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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역시 모산파의 도사라는 것인가. 그는 진목란의 사문을 그녀와 마주친 그때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렇군요. 저 또한 그대들에게는 죄인이겠지요.”
임휘의 말을 들으니, 진목란은 오히려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리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저 억울한 놈들의 투정 정도로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임휘는 다시 사람 좋은 눈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진목란의 시선이 건무정에게로 향했다.
그의 춤도 이제는 막바지에 접어든 듯, 주변을 떠돌던 귀혼들의 너울거림도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불현듯 진목란의 뇌리에 또 하나의 의문이 스쳤다.
“건 동생도 알고 있을까요? 제가 무당에서 나왔음을.”
“아마도요. 사실 뭐, 소저의 기운도 그렇고, 그 흐늘흐늘한 청검도 그렇고, 어지간한 강호인이라면 그게 무당의 상징임을 모를 수가 없지요.”
“그도 무당을 증오하겠죠?”
“뿌리까지 씹어 먹고 싶어 안달 난 친구랍니다.”
“하아.”
진목란은 건무정의 속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당의 고수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지금껏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충분히 자신을 미워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그랬다.
아직 이 강호는, 아니 이 시대는 이대, 삼대, 사대에 걸친 복수를 용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복수의 대상은 복수자가 선택하는 모든 이를 아우른다.
다시 말해, 건무정이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자신을 원수의 혈육이라는 이유로 해코지를 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그를 탓할 수도, 탓하지도 않는다는 의미.
다만, 그 이후 해를 당한 진목란의 복수를 천명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건무정의 목을 취할 자격을 얻게 된다.
이는 지나치게 오래 유지되었던 유교사회의 어두운 면이었다.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
아비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없기에 반드시 쳐 죽여야 하고, 형제의 원수 또한 때려 죽여야 하며, 친구의 원수 역시 잡아 죽여야 한다.
원수는 그냥 보는 족족 모조리 갈아 마시라는 얘기가 유학 경전에 버젓이 쓰여 있을 정도이니, 행하는 자도, 당하는 자도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여 왔음도 당연한 일.
용서? 그건 아닐 것이다.
건무정은 자신이 했던 일들은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앞으로 행할 일에 대해서도 어떠한 후회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강호를 먹는다. 강호를 지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이 강호에 복수하겠다는 뜻.
지금은 아닐 지라도, 그녀 또한 건무정의 복수 대상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이 강호를 지우려 한다면… 그 세계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모든 생명 또한 지워야 한다.
그런데 왜?
이제껏 건무정은 자신을 부드럽게 대했을까. 그리고 왜 오히려 자신에게 상당한 신뢰를 보여주었을까.
혹시, 나중에 자신에게 끔찍하고 잔인한 정신적인 고통을 주고자, 그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끼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아, 깜박할 뻔했네요.”
임휘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조금 전, 대주의 생사도 물으셨죠?”
진목란은 조금 전보다 더더욱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크게 떴다.
양 끝이 조금 올라가고 가느다랬던 그녀의 눈이 확 커진 모습을 보자, 임휘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죽었다고 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임 도사님.”
목소리뿐만 아니라 상반신의 떨림도 주체가 안 되었다.
“글쎄요. 과연 대주가 그때 그 자리에서 죽었을까요?”
“말씀해주세요! 도사님,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쉬잇. 저 친구의 무아지경도 곧 끝납니다. 더 이상 큰 소리로 방해한다면 꽤나 성질을 낼 거예요. 그건 저도 감당 못합니다.”
“아아.”
이 순간만큼은 임휘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그 또한 건무정과 비슷한 수준으로 사람의 속을 뒤집는 재주가 있음이 분명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네, 네!”
“그 무너진 바위들 속에서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겁니다.”
풀썩.
진목란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벽력탄을 안고 같이 터졌다면… 시신을 못 찾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럴까요? 뭐 일단 제가 이 산에서 그의 귀혼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도 알려드리죠.”
