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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기분이 크게 상했는지 건무정은 임휘를 째려본 다음, 바로 무덤가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
그러자 바닥을 흐르던 안개가 이내 그를 살포시 덮었다.
“정파 동도들은 무정이를 ‘소림살불’이라 불렀고, 사혼당 적도들은 ‘마귀승’이라며 욕을 해댔지요.”
“소림살불… 소림살불이라…….”
진목란은 그 명호를 따라 부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이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친구라니까요.”
“그렇습니까?”
진목란은 여전히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저 건무정이 위대한 소림의 승려였다니.
지금까지 같이 지내오면서 소림승다운 모습이라고는 발가락 사이의 때만큼도 볼 수가 없었지 않았는가.
자고로 소림승이라 하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근엄하기 짝이 없고 고지식하며, 악은 원수처럼 여기면서도 또한 어렵고 불쌍한 이들에게는 선행을 베푸는 의인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건무정은 일단 근엄과는 거리가 꽤나 멀고, 전혀 고지식하지도 않으며, 본인 스스로가 악하다고 떠벌리는 것도 모자라 어렵고 불쌍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건 동생이 예전에도 저러했다는 뜻입니까?”
“예, 참 재미난 친구였지요. 오죽하면 저희가 그 무시무시한 소림살불 대신 소림파계승이라고 놀렸겠습니까.”
당시가 떠오르는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는 임휘였다.
“그런데 그게 또 사실 무정이의 본모습은 아니었답니다. 웃는 얼굴 뒤편에는 늘 짙은 어둠이 자리했었어요.”
가면.
“녀석이 소림의 품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결코 그 안에서 뭉쳐질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소림의 자식이기는 하되, 친자식은 아니라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저도 잘 모르지요. 언젠가는 무정이가 소저께 얘기할 날이 올 겁니다. 분명.”
“그때까지 함께 다니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자신을 보는 것조차 건무정에게는 고통일 거란 생각을 하니, 진목란은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명진이라, 명진. 명진……. 명(明)… 명자 항렬.
“아!”
진목란은 순간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무언가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림에서 법명이 명자로 시작하는 승려들을 한 번 얘기해보면.
장문방장 명효대사, 장경각주 명성대사, 지객당주 명일대사, 계지원주 명환대사, 양심당주 명천대사, 계율원주 명심대사, 나한전주 명숭대사, 조사전주 명약대사, 참회동주 명산대사, 호원주 명풍대사 등등.
속 시원하게 풀어보자면 소림에서 ‘명’자 배 항렬은 그 자체로 소림의 중심이었다. 장로원에 해(海)자 배 원로 몇 명이 아직 살아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소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건무정의 법명이 명진이었다니.
배분 상 거의 소림의 최상층이 아닌가.
“설마 반로환동인가…….”
진목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꿈같은 얘기지요.”
임휘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육 년도 더 전이면 건 동생이 열대여섯 살 때 아닌가요? 그때 수백 명도 넘는 사혼당과 천산마교의 무인들을 몰살시킬 만큼 강력한 무인이었다는 게, 가만 생각해보면 믿기지를 않습니다. 일류고수는 불가능하고, 절정을 넘어선 고수도 힘에 부칠 일이에요.”
그래, 반로환동이다. 그게 아니라면 건무정의 무용담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과장에 불과할 테니까.
짝!
갑자기 임휘가 진목란의 눈앞에서 손뼉을 쳤다.
‘또 당했네.’
임휘가 양손바닥을 조금 떨어뜨린 뒤 진목란에게 말했다.
“이 사이가 지금 소저께서 보고 계신 세상입니다.”
“그래서요?”
“무엇이 보이지요?”
“임 도사님의 눈만 보입니다.”
임휘는 다시 손바닥 사이를 더 크게 벌렸다.
“지금은요?”
“얼굴이 다 보이네요.”
“좁았던 시야가 넓어진 소감이 어떻습니까?”
“…….”
“세상을 더 넓게 보세요. 좁은 편견은 진 소저와 같은 젊고 창창한 이들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에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당장 소저 본인께서도 그 나이 대에는 이루기 힘든 절정을 보셨지 않습니까?”
“아.”
이 남자,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건무정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가르치고 있었다.
왜일까? 임휘 역시도 진유상과 무당에 대한 증오가 남다를 텐데.
그 무당의 금지옥엽인 자신은 그에게 있어서는 척살의 대상과도 같았다.
