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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탕!
식탁이 크게 흔들렸다.
챙! 채앵!
“노옴!”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던 노인이 호통을 치며 일어섰다.
노인의 뒤쪽으로는 황건을 머리에 둘러 묶은 무인 이십여 명이 직도를 뽑아 들고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와는 정반대쪽, 그러니까 노인의 정면으로는 검은 수염이 성성한 남자와 그의 무리들로 보이는 청의 무사들 열댓 명이 추, 편, 간 등 타격 병기를 앞세운 상태.
대립하고 있는 양측을 제외하고, 일단은 강호인으로 보이는 서너 명은 꽤나 당황한 상태로 앉아있고, 그 외에 약 스물 정도의 양민과 상인들은 벽에 몸을 붙이거나 한쪽에 우르르 몰려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험악하지는 않았다.
노인 측과 검은 수염 측은 원래는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니었는지, 간만에 만나서 반갑다며 덕담도 주고받고 서로의 안부를 묻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여긴 왜 왔나?’부터 시작해서 점점 던지는 말의 강도가 심해지더니, 결국에는 전부 다 병기를 꺼내 들고 상대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뭘 그리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검은 수염 남자가 노인에게 말했다.
“못 본 사이에 간이 커졌구나.”
노인은 낮게 이를 갈았다.
“먼저 험한 소리를 하신 분은 외숙부가 아니십니까.”
“그래서 이 외숙에게 늙은 새우가 어쩌고 한 게냐? 감히?”
“현실을 제대로 못 보고 계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린 것이 현실을 운운해?”
“이제 저도 사십 줄입니다, 외숙부. 마냥 코나 흘리던 옛 꼬맹이가 아니다 이 말입지요.”
검은 수염이 능글능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겨우 그 정도로 어른들을 능멸하고 허락도 없이 대무신전에 줄을 대었단 말이냐?”
“암요. 마음 같아서는 사혼맹에 붙고 싶지만, 거리가 꽤나 있어 거긴 못가겠더군요.”
“이노오오옴.”
“멀쩡히 잘 굴러가던 가문을 통째로 검산에 바치려고 하시는 외조부님은 어떻고요?”
“너는 외인이니라.”
“하하하, 절 외인 취급하시는 분께서 그 외인이 장주로 있는 집안의 일에는 참 잘도 참견하십니다.”
“네가 문제가 아니다. 네 어미가 있기 때문이지. 넌 외인이지만 네 어미는 나의 혈육이니까.”
“항상 본인 편하신 대로만 생각하시는 것은 아마도 외숙께서 중원 제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려 하느냐.”
노인의 음성은 이제 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극도로 냉정하게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뜻.
즉, 필요하다면 친지 살해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제가 외가의 영역을 침범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땅은 외숙께서 관여할 이유가 없는 곳인데요.”
“관리하는 세력이 없다고 여길 잘라서 대무신전에 바치려고 하는 네 검은 속셈을, 그냥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했느냐?”
“그러니까 그걸 왜 외숙께서 신경 쓰시냐고요. 아하! 이제 알겠습니다. 외조부께서도 검산에 줄 선물이 필요하셨습니까? 그래서 외숙을 보냈나요? 하하하하!”
말을 들어보니 둘이 다투는 이유는 이러했다.
검은 수염은 대무신전에 자신의 가문을 입적시키려 하고, 노인은 검산의 세력권 안에 가문을 안주시키고자 하는 아비의 뜻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뜻만 비추었다고 해서 대무신전이나 검산 같은 거대한 세력이 이들을 쉬이 받아주지는 않을 터였다.
다시 말해,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주고받아야 거래가 성립될 수 있다는 의미.
그리고 이들은 각자 이 지역을 대무신전과 검산에 바치는 공물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피를 봐도 네가 정신을 차릴지 의문이구나.”
“누구의 피인지가 중요하겠지요. 오시겠다면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노인과 검은 수염은 아무래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려는 듯했다.
“그 전에…….”
검은 수염이 주우욱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의미를 누가 모를쏘냐.
