 남자를 끌고 온 거야! 아무리 남자가 고프다고 이런!
삐삐.
ER(응급실)에서 호출이 오고 있었다. 잠깐 눈 좀 붙이자는 것이 그토록 큰 욕심이었단 말인가!
하리는 불결한 눈빛으로 침대를 바라보더니 이내 이불을 주워다 세탁기에 처넣어 버리고선 응급실을 향해 달려갔다.
하리가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고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신음이 울려 퍼졌다.
“아악!”
“이 자식아, 너 때문에 무슨 망신살 뻗칠 뻔했냐고!”
“그래도 잘 넘어갔잖아. 무식하게 그렇게 세게 때리냐? 나 바보 되면 네가 먹여 살려라.”
“닥쳐라, 이 원수야!”
당직실에서 하리와 한판 했던 남자는 맞은 곳을 연신 매만졌고, 그 옆으로 다른 남자가 씩씩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왔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왜 여자 당직실에 가서 잠을 자 이 사단을 내냐?”
“시차 적응이 안 되는 걸 나보고 어쩌라고.”
“하여튼. 네가 돌아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얼른 짐 싸서 이 병원을 떴어야 했는데.”
“네가 가긴 어딜 가? 영원히 이 베스트 프렌드 옆에 붙어 있어야지.”
“징그러운 소리 그만해라, 최선호.”
선호는 여전히 지금의 상황이 못마땅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태종을 향해 활짝 웃어 주고서, 하리가 뛰어가던 곳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여자를 떠올렸다.
꽤 당돌하게 나오던 모습. 호색한 변태라. 찍혀도 아주 이상하게 찍히고 말았다. 군의관 제대를 하고 잠시 미국에서 휴가를 즐기다 갓 들어오는 바람에 시차 적응이 안 됐을 뿐이고, 잠시 눈을 붙인다는 곳이 그만 여자 당직실이었다. 그걸 깨우러 왔던 태종과 하필이면 그때 들어왔던 그 여자. 그 뒤로는 뭐, 보다시피 지금 이 상황이었다. 근데, 뭔가 묘하게 낯이 익었다. 하지만 제대한 지 고작 반년밖에 안 된 터라 저런 풋풋한 여자를 알 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뇌리에 콕 박혀서 떨어지지가 않을까?
“근데 아는 의사야?”
결국, 호기심에 선호가 태종을 보며 넌지시 운을 띄웠고, 그는 호출기를 보고선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곧 알게 될 거야. 다음 달부터 GI(소화기내과)로 올 테니까.”
“흠, 뭐야, 인턴이야? 아직 풋풋한 햇병아리네. 그럼 내가 알 리가 없지.”
“당연히 네가 알 리가 없지. 야, 나 먼저 간다. 또 사고 치지 말고 자려면 남자 당직실 가서 처자.”
그렇게 태종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사라지는 꼴을 보며 그는 엷은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인턴이라. 고작해야 스물여섯, 일곱? 아직 젖내나는 애기로구만. 역시, 알 리가 없다. 그래, 뭔가 착각한 것이 분명해.

* * *

내일이면 EM(응급의학과) 인턴을 마치고 GI(소화기내과) 인턴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그녀의 인턴 인생의 끝자락이라고 할 수 있었기에, 하리는 나름대로 각오를 하고 동기 인턴의 인계장을 살펴보았다.
“내과 쪽이라 수술방 들락날락할 일은 별로 없지만, 보다시피 회진이 좀 많아.”
“그러네. 근데 듣기론 이번에 이 교수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하시던데.”
“아! 그래서 그 자리를 대신할 펠로우 선생님께서 새로 오시기로 했어. 그분이 하실 거야, 넌 그분 따라다니면 돼.”
“새로?”
하리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시기에 새로 펠로우가 들어온다니. 게다가, 우신대병원은 대부분 우신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오는 곳이었다. 다른 곳에서 의사를 데려오는 건 거의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더 깊게 생각하진 않은 채, 마지막까지 꼼꼼히 인계를 받은 뒤, 찌뿌둥하게 굳은 어깨를 두드리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점점 겨울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올겨울은 추워서 좀 일찍 눈이 내렸다. 크리스마스에도 눈이 내리려나?
그녀는 조금 우울한 눈빛을 띠었다. 어쩌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었을지도 모를 3년 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비참한 악몽이 되어 무너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창문 앞에서 청승이냐?”