“살아있다는 말씀인가요?”
진목란의 음성에 힘이 돌아왔다.
“그건 누구도 몰라요. 모든 이가 죽어서 귀혼을 남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우리 강호무림인들의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꽤나 높답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이 또한 그렇고요.”
진목란은 가슴 속에서 커다란 희망이 꿈틀거림을 느꼈다.
어느새 전신에 힘이 꽉꽉 들어찼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흙을 털고는 임휘를 향해 굳건히 포권을 취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이 은혜를 어찌 갚을는지요.”
“그리 좋아하실 일만은 아니잖습니까.”
“……아!”
진목란은 임휘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정의수호대주, 즉 무당의 진유상은 건무정이 반드시 죽여야 할 자들 중에 하나였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듣고서 그녀가 판단했을 때는 그랬다.
그가 살아있는 게 확실하다면, 건무정으로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건무정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는 힘들지만, 그는 천마가 대놓고 붙잡을 만큼의 능력자이며, 수없이 많은 문파들의 비전까지 깨우친 상태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진유상의 수준 정도는 발아래 두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였다.
즉,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걸 진목란이 막는다면?
아마도 건무정은 진목란부터 베려고 할 게 분명했다.
다시금 우울하고 복잡한 마음에 사로잡히기 직전인 진목란.
어느 정도 뒤틀렸던 심사가 제자리를 찾자마자 그녀는 건무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동작이 매우 느려져서 이제는 몇 호흡이나 지나야 한 걸음을 내디딜 정도였다.
곧 있으면 그의 춤은 완전히 정지할 터였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 사라진 옛 동료들을 추억할 테지.
그런데 잠깐. 그녀는 자신이 뭔가 하나를 더 놓치고 있음을 생각해냈다.
물어보고 싶었던 것.
건무정이 추는 춤을 보면서 들었던 의아함이었다.
“건 동생은 지금까지 여러 문파들과 기인들의 비전들을 완벽히 구현해내고 있었어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제가 사실 무예 쪽은 보는 눈이 없기는 합니다만.”
임휘도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을 했다.
“헌데 무당과 소림의 무예는 끝내 펼치지 않는군요. 무당이야 그렇다 치고, 소림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요. 건 동생의 재능이면 소림의 무예도 익혔을 법한데요.”
“…….”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빤히 쳐다보시네요.”
진목란은 조금 기분이 나빴는지 표정을 굳혔다.
“모르셨습니까?”
“예?”
“무정이 녀석의 사문입니다.”
“……?”
“저런,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나 보군요.”
임휘는 눈가에 주름을 만들 정도로 재미있어했다.
“저 녀석, 소림 출신이에요.”
“예에?”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 게다.
“소림에서 중노릇을 하던 친구란 말입니다, 무정이는. 명진은 그의 법명(法名)이었지요. 정말로 모르셨다는 얼굴이십니다, 진 소저.”
“에헤에잇-! 아니 왜 그걸!”
건무정이 지르는 짜증스러운 괴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 * *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하늘을 꽉꽉 채운 구름이 달을 가린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세상은 욕이 나오리만치 컴컴했다.
스스삿.
들쥐 떼인가?
낮게 자란 풀들 위에 여러 개의 줄이 그어졌다.
사사사삿.
어느새 수십 개로 늘어난 줄은 어느 한 곳을 향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풀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번뜩.
어둠을 조롱하듯 나타난 두 개의 작은 빛.
그것은 사람의 눈이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시퍼런 안광들이 번쩍번쩍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동굴 속의 박쥐들과도 같이.
얼굴을 포함해 전신을 흑의로 감싼 자가 아흔 명.
이들을 만약 강호의 무인이라 가정했을 때, 많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적은 머릿수도 아니었다.