구석에 몰린 이들이 검은 수염과 노인을, 그들의 가문을 알지 못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런 이들 앞에서 패륜적인 언사를 남발하고, 또 혈연으로 얽힌 두 가문이 서로 칼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면 실만 있고 득은 없을 터.
목격자는 필요 없다. 처음부터 저들은 여기에 없었다. 그래야만 어긋난 야망과 치부가 가려진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옆에 비켜 서 있던 무인 한 명은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했다.
“이봐 형씨, 내가 누군지 아는가?”
검은 수염이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홍천산장의 장주 아니오이까?”
퍼걱!
말이 끝나자마자 무인의 머리가 둔기에 맞아 터져버렸다.
“꺄아앗!”
그 광경에 양민 무리 중에 있던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청의를 입은 무사 하나가 일절 망설임도 없이 추를 휘둘러 살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미, 미쳤소?”
살해당한 무인의 동료가 입술을 푸르르 떨며 소리를 쳤다.
사앗-
동시에 그의 머리가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뒤에서 직도를 내리친 황건 무인은 바닥에 피를 털어냈다.
흔히들 말한다.
천하에 법도가 없는 곳이 없다고.
그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음은 인간의 무지함과 법을 집행하는 이들의 사이함 때문이지, 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고도 한다.
하지만, 만인을 위해 만든 법을 티끌 보듯 하는 자들이 세상에 있으니, 그들이 바로 강호인이었다.
모든 강호인이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이 시대에 법을 개똥처럼 취급하는 자들의 구 할은 강호인이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에 추호의 거리낌도 없으며, 이러한 행위를 강호인의 권리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정파도, 사파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차이라면, 그저 남들의 눈을 의식하느냐 마느냐에 불과할 뿐.
이게 오늘날의 강호였다.
빌어먹게도.
“살려 주시오!”
“죽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제발요!”
“엄마, 무서워.”
목숨을 애걸하는 사람들에게 몇 명의 황건 무인과 청의 무사들이 다가갔다.
그들은 곧,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면 검과 둔기를 무자비하게 휘둘러 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할 터였다.
그저 이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쩝.”
검은 수염, 즉 홍천산장주는 입맛을 다셨다.
“외숙, 저는 김이 좀 빠져버렸습니다.”
“그러하냐? 나도 그렇다.”
뭐 이런 개자식들이.
“하던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시죠.”
“그러자꾸나.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날 수도 있으니.”
“예.”
이런 미친 작자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바로 강호였다.
그리고 이 쓰레기들의 욕심 때문에 애꿎은 양민들은 죽음을 당연시해야 했고.
“어서 치워라.”
“예!”
황건 무인이 직도를 번쩍 들었다.
“아아악!”
곧이어 자신의 목이 베어질 거란 사실에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비명을 뿌렸다.
바로 그 순간.
끼이이익.
흠칫.
갑자기 객잔의 문이 열렸다.
퉁! 퉁!
조용한 가운데 문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렸다.
홍천산장주도, 노인도, 그들의 수하들도 하려던 일을 멈추고 열린 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쉬이이이~
한 사람이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쯧쯧.”
노인은 혀를 찼다.
그에게 있어서 이 불청객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알아서 찾아온 불쌍한 놈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척. 척.
불청객은 걸음을 옮겨 객잔 내부로 들어왔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가 안면을 덮어 생김새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머리색이며 드러난 피부의 색으로 보아 상당히 젊은 사람임은 분명했다.
물씬 풍기는 피 냄새와 병기를 든 무인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떨고 있는 양민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여기서 일어났던, 일어날 일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터.
그럼에도 불청객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허허!”
홍천산장주는 황당하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텅!
불청객은 등에 지고 있던 가죽 부대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기이한 울림을 주는 쇳소리.
노인의 이맛살이 살짝 구겨졌다.
“당신들.”
이 요염한 음성은…….
그래, 연화령. 바로 연화령이었다.
그녀가 양민들을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죽어야 할 죄라도 지었나요?”