한데 거꾸로 깨달음을 주려고 하니,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아, 밤이 너무 깊었군요.”
임휘가 슬쩍 몸을 돌렸다.
“오래 나와 있었더니 버티기가 힘드네요.”
모산파의 도사라 그런지 그리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는 아니었나 보다.
“저도 이만 떠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떠날 때라니요?”
“아, 제가 그랬나요? 안에 들어가서 쉬겠다는 뜻이니 그냥 흘려들으세요.”
“……?”
안 그래도 진목란 또한 피로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몸이 무겁고 어깨가 자꾸 처졌다.
임휘의 말을 들을수록 계속되던 심신의 격동이 그녀를 상당히 지치게 만든 듯했다.
살짝 어지러우면서 미약하게 시야가 흐려지고, 막 잠들기 직전의 몽롱함이 진목란을 찾아왔다.
‘그래, 오늘 많은 일들을 겪었지.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많이 힘들었던 거야.’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자꾸 풀리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눈꺼풀 위에 돌덩이를 얹은 듯, 눈이 저절로 감겨왔다.
“진 소저.”
흐릿하게 들리는 임휘의 목소리.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게 무얼까요?”
‘무얼까요?’
“한 번 찾아보세요. 진 소저라면 가능할 겁니다.”
‘저는… 못해요.’
“당신은 강하고, 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정말요?’
“당신은 틀림없이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찾은 그것을… 명진에게… 무정이에게…….”
‘네.’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검은 천 아래에서 임휘의 입술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스스스스스.
임휘가 건무정 쪽으로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 광경을 흐린 눈으로 물끄러미 지켜보는 진목란.
그녀는 지금 이 모든 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 극심한 피로는 그녀의 육체와 정신 모두를 완전히 잠재우려 하고 있었다.
건무정에게 가까이 다가간 임휘는 이 불행한 옛 친구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목란은 왠지 그 광경을 보고 왈칵 울음이 터질 것처럼 코끝이 찡해졌다.
스르르.
임휘는 천천히 몸을 굽혀 건무정을 안았다.
조금씩 들썩이는 임휘의 어깨.
그가 잠든 건무정에게 무어라 말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이리 말하는 것이리라.
고맙고 또 미안하다고.
순간, 가늘게 이어지던 진목란의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
* * *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따사로운 빛.
조금 더 자고 싶었는데, 어느새 깨어난 정신이 늘어진 그녀의 몸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아함~.”
한 차례 크게 하품을 하고 나서야 진목란은 몸이 좀 뻐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꽤 오래 잠들었었나? 문틈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이 지금이 완전한 대낮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봐야 잠든 새벽으로부터 서너 시진이 경과했을 뿐인데, 몸은 벌써부터 잔뜩 굳어 있었다.
우두둑, 우두둑 관절을 풀어주고 상체를 몇 번 돌려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준 진목란은 누군가가 모옥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덜컹.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는 건무정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어? 어어.”
“하아, 무슨 잠을 그리도 잡니까?”
투덜거리는 건무정의 모습이 어쩐지 새롭게만 보였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주무시다니. 고수 맞아요? 저 지켜주실 분 맞으신가?”
“뭐라고? 내가?”
미쳤다.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었었다니.
그러고 보니 앞섶도 조금 풀어져 있고 무복의 구김도 심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건무정이 볼 세라 얼른 옷을 잡아당겨 가슴 쪽을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는 진목란이었다.
‘임 도사는 어디 갔지?’
“말에서 내리자마자 어째 사람이 픽 쓰러져요. 난 또 뭘 잘못 드셨나 했네.”
“어, 미안…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말에서 내리자마자 뭐?
“허허허, 누님. 생각보다 무겁더이다. 안고 와서 눕히기까지 이 동생이 고생 좀 했습니다.”
“잠깐, 건 동생. 지금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준비 되면 나오세요. 아, 그리고 저 못 봤어요.”
건무정은 눈을 찡긋하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
어쨌거나 복식을 제대로 정돈하고서야 진목란은 모옥의 바깥으로 나왔다.
쨍쨍한 햇볕은 어제와 또 달랐다. 어제? 건무정의 말에 따르면 어제는 확실히 아니다.
진목란은 뭔가 생소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옥은 훨씬 더 낡아 보였고, 부엌은 무너져 내려 흙벽만 간신히 남은 상태.
‘뭐야, 뭐야 이건…….’
땅은 돌과 모래로 인해 거칠었으며, 잡초가 무성히 자라 발목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분명 나름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던 길이었거늘.
