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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청년의 이름은 곽손.
남직례 북부의 탕현(縣)과 소현(縣)에 퍼져있는 여러 소규모 방파들의 집합체인 작림방 방주의 아들이었다.
물론 그의 아비는 바로 앞에 있는 곽서였고. 즉, 중년인 곽서가 작림방의 방주라는 말이다.
곽손은 여러모로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불안하기까지 했다.
약자는 뭉쳐야 강해진다는 말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모든 경우에 해당된다고는 볼 수 없다.
이 강호에서 약자는 뭉쳐도 그냥 약자였다.
하오문 같은 전국구 약자들은 음지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주 드문 경우였다.
주(州)나 현 단위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있는 중소 문파들은, 모이고 모여 몇 천의 무인을 보유했다 하더라도 유명한 대문파 하나의 상대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어쩌다 재능 있는 인물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활짝 만개하도록 그냥 놔둘 강호가 아니었다.
약자가 약자로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강호의 질서였다.
곽손은 이전부터 이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온 사람 중에 하나였다.
곽서가 두 개 현의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 작림방을 만들고 어깨에 힘 좀 주며 다닐 때에도 곽손은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비애를 느꼈다.
작림방에서 동원 가능한 무인들을 다 합치면 약 이백여 명.
세가련 창궁검대의 한 개 조, 또는 진마도의 혼마병 십 인과 붙어도 가뿐하게 전멸당하고도 남을 수준밖에 안 되는 이, 삼류들.
그러니 곽서가 어떻게든 세가련에 들어가고자 다년간 애를 썼어도 그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세가련에게 있어 작림방은 고작 진마도와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작림방이 만약 세가련의 일원이었다면, 진마도가 작림방을 공격했을 시, 세가련은 진마도에 무조건 전쟁을 선포하고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세가련 소속이 아닌 상태에서 참극이 일어났을 때, 세가련은 작림방을 보호할 의무도 없거니와 당장에 진마도와 결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리고 진마도가 작림방을 마계의 형제로 받아들일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근래에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왔다.
세가련이, 정확하게는 군자도와 검산을 뺀 사패이강 전체가 자세력 내 무인들을 소집하고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사패이강에 들지는 못했어도 그 영향권 안에 자리한 수많은 문파와 무관들에도 협조를 구해왔다.
어쨌거나, 작림방에 세가련의 요청이 들어왔을 때 곽서가 크게 기뻐했던 것과는 달리 곽손이 불안해했던 데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가련은, 이 강호의 기득권들은 결코 자신들 같은 ‘수단’들을 품 안에 들이지 않는다…….
“넌 표정이 왜 그러느냐?”
“……예?”
“내내 불편해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 보이십니까?”
“에잉!”
곽서는 애써 좋아진 기분이 잡쳤는지 역정을 냈다.
“보거라. 이게 우리의 저력이다.”
곽서가 완공 직전의 토성과 천막들을 손으로 주욱 가리키며 말했다.
“예…….”
“련에서도 본 방을 인정한 것이란다. 이런 ‘중책’을 맡기고, 이곳에 방의 무인들이 상시 주둔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지 않았느냐. 우리도 이제 당당한 세가련이다.”
“그러시겠지요.”
“쯧쯧.”
곽서는 아들의 무성의한 대답에 혀를 찼다.
“하고픈 말이 있는 게로구나.”
“…….”
곽손이 머뭇거리고 있자, 곽서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 손을 슬쩍슬쩍 들었다 내렸다.
“소자의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들어주소서.”
“오냐.”
곽손은 그간 자신이 품어왔던 많은 생각들을 하나하나 곽서에게 말했다.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곽서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곽손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이 아닌, 불만의 외적 표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진마도가 절대불가침구역으로 설정한 마왕림에 너무도 가깝습니다. 걸어서 반나절이면 도착할 정도니까요. 그간에는 이 요충지를 비워두었기에 진마도 쪽에서도 본 방을 위협으로 보지 않았던 겁니다. 한데 본 방이 나서서 요새를 보수하고 관리까지 한다는 사실을 저들이 알게 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기우로구나.”