연화령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얼굴을 본 몇몇 무인들은 가벼운 감탄성을 흘렸다.
지저분한 행색도 연화령의 미색을 가릴 수는 없었다.
“저, 저희는…….”
양민들 가운데에서 얼굴이 울상인 남자 하나가 말을 하려다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크흠, 이봐라.”
홍천산장주는 잠깐이나마 넋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뒤 입을 열었다.
“네 꼴이 거지꼴이라 내 가엽게 여겨 목숨만은 살려주겠노라.”
연화령이 얼굴을 돌려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녀는 살고, 다른 이들은 죽나요?”
“우리 같은 무림영웅들의 행사를 감히 엿들었으니 죽어도 마땅하니라.”
노인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조카를 거들었다.
“나를 따른다면, 목숨도 살려주고 널 어여삐 생각하여 아껴주겠다.”
음심이 잔뜩 동한 홍천산장주가 연화령에게 다가오라며 손짓을 했다.
“이곳이 어딘지 아시는지요?”
“어디긴. 앞으로 본좌가 맡아서 다스릴 땅이지.”
홍천산장주는 이루어지지도 않을 꿈에 취해 허세를 부렸다.
“매화는 시들어도 매향은 만리에 황홀하여라.”
연화령의 이 말은 마치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노랫가락? 그래, 맞다.
강호에 적을 두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그 노래.
화산매화만리향(華山梅花萬里香).
“……?”
솨아아아아-
느닷없이 연화령을 중심으로 바람이 일어 사방으로 먼지를 날렸다.
“뭐, 뭣……?”
바람은 더욱 강해져, 몇 가닥의 먼지 회오리를 만들어 여기저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로 인해 황건 무인들과 청의 무사들은 눈을 비비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이 와중에도 연화령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홍천산장주는 순간적으로 오한이 들어 어깨를 움찔했다.
“대화산(大華山)의 그늘 아래 매향은 온데간데없고, 아귀들의 구취만 남았으니.”
쩔껑!
지금껏 다들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연화령의 허리 뒤쪽으로 쇠줄에 묶인 곡도 한 자루가 찰랑거리며 나타났다.
끼이잉.
연화령의 목을 감싼 채 잠들어있던 황색 담비가 하품을 하며 더욱 몸을 웅크렸다.
“크르르륵.”
홍천산장주는 반 정도 잘린 목을 꽉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근처에는 황건 무인들과 청의 무사들 전원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일격에 급소를 꿰뚫려 즉사한 것으로 보였고, 일부는 별로 날카롭지 않은 곡도에 목줄을 찢기듯 베여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중이었다.
“커어어어.”
홍천산장주는 원한서린 눈으로 연화령을 노려보았다.
연화령은 오른손에 쥔 곡도를 아래로 늘어뜨리고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주위로 열 자루의 검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상에 그녀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철퍽, 철퍽.
연화령은 피가 가득 고인 바닥을 걸어 홍천산장주 앞까지 다가갔다.
어차피 가만 둬도 죽을 놈이었다.
하지만 연화령은 곡도를 들어 그의 안면을 가로로 쭉 그어버렸다.
코 윗부분이 단면만 남기고 사라졌다. 실로 참혹한 죽음.
“크크크큭.”
웃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연화령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허리 아래가 잘려나가 상반신만 남은 노인이 있었다.
“무섭구나.”
“…….”
“다른 듯했지만… 그것은 분명…….”
화산의 검.
곡도를 통해 기형적으로 펼쳐진 화산의 검술이 분명했다.
노인의 눈에서 생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의, 강호의 욕심이… 잠자는 용을 깨운… 것인가.”
툭.
휘리릭, 촤앗.
연화령은 곡도를 두어 번 돌려 핏물을 털어냈다.
연화령은 감사를 표하지도 못할 만큼 정신을 놓아버린 양민들을 두고 객잔 밖으로 나왔다.