막 인턴 인계를 마치고 돌아온 진이가 급 우울 모드를 달리고 있는 하리를 보고선 혀를 찼다.
“네년은 또 시작이냐? 무슨 마지막 잎사귀를 세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날만 다가오면 그 지랄이야.”
“시끄러. 망할 것아. 네가 말만 안 꺼냈어도, 까먹었을지도 몰라.”
“행여나 그걸 까먹을까. 그 선배가 안 받아들였을지도 모르지 뭘 그렇게.”
“그래도! 엄청 기다렸단 말이야. 어떻게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그렇게. 미국으로 가 버리냐고!”
아직 그녀가 의대에서 미친 듯이 용을 쓰고 있을 때. 같은 대학교 선배였던 진우에게 첫눈에 반해 버려 첫사랑이자, 짝사랑에 앓이를 할 때가 있었다. 같은 대학이기는 했지만, 진우는 이미 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하던 때라 동아리 모임이 아니면 만날 겨를이 없었기에, 하리는 정말 온몸이 부서져라 시간을 내며 눈도장을 찍기에 바빴다. 그리고 점점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걸 느끼고서, 주변 친구들(특히 진이)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어, 다가온 크리스마스 날. 이 마음을 고백하겠다, 불같은 다짐을 하였는데. 가까워졌다는 건 오직 그녀의 삽질이었는지, 그가 갑작스럽게 미국의 자매병원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눈물과 악몽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벌써 3년 전의 일. 그런데도 여전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온몸에 우울 세포가 넘쳐 났고, 여전히 소식도 연락도 되지 않는 진우 선배를 보고파 하며 애가 닳았다.
“쯧쯧, 열녀가 따로 없구만. 네가 무슨 진우 선배 조강지처도 아니고. 어차피 시작도 안 한 거 그냥 쿨하게 잊으면 되지. 세상에 반이 남자고 넘치는 게 수컷이란다.”
“시끄러. 난 너처럼 지조 없이 살진 않아. 언젠가는 올 거잖아. 그때 반드시, 그날 하지 못한 고백을 하고 말 거야. 더 이상 눈물의 크리스마스는 이 조하리 인생에서 아웃이라고, 아웃!”
“오고 나서 말해라, 이년아. 그러다 평생 독수공방으로 늙어 죽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갸륵한 것. 그리되면 내가 꼭 열녀비를 이 병원에 세워 주마.”
진이는 하리의 일편단심에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또 언제 어떻게 불려 갈지 모르는데 저것의 넋두리를 들어 줄 시간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 근데, 진아.”
“말 시키지 마. 잘 거야.”
“내가 그 말 했던가? 아까 여기서 남자 본 거.”
“무슨 남자?”
하리는 아직 그 사건을 말하지 않은 걸 깨닫고서 다시금 씩씩거리는 태도로 어느새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진이에게 열변을 토해 냈다.
“어떤 변태 새끼가 여기서 그 짓을 하려고 한 거 있지? 그놈도 문제지만 데려온 그 지지배도 문제야. 어디 신성한 당직실에서 그런!”
“그래서 봤어? 봤어?”
잠잘 시간도 없다더니 저렇게 돌변해선 눈을 빛내는 진이의 모습에 하리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보진 못했어. 하지만 어쩜 그럴 수가 있지?”
“야, 사람이 식욕 다음으로 참지 못하는 게 성욕이라고 했어. 바빠도 할 건 해야 하지 않겠니? 참다가 병나는 것보단 낫다. 이것도 하나의 노하우라고 할 수 있지. 누군진 모르겠지만, 참 존경할 만한 지지배군. 덕분에 유익한 걸 배웠어. 나중에 100일 에당(에브리데이 당직) 때 써먹어야지.”
“닥쳐라, 이것아.”
“그래서 네가 아직 얼라인 기다.”
진이는 다시금 침대에서 온몸을 비비적거리며 눈을 감았다. 하리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금 창문을 바라보았다. 왠지 오늘 밤, 눈이 내릴 것 같았다.

* * *

이른 아침, 대충 머리를 동여매고 눈곱만 떼고서 의국으로 달려가자 벌써 내과 레지던트와 치프, 그리고 이 교수님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컨퍼런스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
“다 모였나?”
이 교수의 말에 옆에 있던 치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다 모였습니다.”