“예. 예, 맞습니다. 하지만 진마도의 마인들은 거침이 없는 자들입니다. 본 방이 세가련의 앞에 서서 자신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 판단된다면, 곧바로 침공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는 련에서 우릴 도울 것이다.”
“그때까지 아버님과 제가 살아있기는 어려울 테지요.”
“어허!”
“그리고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예. 그동안 본 방도 이 토성을 복구하면서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최대한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말이지요. 이는 사실 아버님께서도 진마도를 경계한 것이 아닙니까?”
“…….”
“한데 지금껏 한 번도 관심을 주지 않던 세가련에서 천호당의 부당주까지 보내 완성을 독려하고 갔습니다. 게다가 밤에 환히 불을 밝히라는 지시까지 하고 갔지요.”
“그게 왜?”
“이 주변은 강과 늪지대, 숲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흔히 거주할 이유가 없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와 있음을 일부러 드러내놓는 꼴이 아닙니까.”
여기까지 말한 곽손의 얼굴에는 그가 느꼈을 답답함과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겁이 난다는 뜻이냐?”
“아버님!”
곽손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곽서가 미워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어딜 감히!”
“…….”
“네가 어미를 닮아 사내답지 못하고 소심한 것은 잘 알고 있느니라.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치다면 어찌 내 뒤를 이어 큰 중임을 맡을 수 있겠느냐. 한심한 놈.”
곽손은 힘이 쭉 빠져나가는 아찔한 느낌에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세상에 이처럼 어리석은 아비가, 방주가 또 있겠는가.
‘이제 우리 가문도, 작림방도 끝장이로구나.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를 뿐.’
그 시기가 언제냐고?
퓻!
퓻퓻!
쫑긋.
곽서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미세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비록 곽서가 아들보다는 세태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기는 하나, 그는 무공의 고수이자 하나의 문파를 책임지는 장이었다.
자기 스스로도 일류 이상임을 자부해온 바, 지금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든 소리가 평범한 바람소리가 아님은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불길한 어떤 느낌을 ‘확신’할 수는 없었고, 또 그러기도 싫었기 때문에 오히려 본인이 더 어리둥절해졌을 뿐이었다.
퓻! 퓨퓨퓨퓨퓻!
“아버님!”
이 소리는 곽손도 확실히 들었다.
곽손은 빠르게 움직여 아비의 앞에 섰다.
팅! 티티팅!
서둘러 뽑은 검에 막혀 땅에 떨어진 검은 물체는 보나마나 비표일 터.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튀어나오는 광경이 곽손의 눈동자에 선명히 맺혔다.
그림자들은 매우 신속했다. 그 수는 아직 파악이 안 되지만, 결코 적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가장 먼저 횃불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불침번들이 참살되었다.
“윽!”
“크르르륵!”
심장어림이 뻥 뚫린 채 무너지는 무인 다음으로 목젖 부위가 통째로 날아간 자가 신음을 흘렸다.
댕겅, 댕겅.
반쯤 졸린 눈을 했던 무인 몇 명은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엉겁결에 손을 들어 날아드는 병기를 막으려 했던 자는 허공에 붕 뜨는 자신의 잘린 손가락들을 허망하게 쳐다보다가 그대로 남은 팔과 머리를 잃었다.
대여섯 명이 순식간에 쓰러지자, 조금 떨어진 횃불 앞에 있던 무인들은 습격을 눈치 채고는 당황하며 허둥댔다.
곧바로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그저 황망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습격한 흑의 괴인들이 빠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작림방 무인들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목숨을 건 싸움이든, 경계 임무든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소리를 질러 주었다면 그나마 나았을까?
파파팟.
이쪽의 무인 여섯 명도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이이노오오옴드으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곽서가 내공을 실은 사자후를 터트렸다.
아주 짧은 순간, 습격자들 중에 일부가 멈칫하는 듯했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금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곽서는 분노로 몸을 떨며, 자신의 애병을 꺼내 들고 토성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다.