그때, 같이 왔던 동료들 중에 홍천산장주의 독수를 피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청년 무인 하나가 달려 나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은인!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그렇다면 떠나세요.”
“예?”
“그대의 검을 버리고 강호를 떠나 다른 인생을 사시길.”
청년 무인은 그녀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무고한 자들을 해치는 비정강호.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이 더러운 강호.
이곳에 이 청년 무인이 설 자리는 없었다.
게다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연화령의 가공할 무공 또한 그로서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구름이 아니던가.
이쯤에서 강호에 대한 꿈을 접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오래 사는 길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은인의 충고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있었던 일들은 비밀에 부치셔야 할 거예요.”
“압니다. 괜히 입방정을 떨었다가는 저들 가문에 잡혀 모진 일을 당할 테지요.”
“안에 계신 분들이 정신을 차리면 서둘러 떠나도록 도와주세요. 이 땅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예, 은인.”
“아, 그리고 혹시 남은 말 한 마리가 있다면 저한테 팔아주시겠어요?”
연화령은 자신이 몰살시켜버린 자들의 말을 거저 가지려 하지 않았다.
악취를 풍기는 자들이 탔던 말이기에 그런 것일까.
“같이 왔던 형님들의 말이 있습니다. 이제 그들도 세상에 없으니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당신이 그러실 이유는 없습니다.”
연화령은 끝끝내 청년 무인에게 말 값을 치러 주었다.
따각, 따각, 따각.
연화령이 모는 말의 굽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청년 무인은 그녀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가는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화산.
한때 천하제일의 도문(道門)이자, 또 천하제일의 검문(劍門)이었던 화산파가 자리한 화산이었다.
탕!
식탁이 크게 흔들렸다.
챙! 채앵!
“노옴!”
식탁을 주먹으로 내리쳤던 노인이 호통을 치며 일어섰다.
노인의 뒤쪽으로는 황건을 머리에 둘러 묶은 무인 이십여 명이 직도를 뽑아 들고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와는 정반대쪽, 그러니까 노인의 정면으로는 검은 수염이 성성한 남자와 그의 무리들로 보이는 청의 무사들 열댓 명이 추, 편, 간 등 타격 병기를 앞세운 상태.
대립하고 있는 양측을 제외하고, 일단은 강호인으로 보이는 서너 명은 꽤나 당황한 상태로 앉아있고, 그 외에 약 스물 정도의 양민과 상인들은 벽에 몸을 붙이거나 한쪽에 우르르 몰려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험악하지는 않았다.
노인 측과 검은 수염 측은 원래는 그리 나쁜 사이가 아니었는지, 간만에 만나서 반갑다며 덕담도 주고받고 서로의 안부를 묻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여긴 왜 왔나?’부터 시작해서 점점 던지는 말의 강도가 심해지더니, 결국에는 전부 다 병기를 꺼내 들고 상대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다.
“뭘 그리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검은 수염 남자가 노인에게 말했다.
“못 본 사이에 간이 커졌구나.”
노인은 낮게 이를 갈았다.
“먼저 험한 소리를 하신 분은 외숙부가 아니십니까.”
“그래서 이 외숙에게 늙은 새우가 어쩌고 한 게냐? 감히?”
“현실을 제대로 못 보고 계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어린 것이 현실을 운운해?”
“이제 저도 사십 줄입니다, 외숙부. 마냥 코나 흘리던 옛 꼬맹이가 아니다 이 말입지요.”
검은 수염이 능글능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겨우 그 정도로 어른들을 능멸하고 허락도 없이 대무신전에 줄을 대었단 말이냐?”
“암요. 마음 같아서는 사혼맹에 붙고 싶지만, 거리가 꽤나 있어 거긴 못가겠더군요.”
“이노오오옴.”
“멀쩡히 잘 굴러가던 가문을 통째로 검산에 바치려고 하시는 외조부님은 어떻고요?”
“너는 외인이니라.”
“하하하, 절 외인 취급하시는 분께서 그 외인이 장주로 있는 집안의 일에는 참 잘도 참견하십니다.”