사패삼강들이야 당연하고, 아직도 그에 속하지 않은 각 지역 거점의 군소 연합들도 구십의 무인을 모으기는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하지만 단일 문파에서 동원한 전력이라면 분명 무리했다고 할 만큼의 숫자인 것도 사실이었다.
전란의 시기를 거치며 강호가 가장 많이 잃어야 했던 것들은 바로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그들의 차가운 시선이 닿은 곳.
수풀의 끝자락 너머로는 꽤나 넓은 공터가 있었다.
꽤나? 뭐 조금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백에서 백오십 가구(家口) 정도는 충분히 들어서고도 남을 만큼의 공간이랄까.
아니나 다를까. 이 공터 안쪽으로는 원형으로 조성된 수십 개의 천막들과 건설이 거의 끝나가고 있던 토성(土城)이 있었다.
천지에는 흑암의 기운이 가득했지만, 이곳만큼은 곳곳에 밝혀둔 횃불 덕분에 어둠이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윽한 눈빛으로 토성을 응시하는 흑의 무리의 수장.
그가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자, 무리 전체가 조용히 천으로 둘둘 감쌌던 병기를 꺼냈다.
“누가 이렇게 횃불을 잔뜩 켜두라고 했나!”
불 근처에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무인 몇 명은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가벼운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이맛살을 구긴 채 서 있었다.
“낮에 련(聯)에서 사람이 나왔다 갔다고 합니다.”
중년인의 한 발짝 뒤에 있던 청년이 대신 답을 했다.
“누가?”
“천호당의 제갈사빈 부당주가 일의 진척상황을 살펴보러 잠깐 들렀습죠.”
이번에는 불 앞에서 잡담을 하며 경계를 게을리 했던 무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제갈 부당주가? 아니, 그런 높은 분이 와주셨거늘 왜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중년인은 더더욱 소리를 높여 무인들을 나무랐다.
“굳이 알리지 말라고 하셔서 말입죠.”
“어허! 그 말을 곧이듣다니, 참으로 멍청한 녀석이 아닌가.”
졸지에 바보 취급을 당한 무인은 얼굴을 붉혔다.
“본 방(幇)이 이제야 세가련의 눈에 들어 청운의 꿈을 크게 떨칠 기회를 얻었건만, 네 부족한 지혜가 일을 그르치는구나. 쯧쯧.”
중년인의 억지스러운 말에 뒤에 서있던 청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은 되었고. 그래, 제갈 부당주께서 무어라 하셨지?”
중년인이 기대에 찬 얼굴로 다시 무인에게 물었다.
“되도록이면 야밤에 불을 많이 밝히라 하셨습니다. 이게 다입니다요.”
결국 중년인이 처음에 내뱉은, 호통 같은 질문의 답이 여기서 나왔다.
“…….”
“그래서 이렇게 여기저기 횃불을 걸어…….”
“에잉!”
중년인은 팍 짜증을 부리며 몸을 돌렸다.
무인들은 생각했다.
‘제 놈 성격이 저러니 지금껏 세가련의 일원이 되지 못했던 것인데, 그걸 모르는 것인가?’
그들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청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가를 찌푸렸다.
중년인과 청년은 토성의 성벽에 올랐다.
이 토성은 예전에 마교와 중원이 한창 싸우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십년대란이 종식된 후, 버려져서 거의 폐허가 된 것을 최근에 보수하여 이 정도까지 복원해냈다.
사실 십여 일만에 토성을 이만큼이나 요새화시킨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중년인 곽서는 뿌듯한 마음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모산파의 도사라는 것인가. 그는 진목란의 사문을 그녀와 마주친 그때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렇군요. 저 또한 그대들에게는 죄인이겠지요.”
임휘의 말을 들으니, 진목란은 오히려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리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저 억울한 놈들의 투정 정도로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임휘는 다시 사람 좋은 눈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진목란의 시선이 건무정에게로 향했다.