바로 그때, 성벽 위 조금 떨어진 곳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휙. 휘익.
이번에는 곽서와 곽손의 뒤편 성벽 쪽에 또 다시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났다.
앞뒤로 총 네 명에게 포위된 형국을 맞이한 곽씨 부자는 서로의 등을 맞댄 채 이를 악물었다.
“아버님, 이놈들은…….”
“그래, 진마도야. 진마도의 미친 마인 놈들이다.”
곽서는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을 거라 생각했다.
“으아아악!”
아래쪽에서 다시금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천막에서 잠을 자다가 변을 당한 이들은 대부분 토성 보수를 위해 데려온 일꾼들이었다.
즉, 강호의 비정함에 엮여서는 안 될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진마도’의 암습자들은 서슴없이 독수를 날렸다.
사방으로 튀는 피.
머리를 잃고 허우적거리는 몸체.
하나가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다시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람의 모가지.
간혹 작림방 무인들도 검을 휘둘러 대항했지만, 일 합을 넘기지도 못한 채 난자당했다.
으드드득.
곽서는 부서져라 이를 갈아댔다.
“미친 살인귀 새끼들아.”
곽서의 한 맺힌 음성에 앞서 있던 마인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크아아아!”
곽서는 괴성을 지르며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이틀 뒤.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백여 구의 시신이 세가련 무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작림방주 곽서를 포함해 방도 삼십과 얼마 되지도 않는 품삯을 벌고자 따라 나섰던 양민들 전원이었다.
토성은 다시 무너져 이전보다 더 엉망으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이런 천인공노할 학살극을 벌인 미지의 살인마들에게 욕을 퍼붓던 세가련 무인들은 토성 아래에서 단 한 명의 생존자를 발견했다.
그는 바로 곽서의 아들 곽손이었다.
곽손은 진마도의 습격을 ‘증언’해줄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긴급히 후송되었다.
* * *
호광(湖廣)의 북부와 하남(河南)의 서부, 그리고 섬서(陝西)의 남부는 사패와 삼강이 천하를 나누어 먹은 오늘날의 강호와는 조금 다른 세상이었다.
그 어떠한 세력의 통제도, 아니 조금의 영향력조차 미치지 않는 강호의 고립된 섬과도 같은 지역.
지리적으로 대명제국의 중앙이라는 억지스러운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중원인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명산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강산(江山)에 과거 천하를 호령했던 초강(超強) 무인들의 대집단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호광의 무당.
하남의 소림.
섬서의 화산과 종남.
이제는 각자 외부와의 관계를 일절 끊고 오직 도인(道人)과 승인(僧人)의 본연으로 돌아가자며 산문 뒤로 은거해버린 절대문파들.
비록 지금은 이빨이고 발톱이고 가죽이고 뭐고 다 뽑아 던지고 찢어버린 옛 구대문파의 잔영(殘影)뿐인 이름들이었지만, 모두가 이들과 엮이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경계를 두고 있던 대무신전, 군자도, 검산, 세가련은 암묵적으로 이 지역을 금기시했다.
하지만 그러한 금기도 결국 오래가지는 못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며, 과거는 쉽게 잊히기 마련이라고, 잘나신 옛 성현 중에 누군가가 지껄였다지 아마.
금기는 늘 이런 이유로 인해 깨어지고야 만다.
건무정과 진목란이 천봉산의 초입에 막 도착했을 그 무렵.
섬서와 하남의 경계이자 화산에 상당히 가까운 관도 근처의 어느 객잔.
이곳에서도 참으로 추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청년의 이름은 곽손.
남직례 북부의 탕현(縣)과 소현(縣)에 퍼져있는 여러 소규모 방파들의 집합체인 작림방 방주의 아들이었다.
물론 그의 아비는 바로 앞에 있는 곽서였고. 즉, 중년인 곽서가 작림방의 방주라는 말이다.
곽손은 여러모로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불안하기까지 했다.