“네가 문제가 아니다. 네 어미가 있기 때문이지. 넌 외인이지만 네 어미는 나의 혈육이니까.”
“항상 본인 편하신 대로만 생각하시는 것은 아마도 외숙께서 중원 제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려 하느냐.”
노인의 음성은 이제 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다.
지금의 상황을 극도로 냉정하게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뜻.
즉, 필요하다면 친지 살해도 불사하겠다는 의지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제가 외가의 영역을 침범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 땅은 외숙께서 관여할 이유가 없는 곳인데요.”
“관리하는 세력이 없다고 여길 잘라서 대무신전에 바치려고 하는 네 검은 속셈을, 그냥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했느냐?”
“그러니까 그걸 왜 외숙께서 신경 쓰시냐고요. 아하! 이제 알겠습니다. 외조부께서도 검산에 줄 선물이 필요하셨습니까? 그래서 외숙을 보냈나요? 하하하하!”
말을 들어보니 둘이 다투는 이유는 이러했다.
검은 수염은 대무신전에 자신의 가문을 입적시키려 하고, 노인은 검산의 세력권 안에 가문을 안주시키고자 하는 아비의 뜻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뜻만 비추었다고 해서 대무신전이나 검산 같은 거대한 세력이 이들을 쉬이 받아주지는 않을 터였다.
다시 말해,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주고받아야 거래가 성립될 수 있다는 의미.
그리고 이들은 각자 이 지역을 대무신전과 검산에 바치는 공물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피를 봐도 네가 정신을 차릴지 의문이구나.”
“누구의 피인지가 중요하겠지요. 오시겠다면 피하지는 않겠습니다.”
노인과 검은 수염은 아무래도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려는 듯했다.
“그 전에…….”
검은 수염이 주우욱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의미를 누가 모를쏘냐.
구석에 몰린 이들이 검은 수염과 노인을, 그들의 가문을 알지 못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런 이들 앞에서 패륜적인 언사를 남발하고, 또 혈연으로 얽힌 두 가문이 서로 칼질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면 실만 있고 득은 없을 터.
목격자는 필요 없다. 처음부터 저들은 여기에 없었다. 그래야만 어긋난 야망과 치부가 가려진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옆에 비켜 서 있던 무인 한 명은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했다.
“이봐 형씨, 내가 누군지 아는가?”
검은 수염이 다정한 음성으로 물었다.
“홍천산장의 장주 아니오이까?”
퍼걱!
말이 끝나자마자 무인의 머리가 둔기에 맞아 터져버렸다.
“꺄아앗!”
그 광경에 양민 무리 중에 있던 여성이 비명을 질렀다.
청의를 입은 무사 하나가 일절 망설임도 없이 추를 휘둘러 살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미, 미쳤소?”
살해당한 무인의 동료가 입술을 푸르르 떨며 소리를 쳤다.
사앗-
동시에 그의 머리가 미끄러지듯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뒤에서 직도를 내리친 황건 무인은 바닥에 피를 털어냈다.
흔히들 말한다.
천하에 법도가 없는 곳이 없다고.
그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음은 인간의 무지함과 법을 집행하는 이들의 사이함 때문이지, 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고도 한다.
하지만, 만인을 위해 만든 법을 티끌 보듯 하는 자들이 세상에 있으니, 그들이 바로 강호인이었다.
모든 강호인이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이 시대에 법을 개똥처럼 취급하는 자들의 구 할은 강호인이었다.
지금도 그러했다.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데에 추호의 거리낌도 없으며, 이러한 행위를 강호인의 권리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는 정파도, 사파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차이라면, 그저 남들의 눈을 의식하느냐 마느냐에 불과할 뿐.
이게 오늘날의 강호였다.
빌어먹게도.
“살려 주시오!”
“죽고 싶지 않아요!”
“제발, 제발요!”
“엄마, 무서워.”
목숨을 애걸하는 사람들에게 몇 명의 황건 무인과 청의 무사들이 다가갔다.