그의 춤도 이제는 막바지에 접어든 듯, 주변을 떠돌던 귀혼들의 너울거림도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불현듯 진목란의 뇌리에 또 하나의 의문이 스쳤다.
“건 동생도 알고 있을까요? 제가 무당에서 나왔음을.”
“아마도요. 사실 뭐, 소저의 기운도 그렇고, 그 흐늘흐늘한 청검도 그렇고, 어지간한 강호인이라면 그게 무당의 상징임을 모를 수가 없지요.”
“그도 무당을 증오하겠죠?”
“뿌리까지 씹어 먹고 싶어 안달 난 친구랍니다.”
“하아.”
진목란은 건무정의 속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당의 고수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지금껏 전혀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충분히 자신을 미워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그랬다.
아직 이 강호는, 아니 이 시대는 이대, 삼대, 사대에 걸친 복수를 용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복수의 대상은 복수자가 선택하는 모든 이를 아우른다.
다시 말해, 건무정이 사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자신을 원수의 혈육이라는 이유로 해코지를 한다 해도 어느 누구도 그를 탓할 수도, 탓하지도 않는다는 의미.
다만, 그 이후 해를 당한 진목란의 복수를 천명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건무정의 목을 취할 자격을 얻게 된다.
이는 지나치게 오래 유지되었던 유교사회의 어두운 면이었다.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讎).
아비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가 없기에 반드시 쳐 죽여야 하고, 형제의 원수 또한 때려 죽여야 하며, 친구의 원수 역시 잡아 죽여야 한다.
원수는 그냥 보는 족족 모조리 갈아 마시라는 얘기가 유학 경전에 버젓이 쓰여 있을 정도이니, 행하는 자도, 당하는 자도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여 왔음도 당연한 일.
용서? 그건 아닐 것이다.
건무정은 자신이 했던 일들은 후회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앞으로 행할 일에 대해서도 어떠한 후회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였다.
강호를 먹는다. 강호를 지운다.
다시 말해, 이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 이 강호에 복수하겠다는 뜻.
지금은 아닐 지라도, 그녀 또한 건무정의 복수 대상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을 터였다.
이 강호를 지우려 한다면… 그 세계에 살았던, 혹은 살고 있는 모든 생명 또한 지워야 한다.
그런데 왜?
이제껏 건무정은 자신을 부드럽게 대했을까. 그리고 왜 오히려 자신에게 상당한 신뢰를 보여주었을까.
혹시, 나중에 자신에게 끔찍하고 잔인한 정신적인 고통을 주고자, 그에게 인간적인 정을 느끼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아, 깜박할 뻔했네요.”
임휘가 손바닥을 탁 치며 말했다.
“조금 전, 대주의 생사도 물으셨죠?”
진목란은 조금 전보다 더더욱 정신이 번쩍 들어 눈을 크게 떴다.
양 끝이 조금 올라가고 가느다랬던 그녀의 눈이 확 커진 모습을 보자, 임휘는 귀엽다는 표정으로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죽었다고 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임 도사님.”
목소리뿐만 아니라 상반신의 떨림도 주체가 안 되었다.
“글쎄요. 과연 대주가 그때 그 자리에서 죽었을까요?”
“말씀해주세요! 도사님,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쉬잇. 저 친구의 무아지경도 곧 끝납니다. 더 이상 큰 소리로 방해한다면 꽤나 성질을 낼 거예요. 그건 저도 감당 못합니다.”
“아아.”
이 순간만큼은 임휘가 정말로 원망스러웠다.
그 또한 건무정과 비슷한 수준으로 사람의 속을 뒤집는 재주가 있음이 분명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네, 네!”
“그 무너진 바위들 속에서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겁니다.”
풀썩.
진목란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벽력탄을 안고 같이 터졌다면… 시신을 못 찾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럴까요? 뭐 일단 제가 이 산에서 그의 귀혼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도 알려드리죠.”
“살아있다는 말씀인가요?”
진목란의 음성에 힘이 돌아왔다.