약자는 뭉쳐야 강해진다는 말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게 모든 경우에 해당된다고는 볼 수 없다.
이 강호에서 약자는 뭉쳐도 그냥 약자였다.
하오문 같은 전국구 약자들은 음지에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그건 아주 드문 경우였다.
주(州)나 현 단위 지역을 거점으로 삼고 있는 중소 문파들은, 모이고 모여 몇 천의 무인을 보유했다 하더라도 유명한 대문파 하나의 상대도 되지 못했다.
게다가 어쩌다 재능 있는 인물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활짝 만개하도록 그냥 놔둘 강호가 아니었다.
약자가 약자로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강호의 질서였다.
곽손은 이전부터 이러한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온 사람 중에 하나였다.
곽서가 두 개 현의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 작림방을 만들고 어깨에 힘 좀 주며 다닐 때에도 곽손은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비애를 느꼈다.
작림방에서 동원 가능한 무인들을 다 합치면 약 이백여 명.
세가련 창궁검대의 한 개 조, 또는 진마도의 혼마병 십 인과 붙어도 가뿐하게 전멸당하고도 남을 수준밖에 안 되는 이, 삼류들.
그러니 곽서가 어떻게든 세가련에 들어가고자 다년간 애를 썼어도 그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세가련에게 있어 작림방은 고작 진마도와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작림방이 만약 세가련의 일원이었다면, 진마도가 작림방을 공격했을 시, 세가련은 진마도에 무조건 전쟁을 선포하고 총력전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세가련 소속이 아닌 상태에서 참극이 일어났을 때, 세가련은 작림방을 보호할 의무도 없거니와 당장에 진마도와 결전을 벌일 필요도 없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리고 진마도가 작림방을 마계의 형제로 받아들일 일도 없을 터였다.
그런데 근래에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왔다.
세가련이, 정확하게는 군자도와 검산을 뺀 사패이강 전체가 자세력 내 무인들을 소집하고 단속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사패이강에 들지는 못했어도 그 영향권 안에 자리한 수많은 문파와 무관들에도 협조를 구해왔다.
어쨌거나, 작림방에 세가련의 요청이 들어왔을 때 곽서가 크게 기뻐했던 것과는 달리 곽손이 불안해했던 데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가련은, 이 강호의 기득권들은 결코 자신들 같은 ‘수단’들을 품 안에 들이지 않는다…….
“넌 표정이 왜 그러느냐?”
“……예?”
“내내 불편해하고 있지 않느냐.”
“그리 보이십니까?”
“에잉!”
곽서는 애써 좋아진 기분이 잡쳤는지 역정을 냈다.
“보거라. 이게 우리의 저력이다.”
곽서가 완공 직전의 토성과 천막들을 손으로 주욱 가리키며 말했다.
“예…….”
“련에서도 본 방을 인정한 것이란다. 이런 ‘중책’을 맡기고, 이곳에 방의 무인들이 상시 주둔할 수 있도록 허가해주지 않았느냐. 우리도 이제 당당한 세가련이다.”
“그러시겠지요.”
“쯧쯧.”
곽서는 아들의 무성의한 대답에 혀를 찼다.
“하고픈 말이 있는 게로구나.”
“…….”
곽손이 머뭇거리고 있자, 곽서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 손을 슬쩍슬쩍 들었다 내렸다.
“소자의 기우일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들어주소서.”
“오냐.”
곽손은 그간 자신이 품어왔던 많은 생각들을 하나하나 곽서에게 말했다.
아들의 말을 들으면서 곽서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하지만 그것은 곽손의 생각에 동조하는 것이 아닌, 불만의 외적 표현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이곳은 진마도가 절대불가침구역으로 설정한 마왕림에 너무도 가깝습니다. 걸어서 반나절이면 도착할 정도니까요. 그간에는 이 요충지를 비워두었기에 진마도 쪽에서도 본 방을 위협으로 보지 않았던 겁니다. 한데 본 방이 나서서 요새를 보수하고 관리까지 한다는 사실을 저들이 알게 되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기우로구나.”