그들은 곧,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면 검과 둔기를 무자비하게 휘둘러 죄 없는 양민들을 학살할 터였다.
그저 이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쩝.”
검은 수염, 즉 홍천산장주는 입맛을 다셨다.
“외숙, 저는 김이 좀 빠져버렸습니다.”
“그러하냐? 나도 그렇다.”
뭐 이런 개자식들이.
“하던 얘기는 다음에 다시 하시죠.”
“그러자꾸나. 얼마든지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날 수도 있으니.”
“예.”
이런 미친 작자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 바로 강호였다.
그리고 이 쓰레기들의 욕심 때문에 애꿎은 양민들은 죽음을 당연시해야 했고.
“어서 치워라.”
“예!”
황건 무인이 직도를 번쩍 들었다.
“아아악!”
곧이어 자신의 목이 베어질 거란 사실에 누군가가 공포에 질린 비명을 뿌렸다.
바로 그 순간.
끼이이익.
흠칫.
갑자기 객잔의 문이 열렸다.
퉁! 퉁!
조용한 가운데 문이 벽에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렸다.
홍천산장주도, 노인도, 그들의 수하들도 하려던 일을 멈추고 열린 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쉬이이이~
한 사람이 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쯧쯧.”
노인은 혀를 찼다.
그에게 있어서 이 불청객은, 자신이 죽을 자리를 알아서 찾아온 불쌍한 놈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척. 척.
불청객은 걸음을 옮겨 객잔 내부로 들어왔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가 안면을 덮어 생김새를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머리색이며 드러난 피부의 색으로 보아 상당히 젊은 사람임은 분명했다.
물씬 풍기는 피 냄새와 병기를 든 무인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떨고 있는 양민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여기서 일어났던, 일어날 일들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터.
그럼에도 불청객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허허!”
홍천산장주는 황당하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텅!
불청객은 등에 지고 있던 가죽 부대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기이한 울림을 주는 쇳소리.
노인의 이맛살이 살짝 구겨졌다.
“당신들.”
이 요염한 음성은…….
그래, 연화령. 바로 연화령이었다.
그녀가 양민들을 향해 다시 말을 걸었다.
“죽어야 할 죄라도 지었나요?”
연화령이 고개를 들자, 그녀의 얼굴을 본 몇몇 무인들은 가벼운 감탄성을 흘렸다.
지저분한 행색도 연화령의 미색을 가릴 수는 없었다.
“저, 저희는…….”
양민들 가운데에서 얼굴이 울상인 남자 하나가 말을 하려다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렸다.
“크흠, 이봐라.”
홍천산장주는 잠깐이나마 넋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뒤 입을 열었다.
“네 꼴이 거지꼴이라 내 가엽게 여겨 목숨만은 살려주겠노라.”
연화령이 얼굴을 돌려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소녀는 살고, 다른 이들은 죽나요?”
“우리 같은 무림영웅들의 행사를 감히 엿들었으니 죽어도 마땅하니라.”
노인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 조카를 거들었다.
“나를 따른다면, 목숨도 살려주고 널 어여삐 생각하여 아껴주겠다.”
음심이 잔뜩 동한 홍천산장주가 연화령에게 다가오라며 손짓을 했다.
“이곳이 어딘지 아시는지요?”
“어디긴. 앞으로 본좌가 맡아서 다스릴 땅이지.”
홍천산장주는 이루어지지도 않을 꿈에 취해 허세를 부렸다.
“매화는 시들어도 매향은 만리에 황홀하여라.”
연화령의 이 말은 마치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노랫가락? 그래, 맞다.
강호에 적을 두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그 노래.
화산매화만리향(華山梅花萬里香).
“……?”
솨아아아아-
느닷없이 연화령을 중심으로 바람이 일어 사방으로 먼지를 날렸다.
“뭐, 뭣……?”
바람은 더욱 강해져, 몇 가닥의 먼지 회오리를 만들어 여기저기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로 인해 황건 무인들과 청의 무사들은 눈을 비비며 뒤로 물러서야 했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이 와중에도 연화령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홍천산장주는 순간적으로 오한이 들어 어깨를 움찔했다.