“그건 누구도 몰라요. 모든 이가 죽어서 귀혼을 남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우리 강호무림인들의 경우는 그럴 가능성이 꽤나 높답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자들이 또한 그렇고요.”
진목란은 가슴 속에서 커다란 희망이 꿈틀거림을 느꼈다.
어느새 전신에 힘이 꽉꽉 들어찼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흙을 털고는 임휘를 향해 굳건히 포권을 취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별 말씀을.”
“이 은혜를 어찌 갚을는지요.”
“그리 좋아하실 일만은 아니잖습니까.”
“……아!”
진목란은 임휘의 마지막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실언을 깨달았다.
정의수호대주, 즉 무당의 진유상은 건무정이 반드시 죽여야 할 자들 중에 하나였다. 지금까지의 얘기를 듣고서 그녀가 판단했을 때는 그랬다.
그가 살아있는 게 확실하다면, 건무정으로서는 속으로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건무정의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 감을 잡기는 힘들지만, 그는 천마가 대놓고 붙잡을 만큼의 능력자이며, 수없이 많은 문파들의 비전까지 깨우친 상태였다.
그녀가 알고 있는 진유상의 수준 정도는 발아래 두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였다.
즉, 걸리면 무조건 죽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걸 진목란이 막는다면?
아마도 건무정은 진목란부터 베려고 할 게 분명했다.
다시금 우울하고 복잡한 마음에 사로잡히기 직전인 진목란.
어느 정도 뒤틀렸던 심사가 제자리를 찾자마자 그녀는 건무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동작이 매우 느려져서 이제는 몇 호흡이나 지나야 한 걸음을 내디딜 정도였다.
곧 있으면 그의 춤은 완전히 정지할 터였다. 그리고 이제는 모두 사라진 옛 동료들을 추억할 테지.
그런데 잠깐. 그녀는 자신이 뭔가 하나를 더 놓치고 있음을 생각해냈다.
물어보고 싶었던 것.
건무정이 추는 춤을 보면서 들었던 의아함이었다.
“건 동생은 지금까지 여러 문파들과 기인들의 비전들을 완벽히 구현해내고 있었어요.”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제가 사실 무예 쪽은 보는 눈이 없기는 합니다만.”
임휘도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을 했다.
“헌데 무당과 소림의 무예는 끝내 펼치지 않는군요. 무당이야 그렇다 치고, 소림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어요. 건 동생의 재능이면 소림의 무예도 익혔을 법한데요.”
“…….”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빤히 쳐다보시네요.”
진목란은 조금 기분이 나빴는지 표정을 굳혔다.
“모르셨습니까?”
“예?”
“무정이 녀석의 사문입니다.”
“……?”
“저런,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셨나 보군요.”
임휘는 눈가에 주름을 만들 정도로 재미있어했다.
“저 녀석, 소림 출신이에요.”
“예에?”
소스라치게 놀란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일 게다.
“소림에서 중노릇을 하던 친구란 말입니다, 무정이는. 명진은 그의 법명(法名)이었지요. 정말로 모르셨다는 얼굴이십니다, 진 소저.”
“에헤에잇-! 아니 왜 그걸!”
건무정이 지르는 짜증스러운 괴성이 멀리서 들려왔다.
* * *
유난히 어두운 밤이었다.
하늘을 꽉꽉 채운 구름이 달을 가린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세상은 욕이 나오리만치 컴컴했다.
스스삿.
들쥐 떼인가?
낮게 자란 풀들 위에 여러 개의 줄이 그어졌다.
사사사삿.
어느새 수십 개로 늘어난 줄은 어느 한 곳을 향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풀들은 움직임을 멈추고 고요해졌다.
번뜩.
어둠을 조롱하듯 나타난 두 개의 작은 빛.
그것은 사람의 눈이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시퍼런 안광들이 번쩍번쩍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동굴 속의 박쥐들과도 같이.