히히히힝~!
진목란을 보고 점박이 말이 반가운 듯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왔다.
말을 쓰다듬던 그녀의 눈에 안장 뒤로 걸어두었던 청검이 비쳤다.
분명 전날 밤에 청검을 풀어 깨끗하게 닦은 뒤 침상 옆에 두었었는데…….
“건 동생, 여기는…….”
진목란이 건무정을 부르고자 고개를 돌렸을 때, 건무정은 무덤들 쪽에 가 있었다.
처음과 다른 것이 없어 보이는 유일한 곳.
진목란은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는 어떠한 생각에 빠져, 이마에서 삐질 땀이 솟는 줄도 몰랐다.
건무정에게 가까이 다가간 진목란.
그녀는 눈을 감고 서 있는 건무정이 정의수호대 동료들에게 속으로 말을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후, 건무정이 고개를 들고서 몸을 돌리고 나자 진목란이 입을 열었다.
“저기… 뭐가 많이 이상해서 그러는데, 얘기 좀 해.”
“천봉산 정상에는 처음이시죠? 여기로 말할 것 같으면.”
“잠깐만. 그 임…….”
진목란이 임휘는 어디 갔는지부터 물어보려는 순간.
그녀의 눈이 자연스럽게 건무정의 발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 눈동자에 들어온 검은 색 비석 하나.
거기에 음각된 글자는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모산자(茅山子) 임휘(任輝).
어제까지만 해도 ‘명진’이라 쓰여 있던 바로 그 비석이 아닌가.
입은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 고통이라니.
건무정은 입을 벌린 채 꺽꺽거리는 진목란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꺼, 꺼억. 컥!”
진목란은 침까지 흘려가며 막힌 가슴을 두드렸다.
속이 좀 뚫리자 자신이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방금 전에 닥쳐온 무서운 공포감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흐음, 이제야 알겠네. 절정고수가 되면 오래 자서는 안 된다는 걸.”
진목란의 행동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건무정이었다.
‘그게 다 꿈이었다고?’
꿈이 틀림없었다. 한데 이 현실감은 또 무어란 말인가.
‘아니야. 꿈이 아니야.’
꿈이되 꿈이 아닌 꿈.
진목란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달았다.
-네가 이곳에 왜 왔는지 묻고 있지 않느냐.
-소저에게도 저들이 보였지요?
-귀(鬼)의 경계를 보는 눈을 지닌 이들이 있습니다.
-신령과 원한이 만났으니…….
-그들이 당신에게 허락한 겁니다……. 대주와… 혈육이니까요.
-저도 이만 떠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귀혼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던 말들이, 임휘가 했던 말들이 전부 떠올랐다.
‘그렇구나. 그래.’
어떤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그녀에게 작용한 게 분명했다.
“얼굴 좀 펴세요. 제가 차근차근 말씀해드릴 테니까.”
건무정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그는 자신이 겪었던 괴이한 현상에 전혀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이 잠들어있던 사이에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그걸 말할 녀석도 아니었고.
“아니야. 내가 들을 필요는 없으니 신경 안 써도 돼.”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그래요? 흐흠.”
건무정이 오히려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내려갈 거지?”
“그래야죠. 여기서 제 볼일은 끝났거든요.”
“알았어. 준비하고 나올게.”
“간단하게 식사나 하고 가실래요? 허기가 져서 얼굴이 쏙 들어가셨습니다 그려.”
“괜찮아. 그저 어서 내려가고 싶을 뿐이야.”
“흐음. 흐음…….”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사람들을 좀 찾으려 합니다.”
“사람?”
“예. 한 이삼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머물고 있던 친구들이 있어요. 떠나면서 뭔가를 끼적여놓았더군요. 저보고 알아서 찾아오라는 말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들은 아마도 정의수호대의 마지막 생존자들이리라.
“천천히 나와요. 안 볼 테니까.”
“장난 그만해.”
“허허허허!”
건무정은 짜증을 폭발시킨 진목란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그들의 멀리 뒤쪽으로 높이 솟은 나무의 가지가 흔들렸다.
오늘은,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기분이 크게 상했는지 건무정은 임휘를 째려본 다음, 바로 무덤가 옆에 털썩 누워버렸다.
그러자 바닥을 흐르던 안개가 이내 그를 살포시 덮었다.
“정파 동도들은 무정이를 ‘소림살불’이라 불렀고, 사혼당 적도들은 ‘마귀승’이라며 욕을 해댔지요.”