“대화산(大華山)의 그늘 아래 매향은 온데간데없고, 아귀들의 구취만 남았으니.”
쩔껑!
지금껏 다들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연화령의 허리 뒤쪽으로 쇠줄에 묶인 곡도 한 자루가 찰랑거리며 나타났다.
끼이잉.
연화령의 목을 감싼 채 잠들어있던 황색 담비가 하품을 하며 더욱 몸을 웅크렸다.
“크르르륵.”
홍천산장주는 반 정도 잘린 목을 꽉 움켜쥐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근처에는 황건 무인들과 청의 무사들 전원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은 일격에 급소를 꿰뚫려 즉사한 것으로 보였고, 일부는 별로 날카롭지 않은 곡도에 목줄을 찢기듯 베여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중이었다.
“커어어어.”
홍천산장주는 원한서린 눈으로 연화령을 노려보았다.
연화령은 오른손에 쥔 곡도를 아래로 늘어뜨리고는 무심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녀의 주위로 열 자루의 검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고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상에 그녀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은 할 말을 잊고 있었다.
철퍽, 철퍽.
연화령은 피가 가득 고인 바닥을 걸어 홍천산장주 앞까지 다가갔다.
어차피 가만 둬도 죽을 놈이었다.
하지만 연화령은 곡도를 들어 그의 안면을 가로로 쭉 그어버렸다.
코 윗부분이 단면만 남기고 사라졌다. 실로 참혹한 죽음.
“크크크큭.”
웃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연화령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허리 아래가 잘려나가 상반신만 남은 노인이 있었다.
“무섭구나.”
“…….”
“다른 듯했지만… 그것은 분명…….”
화산의 검.
곡도를 통해 기형적으로 펼쳐진 화산의 검술이 분명했다.
노인의 눈에서 생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우리의, 강호의 욕심이… 잠자는 용을 깨운… 것인가.”
툭.
휘리릭, 촤앗.
연화령은 곡도를 두어 번 돌려 핏물을 털어냈다.
연화령은 감사를 표하지도 못할 만큼 정신을 놓아버린 양민들을 두고 객잔 밖으로 나왔다.
그때, 같이 왔던 동료들 중에 홍천산장주의 독수를 피해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청년 무인 하나가 달려 나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은인!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그렇다면 떠나세요.”
“예?”
“그대의 검을 버리고 강호를 떠나 다른 인생을 사시길.”
청년 무인은 그녀의 말을 곧바로 이해했다.
웃기지도 않는 이유로 무고한 자들을 해치는 비정강호.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하는 이 더러운 강호.
이곳에 이 청년 무인이 설 자리는 없었다.
게다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연화령의 가공할 무공 또한 그로서는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는 구름이 아니던가.
이쯤에서 강호에 대한 꿈을 접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오래 사는 길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은인의 충고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있었던 일들은 비밀에 부치셔야 할 거예요.”
“압니다. 괜히 입방정을 떨었다가는 저들 가문에 잡혀 모진 일을 당할 테지요.”
“안에 계신 분들이 정신을 차리면 서둘러 떠나도록 도와주세요. 이 땅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예, 은인.”
“아, 그리고 혹시 남은 말 한 마리가 있다면 저한테 팔아주시겠어요?”
연화령은 자신이 몰살시켜버린 자들의 말을 거저 가지려 하지 않았다.
악취를 풍기는 자들이 탔던 말이기에 그런 것일까.
“같이 왔던 형님들의 말이 있습니다. 이제 그들도 세상에 없으니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당신이 그러실 이유는 없습니다.”
연화령은 끝끝내 청년 무인에게 말 값을 치러 주었다.
따각, 따각, 따각.
연화령이 모는 말의 굽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청년 무인은 그녀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가는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화산.
한때 천하제일의 도문(道門)이자, 또 천하제일의 검문(劍門)이었던 화산파가 자리한 화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