“예. 예, 맞습니다. 하지만 진마도의 마인들은 거침이 없는 자들입니다. 본 방이 세가련의 앞에 서서 자신들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다 판단된다면, 곧바로 침공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때는 련에서 우릴 도울 것이다.”
“그때까지 아버님과 제가 살아있기는 어려울 테지요.”
“어허!”
“그리고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상한 점?”
“예. 그동안 본 방도 이 토성을 복구하면서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왔습니다. 최대한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말이지요. 이는 사실 아버님께서도 진마도를 경계한 것이 아닙니까?”
“…….”
“한데 지금껏 한 번도 관심을 주지 않던 세가련에서 천호당의 부당주까지 보내 완성을 독려하고 갔습니다. 게다가 밤에 환히 불을 밝히라는 지시까지 하고 갔지요.”
“그게 왜?”
“이 주변은 강과 늪지대, 숲으로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흔히 거주할 이유가 없는 곳에 많은 사람들이 와 있음을 일부러 드러내놓는 꼴이 아닙니까.”
여기까지 말한 곽손의 얼굴에는 그가 느꼈을 답답함과 불쾌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겁이 난다는 뜻이냐?”
“아버님!”
곽손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곽서가 미워서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어딜 감히!”
“…….”
“네가 어미를 닮아 사내답지 못하고 소심한 것은 잘 알고 있느니라.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치다면 어찌 내 뒤를 이어 큰 중임을 맡을 수 있겠느냐. 한심한 놈.”
곽손은 힘이 쭉 빠져나가는 아찔한 느낌에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세상에 이처럼 어리석은 아비가, 방주가 또 있겠는가.
‘이제 우리 가문도, 작림방도 끝장이로구나.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를 뿐.’
그 시기가 언제냐고?
퓻!
퓻퓻!
쫑긋.
곽서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뭔가 미세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비록 곽서가 아들보다는 세태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기는 하나, 그는 무공의 고수이자 하나의 문파를 책임지는 장이었다.
자기 스스로도 일류 이상임을 자부해온 바, 지금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든 소리가 평범한 바람소리가 아님은 그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불길한 어떤 느낌을 ‘확신’할 수는 없었고, 또 그러기도 싫었기 때문에 오히려 본인이 더 어리둥절해졌을 뿐이었다.
퓻! 퓨퓨퓨퓨퓻!
“아버님!”
이 소리는 곽손도 확실히 들었다.
곽손은 빠르게 움직여 아비의 앞에 섰다.
팅! 티티팅!
서둘러 뽑은 검에 막혀 땅에 떨어진 검은 물체는 보나마나 비표일 터.
순간 어둠 속에서 그림자들이 튀어나오는 광경이 곽손의 눈동자에 선명히 맺혔다.
그림자들은 매우 신속했다. 그 수는 아직 파악이 안 되지만, 결코 적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가장 먼저 횃불 근처에서 서성거리던 불침번들이 참살되었다.
“윽!”
“크르르륵!”
심장어림이 뻥 뚫린 채 무너지는 무인 다음으로 목젖 부위가 통째로 날아간 자가 신음을 흘렸다.
댕겅, 댕겅.
반쯤 졸린 눈을 했던 무인 몇 명은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목이 날아갔다.
엉겁결에 손을 들어 날아드는 병기를 막으려 했던 자는 허공에 붕 뜨는 자신의 잘린 손가락들을 허망하게 쳐다보다가 그대로 남은 팔과 머리를 잃었다.
대여섯 명이 순식간에 쓰러지자, 조금 떨어진 횃불 앞에 있던 무인들은 습격을 눈치 채고는 당황하며 허둥댔다.
곧바로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했음에도, 그들은 그저 황망한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습격한 흑의 괴인들이 빠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작림방 무인들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목숨을 건 싸움이든, 경계 임무든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소리를 질러 주었다면 그나마 나았을까?
파파팟.