“소림살불… 소림살불이라…….”
진목란은 그 명호를 따라 부르며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이지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친구라니까요.”
“그렇습니까?”
진목란은 여전히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세상에, 저 건무정이 위대한 소림의 승려였다니.
지금까지 같이 지내오면서 소림승다운 모습이라고는 발가락 사이의 때만큼도 볼 수가 없었지 않았는가.
자고로 소림승이라 하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근엄하기 짝이 없고 고지식하며, 악은 원수처럼 여기면서도 또한 어렵고 불쌍한 이들에게는 선행을 베푸는 의인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건무정은 일단 근엄과는 거리가 꽤나 멀고, 전혀 고지식하지도 않으며, 본인 스스로가 악하다고 떠벌리는 것도 모자라 어렵고 불쌍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외면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건 동생이 예전에도 저러했다는 뜻입니까?”
“예, 참 재미난 친구였지요. 오죽하면 저희가 그 무시무시한 소림살불 대신 소림파계승이라고 놀렸겠습니까.”
당시가 떠오르는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는 임휘였다.
“그런데 그게 또 사실 무정이의 본모습은 아니었답니다. 웃는 얼굴 뒤편에는 늘 짙은 어둠이 자리했었어요.”
가면.
“녀석이 소림의 품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결코 그 안에서 뭉쳐질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소림의 자식이기는 하되, 친자식은 아니라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저도 잘 모르지요. 언젠가는 무정이가 소저께 얘기할 날이 올 겁니다. 분명.”
“그때까지 함께 다니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자신을 보는 것조차 건무정에게는 고통일 거란 생각을 하니, 진목란은 가슴이 찌르르 아파왔다.
명진이라, 명진. 명진……. 명(明)… 명자 항렬.
“아!”
진목란은 순간 머릿속에 번쩍 떠오른 무언가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림에서 법명이 명자로 시작하는 승려들을 한 번 얘기해보면.
장문방장 명효대사, 장경각주 명성대사, 지객당주 명일대사, 계지원주 명환대사, 양심당주 명천대사, 계율원주 명심대사, 나한전주 명숭대사, 조사전주 명약대사, 참회동주 명산대사, 호원주 명풍대사 등등.
속 시원하게 풀어보자면 소림에서 ‘명’자 배 항렬은 그 자체로 소림의 중심이었다. 장로원에 해(海)자 배 원로 몇 명이 아직 살아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소림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건무정의 법명이 명진이었다니.
배분 상 거의 소림의 최상층이 아닌가.
“설마 반로환동인가…….”
진목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꿈같은 얘기지요.”
임휘가 딱 잘라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육 년도 더 전이면 건 동생이 열대여섯 살 때 아닌가요? 그때 수백 명도 넘는 사혼당과 천산마교의 무인들을 몰살시킬 만큼 강력한 무인이었다는 게, 가만 생각해보면 믿기지를 않습니다. 일류고수는 불가능하고, 절정을 넘어선 고수도 힘에 부칠 일이에요.”
그래, 반로환동이다. 그게 아니라면 건무정의 무용담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과장에 불과할 테니까.
짝!
갑자기 임휘가 진목란의 눈앞에서 손뼉을 쳤다.
‘또 당했네.’
임휘가 양손바닥을 조금 떨어뜨린 뒤 진목란에게 말했다.
“이 사이가 지금 소저께서 보고 계신 세상입니다.”
“그래서요?”
“무엇이 보이지요?”
“임 도사님의 눈만 보입니다.”
임휘는 다시 손바닥 사이를 더 크게 벌렸다.
“지금은요?”
“얼굴이 다 보이네요.”
“좁았던 시야가 넓어진 소감이 어떻습니까?”
“…….”
“세상을 더 넓게 보세요. 좁은 편견은 진 소저와 같은 젊고 창창한 이들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에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당장 소저 본인께서도 그 나이 대에는 이루기 힘든 절정을 보셨지 않습니까?”
“아.”
이 남자,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건무정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가르치고 있었다.
왜일까? 임휘 역시도 진유상과 무당에 대한 증오가 남다를 텐데.
그 무당의 금지옥엽인 자신은 그에게 있어서는 척살의 대상과도 같았다.
한데 거꾸로 깨달음을 주려고 하니,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아, 밤이 너무 깊었군요.”
임휘가 슬쩍 몸을 돌렸다.
“오래 나와 있었더니 버티기가 힘드네요.”