얼굴을 포함해 전신을 흑의로 감싼 자가 아흔 명.
이들을 만약 강호의 무인이라 가정했을 때, 많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그렇다고 적은 머릿수도 아니었다.
사패삼강들이야 당연하고, 아직도 그에 속하지 않은 각 지역 거점의 군소 연합들도 구십의 무인을 모으기는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하지만 단일 문파에서 동원한 전력이라면 분명 무리했다고 할 만큼의 숫자인 것도 사실이었다.
전란의 시기를 거치며 강호가 가장 많이 잃어야 했던 것들은 바로 사람의 머리통이었다.
그들의 차가운 시선이 닿은 곳.
수풀의 끝자락 너머로는 꽤나 넓은 공터가 있었다.
꽤나? 뭐 조금 사실적으로 표현하자면, 백에서 백오십 가구(家口) 정도는 충분히 들어서고도 남을 만큼의 공간이랄까.
아니나 다를까. 이 공터 안쪽으로는 원형으로 조성된 수십 개의 천막들과 건설이 거의 끝나가고 있던 토성(土城)이 있었다.
천지에는 흑암의 기운이 가득했지만, 이곳만큼은 곳곳에 밝혀둔 횃불 덕분에 어둠이 침범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윽한 눈빛으로 토성을 응시하는 흑의 무리의 수장.
그가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자, 무리 전체가 조용히 천으로 둘둘 감쌌던 병기를 꺼냈다.
“누가 이렇게 횃불을 잔뜩 켜두라고 했나!”
불 근처에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무인 몇 명은 화들짝 놀라서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가벼운 무복을 입은 중년인이 이맛살을 구긴 채 서 있었다.
“낮에 련(聯)에서 사람이 나왔다 갔다고 합니다.”
중년인의 한 발짝 뒤에 있던 청년이 대신 답을 했다.
“누가?”
“천호당의 제갈사빈 부당주가 일의 진척상황을 살펴보러 잠깐 들렀습죠.”
이번에는 불 앞에서 잡담을 하며 경계를 게을리 했던 무인이 조심스레 말했다.
“제갈 부당주가? 아니, 그런 높은 분이 와주셨거늘 왜 나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중년인은 더더욱 소리를 높여 무인들을 나무랐다.
“굳이 알리지 말라고 하셔서 말입죠.”
“어허! 그 말을 곧이듣다니, 참으로 멍청한 녀석이 아닌가.”
졸지에 바보 취급을 당한 무인은 얼굴을 붉혔다.
“본 방(幇)이 이제야 세가련의 눈에 들어 청운의 꿈을 크게 떨칠 기회를 얻었건만, 네 부족한 지혜가 일을 그르치는구나. 쯧쯧.”
중년인의 억지스러운 말에 뒤에 서있던 청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은 되었고. 그래, 제갈 부당주께서 무어라 하셨지?”
중년인이 기대에 찬 얼굴로 다시 무인에게 물었다.
“되도록이면 야밤에 불을 많이 밝히라 하셨습니다. 이게 다입니다요.”
결국 중년인이 처음에 내뱉은, 호통 같은 질문의 답이 여기서 나왔다.
“…….”
“그래서 이렇게 여기저기 횃불을 걸어…….”
“에잉!”
중년인은 팍 짜증을 부리며 몸을 돌렸다.
무인들은 생각했다.
‘제 놈 성격이 저러니 지금껏 세가련의 일원이 되지 못했던 것인데, 그걸 모르는 것인가?’
그들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청년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가를 찌푸렸다.
중년인과 청년은 토성의 성벽에 올랐다.
이 토성은 예전에 마교와 중원이 한창 싸우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십년대란이 종식된 후, 버려져서 거의 폐허가 된 것을 최근에 보수하여 이 정도까지 복원해냈다.
사실 십여 일만에 토성을 이만큼이나 요새화시킨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중년인 곽서는 뿌듯한 마음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