이쪽의 무인 여섯 명도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이이노오오옴드으을!”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곽서가 내공을 실은 사자후를 터트렸다.
아주 짧은 순간, 습격자들 중에 일부가 멈칫하는 듯했지만, 그들은 이내 다시금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곽서는 분노로 몸을 떨며, 자신의 애병을 꺼내 들고 토성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다.
바로 그때, 성벽 위 조금 떨어진 곳에 두 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휙. 휘익.
이번에는 곽서와 곽손의 뒤편 성벽 쪽에 또 다시 그림자 두 개가 나타났다.
앞뒤로 총 네 명에게 포위된 형국을 맞이한 곽씨 부자는 서로의 등을 맞댄 채 이를 악물었다.
“아버님, 이놈들은…….”
“그래, 진마도야. 진마도의 미친 마인 놈들이다.”
곽서는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을 거라 생각했다.
“으아아악!”
아래쪽에서 다시금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천막에서 잠을 자다가 변을 당한 이들은 대부분 토성 보수를 위해 데려온 일꾼들이었다.
즉, 강호의 비정함에 엮여서는 안 될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진마도’의 암습자들은 서슴없이 독수를 날렸다.
사방으로 튀는 피.
머리를 잃고 허우적거리는 몸체.
하나가 땅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다시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람의 모가지.
간혹 작림방 무인들도 검을 휘둘러 대항했지만, 일 합을 넘기지도 못한 채 난자당했다.
으드드득.
곽서는 부서져라 이를 갈아댔다.
“미친 살인귀 새끼들아.”
곽서의 한 맺힌 음성에 앞서 있던 마인은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크아아아!”
곽서는 괴성을 지르며 놈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로부터 이틀 뒤.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백여 구의 시신이 세가련 무인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작림방주 곽서를 포함해 방도 삼십과 얼마 되지도 않는 품삯을 벌고자 따라 나섰던 양민들 전원이었다.
토성은 다시 무너져 이전보다 더 엉망으로 변해버린 상태였다.
이런 천인공노할 학살극을 벌인 미지의 살인마들에게 욕을 퍼붓던 세가련 무인들은 토성 아래에서 단 한 명의 생존자를 발견했다.
그는 바로 곽서의 아들 곽손이었다.
곽손은 진마도의 습격을 ‘증언’해줄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긴급히 후송되었다.
* * *
호광(湖廣)의 북부와 하남(河南)의 서부, 그리고 섬서(陝西)의 남부는 사패와 삼강이 천하를 나누어 먹은 오늘날의 강호와는 조금 다른 세상이었다.
그 어떠한 세력의 통제도, 아니 조금의 영향력조차 미치지 않는 강호의 고립된 섬과도 같은 지역.
지리적으로 대명제국의 중앙이라는 억지스러운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중원인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명산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바로 그 얼마 안 되는 강산(江山)에 과거 천하를 호령했던 초강(超強) 무인들의 대집단이 여럿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호광의 무당.
하남의 소림.
섬서의 화산과 종남.
이제는 각자 외부와의 관계를 일절 끊고 오직 도인(道人)과 승인(僧人)의 본연으로 돌아가자며 산문 뒤로 은거해버린 절대문파들.
비록 지금은 이빨이고 발톱이고 가죽이고 뭐고 다 뽑아 던지고 찢어버린 옛 구대문파의 잔영(殘影)뿐인 이름들이었지만, 모두가 이들과 엮이기를 꺼려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경계를 두고 있던 대무신전, 군자도, 검산, 세가련은 암묵적으로 이 지역을 금기시했다.
하지만 그러한 금기도 결국 오래가지는 못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며, 과거는 쉽게 잊히기 마련이라고, 잘나신 옛 성현 중에 누군가가 지껄였다지 아마.
금기는 늘 이런 이유로 인해 깨어지고야 만다.
건무정과 진목란이 천봉산의 초입에 막 도착했을 그 무렵.
섬서와 하남의 경계이자 화산에 상당히 가까운 관도 근처의 어느 객잔.
이곳에서도 참으로 추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