모산파의 도사라 그런지 그리 강건한 육체의 소유자는 아니었나 보다.
“저도 이만 떠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떠날 때라니요?”
“아, 제가 그랬나요? 안에 들어가서 쉬겠다는 뜻이니 그냥 흘려들으세요.”
“……?”
안 그래도 진목란 또한 피로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몸이 무겁고 어깨가 자꾸 처졌다.
임휘의 말을 들을수록 계속되던 심신의 격동이 그녀를 상당히 지치게 만든 듯했다.
살짝 어지러우면서 미약하게 시야가 흐려지고, 막 잠들기 직전의 몽롱함이 진목란을 찾아왔다.
‘그래, 오늘 많은 일들을 겪었지.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많이 힘들었던 거야.’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자꾸 풀리려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눈꺼풀 위에 돌덩이를 얹은 듯, 눈이 저절로 감겨왔다.
“진 소저.”
흐릿하게 들리는 임휘의 목소리.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게 무얼까요?”
‘무얼까요?’
“한 번 찾아보세요. 진 소저라면 가능할 겁니다.”
‘저는… 못해요.’
“당신은 강하고, 또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정말요?’
“당신은 틀림없이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찾은 그것을… 명진에게… 무정이에게…….”
‘네.’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 검은 천 아래에서 임휘의 입술이 빙그레 미소를 짓는 것만 같았다.
스스스스스.
임휘가 건무정 쪽으로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 광경을 흐린 눈으로 물끄러미 지켜보는 진목란.
그녀는 지금 이 모든 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찾아온 이 극심한 피로는 그녀의 육체와 정신 모두를 완전히 잠재우려 하고 있었다.
건무정에게 가까이 다가간 임휘는 이 불행한 옛 친구를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목란은 왠지 그 광경을 보고 왈칵 울음이 터질 것처럼 코끝이 찡해졌다.
스르르.
임휘는 천천히 몸을 굽혀 건무정을 안았다.
조금씩 들썩이는 임휘의 어깨.
그가 잠든 건무정에게 무어라 말하는지 들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 이리 말하는 것이리라.
고맙고 또 미안하다고.
순간, 가늘게 이어지던 진목란의 의식이 완전히 끊겼다.
* * *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지는 따사로운 빛.
조금 더 자고 싶었는데, 어느새 깨어난 정신이 늘어진 그녀의 몸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아함~.”
한 차례 크게 하품을 하고 나서야 진목란은 몸이 좀 뻐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꽤 오래 잠들었었나? 문틈으로 들어오는 밝은 빛이 지금이 완전한 대낮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래 봐야 잠든 새벽으로부터 서너 시진이 경과했을 뿐인데, 몸은 벌써부터 잔뜩 굳어 있었다.
우두둑, 우두둑 관절을 풀어주고 상체를 몇 번 돌려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준 진목란은 누군가가 모옥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덜컹.
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는 건무정이었다.
“일어나셨어요?”
“어? 어어.”
“하아, 무슨 잠을 그리도 잡니까?”
투덜거리는 건무정의 모습이 어쩐지 새롭게만 보였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더 주무시다니. 고수 맞아요? 저 지켜주실 분 맞으신가?”
“뭐라고? 내가?”
미쳤다.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세상모르고 잠들었었다니.
그러고 보니 앞섶도 조금 풀어져 있고 무복의 구김도 심했다.
평소의 그녀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건무정이 볼 세라 얼른 옷을 잡아당겨 가슴 쪽을 가리고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는 진목란이었다.
‘임 도사는 어디 갔지?’
“말에서 내리자마자 어째 사람이 픽 쓰러져요. 난 또 뭘 잘못 드셨나 했네.”
“어, 미안…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말에서 내리자마자 뭐?
“허허허, 누님. 생각보다 무겁더이다. 안고 와서 눕히기까지 이 동생이 고생 좀 했습니다.”
“잠깐, 건 동생. 지금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준비 되면 나오세요. 아, 그리고 저 못 봤어요.”
건무정은 눈을 찡긋하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
어쨌거나 복식을 제대로 정돈하고서야 진목란은 모옥의 바깥으로 나왔다.
쨍쨍한 햇볕은 어제와 또 달랐다. 어제? 건무정의 말에 따르면 어제는 확실히 아니다.
진목란은 뭔가 생소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옥은 훨씬 더 낡아 보였고, 부엌은 무너져 내려 흙벽만 간신히 남은 상태.
‘뭐야, 뭐야 이건…….’