“그럼, 들어와라.”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리고 하리는 순간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내과 전임의를 맡게 된 최선호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주변으로 박수 소리가 들려왔지만 하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저 남자는, 어제 당직실에서 봤던 그 남자였다. 의사라고? 그것도 전임의? 저 파렴치한 변태 새끼가?
선호 역시 하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깜짝 놀란 눈동자를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고서 저를 바라보는 그 모습을 어찌 놓칠 수가 있겠는가. 만약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면 아마 소리를 지르며 경악을 했겠지. 딱 한 번 마주친 것뿐인데 저 여자의 다음 행동을 예상하다니, 참 이상했다. 자꾸 눈에 밟힌다고 해야 하나? 저런 어린것을 알 리가 없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거지?
선호는 치프들과 다른 레지던트와 인사를 하면서 연신 하리를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연신 시선을 피하며 땅끝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번에 인턴 선생님이 새로 바뀌었습니다.”
치프의 소개에 하리는 충격과 경악이 뒤섞인 정신을 애써 고쳐 잡고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번 달 인턴 조하리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선호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마치 온몸에서 나는 인턴이요, 라고 오라를 뿜어내는 것처럼. 대충 동여 묶은 머리카락에 화장은커녕, 로션기도 없는 100% 맨얼굴에 주머니엔 뭐를 저렇게 넣었는지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아기같이 풋풋하고 상큼하기는 했다. 이번을 끝으로 인턴 생활은 끝이겠군. 그래 봤자 지옥의 레지던트 시작. 역시나 젖내나는 애기는 애기다. 달라질 건 없었다.
끝으로 선호의 환영회 겸 회식을 하겠다는 공문을 날리고서 컨퍼런스를 끝냈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선 선호가 입가에 진한 호를 그리며 부드럽게 입을 열자 하리는 서늘한 시선으로 어렵사리 악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조하리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아직 약을 안 바른 겁니까?”
선호는 아직 손이 빨간 그녀의 손을 살폈고, 하리는 얼른 그 손을 떼어 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 몸에 손대지 말아 주십시오. 최선호 선생님.”
그때, 이 교수가 선호의 어깨를 잡으며 의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뭔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가?”
“아닙니다!”
“뭐, 조금 알고 있습니다.”
이 남자가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그래? 그럼 잘됐군. 최 선생 이번에 논문 연구 들어간다고 했는데, 타이밍도 안 좋게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워 내 환자까지 회진 돌게 생겼잖아. 안 그래도 누굴 하나 붙여 줘야 하나, 고민했었는데. 인턴 선생이 좀 도와주면 되겠군. 내가 다른 치프들에게 잘 얘기할 테니까. 회진도 같이 돌고. 아마 공부도 많이 될 거야.”
“흠, 그렇습니까?”
자, 잠깐.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이야?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데 최 선생이 우리 병원으로 올 줄은 몰랐어. 사실 한국대병원에 머물 줄 알았거든. 아무튼, 이렇게 와 줘서 아주 고마워. 열심히 해서, 여기서 조교수 자리 하나 꿰차야지.”
순간, 선호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어졌지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미묘한 변화였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하하, 열심히 하게.”
“예, 교수님.”
그렇게 이 교수가 떠나고, 하리는 뭔가 커다란 방망이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뭐야, 그럼 이번 한 달 동안 무조건 저 변태 자식의 뒤를 따라다녀야 하는 거야? 논문 연구라면 연구실에도 같이 처박혀 있어야 하는 거잖아! 이건 말도 안 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런 망나니 의사라니. 저런 호색한 변태랑 함께 있으라니!
“역시 우연이 아닌 인연. 아니, 운명인가?”
“그저 우연일 뿐입니다. 우연!”
그것도 아주 징글징글한 우연!
겉으론 웃으면서 속으론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하지만 인턴답게 예를 갖추며 또박또박 대답을 한 하리가 거칠게 의국을 빠져나갔다. 그럼 뭐하나? 어차피 자신과 같이 회진 돌 운명인데. 풋, 안타까운 햇병아리 양.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다고. 한 달 동안 내내 붙어 있으면서 얼마나 더 다양한 표정을 보여 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잠깐, 다양한 표정?
“흠.”
선호는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아주 작은 눈송이가 곱게도 휘날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항상 이맘때쯤 그의 머릿속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한 여자.
“참, 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