땅은 돌과 모래로 인해 거칠었으며, 잡초가 무성히 자라 발목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분명 나름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던 길이었거늘.
히히히힝~!
진목란을 보고 점박이 말이 반가운 듯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왔다.
말을 쓰다듬던 그녀의 눈에 안장 뒤로 걸어두었던 청검이 비쳤다.
분명 전날 밤에 청검을 풀어 깨끗하게 닦은 뒤 침상 옆에 두었었는데…….
“건 동생, 여기는…….”
진목란이 건무정을 부르고자 고개를 돌렸을 때, 건무정은 무덤들 쪽에 가 있었다.
처음과 다른 것이 없어 보이는 유일한 곳.
진목란은 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는 어떠한 생각에 빠져, 이마에서 삐질 땀이 솟는 줄도 몰랐다.
건무정에게 가까이 다가간 진목란.
그녀는 눈을 감고 서 있는 건무정이 정의수호대 동료들에게 속으로 말을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잠시 후, 건무정이 고개를 들고서 몸을 돌리고 나자 진목란이 입을 열었다.
“저기… 뭐가 많이 이상해서 그러는데, 얘기 좀 해.”
“천봉산 정상에는 처음이시죠? 여기로 말할 것 같으면.”
“잠깐만. 그 임…….”
진목란이 임휘는 어디 갔는지부터 물어보려는 순간.
그녀의 눈이 자연스럽게 건무정의 발 근처로 향했다.
그리고 눈동자에 들어온 검은 색 비석 하나.
거기에 음각된 글자는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모산자(茅山子) 임휘(任輝).
어제까지만 해도 ‘명진’이라 쓰여 있던 바로 그 비석이 아닌가.
입은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는 고통이라니.
건무정은 입을 벌린 채 꺽꺽거리는 진목란을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꺼, 꺼억. 컥!”
진목란은 침까지 흘려가며 막힌 가슴을 두드렸다.
속이 좀 뚫리자 자신이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지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방금 전에 닥쳐온 무서운 공포감에 얼굴이 핼쑥해졌다.
“흐음, 이제야 알겠네. 절정고수가 되면 오래 자서는 안 된다는 걸.”
진목란의 행동들을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건무정이었다.
‘그게 다 꿈이었다고?’
꿈이 틀림없었다. 한데 이 현실감은 또 무어란 말인가.
‘아니야. 꿈이 아니야.’
꿈이되 꿈이 아닌 꿈.
진목란은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깨달았다.
-네가 이곳에 왜 왔는지 묻고 있지 않느냐.
-소저에게도 저들이 보였지요?
-귀(鬼)의 경계를 보는 눈을 지닌 이들이 있습니다.
-신령과 원한이 만났으니…….
-그들이 당신에게 허락한 겁니다……. 대주와… 혈육이니까요.
-저도 이만 떠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귀혼이 그녀의 귀에 속삭였던 말들이, 임휘가 했던 말들이 전부 떠올랐다.
‘그렇구나. 그래.’
어떤 설명하기 힘든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그녀에게 작용한 게 분명했다.
“얼굴 좀 펴세요. 제가 차근차근 말씀해드릴 테니까.”
건무정의 말과 행동으로 보아, 그는 자신이 겪었던 괴이한 현상에 전혀 영향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이 잠들어있던 사이에 혹시나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그걸 말할 녀석도 아니었고.
“아니야. 내가 들을 필요는 없으니 신경 안 써도 돼.”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그래요? 흐흠.”
건무정이 오히려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내려갈 거지?”
“그래야죠. 여기서 제 볼일은 끝났거든요.”
“알았어. 준비하고 나올게.”
“간단하게 식사나 하고 가실래요? 허기가 져서 얼굴이 쏙 들어가셨습니다 그려.”
“괜찮아. 그저 어서 내려가고 싶을 뿐이야.”
“흐음. 흐음…….”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사람들을 좀 찾으려 합니다.”
“사람?”
“예. 한 이삼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머물고 있던 친구들이 있어요. 떠나면서 뭔가를 끼적여놓았더군요. 저보고 알아서 찾아오라는 말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들은 아마도 정의수호대의 마지막 생존자들이리라.
“천천히 나와요. 안 볼 테니까.”
“장난 그만해.”
“허허허허!”
건무정은 짜증을 폭발시킨 진목란을 보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그들의 멀리 뒤쪽으로 높이 솟은 나무의 가지가 흔들렸다.
오늘은,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